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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추첨민주주의 갑골민주주의?

지난 2008년 6월. 한성백제 왕성인 풍납토성 발굴현장에서 의미심장한 유물들이 나왔다. 하나는 부여계 은제귀고리 장식편이었다. 다른 하나는 소의 견갑골에 점(占)을 친 흔적이 완연한 갑골(甲骨)이었다. <삼국사기>는 “백제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다(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고 기록했다.



                                                        상나라시대 갑골 

 
또 <삼국지> ‘위서·동이전’은 “부여와 고구려는 소를 잡아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친다”고 했다. 이 발굴은 백제도 조상의 나라인 부여와 함께 갑골로 점을 쳤다는 사실을 입증시켜 준 것이다. 어디 고구려·백제 뿐인가.

박혁거세의 아들인 신라 2대왕 남해 차차웅(次次雄)’은 아예 ‘무당’이었다. <삼국유사>는 “차차웅은 무당이란 말의 사투리”라고 기록했다.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공경했다”는 것이다. 또 가야 김수로왕의 창업설화를 담은 ‘구지가(龜旨歌)’는 왕을 추대할 때 점을 치는 과정을 읊은 것이다. 이형구 교수(전 선문대)에 따르면 ‘구지’는 ‘거북의 뜻’이다.

그런데 갑골문화는 하늘·조상신을 향한 제사의 산물이다. 대표적인 동이계의 습속이기도 하다. 갑골은 1962년 동이의 본향인 중국 동북방 푸허거우먼(富河溝門) 유적(기원전 3500~3000년)에서 처음 출토됐다. 그리고 이 문화는 역시 동이계의 일파인 (상)나라(기원전 1600~1046)에서 꽃을 피웠다. <예기> ‘표기’는 “은나라 사람들은 신을 존숭하고 귀신(조상)을 섬김으로써 백성을 통치한다(殷人尊神 率民以事鬼)”고 했다.


                                                             상나라 은허 갑골

나라의 길흉을 판단할 때, 전쟁의 승패를 물을 때 반드시 점을 쳤다
. 점을 치는 데는 소와 사슴, 돼지의 어깨뼈 등도 애용됐다. 하지만 가장 사랑을 받은 것은 거북(龜甲)이었다. 대대로 중국 황실에서는 ‘장장의 물 속에서 1000년 자란 한자 두치되는 거북’(<사기>·‘귀책열전’)을 썼다. 거북의 배를 불로 지지면 뒷면이 열을 이기지 못해 소리를 내면서 터진다. 점치는 사람은 그 무늬를 보고 길흉을 판단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복(卜)’은 갈라지는 모양을 표현한 갑골문자이다. 또 우리말 발음인 ‘복(卜)’이나 중국발음인 ‘부(卜)’는 모두 열을 받아 터지는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占’은 점궤를 말하는 행위를, ‘兆’는 갈라진 무늬를 뜻한다. 그리고 점을 치는 사람은 정인(貞人)이라 했다. ‘貞’자는 ‘점을 친 뒤(卜) 그 무늬를 보는(目) 사람(人)’을 의미한다. 점을 친 뒤에는 그 점궤를 반드시 귀갑에 새긴 뒤 보관했다. 때때로 갑골판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꿰어 매달아 놓았다. 그것이 책(冊)의 첫 모습이다. 훗날 찬란한 갑골문자로 세상에 나온…. 그랬으니 <상서(尙書)>·‘다사(多士)’의 말처럼 ‘오로지 은(殷)나라 선인들만이 ‘전(典)과 책(冊)’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국 김해 부원동 출
                                                         
물론 점복에 의존한 것은 동이족 뿐은 아니다. 한(漢)족의 나라인 주나라~한나라도 종종 점궤에 의존했다.

신생 한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유항(한 문제·재위 )가 대표적이다. 창업주 고조(유방)의 넷째아들인 유항은 변방인 대(代)나라 왕이었다. 그때 조정에서 여(呂)씨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군신들이 반란을 진압한 뒤 유항을 황제로 추대하고자 했다. 하지만 유항의 신하들은 설왕설래했다. 반란을 진압한 무리들이 자신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천하를 농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점에 맡기기로 했다. 거북의 배를 불로 지져 뒷면이 터지는 무늬로 길흉을 판단하는 거북점을 친 것이다. 점을 치자 ‘대횡(大橫), 즉 가로로 크게 갈라진 무늬가 나타났다. 이는 천자(天子)이 될 징조였다. 그는 이 점궤를 믿고 수레를 달려 황궁으로 입성했다.

그렇게 점복에 기대어 천자에 오른 한 문제였지만 사마천도 감탄할 정도로 어진 정치를 폈다.

“(문제는) 덕으로 백성을 교화했다. 이로써 전국은 재물이 넉넉하고 번영했으며 예의가 일어났다. 아아. 어찌 어질지 않다고 하겠는가!(嗚呼 豈不仁哉)”

최근들어 ‘과학적 통계방법을 통한 추첨으로 의회를 구성하자’는 이른바 ‘추첨 민주주의’를 제안하는 이들도 있다. 일리있는 제안이다. ‘갑골 민주주의’는 또 어떨까. “천명을 받은 자가 왕 노릇을 했으며, 복서(卜筮·점)로 그 천명을 판단한다”(<사기> ‘일자열전’)는 말도 있지 않는가. 이런 천명으로 뽑은 김수로왕이나 한나라 문제를 보라. 지금과 같은 선거로 무자격자를 양산하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