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직이물래(下直吏勿來·관리들의 하직인사 사절), 물래(勿來·인사를 사양), 입직(入直·직무실로 가서 인사), 미견(未見·만나지 못함), 입직미견(入直未見·직무실로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함)….
고문서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 교지연구가 김문웅씨(80)가 얼마전 아주 희귀한 자료를 기자에게 공개했다. 이름하여 ‘역사기(歷辭記)’라는 아주 생소한 문서이다. ‘역사’는 새로 임명된 신임관리(당하관·정 3품 이하)가 의정부 소속 정승들과 인사 관련 부서인 이조 및 병조 등을 돌아다니며 부임인사 하는 절차를 가리킨다. ‘역(歷)’자에 ‘다니다’ ‘두루’라는 뜻이 있으며, ‘사(辭)’자에는 ‘알리다’는 의미가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DB에서 검색해봤더니 ‘역사’라는 용어는 숙종 시대인 1700년 이후의 실록에 등장한다. 그 이전에는 비슷한 용어인 참알(參謁) 또는 당참(堂參)으로 검색해야 한다.
교지연구사 김문웅씨가 경향신문에 공개한 역사기. 새로이 발령받은 지방 수령이 의정부와 문무관 인사담당 부서인 이조와 병조를 돌며 부임인사를 했던 기록문이다. |김문웅씨 제공
■‘부임 인사’를 장부에 기록한 이유
김문웅씨가 공개한 ‘역사기’ 역시 새로이 발령받은 수령이 재상급 인사들과 이조 및 병조 관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역사, 즉 부임인사를 한 결과를 대상자별로 꼼꼼히 체크한 기록문이다. 그랬으니 누가 이 기록문의 주인공인지는 알 수 없다.
‘역사기’에 따르면 새롭게 발령받은 주인공은 영의정 이상황(1763~1841), 우의정 이지연(1777~1841), 영부사 심상규(1766~1838), 판부사 박종훈(1773~1841), 이조판서 조봉진(1777~1838), 병조판서 권돈인(1783~1859) 등을 직접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인사를 완료했음’을 표시한 확인점(′)을 이들의 이름 위에 찍어놓았다. 이조참판 조두순(1796~1870)와 이조참의 김위(1795~?) 등은 물론 이조정랑 이재익·이필옥, 이조좌랑 박재호·유세환, 병조참판 윤지겸, 병조참의 정최조, 병조정랑 김덕희 등은 ‘물래(勿來·인사를 사양)’라 표시했다. 봉조하(전직 관원에게 내리는 특별관직) 남공철의 이름 밑에는 ‘하직이물래(下直吏勿來)’라 적었다. 이 역시 ‘물래(勿來)’와 마찬가지로 ‘하직인사를 사절한다’는 뜻이지만 결이 조금 다르다는 게 김문웅씨의 해석이다. 즉 남공철(1760~1840)의 직함인 봉조하(奉朝賀)는 공신이나 당상관 이상의 고위관리가 은퇴한 뒤 받는 명예직이다. 김문웅씨는 “따라서 ‘이미 은퇴한 나(남공철)에게까지 부임인사를 올 필요가 없다’고 사절한 케이스라는 점에서 특별히 ‘하직이물래(下直吏勿來)’로 적어놓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 병조참의 조규승은 직무실로 찾아가 인사했다는 뜻으로 ‘입직(入直)’으로 표시했고, 병조정랑 허국은 집으로 찾아갔지만 ‘미견(未見)’, 즉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허국의 경우 나중에 직무실로 찾아가 인사를 마쳤다는 뜻으로 맨 밑에 ‘입직(入直)’ 표시를 했다. 또 병조좌랑인 정석린과 김대묵의 경우 ‘입직미견(入直未見)’ 즉 직무실로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역사기에는 인사할 대상자의 거주지까지 표시돼있다. 영의정 이상황의 거주지는 수교(중구 남대문로4가), 우의정 이지연은 안동(종로 안국동), 영부사 심상규는 북송현(종로 중학동과 안국동 사이의 고개) 등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역사기는 언제 작성된 것일까. <헌종실록> 기사를 보면 박종훈이 1838년 1월29일 좌의정직에서 사임한다. 그런데 박종훈은 한달 쯤 뒤인 2월27일 판부사의 직함을 얻어 병조참판 윤치겸과 나란히 <헌종실록>에 등장한다. ‘역사기’에도 등장하는 두 사람의 직함 그대로다. 그리고 ‘역사기’에 영의정으로 등장하는 이상황은 3월23일 사임한다.(<헌종실록>) 따라서 김문웅씨는 1838년(헌종 4년) 1월29~3월23일 사이에 새로이 임명된 수령이 의정부와 이조 및 병조 관리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부임인사를 한 뒤 ‘역사기’를 작성한 것으로 추정했다.
지금까지 ‘역사’는 물론이고 ‘역사기’ 관련 연구는 전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성자 이름이 없이 그저 의정부와 이조·병조 관리들의 이름과 관직명, 거주지만 잔뜩 써놓은 기록문이었기에 도무지 어떤 문서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임관리의 부임인사 기록이 뭐 그리 유의미한 자료인가 싶어 허투루 취급했을 것이다. 김문웅씨는 “현재까지 확인된 역사기는 조선 말기 고종 때의 것인 1점이 경북의 모 연구기관이 소장중이지만 이 역사기는 부임인사 대상자 중 인사를 완료한 이의 이름만 동그라미로 표시해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윤경원(1560~1592)의의 시호를 충장공으로 정하는 데 대해 사간원이 서명해준 서경단자.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국왕의 인사권에 이래라저래라한 대간들
그러나 ‘역사(歷辭)’(참알 혹은 당참)는 신임 관리의 단순한 부임인사가 아니다. 조선 왕조 500년을 지탱한 인사행정 제도의 하나였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자료라 할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경국대전>에 엄연히 등장한다. 즉 <경국대전>은 “신임관원이 의정부와 전조(銓曹·이조와 병조)에 참알(역사·당참)하는 이유는 (의정부와 이조·병조관리들이) 그 사람이 적임자인지를 (마지막으로) 살피려는 뜻”이라 규정했다. 1541년(중종 36년) 7월17일 <중종실록>은 “새로 임명된 수령은 서경(署經)과 참알(參謁)이 다 끝나면 부임해야 한다”는 사헌부의 상언를 기록했다. 참알(역사·혹은 당참)은 서경과 함께 신임 관리(특히 지방 수령)가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서경과 역사(참알·당참)제도는 왜 필요했을까. 일반적으로 왕조시대라 하면 군주가 휘두르는 절대 권력을 연상하게 된다. 또 왕권이 미약할 경우엔 특정 정치세력이 마음껏 인사권을 쥐락펴락 할 수 있다. 이러한 왕조들은 오래 갈 수 없다. 군주의 왕권(王權)과, 특정 정치세력의 신권(臣權)이 정사를 농단할 수 없도록 건강한 관료조직의 유지를 도모하는 제도가 바로 서경과 역사제도이다.
먼저 서경(署經)이 무엇인가. 서명(署名)한다는 ‘서(署)’와 거친다는 ‘경(經)’을 합한 용어이다. 조선초까지도 임금이 모든 관리를 임명할 때 대간(사헌부 혹은 사간원)의 서명(50일 이내)을 거쳐야 관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일종의 인사 적부심 제도라 할까. 대간은 관리의 인사자료를 바탕으로 개개인의 문벌과 품행, 경력을 철저하게 분석한 뒤 국왕의 임명장(고신)에 서명할지 여부를 판단했다.
그랬으니 임금으로서는 자신의 인사권에 사사건건 제동을 거는 서경이 매우 불편한 제도였다. 태조~세조까지 이 제도는 축소(태조)-복원(정종)-축소(태종)-복원(세종)-축소(세종)-무력화(세조)-축소 복원(성종) 등의 우여곡절을 거쳤다. 서경과 관련된 태종~세종대의 일화가 재미있다.
1425년(세종 7) 무관 조흡(?~1429)을 정헌대부우군도총제에 임명하는 왕지이다. 이것이 관리임명장이다.왕지(王旨)는 고려 말 조선 초 임금이 사용하던 문서의 명칭으로 조선국왕지보(朝鮮國王之寶)라고 새겨진 인장이 찍혀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태종이 길길이 뛴 이유
태종이 누구인가. 이복동생(방석·방번)을 죽이고, 동복형(방간)까지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절대군주였다. 그런 그가 서경제도를 곱게 볼 리 없었지만 그래도 재위 13년까지는 모든 관리(1~9품)의 서경제도가 존속됐다. 그런데 1413년(태종 13년) 대간들이 박자청(지의정부사·정2품)과 장주(호군·정4품) 등 새롭게 임명된 관리들의 서경을 줄줄이 거부하자 태종이 폭발했다. 태종은 사간원 헌납(정5품) 은여림을 불러 서경이 거부된 이유를 물었다. 특히 박자청과 장주 관련 일화가 기가 막히다.
“박자청(1377~1423)의 서경은 왜 거부했는고?”(태종) “(박자청이) 척석(擲石·투석전)놀이를 하고 현직관리를 구타했으니 어찌 재상감이 되겠습니까.(은여림) “그래도 (문묘 및 궁궐, 왕릉공사에) 공이 많아 재상으로 발탁한 것이니 빨리 서경하라.”(태종) “그렇게 공이 많으면 상으로 전백(錢帛·금전과 베)을 주고 (재상이 아닌) 다른 관직을 제수하면 될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성상께서 강요한다면 어쩔 수 없이 명은 따르겠습니다.”(은여림)
태종은 이 말에 무척 빈정이 상해서 “내가 이렇게 청하고 애걸한 뒤에야 너희가 생색을 내는 거냐”고 어이없어 했다. 사간원은 태종의 재촉에 마지못해 서경(임명장에 사인)해 주었다. 하지만 기생첩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서경을 거부했던 호군 장주의 임명장 말미에는 이렇게 사족을 달았다. ‘4품에 한함(限四品)’.
임금의 성화에 할 수 없이 임명장에 사인해주기는 하지만 앞으로 장주가 올라갈 수 있는 품계는 ‘4품으로 제한한다’는 낙인이었다. ‘한사품(限四品)’의 글귀를 본 태종이 길길이 뛰었다.
“관작(官爵)은 임금의 권한이다. 어디 신하가 멋대로 ‘몇 품까지만 허용된다’고 ‘한품(限品)’을 쓰느냐.”
‘한품’은 문자 그대로 일정한 품계 이상은 올라갈 수 없다는 조건부 서명이었다. 또 하자는 있지만 불가피하게 서명을 해야 할 대상자에게는 ‘정조외(正曹外)’라는 세글자를 썼다. ‘정조외’는 다른 관직은 괜찮지만 의정부·사헌부·사간원·홍문관·예문관 등 청요직에는 진출할 수 없다는 이 역시 ‘조건부 승인’이었다. 그러나 아예 부적격자일 경우에는 ‘작불납(作不納)’이라고 써서 이조에 돌려보냈다.
조선시대 때는 임금이 관리를 임명할 때 사헌부와 사간원의 동의를 거쳐야 비로소 정식으로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을 서경(署經)이라 한다. 선조 때 청난 및 호성공신이 된 신경행(1559~1623년)은 사후 200여 년 뒤 ‘충익공’으로 추증됐다. 이 문서는 신경행의 시호를 ‘충익’으로 정한다는 순조 임금의 명에 대해 사헌부가 이른바 ‘임명동의’를 해준 것이다. 이것이 <시호서경>(보물 1380호)이다.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비위인사를 대사헌·병조판서로 임명한 세종
각설하고 임금이 발동한 인사에 ‘한품’이라는 조건부 서명을 본 태종은 가만 있지 않았다. 결국 ‘5품 이하의 관리’로 대간들의 서경권을 축소하고 만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이 만고의 성군 답게 다시 서경을 전 품계(1~9품)로 복원했다.(1426년·세종 8년 3월 16일) 그런데 6개월 동안 4품 이상 고위관료 6명의 서경이 거부됐다. 세종은 특히 3월15일 각종 비위혐의에도 불구하고 선왕(태종) 시절부터 문제인사로 찍힌 이발(1372~1426)을 병조판서로 임명했다.
이것은 세종 답지않은 이해할 수 없는 난맥인사였다. 이발은 선왕 때인 1417년(태종 17년) 중국 사행(使行) 때 사사로이 포물(布物)을 대량으로 가져가 내다팔아 외교적 망신을 산 인물이었다. 선왕 때도 이런 이발을 대사헌으로 발탁하려 했다가 좌절돤 바 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도 이발을 대사헌으로 다시 임명했다가 사헌부 관리들의 집단항명(출근거부투쟁)으로 철회한 바 있다.(1420년) 그런 세종이 6년 뒤인 1426년 이발을 다시 슬그머니 병조판서로 임명한 것이다. 그러자 사간원은 고유의 서경권을 발동, 거부권을 행사했다. 세종은 “과인에게 이발은 꼭 필요한 인물이니 빨리 임명장에 서명하라”고 재촉했지만 사간원은 “법에 의한 적당한 거부권 행사”라고 버텼다. 결국 세종은 단 6개월만인 9월4일 다시 서경 대상을 ‘5품 이하’로 원위치 시켰다. 서경은 계유정란(1453년)으로 정권을 잡은 세조 연간에 ‘국정운영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무력화시켰다가 세조 사후에 복구됐다.
사망한 호조판서 윤탁연(1538~1594)의 시호를 헌민공으로 정하는 임명장에 서명한 사헌부의 서경문서.|국사편찬위원회
■신임 수령의 마지막 관문
이렇게 우여곡절 속에서도 존속한 서경 제도와 함께 지방 수령으로 부임하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거쳐야 할 관문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모두에서 언급한 ‘역사’(참알·당참) 제도였다. 의정부와 인사담당 부서인 이조(문관)·병조(무관)를 돌며 부임인사를 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 ‘역사’는 단순한 부임인사가 아니었다. 지방수령으로 떠나는 자가 과연 적합한 인물인지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절차였다. 예컨대 1735년(영조 11년) 12월5일 좌의정 김재로(1682~1759)는 해남현감으로 발령받아 역사(부임인사)하러 온 오석종을 보고는 “아직 부임하지 말라”고 제동을 걸었다. 가장 북쪽인 함경도 회령 출신인 오석종을 가장 남쪽인 전남 해남 현감으로 발령내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게 김재로의 의견이었다. 원래 회령 출신인 오석종을 천거한 어사 이종백(1699~1759)였는데, 인사담당 부서인 이조에서 그렇게 천거된 오석종을 전남 해남현감으로 제수한 것이다. 김재로의 막판 제동에 의해 오석종의 부임은 보류되고 말았다.
1771년(영조 47년) 7월8일 정의(남제주)현감이 된 하용주라는 인물은 역사 때 “출신이 비천한데다 인사철마다 추잡한 구설수에 올랐으니 이번에는 자진사퇴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하용주는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사퇴를 권고한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무마하고자 했다. 이에 영조는 “이런 인물을 관리로 임용할 수 없다”면서 “이조에게 다시는 이 인물을 추천하지 말도록 하라고 단단이 일러두라”는 명을 내렸다.
■‘서얼의 소생’ 아내를 바꿔라
서경이든 역사(참알·당참)이든 원래의 취지와 달리 역기능과 폐해가 나타났다.
우선 서경을 보자. 서경은 주로 ‘세계(世系·혈통 및 가문)’와 ‘품행’의 기준을 적용했다. 그랬으니 신분제 질서 고수와 당쟁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단적인 예로 1413년(태종 13년) 태종이 참찬의정부사(정2품) 유정현의 서경이 거부된 이유를 묻자 사간원 헌납 은여림은 “유정현의 부인 이씨가 서얼의 소생이기 때문”이라 대답했다. 은여림의 첨언이 기가 막힌다.
“유정현은 지난번에도 전하의 특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경했습니다. 그런데도 유정현이 그 아내를 버리지 않았기에 이번에 또다시 서경하지 안했습니다.”
관리로서 출세하려면 서얼의 소생인 아내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니 얼마나 어이없는 발상이란 말인가. 서경이 신분제 질서를 고수하는 방편으로 활용됐음을 알려준다. 서경은 정적을 배척하는데 활용되기도 했다.
임금의 잘못을 간언하는 사간원 관리들의 친목모임을 그린 <미원계회도>(보물868호). 1540년 열린 이 계모임에는 이황, 유인숙, 이명기, 나세찬, 이영현 등이 참석했고 성세창의 시문이 적혀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부임인사가 웬말인가”
역사(참알·당참)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신임 수령이 각 부서에 돌 때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대면 인사였기에 사이가 좋지 못한 경우엔 종종 마찰이 생겼다. 시간이 흐르면 의정부 및 이·병조 뿐 아니라 다른 부서에까지 역사를 해야 했던 모양이다. 1700년(숙종 26년) 2월3일 전남 장흥부의 지방관으로 발령받은 채이장의 예가 단적이다. 역사(부임인사)를 위해 공조참의(정3품) 윤덕준(1658~1717)을 찾아간 채이장은 매우 불손한 태도로 “왜 내 앞길을 가로막았냐”고 따졌다. 애초에 공조판서가 채이장을 절도사로 천거했는데, 공조참의 윤덕준이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좌절됐다는 것이다. 채이장은 그 때문에 ‘꽁’하고 있다가 역사 때 폭발한 것이다. 1731년(영조 7년) 1월28일 황해수사(수군절도사)로 임명된 남덕하(1688~1742)가 군영대장 이삼(1677~1735)에게 역사의 예를 거행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은 물론 유배형의 처벌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남덕하는 1728년 일어난 무신난(이인좌의 난)에서 반란군에게 피살된 남연년(1653~1728)의 손자였다. 그런데 남덕하는 무신난 때 훈련대장이던 이삼이 반란군과 한 패라고 믿고 있었다. 그랬으니 남덕하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역사, 즉 부임인사를 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삼을 무신난 진압의 공신으로 여기고 있던 영조는 역사를 거부한 남덕하에게 ‘공신을 배척하는 속좁은 인사’라며 파직은 물론이고 유배형까지 내렸다. 하지만 <영조실록> 사관은 “남덕하가 이삼을 원수로 여겨 (역사를) 피한 것 뿐인데 그것으로 벌을 내렸는지 알 수 없다”고 영조를 비판했다. 오해가 됐든 아니든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원수로 여겨 만나고 싶지 않고, 인사도 안한다는데 어느 누가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말이냐는 것이다.
조선 중기의 시인인 권필(1569~1612)의 예가 특기할만 하다. 천성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했던 권필을 위해 동료들은 ‘동몽교관’(어린이 교육을 담당한 종9품 관직)으로 추천했다. 규례에 따르면 동몽교관은 관복차림으로 담당관청(예조)에 출석해서 상관들에게 인사하는 ‘역사’의 예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권필은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고작 몇 되 몇 말의 쌀을 얻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은 평소의 지론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금품수수의 온상으로 전락한 역사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부임인사의 절차인 역사 때 금품을 수수하는 관행이 생겼기 때문이다. 예컨대 1485년(성종 16년) 12월30일 성종은 “최근들어 새로 임명된 수령이나 만호(지방 무관직)의 참알 때 공공연히 예물을 요구한다”고 비판한다. 신임 수령과 만호가 금품을 제공할 수 없을 때 더욱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즉 이들이 경저인(지방 수령이 조정과의 업무협의를 위해 서울에 파견한 아전 혹은 향리)을 재촉해서 참알 비용을 빌려 바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끄고는 현지에 부임해서 관물(지방 관청 소유의 물건)로 갚는 관행이 퍼졌다. 물론 참알 비용을 대납해준 경저인이 훗날 몇배의 이자를 붙여 받아내기도 했다. 어떤 경우든 지역주민들에 대한 착취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폐단은 조선 말까지 이어진다. 1865년(고종 2년)에 작성된 ‘충청수영관첩’을 보면 “지방 수령이 자주 갈리는 고을은 1년 안에 금품을 납부하는 일이 3~4차례나 된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아예 해마다 일정액을 납부하는 것으로 규정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지배층의 청렴을 유지한 제도
그러나 군주의 인사권을 침해하고, 숱한 폐단까지 야기했던 서경은 물론 역사 제도까지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단적인 예로 부침을 거듭했다가 세조 연간에 일시에 무력화됐던 서경제도는 1470년(성종 1년) 다시 복원됐다. 역사제도도 마찬가지였다. 1769년(영조 45년) 11월7일 비국당상(비변사 당상관) 민백홍이 “역사(부임인사)하러 온 지방수령의 인물됨이 가볍다”며 부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조는 “누구 맘대로 부임을 막느냐”면서 민백홍을 옥에 가두고는 그 참에 역사 제도를 폐지했다. 그러나 2년 뒤인 1771년(영조 47년) 사간원 정언 한광근이 “역사를 싫어하는 교만한 자들에게 벌을 내려 기강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상소하자 영조는 “뜻이 매우 가상하다”며 수용했다. 이 대목에서 1470년(성종 1년) 3월4일 성종 연간에 서경제도의 복원을 촉구하는 이조의 상소문이 심금을 울린다.
“서경의 법에 따라 관리 임명의 잘잘못을 살필 수 있고, 조금이라도 결점이 있으면 거부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사류(士類·지배층)가 그런 평가를 두려워하고, 그른 짓을 부끄러워 하게 됩니다.”(<성종실록>)
서경과 역사는 바로 조선의 지배층, 즉 관료조직의 건강성과 청렴성을 유지하고 기강을 바로잡는데 일정하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하급관리의 인사까지 철저 검증하려 했던 흔적이었음을…. 김문웅씨가 공개한 ‘역사기’는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조선 시대 인사행정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곱씹어볼 수 있는 희귀한 기록문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송웅섭, ‘조선초기 서경제 운영에 대한 검토’, <한국학연구> 제49집,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2018
박소희, ‘조선 중종연간 인사제도 분석-고신서경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72,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2019
박승용, ‘서경과 인사청문회’, <한국행정학회 학술발표논문집> 한국행정학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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