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낮은 신분으로서 임금의 어가와 세자의 출정에 말고삐를 짊어지는 공을 이뤘고…. 험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도 시종일관 마부의 역할을 다했으니….”
최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가 일본 교토대(京都大) 부속도서관에서 찾아낸 이른바 ‘오연의 호성공신교서’ 중 한 대목이다.
호성공신교서는 1604년(선조 37년)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 임금(聖)을 의주까지 호종(扈)하는데 공을 세운 86명에게 내린 교서이다. 선조는 이때 무공(武)을 떨친(宣) 선무공신 18명과 1595년 이몽학의 난(亂)을 진압(淸)한 청난공신 5명에게도 작위를 내렸다.
그런데 86명의 호성공신 중에는 내시(24명)와 이마(마부·어가 담당) 6명, 의관(어의 허준 등) 2명, 별좌 및 사알(왕명 전달) 2명도 포함되었다. 이 가운데는 말을 치료하는 마의(馬醫)까지 있었다.
이번에 찾아낸 교서는 선조의 말(어가)을 끌고 관리한 이마(理馬·마부) 오연에게 내린 호성공신교서이다.
교서에서는 “동쪽 오랑캐(일본)가 유린하자 어가가 허둥지둥 피신했을 때… 조정 안팎의 신하와 백성들이 대부분 짐승과 새가 달아나듯 했는데 너는 낮은 신분에도…”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 무슨 말인가. 선조는 왜 명공대신도 아닌 오연과 같은 마부와 내시, 어의 등에게 공신작위를 내렸을까. 이 내막을 살펴보자.
■사상 최악의 논공행상
조선조 선조는 온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임진왜란을 초래한 임금이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무능한 군주다.
그런 그가 지루한 7년 전쟁을 마친 다음 행한 공신책록 또한 ‘사상 최악의 논공행상’으로 치부된다. 후대의 평가만이 아니다. 당대에도 혹독한 비판에 시달렸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정인홍·김면·곽재우·김천일·고경명·조헌 등은 공신명단에서 빠졌다. 그들의 공적은 너무도 찬란한데…. 호종공신이 80명에 넘는데다 그 중에 내시가 24명이며 (마부, 의관 등) 미천한 자가 또 20여 명이 되었다. 얼마나 외람된 일인가.”(<선조실록> 1604년 6월 25일)
당대의 사관들은 공신 심사나 책봉, 그리고 공신회맹식의 과정을 기록할 때마다 장탄식했다. 나름 일리있는 지적이다.
왜냐. 확정·발표된 공신책록에서 공정성과 형평성 문제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우선 전쟁을 7년이나 치렀는데, 최일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른바 선무공신은 18명인데, 전쟁이 나자마자 의주로 줄행랑친 선조를 수행한 이른바 호성공신은 무려 86명이나 됐다.
■의병장, 장수를 홀대한 공신책록
누가 봐도 기울어진 논공행상임이 분명했다.
선조는 기본적으로 의병장을 포함한 조선 무장들의 군공을 과소평가했다. 단적인 예로 1601년(선조 34년) 비변사가 호종 신하와 장수들의 녹훈 이야기를 꺼내자 매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긴다.
선조는 우선 “이순신과 운균, 권율 등은 다소 전공을 세웠고, 이 장수들의 공은 약간 나은 편(差强表表)”이라 했다. 한마디로 장수들의 공은 형편없었다는 얘기다. 그 다음 언급이 더욱 기가 막힌다.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대의 힘 덕분이었다. 조선의 장수들은 그저 중국 군대 뒤를 졸졸 따라다니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의 머리만 얻었을 분이다.”
이것이 과연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바쳐 싸운 전장의 장수와 의병장들에게 할 소리인가.
선조는 이 대목에서 호성공신(임금을 호종한 공신)의 수가 선무공신(무공을 떨친 공신)을 압도한 이유를 늘어놓는다.
“중국 군대가 지원군을 보낸 이유가 무엇인가. 모두 과인을 호종한 신하들 덕분이 아닌가.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까지 가서 중국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왜적을 물리친 공적은 명나라-선조-호성공신 순이다.”
선조가 1604년(선조 37년) 공식적으로 내린 ‘호성공신 별교서’를 보면 더욱 기막힌 언급이 나온다.
“임진왜란의…고통을 부모(명나라)에 호소하는 것은 정리상 당연하다. 황제를 저버리는 것은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에 지원을 요청한 사신과 충정한 말고삐를 잡은 이들의 공로는 다를 바 없다. 중국 황제가 ‘조선의 강산을 다시 만들어준 은혜’는 유례없는 것이었다.”
선조는 호성공신의 수가 선무공신을 압도했는지, 또한 왜 마부 등 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호성공신의 명단에 들어갔는지 밝히고 있다.
선조는 왜적을 물리친 공로를 100% 명나라의 지원 덕분으로 돌렸다. 그런 명나라의 지원을 받아낸 이는 다름 아닌 ‘선조 자신’이라 했다. 임금이 무사히 의주까지 가서 중국에 구원을 요청한 덕분에 나라를 구했다는 것이다. 그랬으니 임금을 끝까지 수행한 이들과, 중국에 가서 지원군을 이끌고 온 사신들이 최고의 공신이라는 것이다.
■“저런 천 것들 하고 같은 공신이라니…”
호성공신 명단에 내시(환관), 마부, 의관 등 이른바 최측근 인사들이 포함된 것은 두고두고 논란거리였다. 당대의 사관들은 “임금의 수발을 드는 자들이 직무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놓고 무슨 공신책록을 받느냐”고 비판했다. 어떤 사관은 “태조(이성계)가 창업했을 때도 개국공신은 30여 명에 불과했다. 그 중에 태조의 수발을 든 환관과 시종이 끼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무능한 군주가 무슨 호성공신을 86명이나, 그것도 제 일을 했을 뿐인 최측근 내시, 심부름꾼에게까지 공신 작위를 남발했냐는 질타였다.
1604년(선조 37년) 10월 공신 회맹식이 열렸는데 “저런 허접한 자들(내시·마부·의관·별좌·사알)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 창피하다”고 혀를 차는 공신들도 있었다.
“저런 천한 것들 하고 공신회맹연에 참석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소반의 피를 마시고 맹세했다니…. 아! 이 어찌 비웃음을 사지 않겠는가.”(<선조실록>)
물론 정인홍·김면·곽재우·김천일·고경명·조헌 등 혁혁한 공을 세운 의병장이나 장수들이 공신명단에서 제외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 분들이 비판한다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자들이라면 제발 ‘천한 것들이 무슨 공신이냐’는 ‘허튼 소리’는 집어치워야 한다.
그들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 도망’의 길을 택한 임금
왜일까. 1592년(선조 25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가 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삼십육계줄행랑이었다.
선조가 피란길에 오른 4월 30일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선조가 벽제~혜음령을 거쳐 마산역을 지날 무렵 밭을 매던 백성들은 “나랏님이 백성을 버리시면 누굴 믿고 살라는 거냐”고 통곡했다,
한심스토리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어가를 쫓아가던 관원들 다수가 중도 이탈하여 도성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가족을 데리고 피란했다. 선조 임금을 따르는 문관들이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임금을 보좌해야 할 사간원·사헌부 관리들 역시 도망가기 바빴다.
우여곡절 끝에 선조가 임진나루에 도착했다. 선조 일행은 임진강 남쪽 언덕에 있는 승정(丞亭ㆍ나루터를 관리하던 청사) 건물을 헐어 불을 피웠다. 동파역(파주 진동면 동파리)에 닿은 것은 밤 8시였다. 파주 목사 허진과 장단 부사 구효연이 왕을 위해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자 왕이고 뭐고 없었다. 하루 종일 굶었던 호위병들이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 것이다. 급기야 임금이 먹을 음식마저 없어지자 문책이 두려워진 허진과 구효연의 선택은? 삼십육계 줄행랑이었다. 하기야 임금이 먼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어처구니없는 사관 4인방의 도망
가장 극적인 ‘도망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난 임금의 곁에서 이 피눈물 나는 치욕의 역사를 서술해야 할 ‘사관 4인방’이었다.
1592년(선조 25년) 6월1일자 <선조실록>을 보면 분통이 터진다.
“사관(史官)인 조존세·김선여·임취정·박정현 등이 도망쳤다. 이들은 임금이 자식처럼 대우한 자들이다. 그런데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갈 것을 결정하자 도망칠 것을 몰래 도모했다. 먼저 사초책(史草冊)을 불구덩이에 넣고 불을 지른 뒤 야음을 타 도망갔다.”(<선조수정실록> ‘1592년6월1일조’)
선조는 이들이 도망친 지도 몰랐다.
“선조 임금은 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사관들이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모두들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하자 선조의 걱정은 태산같았다. ‘아니 김선여가 탄 말이 허약한 것 같았는데…. 걸어서 오느라 뒤에 처진 것이냐.’ 새벽이 되어서야 (사관 4인방이) 도망친 줄 알고 사색이 되었다. 따르던 자들이 모두 격분하여….”
뿔뿔이 흩어진 ‘사관 4인방’은 영호남에서 가족들을 만났다. 가족들이 “주상은 어찌 하고 당신만 돌아왔나”고 묻자 “주상께서 우리 더러 물러가라고 허락해서 왔노라”고 둘러댔다. 임금의 좌우에서, 임금의 총애를 받던 자들, 무엇보다 그 참담한 역사를 빠짐없이 기록해야 할 사관들이 붓을 내던진채, 무엇보다 그동안 써놓았던 사초책마저 불에 태우고 도망간 것이다. 그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선조실록>은 가장 형편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사관 4인방이 선조 즉위년(1567년)부터 1592년 3월까지의 사초책을 모조리 불살랐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천고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다.
■실록의 ‘도망자 실명고발’
이들 뿐이 아니다. 훗날의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의 피란길에 동참하지 않고 홀로, 혹은 가족을 이끌고 도망간 이들을 ‘실명’으로 고발했다.
“애초에 임금이 서울을 떠날 때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요설이 퍼졌다. 명망진신들이 각자 몸보신에 혈안이 되었다. 수찬(홍문관 정5품) 임몽정은 하루 먼저 도망갔고, 정언(사간원 정 6품) 정사신과 지평(사헌부 정5품) 남근이 이탈했다. 실무를 담당하는 낭서(정랑·좌랑 등 6품)들도 속속 도망쳤다. 사대부로서 따르는 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평양에 이르러 대사성 임국로는 어미의 병을 핑계대고, 이조 좌랑 허성은 군사를 모집하겠다고 핑계대고, 판서 한준, 승지 민준, 참판 윤우신은 서로 잇따라 흩어져 떠났다. 노직은 영변에서 뒤에 떨어졌다가 도망갔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1일)
비단 이뿐이겠는가. 선조의 어가를 따르던 여러 신하들도 “늙고 병든 신하들은 당연히 사퇴해야 한다”고 했다. 기회가 닿으면 언제든 나이와 병을 핑계로 임금 곁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홍진(1541~1616)같은 이는 “시종하는 신하는 죽든살든 임금의 행차를 따라야 한다”고 울면서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분은 극소수였다. 이때의 <선조수정실록>은 “선조나 세자(광해군)를 따르는 자가 거의 없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서울에서 의주에 이르기까지 선조를 따르던 문관과 무관은 겨우 17명이었다. 나머지는 환관 수십명과 어의 허준, 액정원(왕명 전달 관리) 4~5인, 사복원(司僕員·어가를 몰고 관리하는 마부) 3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사대부는 배아플 자격도 없다
선조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사대부가 도리어 너희들만도 못하구나.”
선조는 이렇게 의주 몽진길 내내 임금을 보필해야 할 이른바 ‘명공대신’과 ‘사대부’의 배신행위를 목도했다. 그런 선조였기에 어려운 시기에도 지근거리에서 임금을 끝까지 지켜준 최측근들에게 공신의 직위를 내리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곽재우 등 의병장들과 견줄 수 없는 공적이다. 그러나 비록 천한 신분이었지만 제 몸보신을 위해 도망가기에 급급했던 자들보다 훨씬 의리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번에 발굴한 호성공신교서의 주인공인 오연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관직은 사복시(궁궐의 말관리) 이마(理馬)이며, 쉽게말하면 임금이 타는 어가(御駕)를 몰고 관리하는 마부였다. 오연은 ‘못난 임금이라도 끝까지 모신 공로’로 호성공신(3등)의 지위에 오른다. 오연의 공신교서는 신지제(1562~1624)가 지었다.
오연은 이때 석성군으로 봉해졌다. 오연 등이 당시에 받은 3등 상급은 대단했다.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전하며 본인은 물론 부모와 처자의 관작을 1단계 올리고, 아들이 없다면 조카나 사위의 품계를 올리도록 했다. 또 적장자에게는 공신의 자격을 세습해서 그 녹봉을 잃지 않도록 했다. 무엇보다 어떤 죄를 지어도 처벌하지 않고 사면하도록 했다. 덧붙여 반당(호위병) 4명, 노비 7명, 구사(잡직) 2명 등과 함께 논밭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받았다.
당대의 기득권층이 보기에는 얼마나 아니꼬았겠는가. 마부 주제에 임금의 말 좀 몰았다고 부와 명예가 세습되는 공신작위를 받았으니 말이다.
■대접받지 못한 의병장과 백성들이 억울할 따름이다
하지만 국난을 맞아 임금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자들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더구나 사초책을 불구덩이에 밀어넣고 도망간 ‘사관 4인방’은 귀신같이 살아남아 떵떵거렸다. 박정현은 인조 때 청나라 사절단장으로 발탁됐고, 임취정은 이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냈으며. 조존세는 한성부우윤에 이어 대사성에 올랐다. 김선여는 그나마 수치스럽게 여겨 벼슬을 하지 않으려 했다지만 예조좌랑에 이르기는 했다. 신흠(1566~1628)은 “나라는 (임진왜란에도) 망하지 않았지만 (그들 때문에) 역사가 망했다”(<상촌집>)고 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과 견줄 때 오연의 상급은 절대 과하지 않다.
다만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 또 있다. 백성들이다. 선조는 적병이 달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단 4일 만에 개성에서 평양으로 줄행랑 쳤다. 도중에 몇안되는 호종관리들은 물론 임금도 제때 수라를 들지 못하는 딱한 처지에 빠졌다. 이때 껍질만 벗긴 현미로나마 밥을 지어 바친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시골농민들이었다.(<선조수정실록> 1952년 5월1일)
못난 임금, 못난 신하들보다 오히려 신분이 낮다고 천대받았던 백성들이 진정한 공신들이었던 것이다.
■‘의관·마의(馬醫)·내시·마부’ 공신열전
이름없이 스러진 백성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공신 명단에 오른 이들의 이름 석자만큼은 한번쯤 소개하고 넘어가야 할 듯 하다.
<선조수정실록>과 호성공신 2등에 책봉된 윤두수(1533~1601)와 윤근수(1537~1616)가 선조의 의주 몽진길을 수행하면서 겪은 일을 기록한 ‘용사호종록’에 그나마 이들의 간략한 이력이 나와있다.
이 가운데는 환관으로 임금을 보좌한 이는 김기문·최언순·민희건·김봉·김양보·안언봉·박충경·임우·김응창·정한기·박춘성·김예정·김수원·신응서·신대용·김새신·조귀수·양자검·백응범·최윤영·김준영·정대길·김계한·박몽주 등 24명이다.
내수사 별좌(정·종 5품) 최세준과 사알(정 6품 잡직) 홍택도 임금을 수발한 공으로 관작을 받았다.
또 의관 중 어의 허준이 눈에 띈다. 이때 허준 선생은 양평군에 봉해지는데, 2년 뒤인 1606년(선조 39년)에는 임금의 병을 잘 고쳤다는 이유로 보국숭록대부(정1품)까지 오른다. 그러나 “의관 주제에 너무 터무니 없는 관작이 아니냐”는 극심한 한발에 못이겨 단 3일 만에 ‘보국승록대부’ 관작은 취소됐다. 의관 중에는 침술 전문인 이공기도 포함됐다.
공신명단에는 익성군에 봉해진 김응수라는 인물이 또 눈에 띄는데 직책이 ‘마의(馬醫)’라 했다. 말을 돌보는 수의사가 공신록에 오른 것이다. 또 임금의 어가를 끈 견마위 오치운과 전용은 “종시토록 말고삐를 잡고 임금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공적이 인정됐다. 이들은 선조의 전용운전기사들이었다.
■처음 발견된 마부의 공신교서
이번에 공신교서가 발견된 오연의 경우 ‘용사호종록’은 “(충남) 부여의 정병(正兵)으로 어가를 호위했다”고 기록됐다. 정병은 일반 양인 농민으로 구성된 정규 의무 사병이었다. 하지만 발굴된 교서에는 “어가와 세자의 말고삐를 잡고…마부의 역할을 다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선조실록>도 오연의 직책을 ‘이마(理馬)’, 즉 마부라 했다.
박영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아마 오연은 부여 출신의 사병으로 군대에 갔다가 선조를 수행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몰라도 사병으로 군복무하다가 운좋게 청와대 운전병으로 발탁된 케이스라고 할까. 오연은 이춘국·이희령 등과 함께 임금의 어가를 관리하고, 때로는 이끄는 역할을 분담했을 것이다.
1604년(선조 37년) 선조가 내린 호성(86명)·선무(18명)·청난(5명)공신과 관련된 공신교서 중 10건이 보물로 지정돼있다. 86건의 호성공신교서 중에 보물로 지정된 것은 이충원(874호)·심대(1175호)·홍진(1308호)·이헌국(1617호)·김응남(1756호) 등 5건이다. 그러나 대상자는 모두 문신들이다. 이번에 발굴된 오연의 호성공신교서는 임금의 말을 끌고 관리했던 ‘마부에게 내린 상급문서’이다. 당연 보물급 문화재로 대접받아야 할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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