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둥글고, 살은 통통하고…. 일제강점기인 1925년 무렵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흥미로운 불상이 전시되고 있었다. 돌로 만들었고, 앉아있는 형상의 미륵불이었다. 이름하여 석조미륵불의자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경주남산고적보고서인 <경주 남산의 불적>(1940)에는 “이 불상은 1924년 10월10일 경주 남산의 장창곡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경주 남산 장창곡에서 확인된 석조여래미륵삼존상. 동안의 모습이어서 ‘애기부처’라는 별명을 얻었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하지만 왜 이런 불상이 고분에서 출토됐겠는가. 발견된 불상 주변에 고분이 5~6구 흩어져있는데다 무너져내린 돌방(석실)에서 발견되었기에 ‘고분(돌방무덤) 출토’라 잘못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불상은 한 구가 아니었다. <경주 남산의 불적>은 “이미 원래 자리에서 벗어나 경주 내남면 월남리 민가가 숨겨 보관했던 협시보살 2구가 밝혀져 역시 박물관에 이전됐다”고 썼다. 무너진 돌방에서 발굴된 불상은 본존불이고, 민가에서 찾아낸 협시보살 2구는 이 본존불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불상이었다. 3구를 다 찾은 장창곡 불상에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이라는 정식 이름이 붙었다. 이 삼존상이 유명한 이유가 따로 있다. 

훼손 이전의 장창곡 삼존불 중 협시보살상. 그래도 10대 중반의 얼굴인 본존불에 비해 좌우협시보살상은 완전이 어린아이 모습이다.

귀엽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닮았다고 해서 ‘애기부처’ 혹은 ‘동안(童顔)의 미륵불’이라는 친숙한 별명을 얻었다. 불상 3구 모두 얼굴이 둥글고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으며 이목구비가 작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다. 그 중 본존불은 동안형의 모습이라지만 코와 턱의 길이가 좌우 협시보살보다 길어서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좌우협시보살은 4등신, 즉 어린아이의 신체비례를 그대로 표현한 동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미륵이 동자의 모습으로 변해 나타나는 예가 적지않다. 예컨대 “굶어죽은 15세 아이의 무덤을 파냈더니 돌미륵이었다”(<삼국유사> ‘탑상·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조)느니, “승려 진자가 만난 미목이 수려한 소년이 미륵선화로 화현했고, 진지왕은 이 소년을 화랑으로 삼았다”(<삼국유사>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느니 하는 기록이 있다. 아닌게 아니라 15~16살에 화랑이 된 사다함과 김유신, 관창은 신라의 삼한일통을 이룬 주역들이었다. 또한 <장자자경제경> <서동자경>, <보살서경> 등을 보면 미륵이 부처로부터 수기(受記)를 받고 출가하는 나이가 16세로 인식되었다. 

1924년 발견당시의 불상. 삼존불 중 본존불이다. 좌우협시상은 그 이전에 민가에 숨겨졌다가 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된바 있다. |<경주 남산의 불적>(1940년)에서

이렇듯 15~16세는 화랑이 되거나 미륵이 수기를 받는 아주 중요한 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연구자 가운데는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의 경우 본존불은 15~16세의 모습을 갖춘 미륵여래상으로, 좌우협시불은 그 본존불을 보좌하는 애기보살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또한 학계일각에서는 “644년(선덕여왕 13년) 승려 생의가 남산의 한 골짜기에서 돌미륵을 파내어 삼화령에 안치했고,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충담사가 해마다 두번씩 이 돌미륵에 차를 끓여 공양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이 삼존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삼존불을 두고 ‘삼화령 애기부처’이라고도 일컫는다. 그러나 원소재지로 추정되는 ‘삼화령’의 근거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협시보살 중 좌협시보살.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문화재청은 신라 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 중 하나로 꼽히는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등 5건을 보물로 지정예고했다고 30일 밝혔다.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박수희 연구관은 “이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은 현전하는 의좌상(倚坐像·의자에 앉은 자세) 불상 중 매우 드물고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삼존상의 크기는 본존불이 높이 167㎝ 정도이고, 좌협우협시상은 98~100㎝ 정도다. 이 의좌상 형식의 불상은 중국 남북조 시대(5∼6세기) 이후 크게 유행했고, 미륵불을 상징한 예가 많다. 본존상은 원만한 얼굴에 두 눈을 아래로 지그시 내려 사색에 잠긴 표정이다. 아담한 체구인 두 보살상은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썼고, 온 몸에는 천의(天衣)를 입었다. 입가에는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다. 

황정연 연구사는 “삼존상의 원 위치가 확인됐고, 국내에서 가장 이른 의좌형 미륵삼존불이며, 불심과 동심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듯한 수준높은 조각양식을 보여준 점 등을 감안해서 보물 지정 가치가 충분하다는 평을 받았다”고 전했다. 문화재청은 또 해인사와 갑사에 400년 넘게 봉안되어온 불상과 복장유물, 복장전적 등을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그 가운데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은 해인사 경내 부속 암자인

협시보살 중 우협시보살.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원당암의 보광전에 봉안된 삼존불상과 이곳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을 말한다. 

이밖에 ‘공주 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사보살입상 및 복장유물’은 갑사 대웅전에 봉안된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사보살입상의 협시보살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이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대상 유물들은 보물로 최종 지정할 방침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배재호, ‘경주 남산 장창곡 출토 석조미륵불의좌상과 선관 수행’, <미술사학연구> 제289호, 한국미술사학회, 2016

한정호, ‘삼귝유사 생의사석미륵과 남산 삼화령’,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37,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16

오정숙, ‘경주 남산 장창곡 출토 미륵삼존상 연구’, 영남대 석사논문, 2015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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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duhan 2020.07.07 0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3장째 사진.일본 통치 시대 이전의 조선의 '문화재 보호'의 실상이 알겠네요.요컨대 실제 그런 것(문화재 보호)가 없었고, 귀중한 불교 유산은 황폐하는 대로 방치됐다.그것을 누가 조사하고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 보존한 것?

    • Abe 2020.07.13 08:24  댓글주소  수정/삭제


      kimduhan 2020.05.28

      당시에도 일본인은 조선의 문화재의 가치를 인정하고 거액의 비용으로 수집, 보존 활동하네.일본인이 없었다면 조선의 문화재의 대부분은 거의 소실했을 것이다

  2. Abe 2020.07.07 21: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입만 열면 거짓말, 사기, 왜곡, 호도하며 혐한론을 펴는 전형적인 왜구 극우 군국주의자의 궤변 잡설...
    얼굴이 얼마나 두껍고 가슴이 음흉해야 저렇게 대놓고 사기를 칠수 있을까? ..... 인간은 불가능 왜구는 가능...

    일제강점기의 문화재 파괴와 약탈
    http://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136&bbsId=BBSMSTR_1008&mn=NS_01_09_01

  3. Abe 2020.07.07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제가 약탈·파괴한 문화재, 그 수난의 기록
    https://mnews.joins.com/amparticle/18440568

  4. Abe 2020.07.07 2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문화 콤플렉스가 야만적 수탈행위로 표출http://m.korea.kr/special/policyFocusView.do?pkgId=10000004&newsId=75085529&#policyFocus

  5. Abe 2020.07.07 2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제 강점기 때 빼앗기고 파괴된 우리 문화재 : 네이버 블로그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ppytour79&logNo=220404245149&proxyReferer=&proxyReferer=http:%2F%2Fwww.google.com%2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