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쓸 데가 없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박혁(바둑과 장기)이라는 게 있지 않으냐. 그걸 하는 게 그래도 현명한 일이다(不有博혁者乎 爲之猶賢乎已).”(<논어> ‘양화’)
공자님 ‘말씀’이다. 무위도식 하느니 바둑·장기로 마음을 다잡으라는 말이다. 기원전 5세기대의 말이다. 바둑의 역사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 한·중 간 바둑 대결의 뿌리도 깊다. 738년 봄, 신라 효성왕 때의 일이었다. 당나라 현종이 사신을 파견하면서 신신당부했다.
“신라는 군자의 나라란다. 중국과 견줄 만하다는구나. 그들에게 대국의 유교가 융성함을 자랑하라.”
또 하나 당부를 곁들였다. “당나라 바둑실력을 뽐내고 오라”는 것이었다.
“(현종은) 신라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고 하여(以國人善碁) (바둑을 잘 두는) 양계응(楊季膺)을 (신라로) 보냈다. 신라의 고수들이 모두 양계응의 아래에서 나왔다(國高혁 皆出其下). 이때 효성왕이 당나라 사절단에게 금은보화와 신라산 약제를 하사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효성왕조’)
당나라의 바둑은 셌다. 궁중에 기대소(棋待詔)라 하는 전문기사제도를 둘 정도였다. 지금의 19줄 바둑은 이미 그때부터 유행했다. 현종은 ‘바둑을 잘 둔다’는 신라사람들에게 바둑실력을 뽐내고 싶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를 곱씹어보면 당나라 국수(國手) 양계응에 맞서 신라 고수들이 돌아가며 도전했다. 이 반상의 나당전쟁으로 서라벌이 들썩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신라기사들이 연전연패했다.
2006년 경주 분황사에서 15줄짜리 바둑판(사진)이 발견됐다. 그렇다면 15줄 바둑을 두던 신라인들이 19줄 바둑으로 무장한 당나라 바둑에 밀렸다는 얘기인가. 어떻든 이것이 한·중 간 바둑 교류의 효시이다.
꼭 1273년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1988년 후지쓰배 이후의 한·중 간 세계대회(아시안게임 포함) 성적을 보자. 93승44패. 특히 국가대항전에서는 22승4패. 한국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다. 나·당 대결을 생각하면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신라인들이 당나라 양계응에게 감탄했듯, 지금 중국인들은 이창호 9단을 존경한다고 하지 않는가.
어떻든 이창호 9단이 강조하는 ‘위기십결(圍棋十訣·바둑 10계명)’ 중 첫번째를 꼽아본다. ‘부득탐승(不得貪勝)’, 즉 ‘승리를 탐하면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어찌 바둑에서만 적용되는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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