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1800년 논쟁 부추긴 조조의 '가짜무덤설'

2009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시가오쉐촌(西高穴村)의 가마터 일꾼들이 벽돌을 만들려고 진흙을 파다가 깜짝 놀랄만한 고분과 유물을 찾아냈다.

2009년에 이어 2016·2017년 세차례 발굴결과를 종합한 중국 허난성 문화재고고연구원은 “이 고분은 조조의 무덤”이라고 확정했다.

왜 그런 결론에 도달했을까. 우선 고분에는 금은 공예품과 토기, 칼과 칼집, 명문 돌판 등 250여점의 공예품이 들어 있었다.

조조 무덤에서 발견됐다는 명패. '위무왕'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또 무덤에서는 60~70대 남성과 여성 두 명의 유해가 발견됐다. 남성은 조조가 분명하고, 여성 둘은 위나라 초대 황제인 조비와 조식의 어머니인 변씨와, 맏아들 조앙의 어머니이자 일찍 죽은 류씨인 것으로 추정됐다. 특히 삼국시대 위나라 건국의 기틀을 쌓은 조조(155~220)의 무덤임을 알리는 ‘위무왕(魏武王)’이라는 명패가 보였다.

조조의 무덤 바로 곁에 옷만 있고 시신은 보이지 않은 무덤이 하나 더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은 197년 토벌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맏아들 조앙(?~197)의 빈묘일 것으로 추정했다. 유물이 250여점이라 하지만 천하를 호령한 조조의 고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도 소박하다.

■봉분이 잘린 이유
고고학자들이 또 주목한 것은 고분의 윗부분이 잘려나갔다는 점이다. 이것은 “내가 죽거든 봉분을 쌓거나 나무를 심지도 말라”고 신신당부했다는 조조의 유언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이렇게 해석했다. 조조의 뒤를 이어 위나라를 건국한 조비(재위 220~226)가 아버지의 유언을 거슬러 대규모로 봉분을 쌓았다가 나중에 마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덤의 윗부분을 잘라냈다는 것이다.

또다른 의문점이 남는다. 누군가 도굴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앙심을 품고 조조의 시신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려고 자의 소행이 아닐까. 중국 고고학자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도굴꾼이나 혹은 복수심에 불탄 자의 소행이라면 뭔가 봉분 위에 파편이 남아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고분의 윗부분은 아무런 흔적없이 말끔했다.

그러나 2009년 발굴 이후부터 제기된 의혹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을 것 같다. 우선 60~70대 남성을 조조라 한다면 두 여인은 변씨와 류씨가 맞는가. 발견된 유해는 40~50대와 20대 여인이었다. 류씨는 그렇다해도 변씨(160~230)는 70살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있다. 나이 차이가 너무 난다.

회의론자들은 특히 무덤에서 발견됐다는 ‘위무왕(魏武王)’ 석비를 주목하고 있다. ‘위무왕’은 조조가 생전에 쓰지 않았던 호칭이라는 것이다.

즉 조조는 생전에 ‘위왕’이었고 사후에 ‘무왕’의 시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왕에서 무왕으로 바뀐 것인데, ‘위무왕’이라 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무왕’의 석비는 후대의 조작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고분을 ‘조조의 무덤’을 믿고 싶은 중국 고고학계의 희망사항에 불과할까.
무엇보다 조조가 죽기 전에 만들었다는 72개의 가짜무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2009년 가마터 인부들이 벽들을 만들기 위해흙을 파다가 발견했다는 조조무덤. 남송 이후 조조가 자신의 무덤이 파헤쳐질까 두려워 72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었다는 속설이 전해져왔다.

■조조의 가짜무덤설
“조조는 죽기 전에 72개의 가짜무덤(의총)을 만들라는 명을 내렸다. ‘후세 사람들이 내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도록 하라. 내 무덤을 사람들이 파헤칠까 염려되는구나.’ 마지막 유언을 마친 조조의 숨이 끊어졌다.”

원말명초의 소설가인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조조(155~220)의 최후 장면이다. 조조의 가짜무덤 이야기는 의심많고 간사해서 죽은 뒤에도 사람들을 속이는 ‘간웅’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오죽하면 조선의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중국의 기기묘묘한 이야기를 전한 ‘구외이문(口外異聞)’에 이런 내용까지 들어있다.

“건륭 무진(1748년) 청나라 황제(건륭제)가 장하(장河)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강 밑바닥에서 무덤을 발견했다. 수만 군사를 풀어 발굴해서 관을 건지니 온갖 금은보화 부장품이 보였고, 황제의 면류관과 옷차림을 갖추었다. 조조의 시신이었다. 황제가 친히 관우의 사당에 있는 유비의 조각상 앞에 나아가 조조의 시신을 꿇리고 목을 잘랐다. 이로써 쾌히 70개의 가짜무덤 의혹을 풀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은 이야기가 조조 사후 1600년이 지난 조선 땅에까지 버젓이 퍼졌던 것이다.

■청평의 간적이자 난세의 영웅
하지만 조조는 그렇게 만만하게 폄훼될 인물이 아니다.

우선 조조와 동시대인인 교현(109~183)과 허소(150~195)의 조조평(<후한서>)은 유명하다. 즉 교현은 “장차 도탄에 빠질 천하를 바로잡을 이는 조조”라고 평하며 자신의 처자식을 부탁했다. 또 여남(하남) 사람인 허소가 매월(月) 초(旦) 한차례씩 했다는 ‘여남의 월단평(月旦評)’은 감탄사를 자아내는 절묘한 인물평이었다. 그런 허소가 조조의 강권에 마지못해 했다는 인물평은 ‘당신은 청평(淸平)의 간적(姦賊)이자 난세(亂世)의 영웅’이라는 것이었다.

당대 위나라 사관인 왕침(?~266)의 평가는 어떨까. 완본은 전해지지 않고 배송지(372~451)의 주석에만 등장하는 왕침의 <위서>를 보라.

조조 무덤에서 확인된 유물들. 조조는 "내 무덤은 절대 호화스럽게 조성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태조는 기묘한 계책으로 적을 속여 승리했다.…전투에선 손동작으로 지휘했다.…우금과 악진은 졸개들 사이에서 발탁했고, 장요와 서황은 포로 사이에서 뽑아썼지만 명장의 대열에 올랐다.…30여년 동안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으며….”

하기야 왕침이 위나라 사관이었으니까 건국의 아버지인 조조를 한껏 과장해서 그렸을 것이다. 태조 이성계를 거의 신적인 존재로 묘사한 조선왕조실록도 있으니까….

하지만 과장은 있었겠지만 없는 사실을 조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검소를 강조한 부분은 과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깨알같고, 또 소박한 편이다.

그래도 위나라 사관이었던 왕침을 100% 믿을 수 없다고 치자.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등에 버금가는 정사인 <삼국지>를 쓴 진수(233~297)의 평가는 어떨까. 진수가 <삼국지>를 언제 집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진수의 사망연도는 297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조조 사후 40~70년 뒤에 집필했다는 이야기다.

거의 당대의 기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 진수의 조조평은 “비범한 사람이고 시대를 초월한 영걸이었다(非常之人 超世之傑)”는 극찬이었다.

“한나라 말엽 천하가 크게 어지러웠을 때…위나라 태조 조조는 모략을 운용하여 천하를 호령했다. 능력별로 인재를 운용했다. 자기 감정을 절제하고 치밀한 계획에 따랐으며 지난날의 사사로운 원한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조조가 대권을 장악하고 건국의 대업을 이룬 것은 총명과 책략이 뛰어났기 때문이다.”(<삼국지> ‘위무제’)

조조와 거의 동시대 인물인 진수보다 조조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있을까. 어디 진수 뿐인가.

조조보다 100여 년 뒤의 인물인 육기(260~303)은 조조를 기리는 ‘조위무제문’에서 “조조의 큰 덕은 온 세계를 뒤덮고 해와 달처럼 빛났다”고 치켜세웠다.

2009년에 처음 확인된 무덤. 그러나 진위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태종-당현종-사마광의 칭찬릴레이
이후 태평성대의 상징인 ‘정관의 치’ 시대를 열었던 당나라 태종(재위 626~649)은 <제위태조문>에서 조조를 찬양하는 제문을 남긴다.

“위 무제 조조는 뛰어난 재능으로 혼란에 빠진 나라의 기둥이었고, 천하를 바로잡은 공로는 앞선 어떤 인물보다 훨씬 컸다.”

당태종 뿐이 아니다. 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가는 ‘개원의 치’를 이룬 당 현종은 조조의 아명인 아만(阿瞞)을 빌려 자신의 별명으로 삼기도 했다.

역시 불세출의 사서인 북송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위·촉·오 삼국 중 조조와 조비가 세운 위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유비의 촉이나 손권의 오가 아닌 ‘조조(위나라)=정통(왕조)’임을 강조한 것이다.

■72개 가짜무덤설은 언제 생겼나
그렇다면 조조는 왜 희대의 간웅으로 급전직하했을까.

물론 그 전에도 씨앗은 잉태되고 있었다. 위나라(220~265)가 45년의 단명으로 멸망한 이후 서진(265~316)-동진(317~419)-남북조(420~589) 시대를 거치면서 위나라가 아닌 촉한을 정통으로 계승하는 풍조가 나타난다.

당나라 말기 안녹산·사사명의 난으로 당나라가 옛 촉땅으로 피난하면서 그런 분위기가 다시 일기도 했다. 그러나 북송(960~1127)의 사마광이 위나라 정통론에 입각한 <자치통감>을 편찬했다. 조조에 대한 긍정평가가 주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송(1127~1279)으로 넘어오면서 조조와 위나라의 위상도 급전직하했다. 여진족(금나라)에 중원을 빼앗긴 남송에서는 ‘한족(漢族)의 애국심’이 자극됐다. 조조와 위나라는 타도대상이 됐다. 더욱이 주돈이와, 장재, 정호와 정이 형제를 계승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주자·1130~1200)의 시대에 이르자 그 도가 심해졌다.

조조는 정통인 한나라 마지막 황제 헌제(재위 189~220)를 향한 충성심이 모자랐고 백성들을 혹독한 법으로 다스린 각박한 지도자로 폄훼됐다. 반면 촉한의 유비(재위 221~223)는 충군의 표상으로 떠올라 이른바 촉한정통론이 부각됐다.

바로 이때 조조의 ‘72 의총(疑塚)’ 즉 72개의 가짜무덤설이 제기된 것 같다. 원나라 말기 도종의(?~1369)의 수필집인 <철경록>에는 남송 유응부가 지었다는 ‘조조의총’ 시가 실려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조의 72의총은 장하(장河)에 있다. 남송 유응부가 시를 지었다. ‘살아서는 하늘을 속여 한나라의 통치를 끊고(生前欺天絶漢統) 죽어서는 사람을 속여 가짜무덤을 만들었구나(死後欺人設疑塚). 살아서는 지혜를 사용하고 죽어서는 그만두어야 하는데(人生用智死則休), 어찌하여 남은 기술을 무덤에 썼는가.(何有餘機到丘壟)’”

유응부의 조롱은 이어진다.

“나는 무덤을 찾을 방법이 있는데, 조조는 모를 것이다. 72개 무덤을 다 파면 분명 한개의 무덤에서 그대의 시신이 있을 것이 아닌가.”

바로 조조가 도굴을 우려해서 조성했다는 ‘72 가짜무덤’ 이야기가 남송대에 이르자 파다하게 퍼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대단한 민족주의자로서 촉한정통론의 입장을 견지했던 나관중과, 나관중의 작품 중 3분의 1이나 개작한 청나라 모성산·모종강 부자의 <삼국지연의>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조는 검약의 아이콘
사실 조조가 생전에 무척 검약했다는 이야기는 북송대에 편찬된 <태평어람> 등에 ‘제왕들의 행동지침’의 형태로 잘 나와있다.

“나(조조)는 곱게 꾸민 상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대나무로 엮고 명주 베와 거친 베로 안팎을 썼다. 옷가지와 이불은 족히 10년씩 된 것들이다. 해마다 풀어 빨고 기웠을 따름이다. 한번은 얼룩무늬 비단신을 선물로 받았는데, 어쩔 수 없이 가족에게 주었다. 식구들은 그 신발이 떨어질 때까지만 신었다.”(<태평어람> ‘내계령’)

사실 조조의 검약은 당대의 기록인 왕침의 <위서>에도 등장한다.

“절약과 검소가 몸에 배어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후궁들에게도 비단이나 수놓은 옷을 입지 못하도록 했고, 곁에서 모시는 시종들마저도 두가지 색을 수놓은 신발을 신지못하도록 했다. 이불도 실용성을 강조했다.”

<위서>는 특히 “옛 제도를 따라 장례 지내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라면서 “태조(조조)가 죽은 뒤 겨우 4상자 분량의 옷만 미리 만들었다”고 전했다.

고분의 윗부분이 깎여있었기 때문에 발견되기가 힘들었다. 중국학계는 조조의 아들 조비가 "무덤을 호화롭게 쓰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고 대규모 무덤을 조성했다가 훗날 마음을 바꿔 윗부분을 잘라낸 것 같다고 추정했다.

■“내 무덤을 척박한 땅에 써라”
그랬다. 조조는 죽기 1년 반쯤인 218년 6월 ‘마지막 명령(終令)’을 남긴다.

“옛 사람은 죽어 매장할 때는 반드시 척박한 땅에 묻혔다. 그대들은 내가 죽어서 묻힐 무덤을 서문표의 사당 언덕 건너편에 만들어라. 본래 언덕 높이 그대로 무덤을 만들 것이며 봉분을 쌓아 크게 만든다든가 나무 등은 심지 마라. 공경대부와 여러 장수들 가운데 공로가 있는 자의 무덤 또한 내 무덤 옆에 써라. 묘역이 비좁거든 넓혀서 모두 받아드리도록 하라.”(<삼국지> ‘위서·무제기’)

그런데 유언에 등장하는 서문표는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이다. 업성 고을 수령으로 부임해서 무당과 원로들이 해마다 마을 처녀 한사람씩 하백(강의 신)의 아내로 바치는 천인공노할 행사를 기막힌 기지로 막아내고 선정을 베푼 목민관이다.

즉 서문표는 처녀 제삿날이 돌아오자 “(제물로 바칠) 처녀가 예쁘지 않다”고 타박했다. 서문표는 “당신이 하백에게 가서 ‘며칠만 기다려달라. 더 예쁜 처녀를 바치겠다’는 말을 전하라”면서 무당할멈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무당 할멈이 나오지 못하자 “아니 왜 돌아오지 않는거냐”면서 무당의 제자들을 계속 빠뜨렸다.

그래도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아무래도 안되겠소. 당신들이 가봐야겠소”라면서 마을 원로 3명을 강물에 던졌다. 그제서야 그 뿌리깊은 처녀제사 관행이 사라졌다. <사기> ‘골계열전’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조조는 목민관의 상징인 서문표의 사당 언덕 건너편에 자신의 무덤을 써달라는 명령을 남긴 것이다. 게다가 봉분을 쌓거나 나무를 심지말고, 평소 자신을 따르던 공경대부와 장수들을 곁에 묻어달라고 했다. 소박하기도 하고, 부하들에게도 배려심이 깊은 ‘깨알유언’이다.

이는 무덤조성에 37년간 70만명을 동원한 진시황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진시황제는 무덤조성에 죄인 70만명을 동원했다. 구리물을 부어 틈새를 메워 외관을 놓았다. 모형으로 만든 궁궐과 백관, 그리고 온갖 기기묘묘한 형상의 물건들을 설치했다. 자동발사되는 활을 장치했고, 수은을 주입하여 강과 바다를 조성했다. 풀과 나무를 심은 묘지는 마치 산과 같았다.”(<사기> ‘진시황 본기’)

죽어서도 천하를 호령하겠다고 백성을 괴롭힌 진시황과 ‘척박한 땅에 묻어라. 나는 선정의 목민관 서문표로 기억되고 싶다’는 조조를 비교해보면 어떨까. 

■스러짐은 허망한 것이다
1년 반 전 유언 형태의 마지막 명령(終令)을 담긴 것으로는 부족했나 보다. 220년 1월 죽음을 맞이한 조조는 다시 한 번 “제발 장례를 간소하게 하라”라면서 아주 구체적이고 세세한 절차까지 신신당부한다. 이것을 ‘유령(遺令)’이라 한다.

“옛 장례예법에 따라 상을 치르지 마라. 내가 죽거든 두건은 물론 옷을 평소와 똑같이 입히도록 하라. 장례가 끝나면 바로 상복을 벗어라. 국경의 병사들은 주둔지를 떠나지 말며 각급 관리들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라. 무덤 속에 황금이나 옥이라든지 진귀한 보물 등은 넣지 말라.”(<삼국지> ‘위서·무제기’ 등)

즉 1년 반 전의 종령(終令)과 죽기 직전의 유령(遺令)을 요약하면 ‘척박한 땅에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지 않고, 관 속에는 황금이나 옥 등 진귀한 보물을 넣지 말라’는 것이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생각한 조조의 심모원려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당시 동탁의 난 이후 각지의 왕릉과 귀족릉이 철저하게 도굴되지 않았나.

하기야 동탁·원소는 물론 조조 자신도 군비충당을 위해 도굴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조조로서는 무덤에 공을 들인다는 게 얼마나 헛되고 허망한 건지 알았을 것이다. 

조조가 죽음에 임박해 지었다는 시(‘정렬·精列’)를 보라.

“조물주의 조화로 빚어진 것은 스러짐이 있지 않을 수 없네. 허망한지고…. 주공과 공자와 같은 성인도 죽었고~누가 죽음을 떨쳐버리리.”

■“나는 주 문왕이 되련다.”
하지만 조조의 유언은 후대에 ‘죽어서도 세상을 속인 간계’라는 비판을 들었다.

조조처럼 무소불위했고, 영악했던 인물이 이렇게 무덤을 간소하게 썼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천하를 찬탈한 조조가 제 무덤이 파헤쳐질까 두려워 72개나 되는 가짜무덤을 조성했다”(<삼국지연의>)는 식으로 그럴싸하게 퍼졌던 것이다.

그런데 위나라의 도읍인 업성(업城)을 끼고 도는 장수(장水) 인근에는 왕릉급 무덤이 실제로 많다. 그러나 이 무덤들은 제나라나 북위, 북제의 왕릉이었다고 한다. 조조의 가짜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업성은 허베이성(河北省) 한단시(邯鄲市) 린장현(臨장縣)과 허난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이 경계에 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조조가 생전에는 결코 한나라의 황위를 찬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한나라의 사직은 끝났으며 백성이 전하에게 몰려들고 있다”면서 “제발 황위를 이어받으라”는 줄기찬 간언에 조조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나는 주나라 문왕이 될 것이오. 만의 하나 천명이 있다면 말이오.”

주나라 문왕은 은(상)의 마지막 군주이자 민심과 천심을 잃었던 주왕(기원전 1075~1046)을 끝까지 섬긴 인물이다. 문왕의 아들인 무왕(기원전 1046~1043) 때 비로소 은(상)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조조는 ‘만약 천명이 있다면 내가 아니라 아들인 조비(문황제 세조) 시대에 새로운 나라를 건국할 것’이라고 넘겼다. 이것이 조조의 진심이 아닐까. 조조의 아들인 조식(192~232)이 지은 시가 심금을 울린다.

“화하는 눈물을 머금었고 백성은 슬픔에 잠기었다. 혼백은 떠나갔고 공훈은 빛을 내고 육신은 묻혔지만 이름은 드날린다….”(<무제뢰> ‘서문’)

과연 조조는 조조다. 1800년 동안 논쟁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은 조조가 이번에 무덤발굴로 다시 화제를 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로운 가짜무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천고에 빛날 ‘핫인물’이 아닐 수 없다. 아들 조식의 말처럼….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재하, <인간 조조>, 바다출판사, 1999
장쭤야오, <조조 평전-사람을 얻어 난세를 평정한 용인술의 대가>, 남종진 옮김, 민음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