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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황룡의 꿈 서린 주몽의 도읍지, 오녀산성을 가다

 “와!”
 환런(桓仁)시내에서 8㎞ 쯤 달렸을까. 단풍이 곱게 물든 산 길을 굽이굽이 돌다가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상상 속 노아의 방주 같은 것이, 혹은 천신이 강림하여 쌓은 거대한 성채(城砦) 같은 것이 떡하니 솟아있다. 이름하여 오녀산성이다.
 옛날 산과 마을을 수호하던 선녀 5명이 흑룡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고 해서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고구려의 발상지라면서 5선녀가 어떻고. 흑룡이 어떻고 하는 전설이 좀 뜬금없기는 하다. 하지만 마땅히 부를 이름이 없으니 어쩌랴. 산성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녹록치 않다.

 

필자는 강남문화원 답사단과 함께 중국 라오닝성(遼寧省) 환런시(桓仁市)에서 약 8㎞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오녀산성 정상에 섰다. 100m 수직벼랑이 현기증을 자아냈다. 과연 천험의 요새였다. 저 멀리 역 S자 모양의 비류수가 보인다. 기원전 37년 동부여를 탈출한 주몽이 정착한 뒤 이곳 오녀산에 산성을 세웠다.(기원전 34년) |사진작가 이오봉씨, 강남문화원 제공

 ■“저기 비류수가 보인다.”
 입구에서 30~40분간 999계단을 터벅터벅 오르다가 숨이 목젖까지 차오를 때면 정상(해발 820m)에 닿는다.
 함께 간 답사단원(강남문화원) 중엔 60~70대가 끼어있지만 누구도 낙오하지 않는다. 정상은 남북 길이 1.5㎞, 동서 길이 200~300m의 평평한 땅을 이룬다. 곳곳에 옛 고구려 사람의 체취가 풍긴다. 그들이 쌓았던 성벽의 흔적이 보이고, 그들이 마셨던 우물이 그대로 있다. 후대 사람들이 ‘소천지(小天地)’란 재치있는 이름을 붙였다.
 궁궐터와 곡식창고, 대형맷돌 등의 유적·유구들이 잇달아 보이는 틈에 움직일 수 없는 고구려인의 자취가 드러난다. 군사들의 숙소였을 건물터에서 확인된 온돌의 흔적이다. <후당서>를 보면 “고구려인들은 겨울에 긴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아래 불을 때서 따뜻하게 만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운해송도(雲海松濤)’라 이름 붙인 전망대에 서면 아찔하다. 100m 가량의 깎아지른 수직벼랑이 현기증을 자아낸다. 가뜩이나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필자의 오금이 저려온다.
 몸서리를 치며 살짝 눈을 들자 환런 시내와 시내를 ‘역S자’로 굽이굽이 흐르는 강이 시선을 휘어잡는다.
 “바로 저 강이 역사에 보이는 비류수(지금은 혼강·渾江)입니다. 고구려 역사의 탯줄이라 할 수 있는….”
 신형식 전 이화여대 교수와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이 한 목소리를 낸다. 답사단을 이끈 최병식 강남문화원장은 “강과 강 유역의 도읍, 산성 등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소리친다.

멀리 바라본 오녀산성. 마치 노아의 방주 같다. 주몽은 해발 820미터 위에 성곽을 지었다. 오녀산성을 오를 때는 999계단을 40분 정도 걸어야 한다.|이오봉 사진작가 제공  

 ■창업을 위한 ‘기획결혼’
 필자는 2000여 년 전 저 비류수와, 이 산성에서 일어난 흥미진진한 역사를 되돌아보며 잠시 상념에 빠진다.
 “추모(주몽) 일행은 비류곡의 홀본(졸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沸流谷忽本西城山上建都) 성왕은 세위를 다하지 못했다. 하늘에서 황룡을 보내와 왕을 맞이했다. 이 때 왕은 홀본성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광개토대왕 비문>)
 가장 확실한 역사기록(금석문)인 <광개토대왕비문>은 주몽(동명성왕·추모왕)이 저 비류수 유역에 도읍을 세웠고, 이 산 위에 성을 쌓았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 이곳에 터전을 잡은 주몽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이 곳(홀본성)에서 승천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동명성왕조’는 주몽이 비류수에 정착, 고구려를 창업했을 때의 상황을 부연 설명해준다.
 “주몽이 졸본천(비류수)에 이르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과 물이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도읍하려 했다. 그러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다.”

산성 내부에서 확인된 고구려인들의 주거터.온돌의 흔적이 역력하다

 두 기록을 종합해보면 주몽은 “죽이겠다”는 동부여 태자(대소)의 추격을 피해 창졸 간에 망명했다. 나라를 세울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랬으니 비류수 유역에 도읍을 짓고, 서쪽

산(오녀산)에 산성을 짓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  었지만 실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온조왕조’를 보면 의미심장한 두 가지 상반된 기록이 나온다.
 “22살의 주몽이 졸본(홀본)부여에 왔을 때 졸본부여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다. 부여왕이 주몽을 보고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여겨 둘째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얼마 후 졸본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비류와 온조였다.”

고구려인들의 생명수였던 우물. 작은 천지라 해서 소천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는 주몽이 졸본부여에 와서 고구려를 세우고, 이곳의 미망인인 소서노와 혼인했다. 소서노에게는 이미 두 아들(비류와 온조)이 있었다. 주몽은 소서노가 창업하는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비류와 온조를 친아들로 여겨….”
 어떤 기록이 맞는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주몽은 졸본부여왕의 눈에 들어, 혹은 재력가의 딸이면서 능력까지 겸비한 여인(소서노)를 얻어 창업의 날개를 단 것이다.     

 

 ■‘듣보잡’ 취급당한 주몽
 시쳇말로 빈손으로 동부여를 탈출한 주몽으로서는 출세를 위한 ‘기획결혼’에 성공한 것이다. 사실 동명왕(주몽)이 고구려를 창업했다지만 현실은 냉엄했다.
 비류수 상류에 둥지를 틀고 있던 기존의 비류국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행인국과 동부여, 북옥저, 낙랑국도 보잘 것 없는 막 첫발을 내딛은 신생국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렸다. 그 뿐인가. 중원의 한나라는 물론 선비와 말갈족 등 이민족들도 위협적이었다. 주몽의 고구려는 우선 비류국을 도모하기로 했다.

산성에서 바라본 비류수. 댐이 생기는 바람에 거대한 인공호수(환룽호 桓龍湖)가 생겼다. 당연히 주몽이 창업했을 때 없었을 호수다.|강남문화원 제공 

 “기원전 36년 왕이 사냥을 하면서 비류수 상류의 비류국을 찾아갔다. 그 나라 왕 송양(松讓)이 말했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고?’”(<삼국사기> ‘고구려본기·동명왕조’)
 송양이 동명왕을 ‘듣보잡’ 취급을 한 것이다. 그러자 주몽은 “난 천제의 아들인데, 여기(비류수 유역)에 도읍을 정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송양은 피식 비웃었다.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 임금노릇을 했다. 여긴 땅이 좁아 두 주인이 나눠 가질 수 없다. 차라리 나에게 귀부하는 편이 어떠냐.”
 동명왕은 그 말을 듣고 분기탱천, 말다툼을 벌였다. 결국 활쏘기 결투로 승자를 가렸는데, 송양이 대적할 수 없었다.(<삼국사기>)
 이규보의 <동명왕편>과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은 <고기(古記)> 등을 인용, 좀 유치하지만 나라의 운명을 건 ‘벼랑끝 결투’ 장면을 현장중계한다. 결투를 먼저 제안한 이는 송양이었다.
 “네가 천제의 후손이라고? 헛소리마라. 활쏘기로 겨루자.”
 송양은 사슴을 그린 표적을 100보 안에 놓고 활을 쏘았다. 그러나 화살이 사슴의 배꼽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동명왕은 코웃음을 날리며 옥(玉)으로 만든 가락지를 100보 안에 걸어놓고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정확히 옥가락지를 꿰뚫었다. 동명왕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송양은 좀처럼 승복하지 않고 동명왕을 견제했다. 어느 날 동명왕이 흰 사슴 한마리를 잡아 거꾸로 매단 뒤 송양의 비류국을 저주했다.
 “하늘이 비를 내려 비류국의 왕도를 쓸어버리지 않으면 내 진실로 너(사슴)를 풀어주지 않으리라.”
 그러자 거꾸로 매달린 사슴의 울음소리가 7일 간이나 하늘에 사무쳤다. 하늘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억수같은 비가 내렸고, 비류국의 도읍은 물바다가 됐다.
 그 때 동명왕이 채찍으로 물을 긋자 홍수가 그쳤다. 송양은 끝내 항복하고 만다. 그 때가 기원전 36년 6월 여름이었다.
 이 이야기를 곱씹어보면 동명왕이 비류국에 엄청난 홍수가 난 틈을 타 송양의 항서를 받아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오녀산성 정상에 오르려면 999계단을 올라야 한다. 고고학자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이 계단을 오르고 있다.

 ■‘성곽과 궁실이 저절로 지어졌다.’ 
 비류국을 접수한 동명왕은 그제서야 한숨을 돌렸다.
 창업 4년째인 기원전 34년 미뤄두었던 성곽과 궁궐을 건설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 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기원전 34년 4월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일주일 간이나 빛을 분간하지 못했다.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그것이 <광개토대왕비문>에 기록된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세운 성’, 즉 오녀산성인 것이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구삼국기>를 인용, 이것을 잘 짜여진 드라마로 묘사하고 있다.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 산은 보지 못했다. 오직 수천 명의 소리가 들렸다. 토목 공사를 하는 것 같았다. 왕이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라 했다. 7일 만에 운무가 걷히니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왕이 황천에게 절하여 감사하고 나아가 살았다.(七月玄雲起골嶺 人不見其山 唯聞數千人聲 以起土功 王曰天爲我築城 七日雲霧自散 城郭宮臺自然成 王拜皇天就居)”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기록도 나타난다. <삼국사기>를 보면 “기원전 35년 골령에 황룡이 나타나고, 상서로운 구름이 보였는데, 그 빛깔이 푸르고 붉었다.”고 했다.
 ‘황룡’은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동명왕이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는 기록에도 나온다. 결국 황룡은 주몽(추모), 즉 동명왕을 상징하는 것이다.

 

 ■황룡 타고 승천한 주몽
 동명왕은 창업(기원전 37년)-비류국 접수(기원전 36년)-성곽 및 궁실 축조(기원전 34년) 등 착착 나라의 기틀을 잡는다.
 재위 6년째인 기원전 32년에는 태백산 동남쪽(함경북도)에 있는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했다. 4년 뒤인 기원전 28년에는 북옥저마저 정벌하고 성읍으로 삼았다.
 바야흐로 동명왕의 고구려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주몽(동명왕)을 잡아 죽이려 했던 동부여도 고구려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가자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24년(동명왕 14년) 동명왕의 생모인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죽었다. 동부여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 장사를 지내고 신묘를 세웠다.”
 고구려는 동부여의 처사에 감사하는 차원에서 사신을 부여로 보내 토산물을 보냈다. 바야흐로 동부여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러던 기원전 19년 동명왕은 ‘세위(世位)’를 다하지 못한 채 홀본성의 동쪽 언덕에서 황룡의 머리를 타고 승천했다.(<광개토대왕비문>)
 노심초사 나라의 기틀을 잡느라 지존(至尊)의 자리를 즐기지 못했던 동명왕이 아니었던가. 22살에 창업했고, 만 18년간 임금의 자리에 있다가 겨우 40살에 승천했으니….
 그가 품었던 ‘황룡의 꿈’은 맏아들 유리(왕)에게 이어졌다. 아버지가 말 위에서 ‘창업(創業)’한 것만큼이나 중요하고 어려운 것은 ‘수성(守成)’이었다.
 그런 면에서 개국초,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힘을 비축해서 나라의 기틀을 쌓는데, 이 깎아지른 듯한 지형의 (오녀)산성은 가히 철옹성이었다.  

오녀산성 성벽. 성곽과 궁실이 저절로 쌓였다고 한다.

 ■황룡의 현신
 하지만 유리왕은 ‘수성(守成)’만을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꾼 ‘황룡의 대업’을 펼치기 위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다. 주변의 소국을 속속 흡수함에 따라 먹여 살려야 할 경작지도 더 필요했다. 당연히 천도론이 제기됐다. <삼국사기>를 보면 “기원후 2년(유리왕 21년) 3월 제사에 쓰일 돼지가 달아났는데, 위나암(국내성이 있는 지안 퉁거우)에서 찾아냈다”고 돼있다.
 이는 하늘이 내려준 새 도읍지가 지금의 지안(集安) 퉁거우(通溝)임을 암시하는 기록이다.
 “위나암에서 돼지를 잡은 설지(제물을 담당하는 관리이름)가 임금(유리왕)에게 아룄다. ‘국내(國內) 위나암은 그 산수가 깊고 험준해서 오곡을 키우기 알맞습니다. 또 순록, 사슴, 물고기, 자라가 생산됩니다.’”
 설지는 “도읍을 옮기면 백성의 이익이 무궁무진하고, 전쟁의 걱정도 면할 것”이라고 천도를 강력히 추천한다. 유리왕 역시 설지의 천도론을 좇았다.
 이듬해인 기원후 3년 10월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성을 쌓았다.
 “지안은 천혜의 도읍지 터입니다. 북위 41도의 북쪽 지방이지만 노령산맥이 북풍을 잘 막아주고…. 여기에 우산(북)과 용산(동)이 울타리가 되고, 남쪽에는 서해 바다로 나가는 압록강이 온대 계절풍을 실어나르고…. 그런 의미에서 지안을 두고 ‘새외(塞外)의 소강남’이라 일컫고 있습니다.”(신형식 교수)
 고구려는 두번째 도읍에서 424년간(유리왕 22년 기원후 3~장수왕 15년 기원후 427년) 주몽이 간직했던 ‘황룡의 꿈’을 마음껏 떨쳤다.
 필자는 이 오녀산성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숨어 저 멀리 실개천처럼 흐르는 비류수를 바라보았다. 구름 사이로 햇빛의 줄기가 뻗어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 혹 황룡의 현신은 아닐까.(끝) 중국 환런(桓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