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제가 한번 해볼게요.”
1962년 3월 하순, 충북 제천 황석리 고인돌(기원전 6세기) 발굴현장. 28살 신참 고고학자였던 이난영(국립박물관 학예연구사)은 선배인 김정기 학예연구관을 졸랐다.
그 때까지 계획된 12기를 모두 발굴한 상황. 단 하나 남은 게 바로 상석부분이 파괴된 채 흙에 파묻혀있던 고인돌 1기(13호)였다. 너무도 빈약한 고인돌이었기에 신참 고고학자가 한번 욕심을 내본 것이었다. “깨진 것 같은데 한번 해보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흙을 파던 신참 고고학자의 손 끝에 뭔가가 걸렸다.
석관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석관을 파헤치자 놀랄 만한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골이 장대한 사람의 뼈였다. 오른팔은 배에, 왼팔은 가슴에 대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필름도 없었다. 그는 제천 청풍읍으로 달려가 재생필름을 1통 산 뒤 현장으로 달려와 정신없이 유골사진을 찍었다.
밤늦게까지 인골을 수습한 발굴단은 서울대 의대 해부학과 나세진·장신요 박사팀에게 조사를 의뢰했다.
■서양인이 살았다.
그런데 놀랄만한 분석결과가 나왔다.
“인골의 신장은 174㎝ 정도, 두개골과 쇄골·상완골 등 모든 부위에서 현대 한국인보다 크다.”
분석팀은 “두개장폭(頭蓋長幅)지수가 66.3”이라면서 “현대 한국인이 단두형(短頭型)인데 반해 이 인골은 장두형인 점이 흥미롭다”는 결과를 내놨다.
이 무슨 말인가.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두개장폭지수라는 것은 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와 귀 사이의 길이 비율을 나타내는 겁니다. 한국인의 경우 100대 80∼82인데 반해 서양인은 100대 70∼73 사이인데….”
김 교수의 해석은 놀랍다. “황석리 인골의 지수(66.3)로 보아 이 인골은 한반도로 이주한 초장두형 북유럽인”이라는 것이다.
즉 기원전 1700년 쯤 유럽의 아리아인들이 인도·이란 등으로 내려왔으며 이들이 기원전 1000년부터 벼농사 전래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흥미로운 것은 ‘얼굴 복원 전문가’인 조용진(한남대 객원교수)이 인골의 두개골을 복원한 결과 ‘서양인’의 얼굴형과 거의 똑같다는 사실이다.
즉 인골의 왼쪽 이마가 볼록하고 코가 높으며 얼굴이 좁고 길며, 눈 구멍 모양이 서양인 두개골의 눈구멍 모양과 비슷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인골은 큰 북방계통의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한 이빨이 크고, 광대뼈는 큰 데 뒤로 물러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얼굴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같은 인골의 특징은 현재 제천의 산간지역 사람들에게도 나타난다는 것. 이 지역 사람들의 특징은 피부가 희고, 털이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알타이 지방에서 내려온, 서양인의 형질을 포함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게 조용진 교수의 설명이었다.
■정선 아우라지의 비밀
제천 황석리 인골 발굴 후 42년이 지난 2005년이었다.
강원 정선 북면 아우라지 유적에서 의미심장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한국의 선사고고학 역사를 뒤흔들만한 핵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먼저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나온 이른바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刻目突帶文土器·눈금 같은 무늬를 새긴 덧띠를 두른 토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덧띠새김무늬토기는 바로 조기(早期) 청동기시대, 즉 가장 이른 시기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에 속한다. 기원전 15~13세기 정도?
이전까지 청동기시대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한반도의 경우 기원전 10세기쯤, 만주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선 기원전 15~13세기쯤’이었다.
그러니까 정선 아우라지에서 기원전 15~13세기를 대표하는 덧띠새김무늬 토기가 나옴으로써 한반도 청동기 시대 연대가 최대 500년 이상 올라간 것이었다.
사실 정선 아우라지 뿐 아니라 그동안 경주 충효동, 진주 남강, 산청 소남리 등에서 숱하게 확인된 바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남한강 최상류인 아우라지에서 조기 청동기시대 유물이 나옴으로써 청동기 연대를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청동기 문화를 한반도에 국한시킬 필요가 있울까. 사실 덧띠새김무늬 토기는 중국 동북방인 발해 연안에서부터 한반도까지 꾸준히 출토돼왔다.
즉 발해연안인 다쭈이쯔(大嘴子), 상마스(上馬石)유적에서부터 한반도 신의주 신암리-평북 세죽리-평남 공귀리-강화 황석리·오상리-서울 미사리-여주 흔암리-진주 남강 상촌·옥방까지….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는 “이 모두가 기원전 15~13세기 유적들”이라면서 “그것이 남한강 최상류(아우라지)까지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온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말한다.
“비단 남한강뿐이 아니다. 북한강 수계인 최근 홍천 외삼포리 같은 곳에서는 AMS(질량가속분석기) 측정결과 기원전 14~13세기로 편년되는 유적에서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왔다.
모두 한강수계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결국 정선 아우라지 유적은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의 전개과정을 알려주는 지표유적이라 할 만하다.
■영국인의 인골이…
그런데 이 뿐이 아니었다. 아우라지에서 또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유물이 나왔으니까.
2005년 7월14일 오후. 당시 조사단(강원문화재연구소) 현장책임자였던 윤석인은 아우라지 유적 한쪽에 서 있던 고인돌을 노출시켰다.
“고인돌 4기 가운데 한 기에서 사람의 두개골과 대퇴부뼈가 나왔습니다. 서울대 해부학교실에 분석을 의뢰했는데, 뜻밖에 서양인의 염기서열과 비슷하다는 결과를 구두로 통보받았습니다. 키 170㎝ 정도의 남성인데, 현재의 영국인과 비슷한 DNA 염기서열이라는….”(윤석인)
물론 이 인골의 연대는 기원전 8~7세기로 측정되었으므로, 덧띠새김무늬토기(중심연대가 기원전 15~13세기)가 나온 곳과는 시간차가 있다. 어쨌거나 만약 2800년 전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지닌 사람이 한반도에서도 두메산골인 정선에서 살았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또한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46년 전인 1962년 제천 황석리 고인돌에서도 수수께끼 같은 인골이 확인된 적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우라지 유적이 존재하는 정선과 제천 황석리는 같은 남한강 수계가 아닌가. 김병모 교수는 아우라지에서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가진 인골이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한반도에서 서양인의 염기서열이 나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기원전 18~17세기 무렵 히타이트족의 정복으로 흑해지역에 살고 있던 아리아족이 인도 쪽으로 이민했어요. 그 중 인도에서 살던 사람들 가운데는 벼농사 전래경로를 따라 동남아시아~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이들의 경로는 고인돌 문화의 전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물론 아직은 서양인의 유전자와 관련해서는 퍽이나 조심스럽기도 하고, 민감하기도 한 주제이기도 하다.
제천 황석리나 정선 아우라지나 모두 고인돌에서 나온 인골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서양인이 청동기시대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것인가. 또 그렇다면 한국인이 서양인의 후손이라는 것인가. 하지만 굳이 그렇게 생각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 김병모 교수의 말이다.
“현대의 한국인이 하나의 유전자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갖가지 교류를 통해 여러 인자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제천이나 정선에서 출토된 인골이 서양인이라고 100% 확정짓는 것도 조심스럽다.
같은 인종에서도 빈부나 계급의 격차에 따라 골격이 다를 수 있으니까. 특히나 특수층 계층인 고인돌에서 나온 인골들은 대체로 충분한 영양공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니까….
어쨌든 정선 아우라지 인골이 발굴된지 9년이 흘렀지만 서울대 해부학실은 최종적인 분석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다.
9년 전의 발굴 담당자들이 서울대 해부학교실 측에 여러 번 최종결과를 발표해달라고 요청했단다. 그러나 아직 최종결과가 발표됐다는 소식은 없다.
대체 어떤 최종결과가 나왔기에 발표를 하지 않는 것일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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