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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14)국보 205호 중원고구려비 下

중원 | 이기환선임기자

ㆍ돌에 새겨진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옛 기록을 보면 의미심장한 일화가 많아요.”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이 빛바랜 책을 하나 건넨다. 1979년 중원고구려비 발견 직후 단국대가 만든 학술지 ‘사학지(史學志) 제13집’이다. 당대를 풍미했던 학계원로들의 발표논문이 수록돼 있다. 30년 남짓 지난 지금, 당시의 논문들을 능가할 만한 연구가 진전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기자의 눈에 띈 것은 1979년 6월9일 7시간 동안 펼쳐진 중원고구려비 학술좌담회 내용이다.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입석마을의 중원 고구려비 전각. 관광객들이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를 살펴보고 있다.


“대박사는 없고 소박사만 왔나봐”

이병도·이기백·변태섭·임창순·김철준·김광수·진홍섭·최영희·황수영·정영호 등 학자들이 막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문을 해독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잘 보이지도 않는 글자와, 잘 연결되지 않은 문장을 두고 고뇌에 찬 해석을 하고, 또 다른 이와 열띤 논쟁을 벌여 붉어진 학자들의 얼굴이 빛 바랜 책갈피에 그대로 투영된다. 그것이 바로 역사 기록인 것을…. 그래서 기록이 중요한 것을….

“그래도 바로 전 해(1978년) 발견한 단양 적성비의 경우 해석은 어려웠다지만 새겨진 글자들을 읽기는 쉬웠어요. 그런데 중원 고구려 비문의 경우 워낙 마모가 심해 비석 정면 부분은 50%만 확실했으니…. 문맥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은 25%정도였다지.”(조 관장)

79년 당시 좌담회 사회를 본 차문섭 교수(단국대)의 재미나는 ‘소박사·대박사’ 발언. 

“현장에서 저희(조사단)의 해석이 워낙 설왕설래하니까 마을사람들이 그럽디다. ‘아직까지 대박사(大博士)님들이 안왔나보다. 이 소박사(小博士)들은 (해석이) 잘 안되나보다’하고…. 우리가 대박사(大博士) 못 되어서 완전히 해독할 수 없나봅니다.”

참석자들이 이 대목에서 논쟁의 열기를 식히고는 박장대소했다. 이번엔 두계 이병도 박사가 ‘꿈의 계시론’을 개진한다.

“내가 우스운 얘기를 할게요. 비문 첫 꼭대기에 액전(제목)이 있는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꿈에 ‘건흥(建興)’ 두 글자가 나타났단 말이야. 아! 그래 눈이 번쩍 띄어가지고 전등불을 켜고 옆에 있던 (중원 고구려비문) 탁본과 사진을 보니까 그 글자가 나온다 말씀이에요. ‘建興’ 두글자는 (고구려 장수왕의) 연호가 틀림없어요.”

또 이번에는 조사단을 이끈 정영호 교수(단국대)의 ‘플래시와 햇빛’ 발언. 

“두계 선생님 말씀대로 탁본을 보니 정말 건흥사년(建興四年)인 것 같아요. (현장에서) 새벽 4시, 5시면 일어나 비문을 플래시로 비추어보면 그것이 그럴 듯하면서도 그렇지도 않고요. (나중에) 또 창고문을 열고 햇빛을 비추어가면서 보면 글자가 또 달라져요. 광선에 따라서…. 하루에 두 자, 석 자 읽어내는 것이 어떻게 힘이 드는지….”

그랬다. 우연히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는 이렇듯 여전히 숱한 숙제를 안긴 채 지금도 오롯이 그 현장에 서있다. 비문의 내용과 관련, 백인백색의 주장들이 난무하니 완벽한 해석은 역불급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비문을 작성할 무렵의 고구려·신라의 주종관계다. 이기백 당시 서강대 교수의 해석을 보자. 

“고려왕은 신라왕과 형제의 관계를 맺는다”

‘高麗大王○○○○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라는 대목이 이를 웅변해준다. 즉 “고려왕은 신라매금(왕)과 오래도록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이니 말이다. 

또 하나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해서 고구려왕이 신라왕(매금)을 오랑캐의 뜻인 ‘동이’로 지칭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이것은 고구려가 스스로를 천자국의 입장에서 신라를 주변국으로 폄훼한 것이다. ‘동이매금지의복(東夷寐錦之衣服)’과 ‘상하의복(上下衣服)’, ‘대위제위상하의복(大位諸位上下衣服)’이라 해서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대목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기백 교수가 주목한 것은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관작(官爵)과 함께 의복을 받았다는 위서(魏書·고구려전)와 삼국사기(문자명왕조와 안원왕조)였지. 이것으로 봐도 고구려가 신라의 종주국 행세를 했다는 뜻이지.”(조 관장)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고구려군의 신라주둔과 관련된 대목이다. 즉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신라 영토 내에 있는 고구려 당주(고구려 군부대의 지휘관)’라는 뜻이다. 자, 이쯤해서 비문이 세워질 무렵의 그 뜨겁고, 폭발적이었던 한반도로 돌아가보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와 신라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신라 자비왕) 때 이미 친선(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대에는 신라가 왕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는 예속관계가 이어졌다. 

즉 광개토대왕 2년(내물왕 37년·392년) 신라 왕족 실성(實聖·훗날 실성왕으로 등극)이 고구려 인질로 떠났다. 401년 귀국해서 승하한 내물왕의 후계자가 된 신라 실성왕은 412년 내물왕의 아들 복호(卜好)를 인질로 보낸 바 있다.

또한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10년(400년) 신라가 왜구의 침입을 받자 고구려는 5만 보기병을 파견, 왜병을 구축(驅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424년 장수왕 12년(눌지왕 8년)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교빙(交聘)의 예를 닦았다”(삼국사기)는 기록을 끝으로 고구려·신라의 우호관계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신라가 고구려의 예속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신라는 대신 백제의 손짓에 눈길을 준다. 433~434년 사이인 백제 비유왕(신라 눌지왕) 때 백제와 신라가 화친한다. 장수왕의 끊임없는 남침야욕에 백제와 신라가 연합전선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강대국(고구려)의 등쌀에서 벗어나고픈 신라가 기어이 일(?)을 저지른다.

450년(장수왕 38년·눌지왕 34년) 신라 하슬라(河瑟羅·강릉) 성주가 실직(悉直·삼척)에서 사냥하던 고구려 변장(邊將)을 습살(襲殺)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맞대매 하기는 역불급. 장수왕이 “대왕과 우호를 닦아 매우 기뻤는데 이 무슨 도리인가”하고 질타하고 공격해오자 눌지왕은 머리 숙여 사과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앙금은 본격적인 반목으로 바뀐다.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했고(454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자 신라가 백제를 돕는 일(455년)이 이어진다. 급기야 신라가 자국 내에 있던 고구려인을 살해한다.(464년·일본서기)

마침내 고구려가 백제 개로왕(재위 455~475년)을 죽이자(475년), 신라가 1만의 구원병을 파견했다. 하지만 이미 한성은 함락됐고, 고구려군은 물러간 뒤였다. 고구려는 481년(신라 소지왕 3년) 호명(狐鳴) 등 7개성을 빼앗고 다시 미질부(彌秩夫)로 진격했다.

정리하자면 381년 무렵부터 백제·신라가 손을 잡는 433년 전후까지 예속관계를 유지하다가 450년부터 극심한 반목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와 신라가 종주국-속국의 사이이던 450년 이전에는 건립됐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개로왕의 ‘생뚱맞은’ 출현

하지만 연대확정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변태섭 당시 서울대 교수는 비문에 나온 ‘오월중(五月中)’, ‘12월23일 갑인(十二月二十三日 甲寅)’, ‘신유년(辛酉年)’ 등을 주목했다. 우선 ‘신유년’의 간지는 420년(장수왕 9년)과 481년(장수왕 69년)에 해당됐다. 그런 다음 ‘12월23일 갑인’의 간지(干支)를 보자 449년(장수왕 37년)과 480년(장수왕 68년)이 나왔다.

“변 교수는 바로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지. 그러니까 비문의 내용 가운데 신라왕이 우벌성에 이르러 신라영토 내에 있는 중인(衆人)을 환급받은 날짜가 480년(갑인년) 12월23일의 일이고, 비문을 세운 것은 이듬해인 481년(신유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지.”(조 관장)

그러나 이 설(說) 또한 허점이 남아있다. 480~481년이면 고구려와 신라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지내는데 ‘영원토록 형제처럼 지낸다는 내용’은 무엇인가. 또하나 해석에 발목을 붙잡은 것은 비문 전면 말미에 나오는 ‘개로(盖盧)’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개로’를 백제 개로(盖鹵)왕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신라영토 내에 있는 고구려 당주(원래는 백제인이지만 고구려로 망명했던 자)가 백제왕 개로와 서로 공모하여 신라영토 내에서 사람들을 모집 동원했다(이병도 박사)”는 내용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것이다. 455년 왕위에 오른 백제 개로왕은 475년 장수왕의 공격에 그만 패사하고 만 인물이다. 그런데 만약 비문의 개로왕이 바로 그 백제 개로왕이라면 건립연대가 더욱 헷갈리는 것이다. 

중국학자 겅톄화(耿鐵華·퉁화 사범대교수)가 이를 토대로 상상력을 펼친다.

“개로왕이 신라 영토 내에서 공모하여 사람을 모집하려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475년 고구려의 침략을 받고 목이 잘린 것이 아닐까요.”

지난 2000년, 고구려연구회는 4박5일 동안 55명의 학자들을 동원, 중원고구려비문을 다시 석문했다. 그 결과 모두 19자의 새 글자를 확인하는 성과를 얻었다. 두 번의 국제학술대회를 거쳐 12편의 논문을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역불급인 듯싶다. ‘개로’가 백제왕의 이름이 아니라 고구려 관직이라는 설(이호영), 비문 중 ‘신라매금기~(新羅寐錦忌~)’에서 ‘기(忌)’자는 “신라왕이 고구려왕과의 만남을 기피(忌)했다는 뜻”이 아니라 신라왕, 즉 눌지왕의 이름(忌)라는 설(김창호), 그리고 처음에는 지명 혹은 군영으로 인식됐던 ‘궤영(궤營)’을 광개토대왕비문에 보이는 궤왕(궤王), 즉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표현이라는 주장(임기환) 등…. 비문 내용을 두고 이렇게 갖가지 설들이 난무하는 형편이다. 

건립연대도 마찬가지다. 비문의 간지를 통해 추정한 변태섭 교수의 481년설(장수왕 69년)이 그럴 듯해보이지만 421년설(장수왕 9년)과 449년 즈음설, 광개토대왕설(403·408년설), 문자왕 초기설(492년?) 등….


풍납토성이 고구려 것?

29년 전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들의 좌담회 회의록에서 읽어낸 대목 하나.

즉, 어느 학자가 “경기도 일대는 이미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의 수중으로 넘어갔다”면서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가 흙을 쪄서 성을 만든 판축토성을 쌓았다는데 바로 풍납리토성이 그렇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자 두계가 일축한다.

“그게 아니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항복을 받고 그냥 철수했어요. 당시 경기도 일대가 고구려 소유였다면 어떻게 백제의 수도가 한성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해석에 따라 우리네 고대사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음을 경고해주는 대목이다. 어쨌거나 30년이 지나도록 어느 향토답사모임에 의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중원 고구려비의 전모를 밝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해도 그 가치는 지대하다’고 한 금석학자 임창순 선생의 말은 전적으로 옳아요. 고구려의 금석이 신라 영역에서 확인됐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지.”(조 관장)

<중원 | 이기환선임기자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