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도심 한복판서 끄집어 낸 ‘시전’
ㆍ‘서울 600년’ 서민의 삶 켜켜이
2003년 12월 말.
문화운동가 황평우씨가 종로 청진동을 기웃거렸다. 건설사(르메이에르 건설)가 주상복합건물 사업시행을 위해 낡은 기존 건물들을 철거하고 있었다. 재개발 면적은 8665㎡.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3만㎡ 이상의 공사를 벌일 때 문화재지표조사를 거쳐야 한다. 그러니 이곳은 지표조사 없이 공사를 진행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폭삭 주저앉은 그대로 확인된 조선시대 시장인 시전(市厘)의 행랑(行廊). 조선정부는 시전을 개설하면서 방-마루-방-창고를 하나의 단위(40평 정도)로 끊어 일반분양한 것으로 보인다. 장사가 잘 되는 이는 바로 옆 가게를 사서 확장한 흔적도 엿볼 수 있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제공>
모습을 드러낸 조선의 관영시장
“법도 법이지만, 도심 한복판을 재개발하면서 문화재 조사를 한다는 마인드가 있을 턱이 없었어요. 그걸 늘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는데, 마침 연말연시였기 때문에 공사장 경비가 소홀했어요. 그래 뒷문으로 살짝 들어간 겁니다.”
황씨의 눈에 심상치 않은 돌 2개가 보였다. 건물 기초석인 장대석(長臺石·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는, 길게 다듬은 돌)이었다. 즉시 문화재청에 ‘문화재를 발견했다’고 신고했다. 언론보도가 터지고, 도심재개발 때도 문화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삽시간에 형성됐다.
“공사 시행사와, 재개발을 학수고대하던 주민들은 화가 날 수밖에 없었어요. 문화재의 ‘문’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고,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뜬금없이 문화재 발굴 운운하니….”(황평우씨)
하지만 문화재가 발견된 이상 그대로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전문가들의 입회 아래 문화재청 조사가 이뤄졌고, 한국건축문화연구소(명지대 부설)가 본격 발굴에 들어갔다.
“맨 처음 여론은 재개발에 따라 피맛골의 훼손 여부에 초점이 맞춰졌어요. 하지만 우리는 조선시대 관영시장이었던 시전(市厘)의 존재 여부에 더욱 신경을 썼습니다.”(김홍식 명지대 교수)
발굴 결과는 놀라웠다. 조선 초기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600년간의 서울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6개의 문화층이 정연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조선 건국~15세기 중반(6문화층), 임진왜란 전후(15세기 후반~16세기·5문화층), 17~18세기(4문화층), 18세기 후반~개항 이전(3문화층), 개항~일제강점기(2문화층), 해방이후~현대(1문화층)까지….”
우선 시전의 행랑(行廊)이 정연하게 노출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시기인 5문화층에서는 30㎝의 소토층(燒土層·불에 탄 흔적)이 쭉 깔려있었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종로 시전을 비롯한 한양 전역이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이후 한참 복구되지 않았음을 증언해준다.
“특히 종로1가 25~26번지 사이에서는 4칸짜리 장옥(長屋)이 확인됐는데요. 전란으로 불에 탔고, 피란갔던 집주인이 돌아오지 못했음을 알려주고 있어요.”(장진희 한국건축문화연구소 연구원)
불에 폭삭 주저앉은 탄화 마루 밑에는 가공 중이었던 형석(螢石)이 한 무더기가 나왔고, 일본식 게다와 같은 나막신도 노출됐다.
“형석은 갓끈 같은 것에 장식할 수 있게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완성품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출토된 나막신 형태는 삼국시대까지 유행했고, 조선시대부터는 고무신 형식의 나막신을 신었다는 게 정설이었는데요. 이 발굴로 조선시대 초기 서민들도 게다 형식의 나막신을 신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장진희 연구원)
무엇보다 재미있는 사실은 조선 정부가 시전 행랑을 만든 뒤, 이를 일반에 분양했다는 것이다.
“발굴된 시전 행랑 구조를 보면 한결같이 ‘방-마루-방-창고’, 즉 2칸 40평 정도의 규모로 조성됐습니다. 그러니까 40평 단위로 일반분양했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 나란히 있던 두 행랑의 벽을 뚫어 연결시킨 흔적도 보이는데, 이는 시전을 운영하면서 돈을 번 사람이 옆의 행랑까지 사서 가게를 넓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김홍식 교수)
현재 ‘조선의 부활’을 알린 이 발굴 현장은 으리으리한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섰다. 그뿐이 아니다. 이 건물 맞은 편, 낙지집과 생선구이집 등이 늘어선 피맛골 일대의 음식점엔 지금 ‘2009년 1월말 가게 이전’을 알리는 공고가 집집마다 붙어있다. 낡고 허름한 가게들을 모조리 철거하고 마천루 같은 현대식 빌딩이 마저 들어설 참이다.
보상비까지 주고, 도시계획에 따라 조성된 시전(市厘)
“지금은 이렇게 괄시받고 있지만 조선 정부는 철저한 도시계획에 따라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면서 시전을 조성했어요.”(김홍식 교수)
시전 행랑을 조성하기 전까지 종로 일대는 ‘뻘층’이었다. 한양에 도성을 건설할 때 하천은 지금의 종로에서부터 청계천, 을지로까지 꼬불꼬불 질펀하게 흘렀다. 만약 이 뻘층의 위까지만 도성을 건설하면 도성의 계획인구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종로를 설정하고, 청계천을 중심으로 상업지구를 만들었다. 개천(청계천)을 최대한 남쪽으로 끌어내고, 적당한 거리를 두어 종로를 개설했다. 종로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통치기관인 궁궐이 배치되고, 남쪽으로는 개천을 중심으로 한 주거지와 상가를 두었다.
태종 14년(1414년)에는 종루~숭례문까지, 종묘 앞~동대문까지 길 양편에 시전 행랑을 지었으며, 종로 네거리에는 육의전(六矣廛·독점적 상업권을 부여받아 국가 수요품을 조달한 여섯 종류의 큰 상점)을 설치했다.
이 일대엔 이미 민가가 1486채나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 기와집이 126채나 되었다. 조선정부는 계획적인 행랑건설을 위해 이 민가들을 모두 철거했으며, 철거민들에게는 보상비를 지급했다.
“호조가 아뢰었다. ‘철거해야 할 기와집은 매 1칸당 저화(楮貨·여말선초에 발행된 지폐) 20장, 초가는 매 1칸당 10장을 주어야 합니다. 총 보상비로는 저화 1만3600장이 소요됩니다.’”(<태종실록 14년>)
거액의 보상비를 투입한 조선판 대규모 도시재개발이었던 것이다.
“발굴에서도 드러났듯 늪지와 비슷한 이 일대의 땅에서 습기를 모두 빼어 말끔하게 말린 다음 땅을 제대로 파서 다진 뒤 목책과 초석을 하여 행랑을 건설했어요. 상가 앞에는 2자 폭의 물도랑을 상가 앞에 파서 상가가 길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물리적인 조치도 취했고….”
피맛길(避馬)은 말을 타고 가던 관리가 상관을 만나면 그때마다 말에서 내려 허리를 굽혀야 했으므로, 그것이 너무 번잡스러워 종로 1~6가 행랑 뒷골목에 조성됐다. 그러나 요즘도 그렇지만 시장은 특히 불에 취약하다.
세종 8년(1426년) 큰 불이 일어나 2370채의 가옥과 116칸의 행랑이 전소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시전행랑을 비롯한 도성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청진동에는 우산과 생선, 자기 등을 판매한 시전행랑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청진동 발굴은 ‘조선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마디로 ‘조선의 재발견’이라고나 할까. 사실 조선은 고고학적 관점에서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던 주제거든. 워낙 문헌이 자세하니까 고고학 발굴로 구명할 수 있는 계제는 아니라는 인식이 있으니까…. 이 청진동 발굴로 조선의 역사, 그것도 서민들의 삶이 묻어난 생활유적이 고스란히 나왔으니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이때부터 도심 재개발 때도 빠짐없이 문화재조사가 선행되었으니까.”(조유전 토지박물관장)
보존과 개발의 두마리 토끼 잡는 법
철거를 앞둔 종로1가 피맛골의 점심 때 풍경. 서민들의 애환과 정취가 담긴 이 뒷골목도 재개발의 소용돌이 속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상훈기자>
그 사이 발굴기관인 한울문화재연구원을 운영하게 된 김홍식 교수는 2007년 탑골공원 옆 육의전 빌딩(종로2가 40번지) 신축 공사장에서도 시전행랑 등 조선시대 유구를 확인했다.
“청진동이 ‘조선 발굴’의 신호탄을 쐈다면 종로2가는 개발과 문화재보존의 모범사례로 평가할 만해요.”(조유전 관장)
7년간 땅값만 300억원을 들여 9층짜리 빌딩을 올리려던 건축업자(이영길씨·영동시티개발대표)는 유구 발견소식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건축공사가 좌절될 판이었으니까. 이영길씨는 하도 답답하여 인터넷을 뒤지다가 문화유산 보존운동을 펼치던 황평우씨를 만났다.
“지난 1월이었어요. 이영길씨에게 보존도 하고, 개발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알려줬어요. 건물을 짓되 육의전 유구 전체를 통째로 떠서 보존처리한 뒤에 지하공간에 전시하면 된다고…. 그런데 한번 만난 뒤에는 소식이 없더라고요.”(황평우씨)
이영길씨는 반신반의했다. 처음 본 사람을 어느 정도 믿어야 하나 하고. 그런 와중에 숭례문 화재가 터졌다. 이씨는 화재 후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황평우씨를 보고 그제서야 ‘믿을 만하다’고 여겼다. 의기 투합한 두사람은 들어서는 빌딩의 지하 1층을 지하박물관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동분서주했다. 보존과 개발의 두마리 토끼를 쫓는 두사람의 뜻이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과했다. 물론 우여곡절도 있었다. 올해 발굴에서 조선초기의 유구가 추가로 발굴됐기 때문이었다.
“발굴비는 계속 늘어나고, 박물관 건립에 드는 거액의 비용(15억원)까지…. 모든 부담을 건축주가 져야 했으니 얼마나 속이 쓰리겠습니까. 결국 건축주가 또 한번 양보하고, 문화재위원회와 서울시 등이 협조해서 추가로 발견된 선대유구까지 포함해서 전시하는 지하박물관 건립이 확정되었어요. 지하전시공간의 높이가 6.5m가 되니 두 개의 문화층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돼요.”(황평우씨)
도심 한복판에서 이뤄지는 대규모 개발과 문화재 조사. 가치의 충돌이 필연적일 수 있지만, 머리를 맞대면 가치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준 것이다. 비단 청진동과 종로2가뿐이 아니다. 도심 재개발을 위해 삽을 대는 족족 숨어있던 조선의 자태가 현현하고 있다.
“저희 연구원이 지금 세종로 1번지와 중학동 일대를 발굴 중인데 조선시대 유구와 유물이 깔려 있습니다. 도심 전체의 땅 밑에는 조선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얘기입니다.”(김홍식 교수)
인간이 살 수 없는 도시
최근에는 서울시가 디자인플라자&파크 조성을 추진 중인 옛 동대문운동장에서는 조선시대 유구가 고스란히 노출됐다. 서울성벽 기저부 123m와, 방어시설인 치성(雉城)이 확인된 것이다. 특히 도성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물을 빼내기 위해 만든 이간수문(二間水門)은 마치 ‘그리스 신전’을 방불케 할 정도도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한번 묻고 싶어요. ‘너희가 조선을 아느냐’고…. 우리는 조선의 표피만 알고 있습니다. 모두들 조선 관련 기록은 차고 넘친다고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예컨대 시전(市厘) 관련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지만 시전의 설계도가 있습니까,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는 고고학적 실물자료로 시전에서 살아간 서민들의 애환을 엿볼 수 있습니다.”(조유전 관장)
송년회가 한창인 12월 말. 기자는 다시 재개발을 위해 철거를 앞둔 종로1가 피맛골 주변의 뒷골목을 걸었다. 좁고 허름한 골목길. 점심을 먹으려고 낙지집에 줄을 선 사람들, 그리고 노천에서 생선을 구워 군침도는 냄새를 피우는 생선구이 집 주인장의 호객행위도 이제 과거의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서민들의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뒷골목도 이제는 빛바랜 사진 속에서나 볼 것이니….
“인간이 살아가는 도시가 아닙니다. 현대식 도시로 건설하면서 뒷골목을 없애버린 브라질의 브라질리아를 봅시다. 얼마 후 뒷골목은 다시 생겼습니다. 백성들의 삶이 살아 숨쉬는 뒷골목 문화는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인데….”(김홍식 교수)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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