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세의 가호(歌豪) 이세춘은 10년간 한양 사람들을 열광시켰지.(當世歌豪李世春 十年傾倒漢陽人) 기방을 드나드는 왈자들도 애창하며 넋이 나갔지.(靑樓俠少能傳唱 白首江湖解動神)

 

18세기 사람인 신광수(1712~1775)가 남긴 <석북집>의 ‘증가자이응태(贈歌者李應泰)’라는 시의 구절이다.

무슨 내용인가. 신광수는 호걸가수 이세춘의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거듭했으며, 10년간이나 유흥업소에서 애창됐음을 전하고 있다. 신광수가 이 시를 지은 것이 1761~63년 사이였다.

 

따라서 이세춘은 1750~60년 사이 조선의 가왕(歌王)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평양감사향연도> 가운데 ‘월야선유도’. 달밤에 대동강변에서 벌어지는 선상연회의 장면이다. 이세춘 그룹의 게릴라콘서트도 이같은 분위기에서 펼쳐졌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세춘 그룹의 결성
이세춘은 특히 지금까지 통용되는 용어인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시조’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새 장르의 노래를 뜻하는 ‘시조’는 기존의 노래를 뜻하는 고조(古調·옛날 노래)와 구별되는 개념이었다. 한마디로 이세춘은 기존의 노래법과 전혀 다른 레파토리를 구사한 가수였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세춘이 ‘솔로’라기보다는 ‘밴드’였다는 것이다. 18세기 조선을 풍미한 ‘이세춘 밴드’라. 다음 문헌을 보라.

 

(1)“어느 날 심공(沈公)이 남자가객 이세춘과 기생 추월·매월·계섬 등 여성가객, 그리고 금객(琴客) 김철석이 초당에 앉아 거문고와 노래로 밤이 이슥해 갔다.”

 

(2)“이 판서 댁에서 피리와 노래 소리가 요란했다. 이 판서와 인사를 나눈 후 노래를 불렀다. 금객 김철석, 가객 이세춘, 기생 계섬·매월 등이 함께 했다.”

 

찬찬히 뜯어보자. 당대 연예계에서는 남성보컬인 이세춘을 중심으로, 거문고 주자인 김철석, 그리고 여성보컬인 추월·매월·계섬 등이 그룹으로 활동했다는 기사내용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이세춘 그룹’이라 일컫는다. 물론 당대에는 유명한 김천택이나 김수장 같은 가수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인계층이었다.

 

반면 이세춘은 물론 이세춘과 이따끔씩 프로젝트 그룹을 구성하기도 한 송실솔 등은 노래로 생계를 꾸려가는 전문가수들이었다.
 

'월야선유도'의 전체그림. 대동강변에는 이세춘 그룹 같은 당대 최고의 가객들이 펼치는 공연배틀을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이세춘 그룹의 평양공연 때는 연주소리가 연광정까지 들렸다고 한다. 

 

■18세기 연예기획사 ‘SY’
그런데 이세춘과 송실솔의 뒤를 봐주는 사람들, 즉 일종의 후원자들이 존재했다는 것이 또한 흥미롭다. 

 

예컨대 (1)에 등장하는 심공(沈公)이라는 사람은 이세춘 그룹을 후원했던 문사 심용(1711~1788)를 일컫는다.

 

시쳇말로 패트론(patron·후원자), 혹은 스폰서라 할 수도 있겠고, 혹은 일종의 연예기획사 사장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요즘 이름을 지었다면 심용이 차린 기획사의 이름은 ‘SY’가 아니었을까.

(1)(2)에서 나오는 이세춘 밴드의 멤버인 계섬과 추월 등도 만만한 가수가 아니었다. 당대의 가요계를 쥐락펴락한 스타였다.

 

섬(桂纖)이라는 여가수를 보자. 그는 황해도 송화현의 계집종이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시랑 원의손(1726~81)의 수하에 있다가 대제학을 지낸 이정보(1693~1766)의 문하에 들어갔다.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말 한마디에 마음이 상해 결별했다”고 한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이정보는 은퇴 후 많은 가수(명창)들을 문하에 두었는데, 계섬은 그 가운데서도 수제자였다.

 

계섬의 이야기를 담담히 써내려간 심노숭(1762)의 시문집인 <효전산고> 중 ‘계섬전’은 이 대목에서 재미있는 강조점을 담는다.

 

“이정보는 문하의 명창들 가운데 계섬을 가장 사랑해서 늘 곁에 두었다. 이정보는 계섬의 재능을 기특하게 여긴 것이지, 사사롭게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대제학을 지낸 이정보가 계섬의 노래실력을 아낀 것이지, ‘여자로서’ 좋아하지는 않았음을 굳이 변명해주고 있다.

 

계섬은 이정보의 문하에서 악보를 보고 여러 해의 과정을 거쳐 노래연습에 전념했다. 일종의 연습생 신분이었던 것이다.  

<평양감사 향연도> 가운데 '부벽루 연회도'.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춤과 노래가 어우러지고 있다.

■조선 최고의 보컬트레이너
그의 노래는 일취월장했다.

 

노래를 할 때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어 소리가 짜랑짜랑, 집안에 울려퍼졌다.

 

계섬의 노래는 조선 전역에 떨쳤다. 지방의 기생들이 서울에 와서 노래를 배울 때는 모두 계섬에게 몰려들었다.

학사와 대부들이 너도나도 노래와 시로 계섬을 칭찬했다.

 

훗날이지만 계섬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초대받아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노래’를 부르는 영예를 안았다.

 

옛 주인인 원의손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새 주인인 이정보를 찾아와 “계섬을 다시 돌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원의손과 좋지않은 상태로 결별한 계섬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한다. 이를테면 옛 기획사 복귀를 거부한 것이다.

 

계섬은 자신을 그토록 아끼던 이정보가 죽자, 마치 부친상을 당한 것처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이후 이정보를 잊지못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이후 기생의 신분에서 벗어난 계섬의 마지막 주인은 심용이었다. 평소 풍류를 좋아한 심용은 계섬의 노래를 워낙 좋아해서, 그녀를 문하에 두었다.

 

마 그 때 심용의 ‘기획사’에서 이세춘과 인연을 맺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계섬은 요즘으로 치면 첫번째 기획자인 원의손과 결별한 뒤 두번째 기획사인 이정보를 거쳐 세번째인 심용 기획사에서 만개한 것이다.  

 

세춘 그룹의 또 다른 멤버인 추월은 가무(歌舞)와 자색(姿色)으로 유명한 ‘얼짱 댄스가수’였다. 공주 기생 출신이었다.

 

궁중의 상방(尙方·임금의 의상을 책임지던 관청)에 들어갔는데 풍류객들 사이에서 수십년간 큰 인기를 끌었다.

 

제3의 멤버 매월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매월은 원래 종친인 이익정(1699~1782)의 ‘가희(歌姬)’였다가 이세춘 그룹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다른 멤버 김철석(1724~76)은 일명 철돌(鐵突)이라 일컬어지며 당대 거문고의 명수로 명성이 자자했다. 

 

■게릴라 콘서트 혹은 히든싱어
이세춘 밴드의 흥미진진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기획사 사장인 심용이 이세춘 그룹에 넌지시 제안했다.

“너희들. 평양 한번 가보지 않겠는고?”(심용)

“가보고는 싶지만 아직….”(이세춘 그룹)

“평양감사가 대동강 위에서 잔치를 벌인다는구나. 평안도 모든 수령들과, 이름난 기생들, 그리고 명가수들이 다 모인다는구나. 육산주해(肉山酒海)를 이룬다고 하는데…. 우리 한번 가볼까. 한번 걸음에 심회(心懷)를 크게 발산할 수 있고, 전두(纏頭·공연후 받는 사례금품)로 비단과 돈을 많이 받을 것이니….”(심용)

“(모두들 손뼉을 치며) 그거 좋습니다.”(이세춘 그룹 일동)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하면 ‘기획사 사장’인 심용이 이세춘 그룹에게 ‘평양감사의 회갑연’에서 공연 한 번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이다.

 

그러자 이세춘 그룹이 모두 손뼉을 치면서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찬성하고 나선 것이고….

심용이 말하는 평양감사는 아마도 신회(1706년~?)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일화는 아마도 신회가 평양감사로 재직하던 1765~66년 사이에 있었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세춘 그룹의 평양공연은 깜짝쇼였다. 초대받지 않은 공연이었다는 것이다.
심용과 이세춘 그룹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다고 소문낸 뒤 종적을 감췄다.

 

그리고는 몰래 평양 성내로 잠입한 뒤 모처에 숙소를 잡았다.

 

평양감사의 잔치가 열린 다음 날, 심용은 작은 배 한 척을 빌려 차양막을 치고, 좌우에 주렴을 드리웠다. 이세춘 그룹 멤버들은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는 능라도와 부벽정 사이에 숨겨두었다.

 

이윽고 풍악이 울리고 돛배가 강물을 뒤덮었다. 평양감사는 층배에 높이 앉았고 여러 수령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다. 맑은 노래와 기묘한 춤에 그림자는 물결 위에서 너울거리고 성머리와 강둑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 때 심용이 노를 저어 나갔다. 평양감사의 층배가 보이는 곳에 배를 멈췄다. 그리곤 저쪽 배에서 검무를 추면 이쪽에서도 검무를 추고, 저쪽 배에서 노래를 부르면 이쪽 배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마치 흉내내는 것이었다.”

 

어떤가. 마치 ‘히든싱어’를 보는 듯 하지 않는가. 잔치에 모인 평양감사 등이 이상하게 여겼다.

“저 배를 바라보니 검광이 번쩍이고 춤과 노랫소리가 구름을 가로막는구나. 범상치않은 사람들이겠다. 저 배를 끌고 오라.”

 

끌려온 심용이 평양감사의 층배 머리에 이르자 주렴을 걷고 껄껄 웃었다. 사실 심용과 평양감사는 친분이 깊던 사이였다. 심용이 이끄는 이세춘 그룹의 깜짝공연이었던 것이다. 평양감사 역시 넘어질듯 놀라며 반가워했다.

 

<평양감사 향연도> 가운데 연광정에서의 연회도.

■깜짝 공연의 개런티
사실 평양감사의 회갑연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서울출신이었다.

 

그러니 서울에서 온 이세춘 그룹의 공연을 대하고 한결같이 기뻐했다.

 

이세춘 그룹 멤버와 현지의 평안도 그룹은 평생의 재주를 모두 발휘해서 온종일 공연했다. 이를테면 ‘공연배틀’을 벌인 셈이다.

 

배틀의 승자는 물론 이세춘 그룹이었다.

“그런데 서도의 가무(歌舞)와 분대(粉黛·화장법)는 아주 무색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세춘과 김철석, 그리고 기생 추월·매월·계섬 등 서울 그룹의 춤솜씨 및 화장법과, 서도(평안도) 그룹과 수준차가 났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초대받지 않은 깜짝 공연이었음에도 심용과 이세춘 그룹은 엄청난 개런티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세춘 그룹의 공연에 감명을 받은) 평양감사가 서울 기생에게 1000금을 주었다. 다른 벼슬아치들도 각자의 위치에 따라 상금을 내놓았다. 거의 1만금에 가까운 돈이 들어왔다,”

 

결국 심용과 이세춘 그룹은 10일 넘게 평양여행을 즐긴 뒤 돌아왔다. 낭만은 낭만대로 즐기고 개런티는 개런티대로 받고…. 여기에 평양 사람들도 조선 최고의 인기밴드가 펼치는 깜짝 공연을 마음껏 즐겼고….

사실 이세춘 그룹의 공연은 당대 평양사람들에게는 문화적인 충격으로 다가갔던 것 같다. 신광수의 <석북집> 가운데 평양의 풍속을 다룬 ‘관서악부’를 보자.

 

“처음 부르는 창을 듣자니 모두 양귀비의 노래일세.~ (이 노래를) 일반 시조로 장단에 맞춰 부르는 이는 장안에서 온 이세춘일세.(初唱聞皆說太眞~一般時調排長短 來自長安李世春)”

무슨 말인가 하면 당대 평양의 가객들은 공연을 펼칠 때마다 모두 양귀비(태진)의 사연을 담은 노래를 선창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세춘은 이 양귀비 노래를 평양에 소개하면서 서울에서 유행중이던 새로운 스타일(일반 시조)로 장단을 배열했다는 것이다. 

 

이세춘은 이 새로운 장단으로 평양시민들을 열광시켰을 것이다.

 

■억지 공연의 대가
이렇게 신명나는 공연이 있었지만, 그 반대의 공연도 있었다.

예컨대 이세춘 그룹은 앞서 인용한 (2)의 사례, 즉 이 판서 댁의 공연을 즐겁게 마쳤다.

 

그런데 이판서 댁 공연에서 보았던 다른 대감이 며칠 뒤 이세춘 그룹을 초청했다. “자기 집에서도 공연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감의 태도는 영 불손했다. 명령조로 “노래 부르라”고 명했다. 기분을 잡친 이세춘 그룹이 마지못해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는데,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판서 댁에서는 노래가 시원했는데 지금은 소리가 낮고 느즈러졌다. 내가 음악을 무른다고 무시하는 것이냐. 싫어하는 것이냐.”

이 때 추월이 눈치를 채고 대감을 진정시켰다.

“처음이라 그렇사옵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면 구름을 뚫고 들보를 흔드는 소리로 금방 울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멤버들과 눈짓을 나눈 뒤 대뜸 우조(羽調)로 잡사(雜詞)를 시작했다. 무조건 큰 소리로 잡스러운 가사를 질러댄 것이다. 음악을 들을 줄 몰랐던 대감은 부채로 책상을 치며 “맞아! 노래는 이렇게 부르는 거야”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세춘 그룹을 대접하는 대감의 무례가 지나쳤다. 시원찮은 술대접에 마른 포만이 안주로 나왔으니까….

 

■이세춘 그룹의 노래
이세춘 그룹의 작품으로 남아있는 곡은 단 2곡 뿐이다. 아마도 창작보다는 가창에 전념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무척 흥미로운 한 곡을 보자.

“화당 빈객 만좌중에 줄 고르는 왕상점(王上點)아. 너희 집 출두천(出頭天)이 좌칠월(左七月)가 산상산(山上山)가 진실로 산상산이면 여아동침(與我同寢)하리라.”
(청구영언)

가사 가운데 왕상점(王上點)은 왕(王) 위에 점(點)을 찍었다는 뜻이다. 주(主)자를 뜻한다. ‘출두천(出頭天)’은 머리를 내민 천(天)이니 부(夫)자를 의미한다.

 

또 ‘산상산(山上山)’은 산(山)자 위에 산(山)이 있다는 말이니, 출(出)자를 뜻한다. 또 좌칠월(左七月)은 유(有)자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내용은 기생집에서 기생을 유혹하면서 ‘한번 동침하면 어떠냐’고 은근슬썩 눙치는 노래이다. 말장난으로 가득찬 노래가 아닌가. 그랬으니 10년간이나 서울의 유흥가를 휩쓸었을 것이다.    

 

■서평군-송실솔 콤비
심용-이세춘 콤비와 쌍벽을 이루는 사람들이 서평군(이요)-송실솔 콤비였다.

 

송실솔의 후원자는 왕족인 서평군 이요였다. 부자였고, 협객이었던 서평군은 음악을 유독 좋아했는데, 송실솔의 노래에 흠뻑 빠졌다. 서평군은 송실솔을 데리고 다녔다.

 

송실솔이 노래할 때마다 서평군은 반드시 스스로 거문고를 연주했다. 언젠가 서평군이 송실솔에게 “내 거문고가 너의 노래를 따라가지 못하도록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일종의 배틀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자 송실솔은 늦게, 빠르게 자유자재로 노래를 불러 서평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서평군은 송실솔의 노래에 따라 궁성을 뜯다가 각성을 울다가 정신없이 여음(餘音)을 고르다 하며 따라가기 급급했다. 서평군은 결국 송실솔의 노래에 맞추려다 자신도 모르게 술대를 떨어뜨렸다. 서평군은 “정말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감탄했다.

 

서평군-송실솔 콤비는 어찌보면 심용-이세춘 콤비와 쌍벽을 이뤘다. 그러나 음악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친분을 쌓았다. 송실솔은 특히 이세춘과 일종의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할 정도였다.

 

한번은 이세춘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송실솔이 조문을 했는데, 문에 들어서면서 상주(이세춘)의 곡소리를 듣고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이건 계면조일세. 평우조로 받는 것이 마땅하지.”
상주가 계면조로 곡을 하니, 문상객은 평우조로 받아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송실솔은 영전에 나가 슬픈 곡조(계면조)가 아니라 일반 노래(평우조) 같은 곡을 했다. 이 일화가 호사가들의 입방앗거리가 되어 널리 퍼졌고, 듣는 이들마다 모두 웃었다.(이옥의 <문무자문초> 중 ‘가장 송실솔전’)

 

송실솔은 어릴적 노래를 배울 때 폭포수 밑에서 날마다 노래연습을 했다. 1년을 그렇게 하자 노랫소리만 남고 폭포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또 북악산 꼭대기에 가서 까마득히 높은 곳에 기대어 또 1년간 노래를 부르자 회오리 바람도 그의 소리를 흐트러뜨리지 못했다.

 

이 때부터 그의 노래는 구슬처럼 맑았으며, 연기를 날리듯 가냘프고 구름이 가로걸리듯 머물렀으며, 철맞은 꾀꼬리 같이 자지러졌다가 용이 울듯 떨쳤다고 한다.

 

송실솔의 ‘실솔(실솔)’은 귀뚜라미와 같은 소리를 낸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     

 

■얼굴없는 가수
이밖에도 조선을 주름잡은 가수와 댄서들이 많았다.

 

외모는 추악했지만 애절하고 원망하는 듯 처절한 목소리로 구름을 멈추게 한 금향선은 또 어떤가. 금향선의 외모를 보고 비웃었던 당대의 문사들은 그의 노래를 듣고는 “끓어오르는 춘정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안민영의 <금옥총부>) 한마디로 섹시한 목소리가 금향선의 장점이었던 것이다.

 

판소리 8명창 가운데 한사람인 모흥갑(1822~1890)도 유명하다. 절대고음을 자랑한 그는 후세사람들로부터 ‘설상(雪上)에 진저리치듯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소리는 고동상성(鼓動上聲)이라 했다.

 

그가 평양감사로 초청받아 평양 연광정에서 소리를 할 때 10리까지 들렸다고 한다.

 

남학이라는 가수의 노래는 벽을 사이에 두고 들어야 했다. 왜냐면 생김새가 추한 가수였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치면 ‘얼굴없는 가수’를 컨셉트로 삼았다고 할까. 얼굴은 방상(方相·귀신)같고 눈은 난쟁이 같았으며, 코는 사자같고, 수염은 늙은 양 같았다. 눈은 미친개 같고 손은 엎드려 있는 닭발 같았다니….

 

그러나 그의 노래는 아주 맑도 곱고 부드러웠다. 타고난 미성으로 여자 목소리를 잘 내는 것이 특기였다.  

 

그러니 벽너머에서 들으면 여인들의 혼이 흔들리고, 마음이 격동했다. 그러나 얼굴이 드러나기만 하면 기생들이 멍하니 앉아있기도 하고, 때로는 깜짝 놀라 울기도 하고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이옥의 <청남학가소기>)

 

그 뿐인가. 세종시대의 구종직(1404~77)은 문과에 급제해서 교서관에 배치됐다. 하루는 몰래 편복 차림으로 경회루 구경을 나왔다가 임금(성종)과 마주쳤다.

 

구종직은 임금의 명으로 구성진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는데, 그 소리가 들보를 흔들었다. 그는 임금의 명령으로 다시 <춘추> 한 권을 다 외었다.

 

그러자 성종은 그에게 술을 하사했으며, 다음날 대사간으로 임명해버렸다. 구종직은 결국 노래를 잘 불러 국왕의 과실을 지적하는 대사간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차천로의 <오산설림초고>)

 

■K팝의 조상들
그러고보면 노래와 춤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는 민족이 아닌가.

 

“연일 음식과 가무를 즐겼다(連日飮食歌舞). 밤낮으로 길을 가다가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종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는다”(<삼국지> ‘위서·동이전 부여조’)

 

“(5월이면) 파종을 마치고 신령께 굿을 올린 뒤 무리가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는데 밤낮으로 쉼이 없다.”(<삼국지> ‘위지·동이전 마한조’)

이런 기록도 있다.
“동이는 모든 토착민을 인솔하여 즐겁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그릇은 조두(俎豆·제기)를 쓴다. 중국에서 예를 잃어버리면 사이(四夷)에서 구한다는 것은 믿을 만 한 일이다. (중국) 천자가 본보기를 잃으니 이것을 사이에서 구했다.”(<후한서> 동이전 등>

하기야 동이족인 공자도 ‘만능 뮤지션’이었다. 평소 거문고를 뜯고, 경(磬·돌 혹은 옥으로 만든 타악기)을 치고 노래를 불렀다니 말이다.

지금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K팝의 전통은 이렇게 뿌리가 깊은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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