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
ㆍ향토사학회가 발견한 ‘충청도의 광개토대왕비’
“중원 고구려비를 말할 때 절대 잊어서는 안될 사람들이 있어요.”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이 지목한 사람들은 바로 ‘예성동호회’라는 향토연구회 사람들이다.
“이 분들이 아니었다면 그 중요한 국보(중원 고구려비·국보 205호)와 보물(봉황리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찾지 못했을 거야. 그뿐인가. 고려 광종이 954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를 기려 지은 숭선사의 위치를 알려주는 명문도 확인했잖아.”
예성동호회라. 이 모임은 1978년 당시 충주지청 유창종 검사와 장준식 현 충청대 교수 등이 만들었다.
■ 예성동호회의 개가
당시에는 문화재 축에도 끼지 못했던 기와를 주우러 다녔고, 모임의 이름도 없었다. 그러나 1979년 9월5일 답사팀이 어느 식당에서 디딤돌로 사용하던 돌에서 연꽃무늬를 발견했다. 답사팀은 “고려 충렬왕 3년 충주성을 개축하면서 성벽에 이 연꽃을 조각했다 해서 꽃술 예(蘂)자를 써서 충주를 예성(蘂城)으로 일컬었다”는 고려사 기록을 떠올렸다. 이 돌은 충렬왕 당시 성을 쌓을 때 사용한 신방석(信防石·일종의 주춧돌)이었던 것이다.
향토연구회인 ‘예성동호회’가 기념사진이나 찍으려고 모여 중원 가금면을 답사하던 중 발견한 중원 고구려비. <중원 | 이기환 선임기자>
이듬해인 79년 2월24일. 예성동호회는 ‘아주 특별한’ 답사길에 올랐다. 동호회 창립의 산파역을 맡은 유창종 검사가 3월2일자로 의정부지청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십 수 차례 답사를 다녔어도 우리끼리 사진 한 장 못찍었어요. 유물, 유적 사진찍기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랬죠. 그래서 이 기회에 기념사진이라도 찍자고 해서 모였습니다.”
기념사진만 찍을 수는 없는 일. 중앙탑(국보 6호) 부근을 답사하면서 기념촬영을 했고, 내친김에 중원 가금면 하구암리 묘곡에 있는 석불입상과 석재부재를 조사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답사단을 태운 차가 중앙탑을 지나 입석(立石)마을을 지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충북도청 소속 공무원이었던 김예식씨(작고)가 자동차를 세웠다.
“잠깐만요. 저기 (입석마을의) 저 돌 보이시죠. 저 돌 때문에 입석마을이라 하는데 한번 보고 가시죠. 일전에 제가 보았을 때는 백비(白碑·비문의 내용을 새기지 않은 비석) 같았는데….”
일행이 우르르 내려 비석을 살펴보았다. 눈을 비벼가며 비석을 살펴보는 순간 “아!”하는 감탄사들이 일제히 터졌다. 눈에 불을 켜고 손으로 더듬어보니 삼면에 글자가 빽빽이 새겨지 있지 않은가.
“분명 國, 守, 土, 大자 같은 글자는 읽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안성(安城)이라는 글자를 읽었는데,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어요. 충북에 무슨 경기도 안성? 그런데 이 ‘안성(安城)’은 나중에 고모루성(古牟婁城·고구려성)이었는데, 당시엔 안성으로 읽었던 거죠.”(장준식 교수)
■ 칠전팔기의 상징?
하지만 동호회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사실 마을에서도 이 비석에 대한 두가지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1979년 2월24일,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석비를 읽어내려 가고 있는 장준식(가운데) 등 예성동호회원들.
즉 먼저 조선 숙종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에 사는 전의(全義) 이씨 문중에게 두 개의 돌기둥(石柱)을 기준으로 그 안쪽의 산과 밭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이 마을 사람의 18대 조상(15세기)이 경상감사를 하다가 순직해서 유해를 남한강으로 운구하는 도중에 이곳 부근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이곳 하구암리 통점산에 산소를 정하고 그 분의 공적을 기려 땅을 하사하면서 이 문제의 입석을 포함해서 3개의 돌기둥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이다.
1972년 대홍수 때는 입석마을이 온통 물에 잠겼고 이 비석도 쓰러졌다. 그러나 마을청년들이 ‘칠전팔기(七顚八起)의 마을’이라는 구호비를 세우고는 바로 그 옆에 쓰러졌던 비석을 다시 세워 마을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러니 비석은 그저 토지경계비일 뿐이고, 그래봤자 조선시대 비석인데, 무엇이 그리 중요할까 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었다.
과연 그럴까. 김예식 등 일부 회원들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혹시 진흥왕순수비류의 중요한 비석일 수도 있다는…. 김예식은 그 해(1979년) ‘예성문화(蘂城文化)’ 창간호에 ‘중원고구려비 발견경위’를 생생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중원고구려비 발견과 관련해서는 가장 핵심적인 자료일 수밖에 없다. 그의 글을 인용해보자.
“(2년 전인) 1977년 동국대 황수영 박사께서 충주를 방문하셨다. 황 박사님은 ‘충주에서 진흥왕순수비류가 발견되어야 하는데, 만약 고비(古碑)가 발견되면 꼭 연락해달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황 교수는 충주 일대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 지역에서 진흥왕순수비 같은 비석이 나올 것이라 예측한 바 있다. 역시 그의 예견대로 1년 뒤인 1978년 단양에서 진흥왕대에 세워진 신라 적성비가 발견된다.(경향신문 9월6일자 참조)
이는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기 1년 전의 일이다. 어떻든 김예식은 황 교수의 이야기가 늘 귓전을 맴돌았다. 그랬기에 입석마을 비문을 예사롭게 보지 않은 것이다.
“진홍섭 박사의 논문 등을 보고 삼국시대 고비(古碑)에 대한 지식을 쌓고 있었다. 그런 지식을 토대로 이 비석이 고식(古式)의 풍취를 안고 있었다. 또 조선시대 것이면 어떠랴. 비문을 읽을 수 있다면 당대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한달이 지난 3월말. 황수영 교수가 일본학자들과 함께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역시 1978년 예성동호회가 찾았다)을 답사하러 온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문화재관리국이 중원군 문화공보실장이던 김예식에게 안내를 부탁한 것이다.
“정말 잘된 일이네. 이 참에 문제의 비석을 한번 보여드려야지.”
예성동호회 차원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미칠 것 같은 궁금증을 풀 절호의 기회였으니…. 약속날짜는 4월5일 식목일이었다.
■ 진흥대왕의 현신?
4월5일 낮 12시. 황수영 교수는 일본인 학자 2명, 그리고 정영호 단국대 교수와 동행했다. 황 교수가 석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 제자인 정영호 교수에게 연락하여 “함께 가보자”고 한 것이다.
황수영 교수의 원래 방문 목적은 일본인 학자와 봉황리 마애불상군을 답사하는 것. 하지만 김예식은 마음이 급했다.
“황 박사님을 우선 가금면 입석마을로 모시고 갔어요. 비석을 한바퀴 돌아보시는 그 분의 표정이 심상치 않더군요.”
친견이 끝나자 김예식은 황수영 교수와 일인 학자들을 안내, 원래의 목적지인 마애불상군이 있는 봉황리로 떠났다. 문제의 비석은 정영호 교수와 예성동호회의 이노영 회원 등이 남아 탁본하기로 했다. 김예식이 봉황리 답사 도중에 황수영 교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 선생님, 석비 어떻게 보셨나요.”
“글쎄요. 진흥왕순수비류의 고비(古碑) 같은데…. 아무튼 내 마음은 온통 그 편에 가 있군요.”
황수영 교수 역시 일본인 학자와의 봉황리 답사는 뒷전이고, 온통 그 비석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따라 일본학자들이 얼마나 세밀하게 봉황리 마애불상을 조사하던지…. 마음은 콩밭에 가있고…. 안절부절 못했습니다.”(김예식)
그날 오후, 예성동호회는 황수영 교수 일행에게 차 한잔을 대접하기 위해 충주의 ‘山다실’에 들렀다.
“우리는 다방에서 정영호 교수가 입석리 비석에서 해온 탁본 1장을 펴서 다방 실내 장식용 병풍에 걸었습니다. 정영호 교수는 탁본 1장을 일행에게 주고는 친지를 만난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 글쎄,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 대왕(大王), 국(國), 태자(太子) 같은 글자가 읽히지 않는가. 황수영 교수와 일인학자 둘, 예성동호회 김풍식, 장기덕, 최영익, 이노영, 허인욱과 김예식 등 9명은 흥분감에 몸을 떨었다.
“어! 진흥대왕(眞興大王)?”
석비 전면 맨 앞줄에 “○○大王”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대왕”을 “진흥대왕(眞興大王)”으로 오독한 것이다.
“그랬을 거야. 진흥왕 순수비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모두들 선입견을 갖고 있었으니 진흥으로 볼 수밖에 없었겠지.”(조유전 관장)
어떻든 당시 황수영 교수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아! 나는 혈압이 높아 흥분하면 안되는데….”
황 교수는 거듭 차를 청했다.
“이 석비는 분명 진흥왕순수비의 유(類)가 틀림없다!”
일행이 나름대로의 식견으로 석비를 읽고 있는데, 친지를 만나러 간 정영호 교수가 다방에 들어섰다. 그날 석비를 탁본한 정 교수는 이미 이 석비의 글자와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정 선생(정영호 교수), 바로 조사에 착수해야지.”(황수영 교수)
“아니 선생님께서….”(정영호 교수)
“아니야. 충청북도는 정 선생(단국대)이 계속 조사했으니까. 정 선생이 해!”
“예, 그럼 선생님 하명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스승은 제자가 충청북도 조사를 전담하다시피한 것을 알고 단국대가 조사해야 한다고 ‘지시’한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 “웬 고구려 지명·관직?”
그때가 1979년 4월5일 오후 5시 무렵이었다. 조사는 시급을 다퉜다. 7일,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석비의 이끼를 걷어냈다.
이윽고 이튿날인 8일 아침, 정식조사를 위한 고유제가 끝날 무렵 한 여인이 달려와 “예배를 해야 한다”고 거듭 요청하는 것이 아닌가. 정순택(당시 57)이라는 여인이었다. 시할아버지부터 3대째 이 석비에 기도해왔는데, 그 여인도 여기서 기도한 뒤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었다. 그 아들이 당시 영남대 졸업반이었다.
“바로 이렇게 이 석비가 마을의 표상으로 치성을 드리는 대상이었으니 온전하게 남아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모두 입석마을 사람들의 공이다.”(정영호 교수)
본격적인 석문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몇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前部大使者’ ‘諸位’ ‘下部’ ‘使者’ 등 고구려 관직명이 주로 보이는 게 아닌가. 특히 처음에 안성(安城)으로 오독했던 글자가 자세히 보니 고모루성(古牟婁城)이 분명했다. 고모루성이면 바로 광개토대왕비문에 보이는 바로 그 성의 이름이 아닌가. 고구려 관직명과 고구려성 이름이 보이는데 고구려라는 명문은 보이지 않고….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때 서울에서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김광수 당시 건국대 교수가 탁본을 보더니 대번에 말했다.
“이건 고려(高麗)네.”
이것이 선입견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진흥왕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진흥대왕(眞興大王)’으로 읽었던 것이었는데…. 선입견이 없던 김 교수가 그걸 고려(高麗)로 바로잡은 것이다.
“지방의 향토연구모임이 발견한 고구려 비 때문에 학계가 난리가 났지. 충북지역에서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한 고구려 석비가 발견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조유전 관장)
<중원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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