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굴쥐고 절벽잡아 바람부는 천제 향해 오르니(攀羅문壁上風梯)/암자 오랜 뜰 소나무엔 학 한 마리 깃들었네(庵古庭松一鶴棲)/숲 아래 경쇠소리 바람 밖에서 간절하네(林下磬聲風外切)/서쪽 봉우리 남은 해는 찬 시내로 떨어지네(西峰殘照落寒溪)’
김시습의 ‘매월당집’에 묘사된 석대암의 풍경이다. 시에서 ‘바람부는 천제에 오르니’라는 대목은 풍수지리를 염두에 둔 구절이다. 석대암 뒤편 환희봉 정상에서 뻗은 능선의 솟은 많은 봉우리가 풍수지리학상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天梯)’ 형세라는 것이다. 또한 석대암은 예부터 바람이 심하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 사냥꾼과 금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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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석대암에 서면 김시습의 표현이 얼마나 절묘한지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자! 이제 고려 말 학자 민지(1248~1326)가 지은 ‘보개산 석대기’를 토대로 창건 설화를 살펴보자.
지금으로부터 1287년 전인 720년. 성덕왕 19년 때였다. 사냥꾼인 이순석·순애 형제가 한 마리 금빛 멧돼지를 보고 힘껏 활을 쐈다. 멧돼지는 피를 흘리며 달아났다. 형제가 그 혈흔을 추적하니 환희봉(877m) 쪽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돼지가 멈춘 곳에 닿으니 금빛 멧돼지는 간 곳 없었다. 다만 샘물 가운데 머리만 빠끔히 내놓은 석상만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왼쪽 어깨 가운데 순석이 쏜 화살이 꽂혀 있었다. 형제는 대경실색했다. 둘은 화살을 석상의 몸에서 뽑으려 했다. 그러나 태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형제는 두려워져서 선 채로 맹세했다.
“대성(大聖)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소서. 우리를 이 속계의 죄에서 구제해주시려고 이 같은 신변(神變)을 나타내신 것임을 알겠나이다. 만약 내일 이 샘물 곁에 있는 돌 위에 앉아 계신다면 우리들은 마땅히 대성의 뜻에 따라 출가 수도하겠나이다!”
다음날 긴가민가해서 이곳을 다시 찾은 형제는 또 한 번 놀랐다. 석상이 그 돌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바로 출가하겠나이다!”
형제는 곧 300여명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암자를 창건했다. 스님이 된 형제는 숲속에 돌을 모아 대(臺)를 쌓아 그 위에서 정진했으므로 석대라 이름지었다. 형제는 훗날 득도해서 열반했다. 그런데 이 지장보살의 영험한 이야기는 시공을 초월해 이어진다.
# 생지장의 영응
풍악도인 문일장노라는 인물의 이야기다. 그는 세상에서 견성득도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그런 그가 여러 문도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하는 내용이 있었다.
“내가 중국에 있을 때 경복사의 장노가 나에게 만날 얘기했어. 삼악도(三惡道:악인이 죽어서 간다는 지옥, 아귀, 축생도)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보개산, 풍악산, 오대산에 머무르면 된다고….”
“그래서 두세 도반(道伴)과 더불어 이 산에 들어와 심원사에서 환희봉을 바라봤지. 그런데 봉우리 아래 상서로운 빛이 촛불을 하늘에 켜놓은 것처럼 서기(瑞氣)가 하늘에 가득하고 따사로운 바람이 훈훈히 일지 않겠어. 그런데 불보살형상의 구름이 화려하게 피어오르고 종소리는 은은하게 구름 밖으로 울려퍼지는 거야.”
“그래 난 마음에 희열을 느껴 그곳에 갔지. 그러니까 지장석상이 화현(化現)해서 영응을 보이시는 거야.”
문일장노는 곧 샘물로 발을 씻고 마지(摩旨·부처님께 올리는 밥)를 올리려 했다. 그러자 지장석상이 큰 형체로 변하면서 자비롭고 밝은 빛을 두루 비추었다고 한다. 그 밝은 빛 속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광대무량의 넓은 세계)가 뚜렷하게 보였다고 한다.
이 이적의 기록을 남긴 민지는 “보개산 전체가 지장진신이 늘 머물며 설법하는 곳”이라고 했다. 또 있다. 사경불사의 위업으로 알려진 남호 스님(1820~72)은 출가 전 피부병 치료를 위해 이곳에 왔다. 그는 3·7일간 기도하며 지장보살을 염송하자 흰옷을 입은 여인으로 변한 지장보살이 나타나 병을 낫게 해주었다. 구한말 포도대장 한규설의 부인인 박기우·기석 자매는 백일기도 중에 빛줄기가 나타나는 현상을 경험했다. 그리고 깨진 옥등잔이 깜쪽 같이 붙은 일, 불기와 전곡을 훔쳐 밤새 달아나던 도둑이 석대암의 미나리광 앞에서 잡힌 일 등등….
그런데 순석 형제가 석대암에 모셨던 지장보살상은 지금은 철원 동송으로 이전된 현재의 심원사에 있다. 남북분단의 쓰라린 역사가 석대암을 덮친 것이다.
# 지장보살마저 괴롭힌 전쟁, 그리고 남북분단
해방이후 38선 이북인 이곳은 북한땅이었다. 5년간의 북한정권 치하에서는 보개산 내 여러 사찰이 법난의 아픔을 겪었다. 한국전쟁 때 이곳은 피아간 1만3000명의 생명을 앗아간 격전지였다. 석대암을 비롯한 암자들은 한국군이 모두 불태웠다. 남북이 교대로 생지장의 성지를 무참하게 짓밟은 것이다.
다행히 지장보살상은 극적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 직전 지장석상은 인편을 통해 월남한 것이다. 이 석상은 전쟁통에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54년 지금의 심원사(철원 동송 상노리)에 봉안되었다.
기자가 석상을 친견하니 소탈한 모습에 왼손엔 여의보주를 받들고 있고 자비로운 미소는 보는 이의 가슴 속에 잔잔하게 적신다. 석상의 색깔은 마치 어제 오늘 만든 것처럼 하얗다. 돼지보살로도 일컬어지는데 높이는 63㎝, 좌폭은 43㎝ 정도다.
“원래는 청흑색이었는데…. 완전히 탈색한 것 같네요.”
그렇게 탈색한 것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보개산 석대기’에도 청흑색으로 돼 있는데 인위적으로 색깔을 바꾼 것이 옳은 일인지.
불교신자가 아니어도 신령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이순석 형제가 쏘았다는 화살 자국이다. ‘보개산 석대기’에도 “좌측 어깨에 길이 한 치가량 되는 비낀 흔적이 있으니 이는 창건 당시 이순석 형제가 쏜 화살에 맞은 흔적”이라고 돼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자국이 남아 있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쯤해서 한 가지 의문. 산짐승과 날벌레들의 보금자리·쉼터로 변해버린 석대암 터는 어찌 할꼬. 걱정이 되어 계속 구시렁대자 이우형씨는 “괜히 복원한답시고 잘못 놓으면 도리어 망친다”고 누차 강조한다. 괜시리 되지도 않은 으리으리한 현대식 건물에 지장보살님을 모실까봐 어지간히 걱정되는 모양이다.
“지금도 민간인들이 출입하기 꺼려하는 곳이잖아요.”
지장보살은 육도중생(六道衆生·6도 즉 미혹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죽는 것을 거듭하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있는 곳마다 임하여 민중의 아픔을 구하고 행복을 얻게 하시는 분이라잖는가. 오늘 이 순간 폐허가 돼버린 이 석대암 터에서 나는 무엇을 빌 수 있을까. 그래 이왕이면 거창한 소원 하나. 서로 죽일 듯 미워하고 싸우며 수십년 살았던 그래서 (지장)보살님마저 이리저리 괴롭혔던 남북이 두 손을 꼬옥 맞잡기를….
〈이기환 선임기자|연천 석대암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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