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군의 내무반인가. 최근 충남 당진 성산리 산성 내에서 확인된 주거지 6기는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침을 막기위한 한성백제군의 전방사령부 막사로 추정된다.

지난 4월부터 산성을 정밀조사해온 발굴조사기관(금강문화유산연구원)은 “성 내부에서 총 6기의 주거지가 성벽과 가까이 밀집해 있었다”면서 “유구의 형태로 보아 군사들의 거주용 막사인 군막일 가능성이 짙다”고 밝힌 바 있다. 이들 건물지들은 암반 위에 조성됐고, 성벽에 매우 가깝게 붙여 열을 지어 있었다. 또한 구들시설을 구축해서 계절에 관계없이 취사와 난방도 할 수 있는 구조였다. 연구원측은 “축조하기 어려운 암반 위에 사철 난방과 취사가 가능한 건물을 열을 지어 축조했다”면서 “성벽에 붙여 조성한 것 등을 미루어 볼 때 이 건물들은 군막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라고 해석했다.

한성백제군의 내무반에서 춡토된 세발달린 그릇과 굽다리 접시, 계란모양 토기, 시루, 가락바퀴 등의 유물들. 취사를 비롯한 생활용품들이다. 백제병사들을 위한 군납용품이었을 것이다. |금강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이곳에서는 세발달린 그릇(삼족기·三足器)와 굽다리 접시(고배·高杯), 계란모양(장란형·長卵形) 토기, 시루, 실을 뽑을 때 사용한 가락바퀴(방추차·紡錘車) 등 취사 및 생활용 토기와 쇠도끼 등 200여점의 유물이 나왔다, 출토 유물로 미루어볼 때 한성백제 시대(기원전 18~기원후 495) 중에서도 4세기 후반~5세기 전반의 유적으로 보인다. 이 유물이 출토된 주거지는 한성백제 병사들이 생활하던 내무반 같은 부대건물일 가능성이 짙다. 

충남 당진 성산리 산성 내부의 주거지. 성벽에 붙여 열을 지어 조성된 이 주거지는 한성백제 병사들의 막사로 추정된다. |금강문화유산연구원 제공

발굴단은 애초에 이 시설을 한성백제와 마한과의 관계에 주목했다. 한성백제가 마한의 소국을 병합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구축한 최전방 전초기지라는 추정에 더 한발 다가섰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온조왕조’는 “기원후 8년 온조왕이 군사를 몰고 마한의 국읍을 병탄하고 1년 뒤(기원후 9년) 마침내 마한이 멸망했다”고 기록했다. <삼국사기>의 ‘마한멸망’ 기사를 마한 54개국의 연맹체의 우두머리인 목지국의 멸망기록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잔존 마한세력은 백제의 핍박을 피해 한반도 서남부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역사학계 주류는 마한의 멸망시기를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인 369년 무렵으로 보고있다. 

백번 양보해서 그런 견해가 맞다해도 당진 성산리 산성의 건물터에서 확인된 유물의 편년이 4세기 후반~5세기 전반이라면 이미 한성백제가 마한을 완전 정복한 이후가 된다. 따라서 시기상으로 보아 충남 당진의 한성백제군의 부대는 마한보다는 고구려의 남진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성산리 산성의 성벽 단면.  5열 정도의 나무기둥을 110㎝ 정도의 간격으로 박아 고정시킨 뒤 그 사이를 적갈색 점토로 다져 쌓은 기법으로 축조했다.|금강문화유산연구원 제공

4세기 후반~5세기 전반이면 근초고왕(재위 346~375)과 그 아들인 근구수왕(375~384), 손자인 침류왕(384~385)·진사왕(385~392)과 아신왕(392~405), 전지왕(405~420) 시대이다. 

이때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사실 고구려·백제·신라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한 나라가 바로 백제였다. 

백제는 특히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고구려와의 초반 기세싸움에서 우세를 보였다. 사실 고구려와 백제는 시작부터 아웅다웅할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갈등의 시작은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주몽)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즉 북부여 태자 대소에게 쫓겨 졸본부여로 망명한 주몽은  졸본부여의 재력가(연타발)의 딸로서 아들을 둘(비류와 온조) 둔 미망인(소서노)과 결혼한다.

소서노는 가산을 털어 재혼한 남편(주몽)의 창업(고구려)을 도왔다.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자기 아들로 여겼다. 비류와 온조 중 한사람이 다음 왕위를 이어갈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한성백제 시대 군사기지로 추정되는 충남 당진 성산리 산성의 원경.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과의 전쟁에 대비하고자 쌓은 해안방어기지일 가능성이 있다. |금강문화유산연구원 제공

하지만 돌발변수가 생겼다. 북부여에 주몽의 친아들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주몽은 북부여 시절 예(禮)씨라는 여인과 혼인했는데, 주몽이 탈출할 당시 부인 예씨의 뱃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이가 바로 유리이다. 우여곡절 끝에 유리가 찾아오자 주몽의 마음이 바뀌었다.

“아들이 찾아오자 추모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삼국사기>)니….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된 비류와 온조는 땅을 쳤다. 

“어머니가 가산을 털어 대왕의 건국을 도왔는데…. 이제 나라가 유리에 속했으니 우린 혹(贅·군더더기) 같은 존재가 됐구나.”(<삼국사기>)

비류와 온조는 결국 어머니(소서노)와 수많은 백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한다.(기원전 18년)

그런데 전화위복이라 할까. 한강을 차지해서 서해바다를 거쳐 중국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한 백제는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았다. <양서>와 <송서> 등 중국 기록은 “진나라(265~319년)에 이르러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등 2군의 땅을 점거해서 백제군을 설치했다”고 했다. 또 중국 양나라의 원제 소역이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양직공도>에도 분명히 그와 같은 내용이 기록돼있다. “백제는 원래 동이였던 마한에 속했던 나라인데 진말에 고구려가 요동 낙랑을 점유하고 백제는 요서의 진평군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백제의 요서경략 기사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왜 그랬을까.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등이 신라 중심의 역사서술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혹은 자료 누락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발굴조사 현장.  2012년 인근 석문산업단지 발굴현장에서도 36기의 한성백제 시대 주거지가 확인됐다. 아마도 이 성산리 산성의 부대와 관련있는 마을이었을 것이다.  |금강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어떻든 백제가 근초고왕 무렵에는 전성기였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때부터 백제와 고구려의 해묵은 갈등은 전쟁으로 비화한다. 고구려와 백제는 4~6세기 무려 37회의 접전을 벌인다. 

최초의 전쟁은 369년인 고구려 고국원왕 39년, 백제 근초고왕 24년대인 치양(백천)접전이었다. 이때 백제가 첫번째 승리를 거둔다. 즉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기병 2만명을 이끌고 백제 민가를 약탈하자 백제가 반격을 가해 고구려군 50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2년 뒤인 371년(근초고왕 26년)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이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삼국사기>는 “이때 승리의 주역이 백제의 ‘이중간첩’이었던 사기(斯紀)였다”고 기록했다.즉 사기는 백제에 있을 때 왕의 말발굽을 다치게 해서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고국원왕이 이끄는 고구려 대군이 백제를 침공하자 사기가 극비리에 백제진영을 찾아와 고구려군의 허실을 고했한다.

“고구려군의 군사가 많다고 하지만 가짜입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로지 붉은 깃발의 부대 뿐입니다.”(<삼국사기> ‘근구수왕조’)

한성백제군의 방형주거지. 성벽과 붙어서 조성되어 있다. |금강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사기의 정보로 천군만마를 얻은 백제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결국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죽였다. 백제가 숨막히는 스파이전을 벌여 멋진 승리를 거둔 것이다. 

반면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고구려는 와신상담 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20년여년 뒤인 광개토대왕 시기에 복수전을 펼친다. 즉 비명횡사한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부터 상황이 바뀐다. 광개토대왕은 396년, 4만 수군을 이끌고 한성백제를 침략한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광개토대왕 6년(396년)에는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여 백제의 국성을 포위하고 공격했다”고 했다. 고구려는 이 전쟁으로 백제의 요충지인 관미성 등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제왕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인질로 잡고 귀국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백제왕(아신왕)이 이때 남녀 1,000인과 세포(細布) 1,000필을 바치고 무릎을 꿇어 영원히 노객(奴客)이 될 것을 다짐했다”고 기록했다. 남쪽의 적인 백제를 패닉상태로 빠뜨린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다시 눈길을 북쪽으로 돌려 기우너후 400년부터는 중국 후연을 궤멸시킨 뒤 410년 무렵에는 동부여까지 정벌함으로써 만주정복을 완성한다.

물론 백제는 가만 있지 않았다. 진사왕의 뒤를 이는 아신왕은 “관미성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요새이다. 그 땅이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로 되어 있다. 애통한 일이니 치욕을 되갚아야 한다”면서 여러차례 반격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백제는 이후 수도 한성이 무너져(475년) 웅진(공주)으로 천도할 때까지 전성기 국력을 급격히 잃어갔다.

이번 발굴지역인 충남 당진은 안성천을 통해 경기 남부로, 삽교천과 곡교천을 통해 호서지방으로 연결되는 해상의 요충지이다. 따라서 아산만 초입에 조성된 성산리 산성은 한성백제가 고구려 광개토대왕과의 치열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전략적인 요충지에 축조한 해안 방어기지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충남 당진의 한성백제군 추정 막사는 절정기에서 내려와 한창 욱일승천하던 고구려군의 남침에 위협을 받고 있던 백제의 퇴락해가는 국력을 상징해주고 유적이라면 너무 지나친 스토리텔링일까.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