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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휴전선이 찢어놓은 궁예의 야망

 “저기 예쁘게 생긴 나무 한 그루 보이시죠? 그 나무를 따라 쭉 이어진 띠 처럼 펼쳐진 윤곽이 보이시죠?”
 “예”
 “저 윤곽이 바로 궁예가 건설한 태봉국 도성의 외성 흔적입니다.”
 지난 25일 강원 철원 흥천원 벌판, 비무장지대가 눈앞에 펼쳐있는 평화 전망대. 필자는 파주 교하도서관의 탐방프로그램(‘길 위의 인문학’)에 참가한 답사객들에게 태봉국과 태봉국의 역사를 설명했다.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이 지역 문화유산 전문가인 박종용씨가 부연한다.
 “이곳에 와보니 궁예가 왜 이곳에 태봉국의 도읍을 정했는지 알 수 있겠죠?”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궁예의 태봉국도성. 군사분계선과 경원선이 4등분으로 도성을 갈라놓았다.

 

 ■비무장지대는 산이 아니다. 벌판이다.
 최성숙 교하도서관 사서를 비롯한 참가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친다.
 하기야 필자도 그랬다. 처음 강원도 철원 땅과 이곳 평화전망대를 밟기 전에는 ‘철원=산악지대’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그때는 이런 생각을 품었다. 궁예는 왜 그 높디높은 철원의 그 궁벽한 산악지대 도읍을 정했던 것일까. 하필이면 그 곳에…
 하지만 지난 2007년 처음 평화전망대에 섰을 때 필자는 비명에 가까운 감탄사를 내질렀다.
 “저기가 비무장지대가 맞나요?”
 비무장지대란 높고 깊은 산악지대, 즉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게 일반상식이 아닌가. 게다가 이곳은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이 풍천원 들판은 해발 220m 위 용암대지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이다. 저 멀리 해발 330m 가량의 평강고원이 마치 거대한 둑처럼, 병풍처럼 이곳 평야를 감싸안고 있고….
 그제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랬다. 궁예는 저 드넓은 들판에 도읍을 정하고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것이다. 

태봉국도성의 위치와 궁예왕릉이 존재하고 있다는 평강의 삼방협 지역. 

■궁예가 꿈꾼 세상
 “천우 2년(905년)에 새 서울(철원)에 들어가 대궐과 누대(樓臺)를 수리하였는데 극히 사치로웠다.”(<삼국사기> ‘열전 ’궁예조’)
 “궁예는 혹독한 혹정으로 백성을 다스리며~국토는 황폐해졌는데 오히려 궁궐만은 크게 지어~원망과 비난이 일어난 것이다.”(<고려사> ‘태조 원년’)
 옛 사료의 편린만 봐도 궁예의 태봉국 도성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제 때 작성된 지도를 보면 도성의 외곽성은 12.5㎞, 내곽성은 7.7㎞에 이른다. 백제의 풍납토성(3.5㎞), 신라 월성(1.8㎞), 고구려 국내성(2.7㎞)은 새발의 피다. 
 심지어 조선의 서울성곽(17~18㎞)에 견줘도 손색이 없다. 그렇다면 궁예는 대체 무슨 맘을 품고 이곳에 도읍을 정했을까.
 그가 꿈꿨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궁예와 견훤 등을 평가한 사론(史論)을 보라.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가 사라져 백성이 돌아갈 바가 없었다. 뭇 도적이 고슴도치 털처럼 나타났다. 가장 악독한 자들이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이었다. 궁예는 신라의 왕자였지만 도리어 신라를 원수로 삼아 그것을 멸망시키려 했으니 그 어질지 못함이 심했다.”
 김부식의 평가처럼 궁예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각박하기만 하다. 한때는 “사졸들과 고락을 함께 했으며, 인사에도 사사로움 없어 백성들이 추앙했다”(삼국사기)는 호평을 들었는데….
 여기서 한가지 상기해야 할 대목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평가라는 것이다.

 

 ■궁예와 오이디푸스
 궁예가 출세할 무렵 중국 중원은 혼란기였다. 당나라에 망조가 들고 중원은 5대10국시대(907~979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천년왕국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하늘은 도을 수 없으며 백성이 갈 곳 없게 된 망조가 든” 나라였다.
 궁예는 헌안왕(47대) 혹은 경문왕(48대)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궁예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빨이 나 있었다. 궁예가 태어난 날에는 이상한 광채가 떠올랐다. 갓난 아기를 본 왕실의 일관(日官·나라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관직)이 “나라를 망치게 할 불길한 아이”라고 지목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내시에게 명하여 그 집에 가서 죽여 버리라 했다.
 내시가 포대기 속에서 아이를 꺼내 던져버렸는데 젖 먹였던 하녀가 몰래 받다가 잘못하여 손으로 찔러 한 눈을 멀게 했다. 그때 종이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이 기록을 보면 버림받은 신라 왕자인 궁예는 신라 왕위 다툼의 희생양인 게 분명하다.     그 출생비화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오이디푸스왕도 “장차 불길한 일이 일어날 징후이니 죽이라”는 계시에 따라 죽을 운명이었으나 짐승의 보호를 받거나 노파에 의해 양육되거나, 배에 실려 표류하다가 구출되지 않는가.
 애꾸눈의 비극과 오이디푸스의 실명 또한 뭔가 비슷하다. 그래서 궁예의 성격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결지어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일제시대 때 태봉국 도성에서 확인된 석등. 당시 일제시대 때 보물 118호로 지정됐다. 이밖에도 삼방협에 남아있을 궁예왕릉은 물론 태봉국 도성의 남대문지, 궁궐터, 미륵전, 궁궐터 등 향후 발굴해볼 여지가 많다.

■고구려를 꿈꾸며 든 대동방국의 기치  
 어떻든 이런 범상치않은 운명을 딛고 영웅으로 거듭난 궁예는 고구려 재건의 기치를 높이 든다. 
 “지난 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퇴하였기에 평양 구도(舊都)는 묵어서 잡초만 무성하니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삼국사기> ‘열전·궁예전’)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야망은 커진다.
 궁예는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었고, 911년엔 태봉(泰封)으로 다시 고친다. 마진은 ‘마하진단(摩訶震檀)’의 줄임말이다. ‘마하’는 범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말한다.
 또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고 했다. ‘봉(封)’은 봉토를 뜻한다. 결국 궁예는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즉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궁예는 더 나아간다. “비겁한 자의 친구가 되느니 정직한 자의 원수가 되는 게 낫다”고 설파했다. 그는 철원(896년·현재 구철원 동송)~송악(898년)에 이어 905년 다시 철원(이곳 풍천원)에 도읍지를 정했다. 철원에만 두번이나 도읍을 정한 것이다. 궁예가 뜻을 폈던 시기에 신라 천년왕국이 뿌리째 무너지면서 백성들은 유리걸식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미륵불을 자처하고 나타난 궁예에 홀딱 빠졌다. 세상이 끝나는 날 홀연히 출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미륵불이 현신했다니까. 그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세운 것이다.
 철원 환도 이후 궁예는 907년 무렵 삼한 땅의 3분의 2를 품에 안았다. 실로 대단한 기세였다.
 하지만 너무 과속했던 탓일까. 궁예에게 귀부했던 고구려 부흥세력, 즉 왕건을 중심으로 한 송악세력이 반발의 기미를 보인다. 당초 궁예가 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왕건세력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북원(원주)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떨친 양길을 제압하려면 송악 호족들과의 제휴가 필요했던 것이다.

경원선 교각의 흔적. 서울~원산간 철도인 경원선은 태봉국도성 내부를 관통한다. 

 ■독존신이 된 궁예왕
 하지만 궁예는 뜻을 이루자 다시 철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청주지역의 1000가구를 철원 땅으로 강제이주시킨다.
 이것은 궁예가 송악세력 말고도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는 뜻이었다. 남으로 남으로 세력을 키워간 궁예로서는 ‘고구려 세력’만으로는 천하를 경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궁예를 도왔던 송악세력, 즉 고구려 부흥세력은 불안에 떤다. 게다가 도읍지 건설에 엄청난 공력을 쏟았고, 때마침 흉년이 들면서 민심이 돌아섰다.
 불승들도 관심법(觀心法)을 내세워 신하들과 심지어 부인, 아들까지 죽인 궁예를 외면했다. 결국 궁예는 918년 보수 호족들에 의해 축출된다. 그의 최후는 너무도 비참하다.
 “궁예는 암곡(巖谷)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는데, 굶주림이 심하여 보리이삭을 몰래 끓여 먹다가 부양(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려사)
 과연 그럴까. 물론 역사서는 한결같이 궁예를 역사의 패륜아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철원지역에서 지금도 채록되는 구비전설은 궁예왕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전한다.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전설은 <삼국사기> <고려사> 등의 역사서와는 사뭇 다르다.
 “구레왕(궁예왕)이 재도(再圖)할 땅을 둘러보는 데 어떤 중이 나타나자~이에 왕이 혹시 용잠호장(龍潛虎藏)할 땅이 없겠느냐 하매 중은 이 병목 같은 곳에 들어와 살 길을 찾는 것이 어리석다 하자~ (궁예가) 아아 천지망아(天之忘我)로다 하고 심연을 향해 몸을 던지니~우뚝 선 채로 운명하였다.”
 육당 최남선이 궁예왕 묘가 있는 삼방협(평강~안변 사이의 협곡)에서 채록하여 쓴 <풍악기유(楓嶽記遊)>의 한 토막이다.
 풍악기유는 또한 “(궁예왕은 이후) 이 지방의 독존신(獨存神)이 되었다”고 했다.
 관련 구전설화는 많다, ‘금학산(철원 동송읍·947m) 밑에 도읍했으면 300년은 갈 건데, 고암산(780m) 밑에 세워 그 양반(궁예왕)이 망했다’는 설화도 있고, ‘(왕건과 강비의 사통이) 들키니까~왕건을 죽일 수 있지만 자기를 보살펴준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부인을 죽였다~.’는 설 등….

 

 ■옹졸한 사가의 평가
 구비전설을 보면 추종세력과 함께 보개산성(포천 관인), 명성산성(철원 갈말), 운악산성(포천 화현) 등에서 치열한 항전을 벌인다.
 특히 지명전설에서는 태봉국 도성 말고도 3곳의 대궐터가 보인다. 왕건과 치열하게 싸운 명성산성과 보개산성, 그리고 운악산성 등이 그 곳이다. 궁예가 쫓겨난 뒤 바로 죽은 게 아니라 왕건과 10~15년 가량을 더 항전했다는 자료인 것이다.
 지금도 왕건과 대치하며서 여우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붙은 ‘여우고개’, 200명이 들어갈 수 있다는 ‘궁예왕굴(명성산)’, 궁예가 자신의 운세와 국운을 점치려 ‘소경과 점쟁이’들을 불렀다는 ‘소경의 절터’, 궁예와 왕건이 투석전을 벌였다는 운악산 인근의 ‘화평장터’, 대패한 궁예군의 피가 흘렀다는 ‘피나무골’ 등…. 모두가 궁예에 대한 주민들의 승모와 연민, 안타까움을 상징하고 있다. 궁예는 한마디로 원대한 포부를 지닌 개혁가였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과 대결에서 끝내 패했다. 또한 역사서는 승자의 기록 아닌가. 궁예를 어떻게 폄훼하든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의 평가는 좀 옹졸하다는 생각은 든다. 저 유명한 역사가 사마천은 무려 2000년 전에 쓴 <사기>에서 유연한 사고를 보여준 바 있다. 그는 ‘사기’의 세가(世家)에 제후와 왕의 흥망성쇠를 담았다. 그런데 진나라 말 농사꾼의 신분에서 일어나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미완의 혁명가 진섭(陳涉)을 당당히 ‘세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이유를 달아놓았다.
 “진섭이 죽었으나 그가 봉립하고 파견한 왕후장상(항우와 유방이 대표적)이 마침내 진을 멸망시켰다. 진섭이 처음 반란을 시작하여 그런 결과를 촉진한 것이다. 고조(유방)때는 진섭을 위해 분묘를 간수하는 30가구를 배치해놓고 지금도 가축을 잡아 진섭을 제사지낸다.”
 승리자로서 최소한 이 정도의 아량은 베풀 수 있지 않을까.

 금학산과 철원평야. 구전설화 가운데는 ‘금학산(철원 동송읍·947m) 밑에 도읍했으면 300년은 갈 건데, 고암산(780m) 밑에 세워 그 양반(궁예왕)이 망했다’는 아쉬움섞인 이야가가 남아있다.

 ■휴전선이 갈라놓은 궁예의 태봉국
 궁예왕의 슬픈 운명은 11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바뀌지 않은 것 같다.
 (한국)전쟁의 악몽이 서려있고, 자금으로 분단의 살벌한 갈등 속에 4등분으로 찢겨있으니 말이다.  
 평화전망대를 중심으로 보자. 도성의 맨 왼쪽에 야트막한 야산(해발 395m) 하나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백마고지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열흘간 12차례의 쟁탈전 끝에 고지의 주인이 7번이나 바뀐 곳이다. 피아간 1만7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고지에 쏟아진 포탄만 27만5000발에 이르렀다. 고지는 벌집이 되었다. 또 도성의 주변에 부저 멀리 북한 땅엔 주변의 산인 고암산(780m)은 일명 김일성 고지이며, 곁의 능선 별칭은 피의 능선이다. 또 이어 저격능선, 낙타고지….
 그리고 또 하나, 앞서 밝혔듯이 철의 삼각지대 맨위 꼭지점인 평강(지금은 북한)이 아련하다.
 그리고 가장 극적인 상황은 전쟁과 남북분단, 그리고 냉전의 상징인 군사분계선(휴전선)이 태봉국 도성을 딱 반으로 가르고 있다는 것이다.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 2㎞씩 물러난 공간 사이, 즉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 팔자 센 도성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서울~원산간 경원선 철도도 도성을 갈라 놓았다. 한마디로 태봉국도성은 전쟁과 분단이 갈라 놓은 비극의 상징이다.
 남북으로는 끊어진 경원선이, 동서로는 휴전선이 도성을 4등분 한 것이다, 비운의 궁예는 죽어 1000년이 훨씬 지나 백골이 진토가 되었을 텐데도 사지가 잘리는 신세에 놓여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전의 기회도 있다. 지금은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화합과 통일의 시대의 상징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예컨대 군사분계선이 반으로 가르고 있는 이 태봉국도성을 남북한이 공동발굴이라도 한다면? 이것은 통일을 위한 거대한 발걸음이 될 수 있지 않은가. 마냥 꿈만은 아닐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