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의 창씨명이 바로 백천의칙(白川義則), 즉 시라카와 요시노리이다.”
얼마전 윤봉길 의사(1908~1932)와 윤의사에게 ‘도륙된’ 시라카와 요시노리(1869~1932) 관련 기사를 쓰자 제법 달린 댓글이 있었다. 즉 ‘시라카와 요시노리(백천의칙)=백선엽의 창씨명’이라는 댓글이었다.
그 와중에 홍범도 장군(1868~1943) 등의 육사 교정 흉상 문제가 불거지자 소환되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백선엽 장군(1920~2020)이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홍범도를 비롯한) 독립영웅 다섯분의 흉상을 없애고 그 자리에 백선엽 장군 등의 흉상으로 대치한다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 언급했다.
“그 분(백 장군)은 일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일제에 충성하는 길도 마다하지 않고 선택했지만 철거한다는 다섯 분의 영웅은 처음부터 나라를 찾기 위해 생명을 걸고 시작했다.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
■‘홍범도 죽이기=백선엽 살리기?’
육군 측은 결국 홍범도 장군의 흉상은 독립기념관으로, 네 분의 흉상은 교정 다른 곳으로 각각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다만 비운 자리에는 백장군의 흉상 설치를 고려하지 않고 “빈 공간으로 두는 방안이 유력하다”고 밝히기는 했다.
그러나 백선엽 장군과 관련해서는 지난 7월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7월24일 국가보훈부가 백장군의 국립현충원 홈페이지의 안장자 정보 비고란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문구를 삭제했다.
다음 날인 25일 2018년 육사 홈페이지에서 삭제했던 백선엽 장군 관련 웹툰(‘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을 복구했다.
이후 “백선엽이 윤봉길 의사가 죽인 시라카와 요시노리의 한자 이름인 ‘백천의칙’으로 창씨 개명했다”는 비판기사와 칼럼 등이 쏟아졌다. 창씨개명 이유가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존경했기 때문이라는 덧붙임도 있었다. 그런 인물을 평생 풍찬노숙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과 같은 반열에 세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 기사를 찾아봤더니 2020~2021년 당시 김원웅 광복회장(2022년 작고)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백선엽이 평소 존경하던 시라카와 요시노리의 이름을 따 ‘백천의칙’으로 창씨개명했다”고 비판하면서 더욱 이슈화했다.
■‘백선엽은 시라카와 요시노리인가’
기자가 시쳇말로 여기에 꽂혔다. 만약 백선엽 장군이 시라카와 요시노리의 이름을 따서 ‘백천의칙’이라 창씨 개명했다면?
그리고 그런 인물을 ‘국군의 창설자’니 뭐니 하고 ‘구국의 영웅’으로 대접하면 어찌 되는가. 그럼 윤봉길 의사와 윤의사 의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건 허투루 넘길 일이 아니다.
해서 ‘팩트체크’에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봐도 물적 증거를 찾기 어려웠다. 관련 기사·칼럼들은 ‘시라카와 요시노리=백선엽의 창씨명’으로 전제하고 시작했다. 하지만 증거를 제시한 기사·칼럼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경향신문·한겨레 출신인 김효순 대기자(현 리영희재단 이사장)의 단행본(<간도특설대>·2014·서해문집) 말미에 주목할만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즉 만주국(일본 괴뢰국) 헌병 출신 모임인 ‘만헌회’가 펴낸 책(<만주국군 헌병의 회고-5족의 헌병>(1984)에 ‘백선엽의 창씨명=백천의칙’이라는 구절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백선엽=백천의칙’을 서술한 인물은 1945년 5월 만주국 옌지(延吉)의 헌병분단장으로 부임한 소네하라 미노루(曾根原實)였다. 소네하라는 40명으로 구성된 헌병분단을 이끌고 있었고 휘하에 백선엽 중위를 두고 있었다.
그 소네하라가 만주국 헌병 출신으로 한국군 장군에 오른 ‘백선엽 소개글’을 쓰면서 ‘백선엽의 창씨명=백천의칙(시라카와 요시노리)’이라 붙였다는 것이다. 김효순 대기자는 소네하라의 글을 전하면서 “백선엽이 시라카와 요시노리의 존재를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쓴 것인지 당사자외에는 알 수 없다”고 조심스레 마무리지었다.
김효순 기자의 단행본 <간도특설대>의 출간 이후 간도특설대가 부각되었고, ‘백선엽의 창씨명=시라카와 요시노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해졌다.
■‘백천정웅과 백천의칙’
그러나 필자는 김효순 대기자의 <간도특설대> 단행본을 읽고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백선엽=백천의칙’을 기술한 소네하라의 글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해서 민족문제연구소에 관련 자료가 있는지 연락을 했더니 이용창 연구위원이 낭보를 전했다.
소네하라의 소개글 원문과 함께, 백선엽의 창씨명을 가늠할 수 있는 비공개 자료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이었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소개한 두 자료에 따르면 백선엽의 일본 이름은 하나가 아니다.
백선엽 장군은 1941년 12월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 제9기생으로 수석 졸업했다.
그런데 졸업 직전인 10월 작성된 <만주군관학교생도 명부>(전우명부)에 ‘조선 평양부 신리 216번지, 21세, 백천정웅(白川正雄)’이라 했다. ‘백천정웅(시라카와 마사오)=백선엽’이 틀림없다는게 이용창 위원의 설명이다.
회고록에 따르면 백선엽은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났고, 6∼7세에 평남 평양부 신리 216번지로 이사했다.
그렇다면 백선엽의 창씨명은 ‘백천의칙’이 아니라 ‘백천정웅’이란 얘기인가.
그럼 ‘백선엽 창씨=시라카와 요시노리’설은 가짜뉴스인가. 그런데 꼭 그렇지 않다.
김효순 기자가 <간도특설대>에서 인용한 <만주국 헌병의 회고> 중 소네하라의 ‘백선엽 소개글’에는 분명히 ‘백선엽=백천의칙(白川義則)’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1940년 2월부터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에 따라 백선엽은 ‘백천’으로 성을 바꾼 일본 이름을 두 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용창 위원은 “창씨개명이 강제되면서 형식적으로 한국식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만 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백선엽은 ‘창씨’(백천)와 개명’(정웅)을 동시에 했다”면서 “그런데 어느 때인가 다시 ‘의칙’으로 ‘개명’한 것”이라 해석했다.
이 위원은 “<친일인명사전> 발간(2009년 11월) 당시에는 백선엽의 창씨개명을 뒷받침하는 1차 자료를 확인하지 못했다”면서 “증보판 발간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면서 1차 자료(백천정웅)와 2차 자료(백천의칙)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만주 시절 상관은 ‘백천의칙’이라 했다
여기서 소네하라 미노루를 소환해야겠다. 소네하라는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5~8월 사이 백선엽과 함께 근무한 상관이다. 그런 그가 왜 굳이 ’백선엽’이라는 이름 밑에 ‘옛 이름(舊姓) 백천의칙’이라 했을까. 소네하라의 기억이 잘못됐을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소네하라는 백선엽의 소개글을 쓰면서 아주 인상적인 촌평을 남겼다.
“…백(선엽)씨는 도쿄에 올 때마다 나(소네하라)에게 전화를 걸고, 만주시대 짧은 기간 상관에 지나지 않던 나에게 아직도 경의를 표해준다. 매우 의리 있고 애정이 많은 인물이다.”
소네하라는 백선엽과 불과 3개월간 생활했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즉 1945년 8월 일제 패망으로 만주국군이 해체되어 평양으로 떠나는 백선엽이 소네하라에게 거금인 300원을 건넸다는 것이다.
백선엽은 “비상금으로 쓰라고 어머니가 주신 돈인데 대장(소네하라)이 한 푼도 없는 것을 알고 있으니 받아 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강한 인상을 받은 상관(소네하라)이 백선엽의 일본 이름(시라카와 요시노리)을 착각할 수 있을까.
또 <만주국 헌병의 회고> 책의 화보에는 1969년 9월 교통부장관이 된 백선엽을 축하하는 기념사진까지 실려있다. 물론 소네하라 미노루 역시 그 사진에 등장한다. 위키피디아 일본어판에서 ‘간도특설대’를 검색하면 소속대원 명단 중에 ‘백선엽’=백천의칙(白川義則·시라카와 요시노리)’라고 표시되어 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몰랐을까
백선엽이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누구인지 모르고 ‘우연히’ 창씨개명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상식적이지 않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최고의 인텔리가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모를리 없기 때문이다.
에히메현(愛媛縣) 출신인 시라카와(1869년생)는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어려서부터 현청의 급사로 일하며 고학을 거듭, 일본육사(1기)를 거쳐 육군 최고위직을 지낸 ‘입지전적 인물’이다.
육군사관학교장과 각급 사단장, 육군차관, 관동군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1927년 육군대신으로 입각했다. 특히 일본군과 중국 북벌군이 충돌한 지난(濟南) 사건(1927~28)과, 일부 관동군이 친일 만주군벌인 장쭤린(張作霖·1873~1928)을 폭살시킨 ‘장쭤린 사건’(1928) 등을 처리함으로써 자타공인의 ‘중국통’으로 일컬어졌다.
시라카와는 1932년 1월 29일 ‘상하이(上海) 사변’이 발발하자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렇게 일본 육군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했던 시라카와는 입신 출세를 바라는 젊은이들의 롤모델이었다.
■호흡·맥박·혈압까지 현장중계한 언론
그런 거물이 윤봉길 의사의 폭탄세례를 받은 것이다.(1932년 4월29일)
시라카와의 몸상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처음엔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칸막이를 치고 누워있던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1875~1962) 9사단장(중장)과 큰 소리로 농담을 나눴고, 좋아하는 브랜디까지 마셨다”고 했다. “3~4주 후면 너끈히 퇴원할 것”이라는 보도까지 나왔다. 그러나 5월 21일부터 상황이 급변한다.
장출혈로 인한 혈변이 나오고 폐혈증세가 본격화했다. 23일 새벽 시라카와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혈압·맥박·호흡·수혈량 등이 시간대별로 언론에 보도됐다. 시라카와를 총애했던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나서 ‘사주(賜酒·임금이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리는 술)’와 함께 욱일 대훈장과 남작의 작위까지 내려주었다.
시라카와는 마지막으로 위장과 대장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지만 5월26일 오전 사망했다. 일본 언론은 “국난으로(일본 전쟁사에서) 군 사령관이 순국한 것은 처음”이라면서 “장례식은 육군장으로 치를 것”(<도쿄 니치니치>·<오카사 니치니치> 5월27일자)이라 전했다. 일본이 윤봉길 의거를 전쟁으로 개념정리한 꼴이 됐다.
일본은 윤봉길 의사를 가만두지 않았다. 상하이 파견 일본군 고등군법회의는 시라카와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무렵인 5월25일 윤 의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일제는 그해 12월19일 윤의사의 무릎을 꿇리고 십자가 형틀에 묶은채 총살형을 집행했다. 보복행위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윤의사는 순국하는 그 순간까지도 추호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엄청난 특전이 주어진 간도특설대
그러니 백선엽이 평소 존경했든, 아니든 ‘백천의칙’이라는 일본 이름을 썼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물론 간도특설대 경력은 말할 것도 없다. 간도특설대가 무엇인가.
1938년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항일세력 토벌을 위해 결성한 조선인 특수부대이다.
조선인의 지원을 독려하는 사설을 게재한 <만선일보> 1940년 2월16일자의 논조를 보자.
“제일선에서 총을 들고 국방의 중책을 짊어지겠다는 작열하는 애국정신을 갖고 지원병을 혈서로 지망하며 특설부대의 용사가 되기를 무상의 광영으로 아는…그들의 지고지위한 애국의 단충에 스스로 옷깃을….”
신문이 말하는 ‘국방의 중책’이나 ‘애국의 단충’은 조선(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다. 두말할 것 없이 일본과 일왕을 향한 충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간도특설대의 <부대가>를 보라.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 떨쳐 야마토혼(大和魂·일본 정신)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 받는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일본혼만 고취시킨 것은 아니다. <조선일보> 1938년 10월25일자는 조선총독부의 공문을 인용하여 간도특설대원들을 위한 특전을 대대적으로 소개했다. 즉 228명으로 구성되는 조선인 특수부대의 합숙훈련기간은 3년이며 성적 우수자는 준장교 이상으로 승진시켜 만주국 군대에 편입시킨다는 것이었다. 성적이 나빠도 도태시키지 않았다.
“성적이 양호하지 못한 군인도 적당한 농지를 주어 평생 생활을 보장한다…젠다이성(간도성·間島省)의 농촌 후방을 조선인에게 주어 개발하도록 하기 위함…합숙훈련 중에도 상당한 보수를 지급…제공하는 농지도 평생 생활에 충족할만….”
이런 특전 때문이었는지 “지린성(吉林省) 허룽시(和龍市)에서만 2000여명이 지원해서 86명이 예비합격했다”(<만선일보> 1940년 1월31일자)는 기사가 보일 정도다.
이 대목에서 간도특설대의 친일행위를 논하기에 앞서 “일신의 출세와 영달의 길을 택한 자들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분들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느냐”는 따끔한 한마디가 먼저 떠오른다.
■대서특필한 전과를 올린 간도특설대
그렇게 탄생한 간도특설대의 임무는 만주의 항일세력 토벌이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만주지역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던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상대로 총 108차례 토공(토벌) 작전을 펼쳤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고, 그밖에 많은 이들이 체포되고 강간·약탈·고문의 고초를 겪었다.
1941년 만주국 봉천군관학교(9기)를 졸업한 백선엽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부임한다. 그후 1944~45년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戰·중일전쟁 중 일본의 최후공세)에 동원되어 토벌 활동에 종사한다.
백선엽은 일본에서 일본어로 출간한 <대게릴라 전 미국은 왜 졌는가>와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 등에 국내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간도특설대 관련 이야기들을 제법 담아놓았다.
백선엽은 “내가 간도특설대에 부임했던 1943년초에는 게릴라(항일투쟁)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다”고 한발 빼면서도 “중위였던 나는 베이징(北京) 동남지역에서 팔로군과 10차례 교전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면서 “게릴라 활동은 그치지 않았고 일본이 패배하는 그날까지 만주 동부의 치안이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고 제법 상세하게 설명했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부터 41년 봄까지 동부 만주에서 대규모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했다…그 중에서도 항상 대서특필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특설대였다.”
■“평화를 위해 토벌작전에 나섰다”
백선엽은 여기서 매우 의미심장한 사실을 털어놓는다.
“우리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여기서 백선엽의 다음 발언을 들어보라.
“우리(간도특설대)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다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백선엽은 “그렇다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도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백선엽의 언급이 이어진다.
“주의 주장이야 어찌되었건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군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 특설대에서는 대원 한사람 한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지고 토벌에 임했다.”
항일투쟁을 게릴라로 표현하고, 평화를 위해 그들을 토벌하는 것이 칼자루를 쥔 군인의 사명이었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것도 일본에서, 일본어로 쓴 책으로…. 윤봉길 의사가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이 기사를 위해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김효순 리영희재단이사장이 자료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7>, 2009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2009
김효순, <간도특설대>, 2014,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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