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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조선판' 4대강 공사…태안 운하

 “암초 때문에 격렬한 파도와 세찬 여울이 휘몰아친다. 안흥정 아래 물길이 열 물과 충돌하고, 암초 때문에 위험하므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다.”(<고려도경>)
 송나라 서긍은 충남 태안 마도 인근 해역의 험난한 물길을 두고 “매우 기괴한 모습이라 뭐라 표현할 수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이 뿐인가. 
 “옛날엔 난행량(難行梁)이라 했다. 바닷물이 험해 조운선이 누차 침몰했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해서 안흥량(安興梁)으로 고쳤다.”(<신증동국여지승람>)
 얼마나 험했으면, 배가 지나기(行) 어려운(難) 해역이라 ‘난행량’이라 했다가 편(安)하고 흥(興)하라는 염원을 담아 ‘안흥량’으로 고쳤다는 것인가.

안흥량의 암초지대. 나라곳간을 채울 조운선은 반드시 태안반도 인근 해역인 안흥량을 통과해야 했지만 배가 침몰되는 해난사고가 잇따랐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난행량이 안흥량으로 바뀐 까닭 
 그럴 만도 하다. 안흥량 일대는 인당수(황해도)·손돌목(강화도)·울둘목(전남) 등과 함께 ‘4대 험로’로 꼽히는 곳이다.
 해안선의 출입이 가장 심하고 다수의 섬이 분포돼있는 데다 수중암초가 곳곳에 있어서 조류의 변화가 심하다. 억센 조류가 해저 암각이나 섬에 부딪쳐 소용돌이 치고,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가 물살을 더욱 빠르게 만든다. 그러니 간조(썰물) 때나 계절적으로 풍랑이 거셀 때 안흥량을 통과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했다.
 예컨대 6~8월 사이와 10월 상순 이후에는 기본적으로 항행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흥량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전라도를 비롯한 3남 지역의 세곡(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서울(개경·한양)로 운반하는 조운선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해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구체적인 기록이 나와있는 조선시대 해난사고만 일별해보자.
 1395년(태조 4년) 5월 경상도 세곡을 싣고 안흥량을 통과하던 조운선 16척이 침몰했다.
 1403년(태종 3년)과 1414년(태종 14년)의 침몰사고는 대형참사였다. 즉 1403년 사고로 조운선 34척이 침몰, 선원 1000여 명과 쌀 1만 여 석이 수장됐다. 1414년 사고 때는 66척이 침몰, 미곡 5000석이 가라앉았다. 1455년(세조 1년) 안흥량에서 일어난 해난사고로 조운선 54척이 가라앉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니까 1395~1455년 사이 66년간 안흥량에서 발생한 해난사고의 통계를 보면 파선 및 침몰된 선박이 200여척, 인명피해 1200명, 미곡손실 1만5800석 이상이었다.
 또 다른 통계를 들어보자. <경국대전>이 반포된 성종 때의 조운선의 수가 총 155척이었다. 그렇다면 태종 때 66척과 세조 때 54척이 침몰한 배의 수는 각각 전라도 조운선의 3분의 1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다. 

안흥량(마도) 해역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선박. 잘 포장된 고려자기가 켜켜이 쌓여있다. 강진에서 올라온 조운선이 수장된 것이다.

 ■최초의 운하공사  
 조운선이 번번이 침몰함으로써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함은 물론 국가재정 또한 고갈되는 이중고를 겪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 조정은 나라곳간을 채우기 위한, 국운을 건 대책을 세웠다. 그것은 바로 ‘운하(運河)공사’였다.
 1134년(인종 12년)의 <고려사> ‘세가·인종’를 보면 다음과 같은 상소문이 올라온다.
 “안흥정 아래의 바닷길은 파도가 격랑하고, 바위가 험준해서 이따끔 배가 뒤집힙니다. 운하를 뚫어야 합니다.”
 상소문은 이어 “소태현(蘇泰縣·태안)’의 경계를 시작으로 해서 운하를 판다면 배의 운행이 매우 빨라 이로울 것”이라고 했다.
 인종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습명(鄭襲明·포은 정몽주의 10대조 할아버지)을 운하 공사의 책임자로 보냈다.
 운하공사의 계획은 천수만~가로림만 연결하자는 것이었다. 현 태안군 태안읍(인평리·도내리)~서산시 팔봉면(어송리·봉담리) 사이에 물길을 낸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해난사고가 빈발하는 안흥량을 경유하지 않고 천수만~가로림만을 통과하는 항로를 개척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사>는 “군사 수천명을 총동원한 이 대역사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고 기록했다.

조운선이 태안 해역에서 조난당하는 일이 빈발하자 고려와 조선조는 공히 태안 일대에 대대적인 운하공사를 벌였다. 조선판 4대강 공사라 일컬을만 했다. 하지만 지반이 암반층인데다 급격한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에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부실 날림공사라는 지적이 잇따르자 급기야 운하공사는 무산되고 말았다.|박지선 기자 그래픽 

 ■화강암 때문에 막힌 운하
 그럼에도 운하는 고려조의 숙원사업이었다. 1154년(의종 8년)에도 “소태현(태안)에 운하공사를 재개했지만 뚫지 못했다”는 <고려사> 기록이 이를 웅변해준다.
 그로부터 240여 년이 지난 1391년(공양왕 3년) 운하의 필요성이 다시 부각된다. 공민왕 이후 왜구가 빈번하게 출몰, 조운선을 약탈함으로써 국가재정이 더욱 곤궁해진 것이다.
 이 때 왕강(王康·?~1394)이 의논을 일으킨다.
 “태안에 예부터 물길을 냈던 곳이 있습니다. 깊이 판 것이 10여 리이고 파지 못한 것은 불과 7리입니다. 지금 공사를 재개하면 조운이 안흥량 400리의 험로를 건너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까 이 때의 공사는 기존 두 차례의 공사(1134·1154년) 끝에 남겨진 7리를 마무리짓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간다.
 “인력을 징발해서 운하를 팠다. 그러나 돌이 밑바닥에 깔려있고 조수가 들락날락 하는 바람에 파는 대로 다시 매워졌다. 공사는 두 달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고려사> ‘열전·왕강’ <고려사절요> ‘공양왕’ 등)
 매우 의미심장한 언급이다. 고려왕조가 그토록 국가사업으로 추진했던 운하공사가 왜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는 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즉 공사구간이 화강암 암반층이어서 파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겨우겨우 판다 해도 족족 다시 메어지는 난공사였던 것이다.

 

조선조 태종의 책사인 하륜은 태안(굴포) 운하를 뚫는 방법으로 갑문식 공법을 제시했다. 천수만~가로림만 사이에 5개의 저수지를 만들어 놓고 각 저수지마다 소선(작은 배)를 띄워 전달되는 세곡을 차례차례 실어나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거센 파도와 암초 때문에 조운선이 첫번째 포구에 닿을 수도 없었기에 처음부터 탁상공론의 계획이었다.|곽호제의 논문 ‘고려~조선시대 태안반도 조운의 실태와 운하굴착’ 중에서

 ■기발한 것 같았던 하륜의 비책
 막 개국한 조선 역시 운하공사에 사활을 걸었다. 안흥량 수로를 피하는 게 개국한 조선의 첫번째 과제였다.
 태조 이성계는 1395~97년 사이 최유경과 남은을 잇달아 태안 현지로 파견한다. “운하를 팔 곳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보고는 똑같았다. “땅이 높고 굳은 돌이 있어 팔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태종 때는 운하공사를 향한 염원은 ‘숙원(宿願)’을 넘어서 ‘비원(悲願)’의 단계로 번졌다.
 즉위 3년이 지난 1403년 조운선 34척과 미곡 1만석, 그리고 선원 1000여 명이 수장된 대형참사를 겪었기 때문이다.
 “1412년(태종 12년), 태종이 안흥량 수로에 배가 통행할 방법을 의논하라고 명했다.”
 이 때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던 하륜이 나름대로의 비책을 꺼냈다. 다음은 ‘태종의 장자방’으로 일컬어졌던 하륜의 계책이다.
 “고려 때 왕강이 뚫던 곳에 지형이 높고 낮음을 따라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둡니다. 그리고 제방마다 소선(小船·작은 배)을 둡니다. 둑 아래를 파서 조운선이 포구에 닿으면 그 소선에 옮겨 싣고, 두번째 저수지를 건너 다시 세번째 둑 안에 있는 소선에 옮겨 싣게 합니다. 이렇게 차례차례 운반하면 근심을 면할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륜은 무작정 물길을 뚫어 바닷길을 통하게 하는 관류식 공법이 아니라 일종의 갑문식 공법을 쓰겠다는 것이다.
 즉 일단은 기존에 천수만~가로림만 사이에 뚫어놓은 운하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것. 그러면서 그 사이 높낮이에 따라 5개의 저수지를 만들고 저수지마다 소선, 즉 작은 배를 둔 뒤 포구에 도착한 조운선의 짐을 차례로 옮겨 싣는 방법을 쓴다는 것이었다.

지금 태안반도에는 고려 인종~조선 세조까지 수차례 뚫었던 운하의 흔적이 남아있다. 천수만 쪽인 태안군 태안읍(인평리·도내리)과 가로림만 쪽인 서산시 팔봉면(어송리·봉담리) 사이에 물길을 낸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17일 만에 끝낸 부실·날림공사
 ‘태종의 꾀주머니’라는 별명에 걸맞은 하륜의 비책이었다. 태종은 참찬의정부사 김승주에게 특명을 내린다.
 “1413년(태종 12년) 11월 16일 임금이 김승주에게 명했다. ‘화공(畵工)과 함께 현장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지도를 그려 바쳐라. 그 후에 판단하겠다.’”
 태안을 둘러보고 돌아온 김승주는 현장 지도를 올리면서 하륜의 비책에 찬물을 끼얹는 소견서를 첨부한다.
 “(고려 때) 왕강이 뚫었던 곳은 모두가 단단한 돌로 되어 있습니다. 난공사가 예상됩니다. 쉽게 공효를 거두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태종은 “그것은 과인도 알고 있지만 과인 독단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므로 의정부에서 여럿이 의논해서 시행토록 하라”는 의견을 낸다. 그럼에도 공사는 강행됐다.
 “1413년(태종 13년) 병조참의 우박과 의정부 지인 김지순이 태안의 운하공사를 감독했다. 5000명의 주민이 동원된 운하공사는 1월 29일 시작되어 2월 10일 마무리됐다.” (<태종실록> 1413년 2월 10일)
 하지만 뒷담화가 터져 나왔다.
 “공사를 마쳤지만 비평하는 자들이 말했다. ‘헛되이 백성의 힘(民力)만을 썼지, 반드시 이용되지 못할 것이다. 조운(漕運)은 결국 통하지 못할 것이다.’”(<태종실록>)
 화강암 암반이라 엄청난 난공사였는데, 불과 17일 만에 후다닥 끝냈으니 그야말로 전형적인 부실·날림공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무엇에 쫓기듯 총력전을 벌이며 야간 밤샘작업까지 벌였던 4대강 사업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당대 여론이 들끓었던 것이다. <실록>을 보면 비평가들의 말이 맞았던 것 같다. 공사 완공 후 불과 19일 후인 2월 29일 <실록>을 보라.
 “사람을 순제(태안)에 보내 제방 안에 있는 암석을 제거하도록 했다.”
 골치거리였던 바닥 암반층이 두고두고 문제였던 것이다. 공사 후에 다시 공사를 해야할만큼….

태안(굴포) 운하가 좌절되자 중종은 의항운하를 뚫는 공사를 시작했으나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공사책임자에게 상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한심한 자들이구나!”
 결과적으로 하륜의 비책은 ‘탁상공론’이었음이 드러났다.
 천수만~가로림만 사이에 5곳의 저수지를 만들고 소선으로 세곡을 차례차례 운반하는 책략은 나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세곡을 첫번째 저수지에 옮겨 실으려면 대선(大船)이 우선 정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안흥량의 바람이 워낙 세고 암초가 험한 데다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세곡을 잔뜩 실은 대선이 정박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어떻게 저수지까지 짐을 옮겨 싣는다는 말인가.
 공사가 끝난지 한달 후인 1413년 3월 12일, 충청도 관찰사 이안우는 “워낙 바람이 세고 돌이 험해서 대선이 정박하기 어렵다”는 상소문을 올린다.
 이 무슨 말인가. 세곡을 실은 큰 배(대선), 즉 모선(母船)이 정박할 수 없는 데도 공사가 강행됐다는 어이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태종이 길길이 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슨 공사를 했다는 거냐. 현장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공사계획을 수정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필이면 농삿달에 백성을 쓸데없는 공사에 동원한 셈이 아니냐.”
 태종은 그러면서 “태안 현장에 가본 자들이 한 둘이 아닐텐데 어찌 그렇게 의견이 분분하냐”면서 현장에서 공사를 책임진 우희열과 우박 등을 소환한다.
 “백성을 동원해서 둑을 쌓고 저수지를 만드는 일은 끝났다 치자. 그러나 대선이 정박할 곳에 바람이 거세고 암초가 많다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경들은 왕명을 받고 공사를 책임진 자들이 아니냐. 문제가 있다면 보고했어야지…. 어찌 아뢰지 않았는가.”

최근 태안 인근 해역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선박. 고려와 조선 때 수차례에 걸쳐 운하사업이 이어졌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탁상공론과 함께 부실 날림공사가 두고두고 문제가 됐다.

 ■“도대체 현장 가서 무얼 했느냐” 
 그러자 우희열과 우박이 변명한다는 말이 기막히다.
 “저희는 의정부의 명에 따라 저수지를 만들고 운하를 뚫는 공사를 시행했을 뿐입니다. 대선(大船) 문제는 의정부의 명령이 아니었기에 저희가 살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수지 축조와 운하공사는 책임질 수 있지만, 대선 문제는 책임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책임회피용 발언이었다.
 태종이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꾸짖었다.
 “배가 다니고 통하는 여부를 어찌하여 듣지 못했다고 하는가. 살피지 못하였다고 대답하다니…. 참 망령된 말이구나.”
 태종이 다시 윤향과 탁신 등을 태안 현장에 보내 상황을 살피도록 했다. 이들이 돌아와 올린 보고를 보라.
 “1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서 3삭(朔) 동안 공사를 깅행한다면 조운(漕運)이 통할 만합니다.”
 임금의 호통을 듣고 현장을 다녀온 관리들까지 여전히 큰소리 뻥뻥 치면서 ‘공사강행’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조운선에서 확인된 청자사자향로뚜껑.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말 끝마다 탁상공론 
 태안의 운하공사는 이후에도 두고두고 논란을 야기시켰다. 저마다 백가쟁명의 방안을 내놓았던 것이다.
 5개월이 지난 1413년 8월14일. 충청관찰사 이안우가 ‘비분강개’의 어조로 다시 올린 상소문을 보라.
 “태안 현장을 본 관리들마다 일시적인 모책(謀策)만 쓰고, 백성들을 위한 계책은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분강개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상소문을 올립니다.”
 중앙 관리들이 현장을 둘러보고 간 뒤에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계책만 내놓는다는 것. 이안우는 관리들의 공론(空論), 즉 헛소리들을 하나하나 거론한다.
 “어떤 관리는 암초의 풀이 있는 곳에 푯말을 세워 표시하면 어떠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요. 밀물 때이면서 순풍을 만나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썰물 때 갑자기 폭풍이라도 만나면 어쩝니까. 배들이 밀려 암초의 풀에 걸리면 전복될 것입니다.”
 이안우는 태종의 책사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하륜의 계책도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라 비판한다.
 하륜의 계책, 즉 저수지 5곳을 만들어 각각의 저수지에 소선, 즉 작은 배로 세곡을 차례차례 실어나른다는 계획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라는 것이다.
 “전라도 조운선이 1년에 실어나르는 세곡은 9만석이 넘습니다. 그런데 한 척의 소선(작은 배)에 싣는 세곡은 150석이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작은 배가 각 저수지를 따라 7차례 세곡을 옮겨 싣는다고 계산해보십시요. 9만석의 세곡을 반년이 걸려도 다 운반하지 못할 것이 아닙니까.”
 그랬다. 운하공사를 끝낸 곳은 기껏해야 세곡 150석을 실을 수 있는 소선 1척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게다가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에 실제 배가 운항할 수 있는 일수는 한 달에 10일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에 1년에 9만석 이상의 세곡을 실어날라야 했으니….
 이안우는 “이런 상황에서 백성의 노고가 얼마나 심하겠느냐”고 정곡을 찔렀다. 이안우는 특히 “백성들이 쓸데없는 운하를 파느라 농사 지을 때를 놓쳤다”고 한탄했다.

청자철화퇴화문 두꺼비 모양의 벼루..

 ■실력자에 아부한 공사강행파
 이 때의 <태종실록>은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을 기록해두고 있다.
 “(태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던) 하륜이 운하공사의 필요성을 주장하자 아부하는 자들이 많았다.”  
 국가적인 사업을 추진하는데 세도가의 눈치를 보며 공사를 강행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공사를 재개하는 문제는 태종 임금이 직접 태안 현장을 둘러보고 최종 결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태종은 1413년 9월 11일부터 태안 방문을 최종 목적지로 하는 순행(巡行)에 나섰다. 그런데 17일간 남부지방을 실컷 돌다가 막상 최종목적지인 태안 방문을 앞두고 돌연 마음을 바꾼다.
 “태안을 두루 돌아보는 것이 처음의 뜻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니, 곧은 길을 따라서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 태안 방문은 내년 봄(1414년)을 기다려도 좋을 것 같다. 운하공사는 포기하라.”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운하공사는 결국 왕명으로 최종 포기됐다. 이후에도 태안의 운하공사 재개를 둘러싼 논란은 기회있을 때마다 일어났다.
 특히 세조 때 그 논의가 극심했다. 세조는 1461~64년 사이 임영대군 등 4명의 대군과 신숙주·홍윤성 등 재상들을 태안 현장으로 총출동시켜 재개여부를 타진했다.
 그러나 현장을 다녀온 임영대군(이구)과 신숙주 등은 “공사재개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안됩니다. (기존 운하의) 물길이 똑바르지 않고 진흙이 물러서 파는대로 무너지니 운하를 더이상 뚫을 수 없습니다.”(<세조실록> 1464년 3월 13일)

 

 ■둑이 무너졌는데도 상을 주다
 고려 인종~조선 세조까지 4차례의 운하계획이 무산되자 궁여지책의 대안이 마련되기도 했다.
 그것이 1521년(중종 16년) 태안군 소원면 송현리~의항리를 연결하는 이른바 ‘의항운하 계획’이었다.
 1537년(중종 32년) 2월부터 15~50세 사이의 승려 5000명을 동원한 의항운하 공사는 6개월 만에 완료됐다.
 중종은 “어려운 공사를 끝냈다”면서 공사책임자인 박수량과 이현에게 잘 단련된 말 1필씩을 상급으로 내려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운하의 효용성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표된 섣부른 ‘상잔치’였다. 의항운하 역시 거센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에 공사 직후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상급을 받았던 이현은 불과 2년 뒤 삭탈관직됐다.
 의항 공사 때 많은 뇌물을 받고 공사에 동원되지도 않은 승려들에게 호패를 발급해준 데다, 공사에 쓴 기물들을 집으로 옮겨가 사사로이 간척지를 메우는데 쓴 혐의를 받았다.(<중종실록> 1539년 6월 10일) 결국 의항운하 역시 졸속, 날림 및 비리 등 갖가지 구설수 속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렇게 고려·조선의 운하공사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문제는 ‘사람’이다
 이쯤해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안행량에서의 잦은 해난사고가 단순히 ‘거센 바람과 암초,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1473년(성종 4년) 4월 20일 성종이 전라도 관찰사 김지경 등에게 내린 명령을 한번 보자.   
 “조운의 실패는 물길이 멀고 험해서가 아니다. 담당 관리들이 출항날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운선이 출발할 때 해당 관리들은 출항지에서 모두 모여 기후와 바람과 물때를 살펴 하나하나 헤아리고 점검해야 한다. 배가 기항하는 곳에서도 출발 때처럼 하면 거의 실패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성종은 한가지 단서가 될만한 한말씀을 남긴다. 
 “안흥량이 험악하다고? 물론 예로부터 근심이 된 곳이다. 그러나 잘 봐라. 개인의 배, 즉 사선(私船)의 파선은 적고, 조운선과 같은 공선(公船)의 파선은 많지 않은가. 무엇을 말해주는가. 험악한 지형 때문만이 아니라 항행에 조심하지 않아서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제 법에 따라 해당 관리들을 제대로 발령하고, 이들을 제대로 지휘·고찰한다면 조운선의 파선을 면할 수 있다.”

 

 ■지독한 인재(人災)
 무슨 말인가. 결국 ‘사람’이 문제인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1403년(태종 3년) 5월 5일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침몰, 1000명의 선원과 미곡 1만석이 수장됐다. 그 때 태종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책임은 과인에게 있다. 출항일은 풍랑이 거센 날이어서 배를 띄울 수 없었는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출발시켰으니…. 과인이 백성을 사지(死地)로 몬 것이다.”
 3개월 후인 8월 21일 사간원이 올린 상소를 보면 그 날의 참사가 움직일 수 없는 인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조운선을 띄울 때는 풍랑을 잘 파악하고 화물적재 중량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용렬하고 간사한 무리에게 맡겨….”
 결국 풍랑을 파악하지 않고 과적을 일삼은 무리 때문에 일어난 사고였던 것이다. 
 1414년(태종 14년) 8월 8일 전라도 운반선 66척이 태풍을 만나 침몰·파손돼 200여 명이 익사하고 쌀·콩 5800석이 수장된 사건은 어땠으랴.
 “7월에는 조운선을 띄우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호조가 전라수군절제사에게 공문을 보내 ‘7월에 세곡을 실어 8월초에 배를 띄우라’고 지시했다. 전라수군절제사도 문제있는 인물이다. 호조의 공문대로 배를 무리하게 띄우는 바람에….”
 조운의 원칙은 4월 쯤 배를 띄우고 5월 안에 한강에 도착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호조가 가장 위험한 시기인 7월 말~8월 초에 조운선을 띄우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전라수군절제사 역시 무리한 명령인줄 뻔히 알면서도 배를 출항시켜 참변을 불렀다는 것이다. 지독한 인재(人災)가 아닐 수 없다.
 이쯤해서 다산 정약용의 언급이 떠오른다.
 “뱃길 가운데 위험한 곳 중 하나가 안흥량이다. 파선(破船)되는 배가 해마다 10여척 나온다. 그 원인으로 첫째 배를 만드는 제도가 좋지 못했고, 둘째 수령들이 가외의 짐을 실은 때문이며, 셋째 뱃사람들이 일부러 파선시키기 때문이다. 파선 시키는 것이 10척 가운데 7~8척이나 된다.”(<경세유표> 제1권 ‘지관·호조’)

 

 ■불현듯 떠오르는 4대강 악령
 필자의 뇌리에 불현듯 4대강 공사의 망령이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속도전을 방불케하는 공사강행에 따른 부실·날림공사…. 현장여건을 무시한채 실권자의 공사강행 주장에 아부하며 추종했던 무리들…. 잘 마무리되지도 않은 공사의 책임자에게 훈장을 내리고…. 훈장 받은 인물은 비리혐의로 적발되고…. 결국 천문학적인 공사비만 낭비하고, 백성들의 헛심만 쓰게 되는 후유증을 낳았으니….
 그래도 높이 평가할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안흥량의 험로를 피해 조운선을 운반하는 것은 분명 국운을 건 숙원의 국책사업이었다.
 왕조시대였던만큼 임금이 나서 어떤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공사를 강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정 내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고, 임금(태종·세조)은 끝까지 그들의 논쟁을 들었으며, 결국은 임금 스스로가 공사중단이라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최소한 불통의 리더십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