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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13)매소성 대첩 현장에서(하)

2007년 5월 어느 날.

기자는 연천 대전리 산성을 찾았다. 강성문 육사 명예교수와 이우형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이 동행했다. 산성에 올라보니 과연 요처였다. 한탄강 줄기를 건너 그 유명한 경원선 철도와 3번 국도가 통하는…. 멀리 전차부대의 진로를 막는 용치(龍齒·전차부대 전진을 막는 인공요철)가 길게 설치돼 있다.


전곡의 넓은 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산성 곳곳에는 군진지가 설치돼있다. 옛 산성의 흔적은 거의 대부분 무너져있고, 조각조각 삼국시대 기와·토기편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군인들의 성지

한 30분이 흘렀을까. 답사차 이곳을 찾은 국방대학원 학생들과 맞닥트렸다. 보훈처장을 지낸 안주섭씨(예비역 육군중장)와 허남성·노영구 국방대학원 교수가 이끄는 학생들이었다. 전사(戰史)의 측면에서 매소성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나라군 20만을 궤멸시킨 매소성(買肖城·혹은 매초성) 전투. 외세를 몰아낸, 그래서 역사에 길이 남을 대첩으로 기록될 전투지만 여전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가 많다.

아주 근본적인 질문 하나. 삼국사기는 “675년 당 이근행군이 20만군을 이끌고 매소성에 주둔했는데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쫓고 말 3만380필을 얻었으며 그와 비슷한 수의 병기를 얻었다(我軍擊走之 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 其餘兵仗稱是)”고 기록했다.

그런데 중국측 자료, 즉 ‘신당서’와 ‘자치통감’은 정반대로 신라가 패배한 것으로 기록했다. 또한 ‘구당서’는 매소성 전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중원의 제국 당나라의 패배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가능성이 짙다.

또다른 역사왜곡?

당나라는 매소성 전투가 일어난 이듬해(676년 2월)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옮긴다. 매소성 전투에서 치명타를 얻어맞은 당나라의 퇴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매소성 전투에 대해 최초의 기록인 구당서에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충격적인 패배를 당대의 기록에는 빼고 오히려 후대의 역사서(신당서와 자치통감)에 조작하여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요즘의 동북공정 같은 역사왜곡인가.

다른 질문 하나. 당군 20만을 깬 것과 관련, 삼국사기 기록은 가시 하나가 목에 걸린 듯 개운치 않다. “신라군이 당나라군 20만명을 ‘쫓았다’”고만 표현했을 뿐 사상자가 몇명인지, 전과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왜일까.

이 때문에 20만명이라는 숫자가 과장이 아닐까 보는 이들도 있다. 나·당전쟁을 위해 672년 평양에 도착했을 때의 당군 숫자는 당나라 기병 1만명과 말갈·거란병 등 3만명 등 모두 4만명이었다. 그런데 이후에는 증원군 파견기록이 없다. 당나라가 고구려·백제 유민과 신라포로병을 동원할 수 있지만 20만명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따라서 당군 20만명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3만~4만명 선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전사에 정통한 윤일영 예비역장군은 “당군 20만명 동원은 있을 수 있는 얘기”라고 분석한다.

“전투병력뿐 아니라 보급병력과 동원된 일꾼까지를 모두 계산한 숫자가 20만명 아닐까요. 신라는 아마도 당나라의 보급로를 끊어 대승을 거두었을 겁니다.”

매소성의 0순위는?

또다른 의문점은 과연 그 유명한 매소성의 현재 위치는 어디일까 하는 것이다. 대전리 산성을 찾은 기자와 국방대학원 학생들은 양주 대모산성으로 향했다. 대모산성 역시 유력한 매소성 후보지이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시절 ‘이곳이 매소성’이라고 비정하여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당시 최영희·김철준 선생 등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들은 연천 대전리 산성을 답사하고 나서 “매소성 후보 0순위는 대모산성이 아니라 대전리 산성일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학계 주류도 바로 매소성=대전리 산성 가능성을 가장 높이 치고 있다. 대전리 산성이 자리잡고 있는 한탄강 유역은 천혜의 방어요새이다. 두말할 나위없이 전곡읍 지역에서 한탄강을 도하하여 남하하는 세력을 한눈에 보면서 저지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하나 나·당전쟁의 최대 분수령은 임진강·한탄강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전투였다.

중요한 칠중성 전투가 벌어졌고, 그 이후 당군이 말갈·거란군까지 동원해서 침략을 획책하자 신라는 9군을 출동시킨다. 적(당)의 남하를 막으려면 임진강·한탄강을 막아야 했기에 신라·당나라 간 피어린 싸움이 벌어진 곳은 바로 이곳 대전리 산성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5개년 계획으로 진행된 양주 대모산성 발굴 결과 매소성임을 입증할 자료가 없다는 점도 대전리 산성 가능성을 높인다.

하지만 대모산성=매소성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윤일영씨는 “675년 2월 칠중성(파주)에서 전투를 벌인 당나라군이 왜 게걸음 하듯 옆으로 빠져 대전리 산성(연천)에서 싸웠겠느냐”고 반문한다. 신라가 전투병력과 보급부대 등 20만명을 동원한 당나라군을 양동작전으로 격퇴시켰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매소성(대모산성)에서 당나라 군을 묶어두고는 고읍리 평지와, 그리고 보급부대가 주둔했을 칠중성 인근과 감악산 일대를 동시에 쳐서 당군을 혼란에 빠뜨렸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낯 부끄러운 현장

알다가도 모를 일은 왜 현장에는 매소성 전투에 대한 명문 하나가 없는 것인지…. 작은 시설물 하나를 세우더라도 군수이름에, 이장이름, 일꾼 이름까지 줄줄이 새겨넣는 마당인데….

당군 20만을 깬 불멸의 전적지인데 문무왕을 비롯한 신라인들은 승전기록을 새긴 비석 하나쯤은 세워놓지 않았을까. 못 찾는 것일까, 아니면 정녕 없는 것일까. 기자 또한 무너져버린 대전리 산성과 대모산성 주변을 홀린 듯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역부족.

매소성 대첩을 이룬 지 1332년이 흐른 2007년 5월. 두 성 가운데 어느 성이 매소성이든 그걸 밝히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현장을 목도하면 끔찍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다 허물어진 대전리 산성. 참을 수 없는 절망감이 가슴을 찌른다. 대모산성은 어떻고…. 성벽은 일부 잘 남아있지만 방치된 상태. 성벽 틈에서 자란 큼지막한 나무가 막 벽을 째고 나올 태세다. 아프다.

우리는 늘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비에 젖고 이끼가 잔뜩 묻은 1300년전 토기·기와편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연천·양주에서/이기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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