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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20) 석대암(上)

-‘지장신앙’ 성지 중 성지… 절터의 속살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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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숨에 올라가려 했다.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헛된 오만함이란….

만만찮았다. 지장신앙의 성지를 찾는 길은 쉽지 않았다. 경기 연천 최고봉인 환희봉(877m) 정상 밑 해발 630m에 자리잡은 석대암 가는 길.

비무장지대가 아닌데도 ○사단 공보 장교가 따라나선 이유가 있었다. 지름길로 가려면 군부대를 관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병장을 가로지르면 심원사지 부도군이 보이고, 바로 그 위에 옛 심원사(647년 창건) 터가 펼쳐진다. 부도군은 2기의 비석과 12기의 승려 사리탑으로 이뤄졌다. 휴정스님(1520~1604)의 법맥을 이은 스님들의 탑과 부도란다. 우리나라 제일의 지장신앙 성지인 심원사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철원 동송 상로리로 이전했다. 군부대 안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의 자리엔 터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기자가 찾아가는 석대암은 바로 심원사에 딸린 암자다.

# 거미줄, 날벌레, 포격소리, 끝없는 돌길

단순한 암자가 아니다. 그야말로 지장신앙 성지의 성지다. 이우형씨(현강문화연구소장)에 따르면 원래 석대암 가는 계곡을 ‘절골’이라 했다. 석대암을 포함해서 무려 9개의 암자가 있었다니까.

심원사 터에서 차를 ‘버리고’ 산중에 몸을 ‘던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돌길. 삐죽삐죽 제멋대로의 돌로 이어지는 산행은 고달팠다. 길목마다 투명한 그물을 꿰어놓은 거미줄의 훼방. 실로 오랜만에 사람의 땀 냄새를 맡았다는 듯 끊임없이 공격하는 온갖 날벌레들. 막춤을 추듯 연방 두팔을 휘저어가며, 그것도 모자라 온몸을 배배 꼬며 쫓아내도 아랑곳 없다. 귓전을 끊임없이 맴도는 ‘윙윙’ 소리에 절로 진저리가 난다.

‘꽈당! 쿵!’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난다. 벌레와 산새, 그리고 개천의 물 흐르는 소리만이 산행을 재촉하는 순간이었는데….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이게 무슨 소리죠?”

“포격 훈련하는 소립니다.”

“혹시 이쪽으로 떨어지는 건 아니겠죠?”

“절대 아니니 걱정 마세요.”

대포 소리가 계속 이어진 탓에 제법 익숙해 질 법도 했지만 소리가 너무 커서 들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 불탄 지장성지

온갖 악재 속에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니 ‘석대암 50m’ 표지가 보였다. 몇 걸음이면 다 되었으려니 했는데 또 끝이 없다. 한번도 쉬지 않고 속보로 가겠다고 다짐했던 기자는 그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럴 때 가장 힘이 빠진다. 다 왔겠거니 하면 다시 가야할 길이 보이고…. 이제 끝났겠거니 하면 다시 고비가 생기고….

마지막 시험이 아닌가 싶다. 지장보살님을 뵙기 전에 인간의 모든 오만한 찌꺼기를 털어내라는 가르침인가. 단숨에 올라가려던 헛된 욕심을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올라간 길. 마침내 환한 공간이 펼쳐졌다. 따사로운 햇빛이 석대암 절터에 쏟아진다. 어둠 속을 비추는 한줄기 빛처럼.

여기가 바로 지장신앙의 본산인가. 불자들의 귀의처가 되었고 한국 불교의 성지로 꼽히던….

지장보살. 그 분은 누구인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는 영원히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보살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한 후 미륵불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6도를 윤회하면서 고통받는 중생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원력보살.

눈부신 햇살에 잠깐 눈이 멀었던 기자의 눈에 절터의 속살이 펼쳐진다. 물론 인간의 눈으로 보면 실망이다. 축대와 건물지, 우물지, 그리고 밑동만 겨우 남은 채 죽어버린 나무만이 처연하게 남아있을 뿐. 한 50m쯤 떨어져 그것도 나무 숲에 싸여 잘 보이지도 않은 곳에 있는 지장영험비는 제자리에서 뽑혀나간 채 위태로운 모습으로 기우뚱하게 서 있다. 하기야 한국전쟁 때 ‘인간의 손’에 의해 불탔으니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겠지. 그런데 이상하다. 다른 유적이 이런 몰골이었으면 흥분했을 이우형씨였지만 웬일인지 담담한 표정이다.

“그냥 두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괜히 으리으리한 건물을 지어놓으면 더 흉한 몰골로 변하니까요.”

하기야 지장보살은 자비행을 철저하게 실천하려고 중생의 업고(業苦)를 자기 업고로 대비(大悲)하는 보살이 아닌가. 보관(寶冠)이나 영락(瓔珞)으로 치장하지 않고 오로지 가사만 걸칠 뿐이다. 그러니 인간의 헛된 몸치장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수없이 이곳을 찾았을 이우형씨였지만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이곳은 지장보살상이 발견된 우물이고요. 이곳은 보살님이 앉아 계셨던 곳이고요. 이곳은…. 이곳은….”

# 19살 청년의 인생역정

그의 인생 역정을 품에 안은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터이다.

“절터 덕분에 농사꾼이었던 제가 이렇게 문화 유산에 빠져 살게 됐습니다.”

19살 때인 1984년. 석대암과 인접한 보개산 자락에 살고 있던 이우형씨가 본격적으로 암자터를 찾으러 나섰다.

“동네 사랑방에서 어르신들이 하는 얘기를 귀동냥 했어요. 지장보살님의 사연이 담긴 석대암이 이곳 어디엔가 있다는 말씀이었죠.”

지금도 이 암자터는 1년에 1~2명이 찾을까 말까 할 정도로 외진 곳이다. 포천쪽 보개산 정상을 거쳐 넘어오는 길이 있지만 한국전쟁 이후엔 군부대 훈련장이어서 민간인들이 감히 출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청년 이우형은 그런 살벌한 환경에서 3~4번이나 답사를 한 것이다. 그러나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계속 허탕을 쳤는데 하루는 산꼭대기(환희봉 정상)에서 내려다 보니 절터로 안성맞춤인 터가 보이지 않겠어요?”

단숨에 달려간 그는 마침내 자연상태 그대로 남아있던 암자터를 찾았다. 지장보살의 성지를 일개 농사꾼이 찾아내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문화유산 답사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우형씨가 찾아낸 석대암은 창건 기록도 소설처럼 흥미롭고, 그 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는 상서로운 감응과 이적(異蹟)으로 국내 제일의 영험한 생지장도량으로 성가를 높였다.

멀리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오비이락·烏飛梨落)’는 속담이 탄생한 곳이며, 가까이는 광복 3일 전에 8·15 해방과 남북분단을 한꺼번에 예견한 이른바 쌍광방(雙放光), 즉 두줄기의 빛이 쏟아진 곳이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목은 이색이 “보개산 지정석상의 상서로운 감응은 세상이 모두 아는 바이다(地藏瑞應世所共知)”(보개산 석대암 지장전기)라고 했을까. 이제 석대암에 나타나신 생지장보살의 이야기를 해보자.

〈이기환 선임기자|연천 석대암터에서〉

 

36곳 경승지 있는 보개산… 고려땐 60곳이 넘는 사찰
 

궁예가 나뭇가지를 한번 휘둘러 쌓았다는 보개산성 석축.


지장보살의 숨결을 담고 있는 보개산은 그리 간단한 산이 아니다.

휴전선 인근, 즉 경기 연천 신서면과 연천읍, 포천시 관인면, 강원 철원읍과 동송읍에 걸쳐있는 군산(群山)을 통칭한다. 남북으로 25㎞, 동서 14㎞에 둘레만 해도 180리에 달한다. 보개산군은 고대산(832m), 환희봉(877m·지도엔 지장봉으로 잘못 표기됨)을 사이에 두고 내보개, 외보개로 구분한다.

산내 최고봉은 금학산(947m)이며 석대암 뒤편의 환희봉은 내산의 최고봉이다. 보개산군엔 고려 때만 해도 60곳이 넘는 사찰이 있었다. 지금도 저마다 각각의 사연을 간직한 28개의 봉우리와 36곳의 경승지가 있는 영험한 산이다.

특히 미륵을 자처한 궁예와 관련된 설화가 줄을 잇는다. 금학산이 대표적. 금학산은 지금 봐도 예사롭지 않은 자태를 지니고 있는데, 학이 알을 품은 형상이란다.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터를 물색했을 때의 일이다.

풍천원 억새밭에 엎드려 있던 궁예는 도선의 지시(도선이 들판을 한 바퀴 돌고 올 때까지 엎드려 있으라고 했다)를 어기고 일어서는 바람에 불행이 생긴다. 그만 학이 날아가 고암산(풍천원 태봉국 도성의 진산)이 아니라 금학산에서 알을 낳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300년 도읍지의 힘은 금학산 쪽으로 옮겨갔으며, 고암산을 진산으로 한 풍천원 태봉국 도성터는 30년 도읍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쨌든 300년 도읍지로 각광받은 곳은 금학산을 주산으로 한 지금의 철원 동송읍 이평리와 오지리 일대다. 학의 형상인 금학산의 남쪽 발등과 북쪽 발등 사이인데, 지금 봐도 도읍지로 손색이 없을 만큼 드넓은 평야 지대다.

지금도 보개산군의 관인봉 능선엔 보개산성이 남아있다. 전설에는 궁예가 부하 장졸들에게 “내 신통력으로 이 성을 쌓을 것이니 너희는 보고만 있으라”면서 싸리나무 가지를 꺾었다. 그리고는 한 번 휘두르니 웅장한 보개산성이 한순간에 완성됐다고 한다. 이런 수많은 전설이 깃든 보개산군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초토화된다. 한국전쟁 직후 보개산군의 원시림을 대부분 벌목하여 전쟁 복구사업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산군의 대부분이 군작전지역. ‘덕분에’ 벌목 이후 생긴 2차림이 어느덧 자라 제법 울창해졌다. 이젠 개발이다 뭐다 해서 건드리지 말고 제발 이대로 놔두었으면 좋겠다.

〈이우형|현강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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