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희생 카드 ‘요동파병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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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리 5초소를 지났다. 이른바 민북지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늘 느끼지만 철원 쪽에서는 민통선을 과연 지나기나 한 것인지 실감할 수 없다. 비무장지대답지 않은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논길을 따라 2㎞쯤 달리자 제법 그럴듯한 산소가 마주 보고 있다. 철원 동송읍 하갈리다.

“저기는 김응해 장군 산소고요. 저기 보이는 곳이 김응하 장군 묘소입니다.”

# ‘충무공 김응하’ ‘요동백 김응하’

형제는 용감했다는 말이 딱 맞다. 형(김응하 장군·1580~1619년)은 요동파병군을 이끌고 후금군과 접전을 벌인 뒤 전사했고, 동생(김응해 장군·1588~1666년)은 병자호란 때 청군과 결사항전을 펼쳤으니 말이다.

김응하 장군의 후손 김규장씨(77·안동 김씨 부사공파 회장)와 함께 수풀이 무성한 산소에 올랐다.

산소는 북한이 뚫은 제2땅굴 전방 6㎞ 앞에 서 있다. 산소 맞은 편엔 일명 아이스크림 고지(삽슬봉)가 버티고 있다. 한국전쟁 때 피아간 얼마나 포를 쏘아댔는지 고지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렸다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장군의 신도비(1899년 건립)를 보면 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실감할 수 있다.

“한국전쟁 때 얼마나 총을 쏘아댔는지 이렇게 됐네요.”

김규장씨가 허허 웃고 만다. 제초제를 뿌려야 그나마 관리가 되는 듯 키만큼이나 자란 잡초가 산소 오르는 길을 방해했다. 김응하 장군의 산소는 장군의 아버지 산소보다 위쪽에 모셔져 있다. 그 연유를 물으니 전설에 가까운 대답이 돌아온다.

“(장군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지금 이 자리(장군의 묘 자리)에 아버님을 모시려 했답니다. 그런데 어떤 스님이 그곳은 빈장의 자리(빈 산소)이니 모시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네요. 덧붙여 바로 그 밑에 아버지 산소를 모시면 자손 중에 장군이 나온다고 했답니다.”

딱 맞았다. 훗날 아들 김응하는 장군이 되었고, 요동땅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그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채 이곳에 빈 묘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장군 덕분에 가문은 조선 대대로 빛이 났어요. 조정에서는 1년에 두 번씩이나 원을 들어주었어요(조상 덕에 과거없이 출사의 기회를 1년에 두 번이나 주었다는 뜻). 명나라 황제는 장군에게 요동백이라는 관직을 추증했어요.”

6월20일 천안에서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조선조 9명의 ‘충무공’ 가문이 상견례를 연 것이다. 9명의 충무공은 이순신·조영무·이준·남이·김시민·이수일·김응하·정충신·구인후 등을 뜻한다. ‘충무공’은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며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지킨 무장들에게 내린 시호다.

# 이길 수 없었던 파병군

바야흐로 조선이 임진왜란을 치르던 때 만주 벌판에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한낱 오랑캐로 치부되던 여진족 일파인 누르하치가 고개를 쳐든 것이다. 만주 전역을 석권한 누르하치는 1589년쯤 왕을 칭했고, 1616년에는 명나라에 조공을 중지하는 조치를 내린다.

1618년 명나라는 대대적인 후금정벌을 계획하고 조선에 파병을 요청한다. 하지만 아직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 후금의 위세를 온 몸으로 느낀 광해군은 썩 내키지 않았다. 광해군은 첩자를 통한 정보전을 바탕으로 기미책(기미策·견제는 하면서도 관계는 끊지 않는 외교)을 펴면서 자구책을 꾀하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에 따르면 광해군은 “싸움이 벌어진다 해도 사자(使者)는 그 사이에 있어야 한다(古人臨戰 亦使在其間)”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광해군은 조선의 피폐한 경제력, 나약한 군사력, 상존하는 일본의 침략 위협에 두렵고, 출병요구에 황제의 칙서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출병 요청을 따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임란 때의 재조지은(再造之恩·망하게 된 것을 구해준 은혜)을 갚아야 한다는 명의 협박과 조정 신료들의 아우성에 광해군은 끝내 굴복하고 만다. 광해군은 요동파병군 도원수에 강홍립, 부원수에 김경서 그리고 조방장에 김응하(선천군수)를 각각 임명했다. 그러면서 1만3000명의 원군을 파견한다. 그러나 ‘이길 수 없는 전쟁’임을 뻔히 알고 있었다. 광해군은 또 하나의 궁여지책을 세웠던 것 같다.

강홍립에게 “관형향배(觀形向背·정세를 살펴보고 행동하라)”라는 밀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원군은 그야말로 느림보 행군을 펼친다. 1618년 7월 모인 파병군은 무려 7개월이 지난 이듬해 2월, 느릿느릿 압록강을 건넌다. 명나라군의 군사력은 정말 엉망이었다.

# 두 장의 카드 쥔 광해군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 힘쓰라.”(1619년 2월3일 광해군일기)

“중국의 동쪽 군대가 매우 약하여 오로지 우리 군대만 믿고 있다니 한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당초 내가 염려했던 일이다. 군사들을 호랑이 굴로 몰았으니 (비변사는) 이 점을 생각하고 있는가.”(광해군 일기·1619년 3월3일)

애초부터 패할 전쟁이라는 것을 안 광해군은 강홍립에게는 “패하지 않을 방도만을 찾으라”고 지시했으며, 나중에는 ‘재조지은’ 운운하면서 파병을 강요한 신료들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3월4일 조선 조정에는 조·명 연합군이 심하(深河·사르후 전투) 후금군에 궤멸당했다는 비보가 들린다.

“크게 패전하였습니다. (김)응하는 혼자 버드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았는데…. 적은 감히 다가갈 수 없어 (응하의) 뒤쪽에서 찔렀는데 철창이 가슴을 관통했는 데도 활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랑캐들조차 (김응하의 분전에) 감탄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일 이 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의류장군(依柳將軍)이라 불렀습니다.”(광해군일기·1619년 3월12일)

그런데 김응하의 결사항전과 달리 총사령관(도원수) 강홍립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항복하고 만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이런 강홍립의 항복을 광해군의 현명한 실리외교와 묶어 설명하고 있다. 즉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강홍립은 ‘관형향배의 책략’에 따라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금에 어쩔 수 없이 참전했음을 알린 뒤 항복했다는 것이다. 후금과 조선과의 관계가 더 악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됐지만 누르하치와 전장을 누볐고, 꾸준히 광해군에게 후금의 사정을 밀서로 알렸다.

그렇다면 파병군 장수인 김응하 장군의 장렬한 전사는 한낱 ‘개죽음’인가, 절대 ‘괜한 죽음’이 아니었다.

김응하 장군의 죽음은 후금과 명나라 사이를 오가며 아슬아슬한 등거리 외교를 편 광해군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카드였다. 즉 광해군은 두 장의 카드를 쥔 셈이며, 한 장(강홍립의 투항)을 대후금 실리외교의 밑천으로, 다른 한 장(김응하의 전사)을 대명 명분외교의 재산으로 각각 쓴 것이다.

〈이기환 선임기자|철원 동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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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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