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경주 계림로에서 발굴된 무덤(계림로 14호분)은 희한했습니다. 적석목곽분치고는 상당히 작았는데, 그 안에 성인 남자 두 명이 누워있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오른쪽 남자는 대도를 찬 흔적이 있었는데, 왼쪽 남자가 달고 있던 유물이 군계일학이었습니다. 길이 36㎝에 불과했지만 눈부신 황금보검이었습니다. 분명 신라 고유의 제품은 아니었습니다. 1928년 옛 소련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에서 확인된 검의 파편과 비슷했습니다. 이밖에도 비슷한 양식의 벽화 그림들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무덤의 주인공은 왜 외국산 황금보검을 차고 있었을까요. 서역인이 이역만리 신라의 수도 경주에 묻힌 것일까요. 아니면 신라인일까요. 신라인이라면 당시로서는 해외명품이었던 황금보검을 찰만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일까요. 또하나, 나란히 누워있는 대도를 찬 남성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99회는 ‘황금보검 주인공은 금수저가 아니었다’입니다.
여전히 수수께끼인 황금보검과 관련된 흥미로운 가설 중 하나가 있다.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의 주장이다. 그는 황금보검에서 보이는 세 개의 태극무늬(바람개비 무늬)에 주목했다.
세 개의 태극무늬 안에 꽃봉오리와 세잎 무늬, 때로는 사람의 머리나 동물머리 형상을 박아넣은 것은 고대 켈트인이 즐겨 사용한 무늬라는 것이다.
켈트인은 다뉴브강 중류지역의 본거지에서 동서남북으로 확장했는데, 일부는 아일랜드까지 건너갔다. 그런데 그 켈트의 후예가 저술한 <켈트의 서(書)>를 보면 이 태극무늬가 나온다.
또한 경주의 황남대총 북분을 보면 로만글라스와 상감 팔찌 등이 보이는데, 이것은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전통기법과 디자인을 답습한 것이라 보았다.
그런데 이런 팔찌가 제작되었을 5세기 전후의 비잔틴 세력권은 다뉴브강 남쪽까지로 한정된다. 다뉴브강 남쪽이라면 트라키아(불가리아·헝가리·루마니아 일대) 지방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이런 저런 유물을 비교분석하면 동로마와 켈트, 트라키아가 연결된다.
요시미즈는 따라서 계림로 14호묘의 황금보검에 보이는 3개의 태극무늬를 “로마화한 켈트족 왕이 정착한 땅, 즉 다뉴브 강 남부의 트라키아 지방에서 제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마디로 계림로 14호묘의 ‘황금보검’은 트라키아 켈트족 임금이 만든 것이라는 얘기다.
이 황금보검은 트라이카에서 수천㎞나 떨어진 신라의 경주까지 어떻게 올 수 있었다는 말인가.
신라를 방문한 켈트 왕의 사절이 가져온 것일까. 아니면 신라의 사절이 트라키아 켈트족 왕을 알현하고 받은 하사품일까. 아니면 트라키아 켈트의 사절이 기술자들을 함께 데리고 와서 황금보검 제작 기법을 가르쳐 준 것일까.
요시미즈의 상상력은 또하나의 가설을 생산한다.
트라키아 지역이 어디인가. 전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며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재위 433~453)의 근거지다.
■훈족-흉노-신라인
그렇다면 훈족의 정체는 무엇인가.
중앙아시아를 호령하던 흉노족이 중국에 쫓겨 서천(西遷)하면서 일컬어진 이름이다. 요시미즈는 바로 황금보검 같은 문물의 교류를 담당한 이들이 바로 이 훈족이라 여겼다. 한발 더 나가는 주장이 제기된다. 훈족의 원류가 아시아의 최동단, 즉 한국인일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독일 zdf 방송이 제작한 프로그램은 게르만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을 집중 취재했는데, 거기서 ‘훈족의 원류가 한국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기야 신라 문무왕의 비문을 보면 심상치않은 대목이 나온다. “문무왕의 선조는 15대조가 성한왕(星漢王)이다. 투후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했다.”
여기서 언급된 ‘투후 제천지윤’은 <한서(漢書)> ‘열전’에 나오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인 김일제를 가리킨다. 아버지 휴도왕과 태자 김일제는 기원전 102년 중국 한나라에 투항했다. 이때 한무제는 휴도왕을 ‘금인(金人)의 제천주’로 대접하고 일제에게 김씨성을 하사했다.
또 하나의 고고학자료가 주목된다.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시 궈자탄(郭家灘) 마을에서 흥미로운 비석 하나가 나왔다. 864년 5월29일 향년 32살로 사망한 재당 신라인 ‘대당고김씨부인(大唐故金氏夫人)’의 묘지명이었다.
“…먼 조상 김일제가 흉노의 조정에 몸담고 있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중략) 투정후라는 제후에 봉해졌다. 이런 김일제의 후손이 가문을 빛내다가 7대를 지나 한나라가 쇠망함을 보이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무왕 비문과, 중국에서 확인된 김씨 부인의 묘지명은 일맥상통한다. 신라 김씨가 흉노족 왕인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김씨 부인의 묘비를 보면 한나라로 투항했던 김씨 가문이 한나라 쇠망기에 요동, 즉 신라로 숨어들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됐다. 금석문이라는 것은 당대 사람들이 새겨넣은 글이다. 따라서 다른 어떤 유물보다 신뢰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신라왕족의 정체는?
그렇다면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
흉노족은 한나라에 쫓겨 동서로 갈라졌으며, 서쪽으로 간 세력은 훈족이 되고 동쪽으로 이동한 세력은 신라의 지배층이 된 것일까.
그렇다면 트라키아와 신라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셈인가. 그 경우 트라키아에서 만든 황금보검이 이른바 흉노족(훈족)을 통해 신라 경주까지 들어왔다는 주장도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도 같다.
혹은 트라키아 켈트족을 정복한 훈족이 보낸 선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계림로 14호묘에 묻힌 이가 서역인, 즉 황금보검을 지니고 이역만리 경주까지 온 사람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리스 로마 문화를 흡수한 지역의 지배자와 신라의 지배자가 의례적인 사신을 파견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술자를 파견해서 당대 최고의 기술을 전수할 정도로 밀접했다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다. 왜? 트라이카 훈족과 신라가 같은 핏줄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또한 너무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지적도 무시할 수 없다.
황금보검 등 일부 외래적인 문화가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트라키아 켈트로까지 연결하고, 더 나아가 훈족(흉노족)-신라로 이어붙이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이다.
유물 하나 나왔다고 역사 전체를 끼워맞추는 견강부회, 침소봉대의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고고학 및 문헌자료를 통해 차분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어찌됐든 한가지 분명한 것은 신라가 한반도 한 구석에 쳐박혀 있던 아주 궁벽한 나라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종호, <한국 7대 불가사의>, 역사의 아침, 2007
윤상덕, ‘계림로 14호묘의 축조연대와 피장자의 성격’, 고고학지, 국립중앙박물관, 2011
윤상덕, ‘경주 계림로 보검으로 본 고대문물교류의 단면’, 특별전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도록, 2015
이한상, ‘신라묘제 속 서역계문물의 현황과 해석’, 한국고대사연구 45, 한국고대사학회, 2007
이송란, ‘신라 계림로 14호분 금제장감보검의 제작지와 수용경로’, 미술사학(고 고고미술), 한국미술사학회, 2008
요시미즈 츠네오, <로마문화 왕국, 신라>, 씨앗을뿌리는사람, 2002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계림로 14호묘 발굴조사보고서>, 국립경주박물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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