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전 서울과 서울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려볼 수 있을까.
사실 100년전이면 신문·잡지가 발행된 시기였고, 사진 기록까지 다수 남아있으니 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데 ‘200년전은?’ 하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쉽지 않다. 다행히 단원 김홍도(1745~?)와 혜원 신윤복(1758~?) 같은 이들의 풍속화로 200년전의 ‘이미지’를 가늠할 수 있다.
■껌씹고 침 좀 뱉은 200년전 양아치
또 놓쳐서는 안될 자료가 있다. 18세기말~19세기초의 서울 풍물을 시로 묘사한 ‘성시전도시’ 몇 편이다. 그중 초정 박제가(1750~1806)의 시가 눈길을 끈다.
“물가 주막엔 술지게미 산더미네…눈먼 장님 호통치니 아이놈들 깔깔 거리고…개백정이 옷 갈아 입으면 사람들은 몰라뵈도, 개는 쫓아가 짖어대고 성을 내며 노려본다.”
박제가는 또 ‘아전배들은 허리로 인사하고, 시정잡배들은 이빨 사이로 침을 뱉어낸다’고 묘사했다. ‘쓰읍~’하고 이빨 사이로 침을 갈기고, ‘쫙~쫙’ 소리내며 껌 좀 씹는 영락없는 뒷골목 양아치들의 모습이다.
이학규(1770~1835) 등의 ‘성시전도시’도 공감각적이다. “생선가게에선 비린내 살살 풍기고…누더기 사내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어린 계집종은 정수리에 동이 이고~쏟아지려 하자 머리를 치켜든다.”고 했다.
신택권(1722~1801)의 시는 당대의 담배열풍을 고발한다. “위로 정승판서부터 아래로 가마꾼까지, 안으로 규방서부터 외방고을의 기생까지 입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가 (담배를) 즐기지 않겠느냐.”고 했다.
신택권의 시에는 당대 부동산 거래의 허와 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다.
“집주름(家쾌·부동산 중개업자)이 1000냥을 매매하고 100냥을 값으로 받으니 동쪽 집 사람에게 서쪽 집을 가리킨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이사를 유도하고 중개수수료(1할)를 챙기는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게다가 “예전엔 조용하고 외진 곳을 좋아했으나 지금은 시끄럽고 낮은 데를 탐낸다”는 표현도 있다. 요즘의 강남 선호 현상을 가리키는 말인가. 그러나 “서민들은 외진 골목에 팔짱끼고 살자니 생계가 어려워 빈촌에 둥지 틀어 시장 가까이 산다”고 했다. 200년이 지난 요즘과 다르지 않다. 또 김희순(1757~1821)의 ‘성시전도시’에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나온다.
“협객을 사모하는 풍모가 남아…문득 의기투합하는 자를 만나면 술집과 찻집에서 손바닥을 부딪히네.(酒樓茶肆掌一抵)”
다음 구절도 걸작이다. “취한 뒤엔 고담준론, 공자들을 압도하며 한평생 호화로움 언제나 자신한다”(<산목헌집>)는 것이다. 만나면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허세를 부리고, 술에 취하면 큰소리 뻥뻥 치면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해대고….
■200년전 풍물기행
이 ‘성시전도시’에는 다소 한계가 있다.
서울의 뒷골목 풍경을 생생하게 표현했다지만 작자들은 거개가 사대부 출신이었다. 게다가 ‘성시전도시’는 한문시다.
사대부가 아니라 서울의 뒷골목을 직접 누빈 것으로 추정되는 중인계층이 쓴 200년전 서울풍물지가 있다.
무엇보다 순한글로 된 가사집이다. 그것이 1844년(헌종 10) ‘한산거사’(중인 추정)라는 인물이 쓴 <한양가>이다.
그런데 이 ‘한양가’는 요즘의 3분짜리 노래 한 곡이 아니다. 대작이다.
‘천지개벽하여(1구) 일월이 생겼어라(2구)…’로 시작하는 가사는 1600여구까지 이어지는 장편이다.
<한양가>는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각종 의례 및 행사, 놀이, 공연 등을 풀이해주고 있다.
마침 국립한글박물관이 대작 한글가사인 <한양가>에 담겨있는 200년전 서울 풍경을 소개하는 특별전(‘서울구경 가자스라, 한양가>)을 2024년 2월12일까지 열고 있다.
행사에 발맞춰 <한양가> 학술대회까지 열렸으니 이 기회에 <한양가>를 한번 소개해보고자 한다. 사실 <한양가>는 한글 가사라지만 워낙 고어체인 탓에 일반인들은 여전히 접근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해제를 토대로 감상해보면 200년 전의 서울 풍물을 주제로 들을 수 있는 ‘해설을 곁들인 라이브 중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양가>는 우선 ‘한양(서울)은 하늘이 내린 왕도이자 해동의 으뜸’이라고 소개한다.
‘외관도 화려하고 문물도 가득하다’고도 한다. 그렇게 낙관적인 분위기로 관람객들을 궁궐로 이끈다.
“…전각마다 한가운데 3층 보탑(임금 자리) 높이 두고…한편의 보불(임금의 예복에 수놓은 도끼와 ‘亞’자 문양) 병풍에 엄위(위풍당당)한 그린 도끼…제간거흉(간악함을 흉함을 제거)하는 기상, 제왕의 위엄이요.”
얼마나 친절한 설명인가. 병풍의 도끼 그림은 간사하고 흉함을 제거하려는 군주의 기상이자 위엄이라고 한다.
■조선판 ‘삐끼’
<한양가>가 그리는 시장(시전)의 모습도 자못 생생하다.
“청포전(점포의 일종)에 당물화(중국 수입물품)을 진열했다…몽골산 무명 및 고약(곪을 때 바르는 약), 감투모자 회회포(중앙 아시아산 베)…민강(생강을 설탕물에 조린 과자), 사탕·오화당(오색사탕)·연환당·옥춘당(쌀가루 사탕)….”
직물은 물론 약과 군것질 거리 등 중국 수입 잡화의 이름은 오로지 <한양가>에서만 보이는 자료이다.
‘여립군(列立軍·여리꾼)’의 모습도 보인다.
“큰 광통교 넘어서니 육의전 여기로다. 일 아닌 여립군과 물화맡은 전시정은…사람 불러 흥정할제 경박하기 측량없다.:
여립군, 혹은 여리꾼은 시쳇말로 ‘삐끼’이다. 가게 앞에 서있는 사람을 끌어들여 물건을 사게 하고 주인에게서 수고료를 받는 자이다. ‘여리꾼’ 이야기는 <한양가>에서만 보인다.
<한양가>에는 1843년(헌종 9) 헌종이 건릉(정조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릉)과 헌릉원(사도세자와 부인 혜경궁 홍씨 묘)을 행차한 장면도 묘사되어 있다. 또 능행에서 돌아온 헌종이 과거시험을 치르는 모습도 들어있다.
■과거시험장의 ‘오픈런’
그 중 부정행위가 난무한 과거장의 모습을 생생한 필치로 그려낸게 눈길을 끈다.
<한양가>는 ‘밤중에 궁궐 문을 여니…각색의 등불이 들어왔다. 마치 새벽별 흐르는듯 기세는 백전일세, 쏜살 같이 빠르다’고 했다. 궁궐 앞에서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면 ‘와!’하고 달려가 자리를 맡아두었다는 이야기다. 왜 ‘오픈런’으로 자리싸움을 벌였을까.
요즘처럼 수험번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조건 먼저 들어가서 현제판(懸題板·시험문제를 내거는 널판지)에 게시되는 문제를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판뷰’라고나 할까.
그렇게 치열한 자리싸움을 벌였으니 시험은 정상적으로 치렀을까. <한양가>는 “문제를 받아들고 각자의 자리에서 (예상문제지 및 답안지, 참고서적 등을 담은) 책행담(책가방)을 열어 답을 풍우처럼 지어낸다”고 했다.
그렇다면 별문제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 답안을 작성하는 자가 응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옆에 앉아있던 거벽(문장 담당)이 구구절절 답안을 읊어대고, 사수(글씨 담당)가 일필휘지로 써내려간다.”(<한양가>)
즉 ‘거벽’이 책가방에 숨겨온 예상답안지나 참고서를 꺼내 답안을 지어내면 ‘사수’는 촌각의 지체없이 글씨를 써서 제출했다는 것이다. 그럼 수험생(거자)은 무엇을 했을까. 가만 앉아있기만 했다.
<한양가>에 묘사된 부정행위는 김홍도의 ‘공원춘효도’에도 100% 똑같이 그려져 있다.
■별감 100명을 위한 대규모 공연
그런데 연구자들은 <한양가>의 으뜸은 전체 분량의 17%에 달하는 ‘승전놀음’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이 ‘승전놀음’은 오로지 이 <한양가>에만 소개되지 다른 자료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
‘승전(承傳)’은 ‘왕명을 전달하는’ 하급관리를 뜻한다. 궁궐에서 액정서 소속의 잡직에 해당하는 ‘별감’들이다.
액정서는 바로 왕명의 전달과 알현, 그리고 왕의 붓과 벼루, 궁궐문의 열고 닫음, 궁궐의 설비 등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그렇다면 ‘승전놀음’은 궁중의 별감들을 위한 공연이라 할 수 있다.
‘구경가자 구경가자’로 시작되는 <한양가>의 ‘승전놀음’은 북일영(경희궁 북쪽 훈련도감 분영)의 정자에서 열렸다.
‘눈빛같이 흰 휘장에 구름 같은 높은 햇볕 가리개(차단막)’ 등으로 화려한 무대를 꾸며놓고 본격적인 공연을 펼친다.
“금객(거문고 연주자) 가객(가수) 다 모였구나. 거문고 임종철이, 노래에 양사길이, 계면(슬픈 곡조)에 공득이…생황, 퉁소, 죽장고, 피리, 해금…각색의 기생 들어온다…내의녀, 침선비, 공조 계집종(기녀 역할), 혜민서 의녀(기녀 역할)…늙은 기생, 젊은 기생, 어린 기생…”
장안의 내로라는 연주자·가수는 물론 추월·관산월·연앵·부용·영산홍·채봉·금옥·초선·매향 등 기녀들까지 총출동했다.
“차례로 늘어앉아 놀음(공연)을 재촉한다…어린 기생…우조(남성적이고 씩씩한 소리)라 계면(단조)이며…‘춘면곡’과 ‘처사가’, ‘어부사’, ‘상사별곡’, ‘황계타령’, ‘매화타령’ 등이 듣기 좋다…”
이중 ‘춘면곡’은 임을 여의고 괴로워하는 남자의 감정을 읊었다. ‘상사별곡’은 이별한 연인의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했다. ‘황계타령’은 하루아침에 임과 이별한 후의 마음을 전했다. ‘매화타령’은 기녀들의 복잡한 마음을 노래한 곡이다.
“기생들은…(영산회상곡의) 웃영산·중영산·잔영산 입춤(춤꾼의 감정에 따라 자유롭게 추는 춤)추니…배따라기 춤이며 대무(마주 서서 추는 춤), 남무(기생이 쪽빛 창의 입고 추는 춤) 다 춘 후에…허리를 잔뜩 매고 상모 단 노는 칼을….”
노래와 연주, 춤까지 삼위 일체가 어우러진 대규모 공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별감=기방의 기둥서방
그런데 <한양가>를 보면 흥미로운 구절이 보인다. 이 공연에 ‘난번 별감(당직근무를 마친 별감) 100여명이 참석했다’는 것이다. 궁금하다. 왜 이날 공연이 별감들을 위한 페스티벌로 치러졌을까.
이들의 독특한 신분 때문이다. 별감은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그리 높은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임금(혹은 왕비나 왕세자)을 지근거리에서 모셨기에 그 위세는 어지간한 양반 못지 않았다.
문필로 출세할 수 없었던 이들은 종종 조선의 밤과 뒷골목을 넘나드는 ‘유흥가의 황제’로 군림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특별한 배경이 있었다. 18세기초 대동법의 확대시행으로 각 지방에서 나라에 바치던 공물을 쌀(혹은 베와 동전)로 통일하게 됐다. 그러자 변화가 일었다.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쌀이 한강의 포구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게 되면서 물류량이 급증한다. 조정은 거둬들인 쌀을 팔아 필요한 물품을 시장에서 사서 쓰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시장이 발달했다. 조정이 필요한 물품을 주문받아 생산하는 민영수공업도 활발해졌다.
서울에는 다양한 물화가 넘쳤고, 저잣거리에는 유흥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예전 관리가 기생의 집에 조용히 찾아 하룻밤 머물렀던 공간이던 기방 문화도 혁명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이전에는 없었던 업종이 생긴 것이다. 그것이 기방의 ‘기부(妓夫·기둥서방) 제도’였다.
당시 서울의 궁중연회에 동원된 지방출신 기생들은 관으로부터 별도의 여비를 받지 않았다. ‘각자도생’이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숙소와 생활비가 큰 문제였다. 이때 기녀들의 의·식·주를 주선하면서 기방영업도 시킨 자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기부(妓夫)였다. 조정은 아예 기부가 될 수 있는 직업군을 정해놓았다.
즉 서울의 경우 궁궐의 별감, 포도청 군관, 승정원의 사령, 의금부 나장, 궁가나 외척의 겸인(청지기), 그리고 무사 등이었다. 그중 왕과 왕비, 세자의 호위를 맡는 등 힘깨나 썼던 무예별감은 더더욱 ‘유흥가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랬으니 <한양가>에 등장하는 대규모 공연은 어땠을까 짐작할 수 있다.
장안의 유흥계를 장악했던 별감이 100명 넘게 모이는 행사가 아닌가.
당대 내로라하는 유명가수와 연주자. 그리고 서울에서 활동했던 모든 예능 기녀들이 총동원되었을 것이다.
■‘백만 교태’ 피우고 입장한 기생들
별감의 위상과 관련해서 <한양가>의 한 구절이 주목을 끈다. 공연장에 들어서는 기생들의 모습이다.
“각색 기생 들어온다. 예사로운 놀음에도 치장이 놀라운데 하물며 승전 놀음, 별감의 놀음인데 평범하게 치장하랴.”
공연 기녀들의 몸치장은 평소에도 화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그들을 관리하는 별감, 즉 일종의 기획사가 주최한 행사이니 얼마나 멋들어지게 몸단장을 했겠느냐는 것이다.
“얼음 같은 누런 전모(햇빛 가리개) 자지갑사(자줏빛 고급 비단) 끈 달고 구름 같은 허튼머리 반달같은 쌍얼레빗으로 솰솰 빗겨 고이 빗겨 조각달 좋게 땋고….”
<한양가>는 온갖 수식어로 공연장에 입장하는 기녀들의 행색을 소개한 뒤 그 모습을 한마디로 정리한다.
“…(온갖 몸단장을 한 기녀들이) 백만 교태 다 피우고 모양 좋게 들어온다.”
■조선의 패션리더 ‘별감’
그런 멋쟁이 기녀들을 관리하는 별감들은 어떻겠는가. 그와 관련해서 <한양가>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보인다.
‘별감들 거동보소. 난번별감(당직 끝난 별감) 100여명이 맵시도 있거니와 치장도 놀라옵사…’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랬다. 별감은 짝궁인 기녀와 함께 당대 조선의 패션리더였다. 무엇보다 왕와 왕비, 세자를 지근거리에서 지킨 이들이었으니 거개가 헌헌장부(軒軒丈夫)였을 것이다. 게다가 별감의 ‘시그니처’는 멀리서도 돋보이는 홍의(붉은 옷)였다.
홍의는 다홍색 생초(삶지 않는 명주실로 짠 비단)로 만든다. 신윤복(1758~?)의 풍속도 ‘유곽쟁웅’과 ‘주사거배’, ‘야금모행’, 유숙(1827~1873)의 ‘대쾌도’에는 한눈에도 도드라진 빨간 패션의 별감이 보인다.
<한양가>는 이 멋쟁이 패션리더인 별감의 옷차림새를 한참 설명한다.
“편월(조각달 모양) 상투…곱게 뜬 평양 망건, 외점박이 대모(거북등껍질) 관자(망건 줄 꿰어매는 작은 고리)…. 상의원(궁궐 옷제조 관청) 자지팔사(8가닥으로 꼰 자줏빛 노끈) 초립 밑에…”(머리치장)
“다홍 생초(삶지않은 명주실로 짠 비단) 홍의(붉은 옷) 숙초 창의(삶은 명주실로 짠 비단) 받쳐입고 보라누비 저고리며 외올뜨기 누비바지….”(몸치장)
옷은 남들의 눈에 띄는 붉은 색을 입고 그 속에 다양한 옷을 겹쳐 입는 ‘레이어드 룩’(여러 단을 연결한 패션)이다.
“…오색 비단 괴불줌치(주머니 끈 끝에 차는 노리개) 향 주머니 섞어 차고…삼승 버선(성글고 굵은 베로 만든 버선) 수눅(버선의 가운데 바느질선) 파서 맵시있게 하여 신고….”(허리 및 발치장)
■19세기가 태평성대인가
<한양가>에는 다소 의아한 대목이 보인다. 전국에서 거둔 세금을 한강에서 궁궐로 실어나르는 모습을 묘사했다.
“한강에 조운선이 끝없이 드나들고, 세금을 가득실은 수레 행렬이 궁궐(첫머리)~한강(끝머리)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게다가 “나라창고에 10년 곡식을 비축했다”고도 했다. 이 대목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때는 바야흐로 19세기 중반인 1844년 즈음의 일이다. 조선 개국 후 450년이 흘러 갖가지 모순이 폭발되는 시기였다.
이른바 삼정(전정·군정·환정 또는 환곡)의 문란으로 홍경래의 난(1811)과 진주농민봉기(1861)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여기에 세도정치의 심화로 국정이 특정 세력에 의해 농단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10년 곡식을 비축했다’니….
그러니 <한양가>는 당대의 현실을 외면한 ‘찬양가’로 여겨질만하다.
그러나 달리 보면 그러한 이상향을 갈구하는 작자의 소망을 반영한 가사일 수도 있지 않을까. 반어법으로…. 한편으로는 또 이런 생각도 든다. 어지럽고 혼란한 정치·사회 상황 속에서도 백성들은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일상의 삶이라는 것을…. 역사란 일면만 보면 안된다는 것을 <한양가>가 증거해준다.(이 기사를 위해 강명관 부산대 교수, 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전통한국연구소 연구원, 고은숙 국립한글박물관 학예연구관, 정은진 국립한글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강명관,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강명관, <한양가>, 신구문화사, 2008
고은숙·강명관·홍순민·김지영·유재빈·노경희, <한양가로 그려낸 조선후기 한양>(학술대회 발표집), 국립한글박물관, 2023
송지원, ‘19세기 <한양가>에서 노래한 조선의 음악 문화’, <한양가로 그려낸 조선후기 한양>, 국립한글박물관, 2023
양보경, ‘한양가에 비친 조선 후기 서울의 모습’, <토지연구> 5,4, 한국토지개발공사, 1994
이민주, ‘<한양가>를 통해 본 조선 후기 패션 리더, 별감과 기생’, <한양가로 그려낸 조선후기 한양>, 국립한글박물관, 2023
조재희, ‘조선후기 서울 기생의 기업 활동’, 이화여대 석사논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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