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신석기문화 위용 드러낸 ‘동삼동 팔찌 수출단지’
최고급 장신구 ‘투박조개 팔찌’ 유물 무더기로 출토
일본 흑요석 수입해 석기제작 왕성한 교역거점 추정
조개가면·토우 등도 발견… 한국 고고학계 산실로
대체 동삼동 패총(貝塚)이 무엇인데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가.
동삼동 팔찌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조개팔찌(패천). 한반도산 조개팔찌와 열도산 흑요석이 교역의 주대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골이 진토(塵土)된다”는 말이 딱 맞다. 하지만 석회질로 된 조개껍데기는 토양을 알칼리성으로 바꾸기 때문에 패총 안에 들어있는 유구와 유물들이 잘 썩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토기와 석기, 뼈연모, 토제품 등 생활도구는 물론 무덤과 집자리, 화덕시설까지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선사시대 사람들이 지금처럼 ‘유난을 떨며’ 쓰레기 분리수거를 했다면? 우리는 선사시대가 남긴 숱한 삶의 정보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아! 현명한 우리의 선사인들이여!
곰 신앙의 정체
“특히 동삼동 패총은 선석기 초기인 BC 6000년부터 말기인 BC 2000년까지 4000년 동안 신석기인들의 삶이 고스란히 묻혀있어요. 각종 토기류와 석기, 골각기, 패(貝)제품, 토제품, 의례품을 포함해 그때의 자연환경과 일상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포함돼있어요. 그러니 신석기시대의 전 과정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거지.”(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찬찬히 뜯어보자. 먼저 이곳에서 숱하게 출토된 덧띠무늬(융기문) 토기들은 연대 측정결과 유적 조성연대가 BC 6000년임을 알려준다. 울산 세죽유적과 강원 고성 문암리 출토 덧띠무늬 토기와 같은 시기임이 판명되었다.
“강원 고성 문암리라든가, 중국 동북방 발해연안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유적’ 등 BC 6000년 유적과 같은 시대임을 알 수 있어요. 또 다양한 문양의 빗살무늬 토기류가 쏟아졌는데, 토기에 이렇듯 갖가지 문양을 새기면서 예술적 감각을 발휘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지.”(조 관장)
출토 유물 가운데 재미있고 의미있는 몇가지를 소개하자면…. 우선 종교의례와 관련된 유물들.
동삼동에서 확인된 사람 얼굴 모양의 조개가면.
조개가면은 크기가 12.9㎝, 11.8㎝ 정도인데, 국자 가리비에 사람의 눈과 입 모양으로 구멍을 뚫은 형상이다. 집단의 공동체 의식이나 축제 때 사용했거나 혹은 벽사의 의미를 담은 주술구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흙으로 만든 곰(熊) 모양의 토우(土偶)도 의미심장하다. 이 유물은 BC 4500~BC 3500년 문화층에서 확인됐다. 기자는 이 토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바로 훙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 유적지인 중국 뉴허량(牛河梁) 유적에서 발굴된 곰이빨과 흙으로 만든 곰 소조상, 곰 모양 옥기(玉器)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훙산문화 시대는 동이족이 창조한 발해문명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때.
뉴허량 유적은 제단(壇)·신전(廟)·무덤(塚·적석총)이 결합된 제사유적. 그런데 바로 여신을 모셨던 신전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던 제단·적석총 등에서 유물들이 나온 것이다. 중국학계는 “이로써 훙산인들의 곰 숭배 사상을 엿볼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기자의 시선을 더욱 붙잡은 것은 동삼동 출토 곰 토우의 연대가 훙산문화와 같은 시기라는 점이다. 이것은 역시 지금의 중국 동북방과 한반도 최동남단은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증거해주는 단서이다.
사슴그림의 비밀
또 하나 재미있는 유물의 탄생비화. 2003년 어느 날, 당시 하인수 복천박물관 조사보존실장(현 복천박물관장)은 동삼동 패총에서 쏟아진 유물정리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동삼동 패총에 대해 설명하는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조 관장은 1969년 햇병아리 고고학도 신분으로 동삼동을 발굴한 바 있다.
<부산 | 이기환 선임기자>
“1999년 동삼동 패총을 발굴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런데 출토된 토기가 편을 합해 유물상자로 300상자가 됐어요. 그야말로 ‘흙 반 유물 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어요. 그걸 스폰지나 칫솔 같은 도구로 토기에 묻은 흙을 씻어내느라 죽을 힘을 다했는데….”
기형과 문양별로 토기를 분류·정리해야 무문토기인지, 덧띠무늬 토기인지, 빗살무늬인지 알 수 있고, 빗살무늬라도 세부 문양이 어떤지를 파악해야 문화양상과 시대구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는데 어느 토기편(길이 8.7㎝, 너비 12.9㎝)에 눈이 한번 더 갔어요. 뭔가 선각(線刻)한 듯한 문양이 있는데, 왠지 단순한 문양이 아닌 것 같았어요.”
일일이 칫솔로 토기편을 씻어내던 하인수의 손이 떨렸다.
“그것은 사슴그림이 분명했어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사슴 그림은 뼈나 대칼 같은 도구로 폭 2~3㎜의 선각으로 그렸다. 세밀한 형상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그 특징만 잡아 추출 묘사함으로써 대상물의 이미지를 간결하고 단순하게 형상화했다.
“처음 길게 그은 선의 3분의 1 지점에 수직으로 선을 내려 사슴의 목과 몸체를 구분하고, 몸체는 사다리꼴 모양으로 묘사했어요. 이 그림은 걸어가고 있는 사슴의 형상이 분명합니다. 신석기인이 이토록 첨단의 미술기법을 발휘하다니….”
반면 경주 출토로 알려진 견갑(肩甲)형 청동기와 아산 남성리 석관묘 출토 검파(劍把·칼자루)형 청동기 등에 보이는 청동기시대 회화는 굉장히 사실적이다. 곧 정신을 차린 하인수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주목했다.
동삼동에서 확인된 곰형 토우(土偶).
“반구대 암각화는 청동기 시대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어요. 암각화 제작에 고래 사냥에 표현된 작살의 형태가 청동기일 것이라는 추정을 토대로…. 따라서 반구대 암각화에 나오는 전문적인 고래사냥 또한 청동기 시대 때 일어난 일이라고 보았고….”
하지만 동삼동 패총에서 보인 사슴그림은 반구대 암각화 사슴과 미술사적으로 동일한 양식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바로 고래사냥입니다. 지금까지는 신석기 시대에는 고래사냥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이 정설이었는데요. 문제는 동삼동 패총의 전 문화층에서 고래뼈가 다량으로 출토됐다는 것입니다. 다른 남해안 유적에서도 고래 유존체와 함께 대형석제 작살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은 무얼 말합니까.”
그것은 신석기 시대에 이미 고래사냥이 성행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수출용 팔찌를 생산한 산업단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하인수가 또 주목한 것은 1999년 조사에서 확인된 1500여 점에 이르는 조개팔찌(패천·貝釧)와, 발굴조사 때마다 보이는 일본산 흑요석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발굴된 1500여점을 유심히 보면 완제품은 물론 파손된 제품과 아직 제작되지 않은 제품 등이 섞여 있어요. 출토 팔찌의 70~80%는 중간단계에서 파손됐고, 일부는 마연 및 마무리 단계에서 깨졌어요. 조개팔찌를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종합하면 동삼동에는 대규모 ‘팔찌공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문제는 팔찌의 재료가 밤색무늬조개과에 속하는 투박조개(90%)라는 점. 이 투박조개는 수심 5~20m 사이의 모래밭에서 서식하는데, 바위가 많은 일본 대마도에서는 볼 수 없다. 하인수는 투박조개가 서식한다는 동해안 죽변과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을 수시로 답사했다.
“투박조개가 어떻게 서식하고 잡히는지 직접 잠수복도 입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어 채집까지 해봤어요. 그래서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동삼동 패총의 조개팔찌는 광안리산 투박조개였다는 것을….”
그리고 또 하나. 투박조개는 매끌매끌하고 워낙 단단해서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을 정도지만 그만큼 가공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니 조개팔찌를 만드는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였던 셈이다. 덧붙이면 실패율이 그렇게 높았어도 투박조개만 고집한 것은 투박조개 팔찌가 최고급 장신구였음을 시사해준다.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 규슈 사가(佐賀) 패총에서 출토된 조개팔찌 113점 가운데 투박조개 팔찌가 84%(95점)나 된다는 점. 대마도에서는 나지 않는 투박조개 팔찌가 왜 대마도에서 다량으로 나오는가. 그리고 일본산 팔찌의 제작방법과 형태, 속성이 동삼동 것과 완전히 일치했다. 이것은 ‘동삼동산 조개팔찌’가 대마도와 일본 규슈로 대량 수출됐다는 이야기다.
일본산 흑요석의 의미
그렇다면 수입품은? 하인수는 그것을 일본산 흑요석이라 본다.
“석기를 제작하는 데 쓰이는 흑요석은 한반도에서는 백두산 정도에서만 나옵니다. 그런데 동삼동 패총을 비롯, 남해안 패총 유적 18곳에서 출토되는 흑요석은 대부분 일본 규슈 고시다게(요악·腰岳)산입니다.”
동삼동 ‘팔찌공장’에서 제작된 조개팔찌(패천)와의 교역품일 가능성이 큰 일본산 흑요석.
또하나, 하인수는 대마도에서 확인된 고시다카(越高) 유적을 주목했다. 이곳에서는 한반도산 융기문 토기가 2600여점 쏟아진 반면, 일본계 유물인 승문(繩文·새끼줄 문양)토기는 단 7점에 불과했다.
“곧 대마도에는 동삼동 등 한반도에서 건너가 중개무역을 담당했던 집단이 존재했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한반도인들은 대마도에 둥지를 틀고 동삼동산 최고급 조개팔찌와 일본산 흑요석을 물물교환이나 아니면 다른 교역의 형태로 거래한 것입니다.”(하인수)
“그런데 수입된 흑요석의 경우엔 완제품도 있었겠지만 원석도 있지?”(조 관장)
“예. 통영 연대도 패총에서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길이 4.8㎝, 너비 3.3㎝, 두께 2.5㎝, 무게 43.6g의 흑요석 원석이 확인됐어요. 그것은 한반도 사람들이 원석을 가져다 정교한 석기를 제작했다는 얘기입니다.”(하인수)
결국 동삼동은 당대 최대의 수출용 팔찌를 제작한 ‘산업단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흑요석이 집중 출토된 부산 범방패총, 통영 욕지도·연대도 패총 등은 수입된 흑요석으로 석기를 제작한 거점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슴그림이 새겨져 있는 토기편(왼쪽). →
세부모양은 과감하게 생략했고, 사슴의 특징만을 따서 시원시원하게 그렸다.
사실 한반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제주도 간 교역은 이미 구석기말~신석기 초부터 시작됐는데, 동삼동에서 제주 북촌리식 토기와 규슈산 승문토기 등이 보이는 이유이다.
“한반도 동남부와 일본열도 서북 사이는 200㎞ 정도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8000년 전부터 이런 교역이 이뤄졌냐고요? 해양학을 전공한 윤명철 교수(동국대)의 연구에 따르면 항해도구와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선사시대에도 기본적인 항해수단만 있으면 자연조건을 이용해서 바다를 건널 수 있다고 해요.”
예컨대 규슈해안~한반도 남해안에 닿으려면 대마도 남서해안에서 북서방향으로 진행하면서 대한해류를 타고 항해할 경우 동남해안인 부산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조유전 관장이 동삼동 패총 유적을 정리한다.
“동삼동 패총은 한국 고고학계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유적입니다. 한국 고고학이 걸음마 단계일 때 실습장이 되어 내로라하는 고고학자들의 산실이었고…. 고고학자들의 애환이 깃든 곳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한국 신석기 문화 4000년’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우리나라 대표유적이라 할 수 있지.”
<부산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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