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이야깃거리를 남긴 무령왕릉 발굴로 수수께끼 같은 한국 고대사의 블랙박스가 열렸습니다. 108종 30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백제 25대 왕 무령왕은 그렇게 1450년 만에 현현했습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무령왕은 헌헌장부의 미남자였습니다. “이름은 사마 혹은 융이라 했으며 키가 8척이고 눈매가 그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다”는 것입니다. 무령왕이 즉위할 당시 백제는 존망의 위기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한성백제 멸망 후 공주로 도읍지를 옮긴 지 불과 30년도 안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무령왕은 불구대천의 원수국인 고구려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왜와 신라 등과도 나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무엇보다 중국 양나라에 국서를 보내 “이제 민심을 수습해서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영동대장군’의 작호를 얻어냅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지석에 그 결과가 적혀있습니다. 무령왕릉은 백제의 중흥군주로서 이름을 떨친 무령왕과 그 부인의 합장묘입니다. 백제는 왕의 무덤이라 해서 그 땅을 함부로 쓰지 않았습니다. 토지신에게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무덤이 들어설 땅을 사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전말이 지석에 담겨있습니다. 왕과 왕비는 죽은 뒤 27개월간, 즉 3년상을 치른 다음에야 무덤에 안장됐습니다. 그 사연도 지석에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이렇게 엄청난 고대사 스토리를 후손들에게 전합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01회 팟캐스트’ 주제는 ‘무령왕, 과연 그 분은 누구인가’입니다. (이기환 기자)
1971년 7월 하룻밤 사이에 쓱싹 해치운 무령왕릉 발굴에서 수습한 유물은 놀라웠다.
금제 관강식과 금고리, 은팔찌, 금 은제 허리띠, 장식칼, 베개, 다리미, 청동거울 등 108종에 3000여점이 달했다.
이 유물들은 모두 서울로 옮겨질 운명이었다.
무령왕릉을 지키고 있던 돌짐승 형상.
당시 공주박물관은 80여 평의 목조 단층건물이어서 이 많은 유물을 보관할 능력이 없었다.
정부는 발굴유물의 정리와 보존처리를 위해 서울이송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렸고 2,3년 후에 새 공주박물관이 완공되면 다시 옮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공주 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만약 단 한 점이라도 서울로 가져간다면 실력으로 저지 하겠다”면서 공주박물관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조사단원들과 관계관들은 테러위협을 받았으며 밤에는 박물관 뜰로 돌멩이가 날아오는 등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서울에서 연구가 끝나면 반드시 공주 새 박물관에 이관 시키겠다”는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의 약속, 그리고 가장 낡은 청동제 신발을 들고 “보다시피 이 청동신발은 중병에 걸려 있으니 서울에서 고치지 않으면 썩어 없어진다”고 한 김원룡의 설득이 이어졌다.
급기야 공주시민들의 이해를 얻고는 7월16일 새벽 무장 경관의 호위를 받은 무령왕릉 출토품들이 공주를 출발, 오전 9시 40분쯤 서울 덕수궁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한다.
마지막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사건.
무령왕릉 출토품 가운데 주요 금제 유물들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여 주었다.
대통령은 얼마나 신기하게 생각했던지 유물 가운데 왕비의 팔찌를 들고는 “이게 진짜 순금이냐”며 두 손으로 휘어 보았다. 이때 문화공보부 장관이던 윤주영을 따라 갔던 김원룡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고 회고했다. 대통령이 뜨거운 관심을 보여서 그랬는지, 혹은 단순한 아부였는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령왕의 매지권. 무령왕 사후에 무덤을 조성할 땅을 토지신으로부터 매입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수수께끼를 풀어줄 고대사의 블랙박스를 열다
이렇게 못난 후손들을 둔 덕에 욕을 보셨던 무령왕(재위 501~523년).
그러나 우리 곁에 홀연히 나타난 임금님은 수수께끼에 가득 찬 고대 백제사는 물론 동아시아사에 엄청난 해답의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무엇보다도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무덤이었고, 왕의 이름과 출생·사망연대 등이 기록된 지석이 발견됐다. 이는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피장자가 밝혀진 고대 임금의 무덤은 무령왕릉이 처음이다.
무령왕이 “내가 무덤의 주인공이요”하고 선언함으로써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모두 삼국시대를 편년하는 기준자료가 되었다.
명문 지석을 통해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이 맞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또한 당대의 장제(葬制)와 역법, 음양오행사상 등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마련해 주었다.
왕의 지석 내용은 이렇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조/登冠大墓立志如左”, 즉 무령왕이 523년 5월 7일 죽었고 약 27개월 후인 525년 8월 12일에 대묘에 안장됐다는 뜻이다.
이는 “왕이 523년 5월에 죽었다(夏五月王薨)”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조 기사와 정확하게 맞다는 점을 의미한다.
왕의 지석 뒷면은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를 두고 단순한 방위표라는 해석과, 능묘에 대한 방위표이면서 일종의 능역도를 겸했다는 해석 등 의견이 분분했다.
또한 단순한 방위표가 아니라 묘를 축조하고 매지권을 만든 것과 관련이 있으며, 능역도와 같은 의미에서 묘역도로 해석하는 게 옳다는 주장도 있었다.
다른 1장의 지석 앞면엔 지신(地神·귀신)들로부터 땅을 사서 이 묘를 만들었다는 걸 의미하는 매지권(買地券), 그리고 뒷면에는 왕비의 묘지(墓誌)가 새겨져 있었다. 왕과 왕비의 묘지에는 매장자의 직위, 이름, 사망 연월일, 장례연월일, 묘지의 위치 등이 적혀있다.
지석의 출토장면. 토지신에게 땅을 구입해서 묘지를 마련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토지대금으로 오수진 90매를 지석 위에 놓았다.
앞면(매지권)의 내용은 “錢一萬文 右一件/乙巳年八月十二日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以前件錢詣土王/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買申地爲墓故立券爲明/不從律令”, 즉 죽은 무령왕이 토지신에게 땅을 사서 무덤으로 조성했다는 내용이다.
이 매지권 석판 위에는 중국 돈인 오수전 90매가 놓여있었다. 바로 이 오수전이 토지매매대금으로 지불한 것이 아닐까.
뒷면의 왕비 묘지 내용은 “丙午年十一月百濟國王太妃壽/終居喪在酉地己酉年二月癸/未朔十二日甲午改葬還大墓立/志如左”이다.
왕과 왕비의 묘지, 그리고 매지권을 통해 정리하면 무령왕은 523년 5월 7일 붕어하여 3년상을 치르기 위해 27개월 동안 가매장됐다가 525년 8월12일 신지(申地)인 대묘에 모셔졌다.
그 때 왕의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을 만들었다.
그런데 왕비 또한 526년 12월 죽었고, 서쪽의 땅에서 빈(殯)을 치른 뒤 529년 2월12일 2월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겼다. 이때 기왕에 작성해 놓은 매지권 상하를 뒤집어 뒷면에 왕비의 묘지를 써넣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령왕(재위 501~523년)은 누구인가.
이 무령왕릉 발굴로 어떤 고대사의 비밀이 풀린 것일까.
우선 무령왕대의 백제를 살펴보자. 무령왕이 즉위한 501년 무렵, 백제는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BC 18년 온조왕이 한성에서 나라를 일으킨 뒤 한성백제는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나간다.
근초고왕(재위 346~375년) 때는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이고 백제사를 통틀어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재위 391~413년) 장수왕(재위 413~491)의 남하정책으로 대방 고지(故地)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줄곧 접전을 벌이다 475년 결국 한성이 함락되는 비운을 겪는다.
이전에 개로왕(재위 455~475년)은 대내적으로 해(解)씨·진(眞)씨 등 귀족세력들을 억누르기 위해 동생 문주(文周)를 상좌평에 임명했고, 또 다른 동생 곤지(昆支)에게는 병권을 장악하게 했다. 그러나 이같은 무리한 친정체제 구축은 귀족세력들의 불만을 샀다.
여기에 권력의 과시욕에서 나온 대대적인 궁성수축, 왕릉의 조영, 치수사업 등으로 국고가 고갈됐고 민력이 급격히 피폐해졌다. 비근한 예로 개로왕을 죽인 고구려군의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출신으로 고구려에 망명한 자들이었다.
아무튼 한성이 함락되자 백제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동생 문주는 한성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시달릴 때 신라에게 1만의 원병을 얻어 달려오는 중이었으나 한성함락의 비보를 접하게 된다.
그는 개로왕 또한 참살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만치(木協滿致) 등 중신들의 보필을 받아 웅진(熊津)천도를 단행한다. 신라원병 1만 명이 든든한 배경이었다. 웅진시대(475~538년)의 개막이었다.
하지만 한번 기반이 흔들린 백제는 쉽게 재기하지 못했다. 한성의 상실, 권신의 발호, 왕권의 실추는 잇단 정정불안의 원인이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쓱싹 발굴을 해치우고 3000여점에 이르는 부장품을 솜상자에 담아 서울로 이송했다.
문주왕(475~477년)은 병관좌평 해구(解仇)의 발호를 통제하지 못한 채 그의 손에 시해당하고 만다. 해구는 문주왕의 아들로 13살에 불과했던 삼근왕(477~479년)을 옹립하고 국정을 농단했다.
그런 해구는 이듬해 478년 봄 옛 왕비족인 진(眞)씨 세력에 의해 제거됐다. 그러나 1년 뒤 삼근왕 역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 뒤를 동성왕(479~501년)이 잇는다.
10대 후반의 나이로 등극한 동성왕은 담력이 뛰어났고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다. 그는 신흥세력을 등장시켜 옛날 세력과 균형을 꾀했다.
동성왕 12년(490년)과 17년(495년) 중신들의 구성을 보면 사(沙), 해(解), 찬(贊) 등 신 구 귀족들이 골고루 분포돼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자 동성왕도 개로왕의 전철을 밟는다. 절도를 벗어난 토목공사로 민심이 이반됐고, 신료들에 대한 고압책으로 반감을 샀다.
그는 486년 이래 위사좌평직에 있으면서 신진세력으로 부상하던 백가를 가림성 성주로 좌천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화를 불렀다. 원한을 품은 백가는 501년 11월 자객을 보내 사냥을 하던 동성왕을 찔렀다. 중상을 입은 동성왕은 12월 숨을 거둔다.
◇누란의 위기에서 조국 구한 무령왕
무령왕은 비명에 간 동성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다.
삼국사기 무령왕 즉위조는 “이름은 사마 혹은 융이라 했으며 키가 8척이고 눈매가 그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다”고 평했다.
어느덧 40세 불혹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백가가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몸소 군사를 이끌고 토벌했다. 왕은 항복을 청하는 백가를 베어 백강에 던지도록 했다.
혹 무령왕은 동성왕을 시해한 정변의 주모자이거나 배후 조종자는 아닐까. 동성왕 말년의 실정을 계기로 백가를 충동질하여 왕을 죽이게 한 뒤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닐까.
그런 무령왕이 즉위한 지 한 달 만에 한 때의 동지였던 백가에게 동성왕 시해의 책임을 뒤집어 씌운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핀치에 몰린 백가가 반란을 일으켰고 무령왕은 “이때다” 싶어 백가를 참형에 처해 팽(烹)한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무령왕이 백가의 반란을 진압한 것은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었다.
왕이 직접 출병하여 역적의 목을 벰으로써 정치적인 입지를 확보한 데다, 동성왕 이래로 비대해진 신진귀족들의 권한을 통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한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백제의 제25대 왕에 오른 무령왕은 민생안정과 부국강병책, 활발한 대외교류로 중흥의 주춧돌을 놓는다.
전대 동성왕대에는 가뭄 때문에 백성들이 상식(相食)하는 등(499년) 도탄에 빠졌으나 왕(동성왕)은 구휼을 하지 않은 채 방관했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비의 베개.
무령왕은 창고를 열어 민심을 잡고(506년) 제방을 쌓아 유식(遊食)하는 자들을 모아 귀농케 했다(510년). 이는 농업 노동력 확보를 뜻하며 동시에 조세 및 노동력 수취의 기반확대라 할 수 있다.
특히 한편으로는 불구대천의 원수국 고구려를 압박하고 중국 양나라, 왜, 신라조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무령왕은 당대 세계화 국제화의 기수였으며 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국가 중흥의 영주가 된다.
무령왕은 521년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 "이전 고구려에 의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강국이 됐다"고 알렸다. 이에 양나라는 무령왕릉 출토 지석에 쓴 대로 ‘영동대장군’의 책봉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지석에는 무령왕의 죽음을 천자의 죽음을 칭하는 ‘붕(崩)’으로 칭했다. 사람의 죽음을 표시하는 글자로는 사(死), 졸(卒), 종(終), 훙(薨), 붕(崩)을 쓰는데 일반적으로는 사, 졸, 종을 쓰지만 제후의 죽음엔 훙(薨)을, 천자의 죽음엔 붕(崩)을 쓴다.
이로써 백제의 주체의식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지석의 다른 부분엔 중국 양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이라는 책봉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고, 또 제후를 나타내는 王이란 표현이 있는가.
그것은 결국 사대주의가 아닌가. 영동대장군은 무령왕 21년(501년) 양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을 때 양나라 무제에게 받은 직위. 대장군은 양나라의 제2품직 벼슬이었다.
그러나 이는 당대 동아시아의 국제적 관행을 잘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두계 이병도는 “마치 오늘날 외국에서 명예학위 혹은 명예회원이나 명예훈장을 받는 그런 감각으로 사용한 것일 뿐”이라고 보았다.
또 ‘왕’이란 칭호는 중국에서도 군주에 대한 고전적인 최고호칭이었다. 중국도 춘추시대까지 천자라야 왕의 칭호를 사용한 것이다. 전국시대 때 들어서 제후국들도 왕을 칭했다.
중국에서 황제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진시황 때에 이르러서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덕은 삼황(三皇)을 겸하고, 공은 오제(五帝)보다 높다”고 하여 황제를 칭했고 그에 따라 왕의 칭호가 격하됐던 것이다.
무령왕릉은 웅진시대(475~538년)에만 잠깐 선을 보인 전축분(벽돌분). 이는 전형적인 중국(양나라)식 묘제이다. 무령왕릉 발굴 후 10년 뒤 중국에서 발굴된 남경연자기묘(南京燕子磯墓)와 똑같은 양식이다.
무령왕릉에서 확인된 순금제 관장식과 귀고리.
이 묘는 중국에서 처음 발견된 ‘梁普通2年~’ 명문이 남아있는 양나라 시대묘(양나라는 武帝인 蕭衍이 건국하여 敬帝인 蕭方智 때 멸망할 때까지 불과 56년 존속했다)이다. 여기서 보통 2년은 521년을 뜻하며 무령왕릉보다 4년 이른 것이다.
더욱이 지석판 위에는 무령왕이 죽은 523년 양나라가 주조한 90매의 오수전(五銖錢)이 놓여있었다.
원래 오수전은 후한 광무제 건무 6년(AD 30년)에 철 오수전이 주조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폐기됐다. 양무제 천감(天監) 연간(502~519년)에도 여오수전(女錢五銖)를 주조했지만 화폐가 얇고 작았다.
양나라는 보통 4년(523년) 영을 내려 될 수 있는 한 동전유통을 중지시키고 철전을 다시 사용하게 했다. 양나라에서 철로 주조한 오수전을 다시 사용한 때가 523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무령왕은 523년에 죽었고, 지신에게 줄 토지대금으로 이 오수전 꾸러미를 지불한 것이다.
설혹 왕비가 526년 죽었고 529년에 장사지냈다 하더라도 오수전이 이곳에 묻혀있었다는 것은 돈의 전파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 측 자료인 양서 백제전에는 “백제가 양조에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 인원파견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교류가 활발했다.
양나라와 백제의 친밀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심지어 대륙 본토에서 양나라가 관할하던 다른 지역보다 더 친했다, 예컨대 후난성(湖南省) 소량(邵梁) 양조묘 안에 있는 묘 벽의 문자는 뜻밖에 ‘梁 普通 10年’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보통 8년’ 이후 양나라의 연호가 ‘대통(大通)’으로 바뀌었는지를 후난성에서 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양나라 무덤에 일본제 목관의 비밀
지난 1991년 무령왕이 안치됐던 관의 재질이 일본 남부에서만 자라는 금송(金松)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또 한 번 파란이 일었다. 이를 처음 밝혀낸 나무학자 박상진의 말을 들어보자.
“발굴한 지 꼭 20년이 지난 1991년 무령왕의 관재조각을 입수한 나는 급히 프레파라트를 만들어 현미경 접안렌즈를 들여다보았다. 확대된 세포모양을 확인하는 찰나,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일본인들이 자기네들 나라에만 있다고 자랑해 마지않은 금송의 세포배열이 잃어버린 기나긴 세월을 일깨워주듯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박상진은 3년 뒤 공주박물관 지하수장고에 보관된 무령왕릉의 열한 개 나무관재 하나하나를 조사했다.
모두 금송이었다. 함께 보관된 작은 나뭇조각에서 삼나무가 검출됐는데 이 삼나무도 일본에서만 자라는 나무였다.
금송은 겉씨식물 바늘잎나무 무리에 들어가는 ‘늘 푸른 나무’이다. 식물학적으로는 낙우송과(科) 금송속(屬)으로서 자손이 귀한 집안의 외동아들이다. 오로지 일본열도 남부지방에서만 자란다.
판자를 만들어 놓으면 연한 황갈색을 띠어 고급스럽고 나이테가 살짝 드러나는 은은함이 돋보인다. 잘 썩지 않고 습기가 많은 장소에 쓰더라도 오래 견딜 수 있어 나무관 재료로는 최상품. 일본에서도 예로부터 고급관리나 임금의 관재로 쓰였다.
목관의 제작에 필요한 시간을 고려한다면 무령왕은 미리 일본에서 많은 양의 금송을 입수 관리하고 있었고, 목관의 제작도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 무슨 조화인가. 학계는 들끓었다. 가뜩이나 무령왕의 출자(出自)와 관련된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지던 중이었다.
물론 여전히 그 논쟁은 끝나지 않고 있다.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이니(삼국사기),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이니(일본서기)”하는 팽팽한 논전이 계속 되고 있다.
어쨌든 이 금송의 확인은 6세기 전반대 백제가 문물 뿐 아니라 오경박사 같은 기술자들을 왜 야마토 정권에 보냈다는 점을 상기하면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일본서기 기록(雄略記 5년·461년)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개로왕이 동생 곤지를 일본에 보내려 한다. 그런데 곤지는 야릇한 조건을 단다.
임신 중인 개로왕의 여자, 즉 형수를 달라는 것이었다. 왕의 허락을 얻은 곤지는 왜국으로 떠났다. 다만 개로왕은 왜국으로 가는 도중에 아이를 낳으면 모자 함께 같은 배를 태우고 돌려보내도록 명했다.
개로왕의 여자는 각라도(各羅島·佐賀縣 松浦郡 鎭西町 加唐島?)에 이르러 아이를 낳았다.
그가 바로 무령왕이라는 것이다. 왕의 명에 따라 이 왕자에게 도왕(嶋王·せまきし)라고 이름 붙여 백제로 돌려보냈다. 백제인은 이 섬을 니리무세마(にりむせま)라고 했다.
이 니리무는 고대언어로 국주(國主)라는 뜻이라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무령왕은 현해탄에 면하는 사가현 가당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2000년 9월 경북대 교수 문경현이 가당도를 조사하여 일본서기의 기록을 확인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 해괴한 형제공처(共妻) 내용은 신뢰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많지만 무령왕의 백제와 왜 사이에 뭔가 특수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사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간무(桓武)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적은 속일본기(續日本記)의 기록으로 보면 한국과의 친연관계를 느낀다”고 한 아키히토 일왕의 발언(2001년 12월23일)은 무얼 암시하는가.
바로 간무천황을 낳은 화씨부인(?~789년)이라는 여인이 바로 백제계인 것이다.
화씨부인의 아버지는 왜왕실의 조신(朝臣)인 야마토노 오투츠쿠(和乙繼)인데 그 뿌리를 찾으면 바로 무령왕에게 닿는다는 것이다.
이 발언의 의미를 두고 학계에서 일찍부터 공인된 이야기를 발설하는 것은 이른바 일선동조론(日鮮同祖)을 제기하는 게 아니냐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던 건 사실이다.
어쨌거나 무령왕과 무령왕릉 발굴은 비밀에 싸였던 동아시아 고대사의 블랙박스를 연 것이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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