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50, 70, 700, 900, 1500. 무슨 숫자조합일까요. 올해(2023년)에 유독 많이 붙은 ‘~주년’의 수식어입니다.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30주년과, 천마총 발굴 50주년이고요.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입니다. <고려도경>을 쓴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 방문(1123년) 900주년이 됩니다. 백제 무령왕의 장례식(523년)이 거행된지 1500주년이고요.
그런데 얼마 전에 올해가 또하나의 ‘~주년’이었다는 사실을 알린 행사가 열렸더라고요.
그것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신안 보물선’이 1323년(충숙왕 10) 원나라 경원(저장성 닝보·浙江省 寧波)을 출발한 지 700주년이 된 해라는 겁니다. 얼마전(11일) 고려대에서 ‘신안선 출항 700주년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답니다.
새삼 ‘신안 보물선’ 인양 이야기가 새록새록 떠오르더군요.
■쇠닻과 도자기
전남 목포에서 서북쪽 40㎞ 거리에 증도(신안군)라는 섬이 있습니다. 1972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인근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민 최씨의 그물에 갈퀴 4개가 달린 쇠닻이 걸려 올라왔습니다. 길이 2m30㎝에 무게가 140㎏이나 되는 대형 닻이었어요. 최씨는 이 닻을 이웃주민 박씨에게 건넸습니다.
“정치망 어장의 그물추로 쓰라”고요. 박씨는 2㎞ 떨어진 죽도 해역까지 쇠닻을 끌고가 어장의 그물추로 썼습니다.
물론 이 그물추가 무엇인지 최씨와 박씨가 알 턱이 없었습니다.
4년 뒤인 1975년 8월20일이었습니다. 증도 방축리 앞바다에서 조업중이던 어부(최형근씨)의 그물에 청자꽃병을 비롯한 중국제 도자기 6점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최씨는 이 도자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요강과 개밥그릇으로 쓰인 청·백자
사실 이 해역에서는 1950년대부터 어민들의 그물에 곧잘 중국제 청·백자가 걸려 올라왔는데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답니다. 이 도자기를 요강 혹은 개밥그릇으로 사용했거나 엿과 바꿔먹기도 했다죠.
최형근씨는 인양한 도자기들을 그냥 집 마루 밑에 넣어 두었답니다. 그나마 엿바꿔 먹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던 거죠.
해가 바뀐 1976년 1월 초등학교 교사였던 동생(최평호씨)이 형 집을 찾아와 마루밑 청자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동생 최평호씨의 ‘촉’이 발동됩니다. 뭔가 심상치않은 물건임을 알아차린 최평호씨는 신안군청에 신고했습니다.
얼마 후 다른 어부의 그물에도 도자기 한 점이 걸렸습니다. 그 소식이 파다하게 퍼지자 증도 앞바다에 도굴범들이 북적댔습니다. 그해 9월 도굴꾼 이모씨가 청자화병 등 122점을 인양해서 몰래 팔아넘기다 검거됐습니다.
이와같은 사건이 터지자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 발굴단을 꾸려 사상 처음으로 수중발굴에 나서게 됩니다.
1976년 10월 말 1차 긴급발굴 끝에 청자 52점을 포함해서 112점의 도자기를 건져올렸습니다.
■고려 앞바다의 보물선
이러한 발굴사실을 접하고 무릎을 친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4년 전 1~2㎞ 떨어진 해역에서 발견된 대형 닻을 선물받아 어장의 그물추로 쓰고 있던 박모씨의 동생이었습니다.
박씨의 동생은 이 쇠닻이 도자기 발굴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즉각 관계당국에 신고했습니다.
전문가의 감정결과 이 그물추는 송·원나라 시대에 사용된 중국제 닻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쇠닻의 크기(2m30㎝)와 무게(140㎏)로 미루어볼 때 이 닻을 장착한 배는 300t 정도 되는 대형선박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그랬습니다. 발굴 결과 해저 20m에 가라앉은 난파선(최대 길이 34m, 최대 폭 11m)은 100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는 200t급 대형 선박으로 추정되었습니다. 1984년까지 9년 동안 11차례의 인양 결과는 ‘경천동지’, 그 자체였습니다. 유물은 총 2만3502점에 달했는데요. 동전 800만개(28톤), 자단목(아열대산 최고급 가구 목재) 1017개, 선체조각 445개가 인양되었습니다.
■하카다행 무역선의 침몰
이 배가 언제 어디서 출항했으며, 어디로 가는 무역선이었는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인양된 명문 목간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배에 실려있는 물품에는 상품의 종류와 수량, 선적일자, 수령인의 이름과 주소를 적은 목간이 364점 달려 있었거든요. 오늘날의 ‘택배 송장’이죠. 이 중 ‘지치 3년’명 목간이 눈에 띕니다.
‘지치(至治)’는 원나라 영종의 연호(1321~1323)입니다. ‘지치 3년’이면 1323년(충숙왕 10)이 됩니다.
그와 함께 ‘4월22일, 23일, 5월11일, 6월1~3일’ 목간이 인양되었습니다. 또 ‘경원로(慶元路)’명 청동추가 나왔습니다.
‘경원’은 지금의 저장성 닝보(浙江省 寧波·절강성 영파)를 가리킵니다. 도착지는 하카다(博多·지금의 후쿠오카)가 유력했습니다. 목간 중에 교토(京都)의 도후쿠사(東福寺)’와 함께 ‘하코자카궁(거崎宮)’, ‘조자쿠암(釣寂巖)’ 등 하카다의 신사와 사찰 이름이 보였거든요. 교역선장의 의미인 쓰나지(綱司)명 목간도 있었습니다. 배는 1323년 4~6월 세 차례에 걸쳐 하물을 선적한 경원(닝보)을 떠나 일본 하카다로 향하던 중에 고려의 신안 앞바다에서 악천후를 만나 침몰하고 만 겁니다.
■동전 800만개의 정체
그렇게 수장되어 700년 남짓 만에 모습을 드러난 유물 중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아무래도 중국제 도자기였죠.
그런데 이번 학술대회 발표문 중 에노모토 와타루(가本涉)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의 논문(‘일본과 원나라 무역의 시박사 무역과 밀무역’)이 제 눈에 띄었습니다. 이 신안선에 밀수품이 다량 적재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건데요.
그 밀수품이란 선체의 밑바닥에 쌓여있던 자단목(1017개) 위에 덮여있던 800만개의 동전이라는 겁니다. 무게가 28t에 달했습니다. 동전은 대부분 끈에 꿴 채로 확인되었는데요. 끈은 비록 썩었지만 그 흔적은 남아있었어요.
인양 과정에서 동전의 소유주마다 달아둔 목패가 나왔습니다. 그 종류 또한 다양했습니다. 66종에 달했는데요.
신(기원후 8~23)에서 제작된 화천 및 후한의 오수전(25~219)부터 원나라 지대통보(1310)까지 1300년 동안 중국에서 제작·유통된 동전이 끊임없이 쏟아진 겁니다. 심지어 안남(베트남)에서 만든 동전(천복통보·天福通寶)까지 나왔습니다.
■신안선에 밀수품이 존재했다?
그런데 ‘동전 800만개=밀수품’일 수 있다는 주장이 학술대회에서 제기된 겁니다. 발표자는 몇가지 사례를 듭니다.
즉 신안선이 출항하기 70여년 전인 1250년대 남송의 관리 포회(1182~1268)가 경원 일대에서 동전의 해외 유출 상황과 그 대책을 논한 장계를 남송 조정에 올리는데요.
“일본선이 경원(공인무역항)에 도착하기 전에 (무역이 불허된) 인근 지역에 들러 동전을 공공연히 (불법) 거래…일본인이 좋아하는 것은 동전 뿐…중국인들은 일본선이 가져오는 물건을 싯가의 10분의1로 구입…시장의 동전이 동이 날 지경….”
또 신안선 출항 후 17년 정도 뒤인 1340년 무렵 원나라 문인 허유임(1287~1364)이 “(중국 남부 해안)에서 ‘섬나라 오랑캐(島夷·일본인)’와 (불법)거래가 빈번하게 이뤄졌는데, 관청에서 통제할 수 없었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당시 중국에서는 동전 수출이 금지되어있었는데요. 여기에 남송대에 이르러 지폐와 동전 병행정책을 펴기 시작했는데요.(1160년대) 게다가 금나라(1215)와 원나라(1270)가 동전 사용을 금지하고 지폐(보초와 교초) 사용을 공식화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중국에서 동전이 화폐의 기능을 잃게 되었죠.
■밀수품은 동전 28t
일본쪽 사정은 어떨까요. 일본에서는 683~958년까지 13종의 동전이 발행되었는데요.
그런데 동전을 주조하는 비용보다 액면가치가 높은 화폐를 유통시킨게 문제였어요. 수도 조영에 필요한 경비 등을 마련해려고 발행한 겁니다. ‘주조비용<액면가치’의 차액에서 얻은 재정수입을 노린거죠.
그러나 이렇다보니 민간에서 동전을 마구 찍어내는 밀조(密造)가 이뤄졌고요. 그럴 때마다 기존의 동전은 10분의 1로 평가절하됐죠. 그러니 동전은 화폐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죠.
결국 일본에서 동전은 11세기말이 되면 거의 유통되지 않았답니다.(고은미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
그래서 중국의 동전이 대량으로 수입·유통된 겁니다.
정리해볼까요. 중국에서 동전은 수출금지 품목이었지만 (동전이 사라진) 일본에서는 그 수요가 생겼고요.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싯가의 10분의 1의 가치로 일본 물품을 살 수 있었죠. 그러니 어떻게 되었을까요. 동전의 밀수출입이 성행했던 겁니다.
그 당시 신안선이 출항한 경원은 공인된 무역항이었는데요. 그러니 경원항에서는 정상적인 물품을 싣고요. 인근 지역에서는 동전과 같은 밀수품을 선적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이번에 발표된 일본학자의 논문입니다.
신안선에 28t이나 선적된 그 어마어마한 동전이 실은 ‘밀수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니….
■동전을 화폐로 사용?
신안선 뿐 아니라 일본으로 (밀)수입된 동전은 어떻게 화폐로 활용되었을까요.
현재 일본에서 출토되는 동전은 낱개가 아니라 꾸러미 단위로 묶여 있거나 묶여있는 흔적이 역력하다는데요.
예컨대 100개씩 꿴 한 꾸러미 10개를 모아 1관 단위로 만든거죠. 신안선에서도 66종의 다양한 동전이 인양되었죠.
일본에서는 그렇게 다양한 동전의 구성비를 일정하게 맞춘 흔적이 보인답니다.(고은미 교수)
그런 면에서 신안선에서 보이는 꾸러미 흔적이 심상치않습니다.
실제 12~15세기 일본에서 수많은 중국 동전이 시중에 유통됐다는 방증자료가 있는데요.
즉 동전을 사용하거나 보관하는 모습은 승려 잇펜(一遍·1239~1289)의 생애를 두루마리에 그린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수입한 중국 동전을 사용한 1187년의 토지매매기록도 있어요.
■청동대불 조성용?
그러나 단순환 화폐로만 쓰이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예컨대 신안선의 동전이 ‘청동대불 조성용’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유통되던 동전은 동의 함유량(개당 4g에 동 80%)이 높은 양질이어서 그 가치가 높았답니다. <송사>는 “동전 10점을 녹이면 정련된 동 1량을 얻는데 그것으로 청동기를 만들면 5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지·식화하2·전폐)고까지 했습니다. 반면 일본의 동 수요량은 늘고 있었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던 시기였죠.
불교의 극락세계로 왕생한다는 말법사상이 유행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에따라 경통(經筒·경서와 경문을 넣는 통)과 청동대불의 주조가 대거 이뤄졌는데요. 그런데 일본의 ‘3대 대불’ 중 하나인 ‘가마쿠라 대불(鎌倉大佛·1185~1392)의 금속성분을 분석하자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납 성분이 19.57%에 달했는데요.
이게 의미심장한 분석입니다. 신안선에서 인양된 북송 시기의 동전 5개를 분석한 결과 납성분이 21.13~45.40%였던 겁니다.
신안선에서 출토된 북송 시기의 동전과 가마쿠라 불상의 성분이 비슷하다는 거죠. 그렇다면 가마쿠라 대불이 바로 북송에서 수입한 동전을 녹여 조성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두 가지 견해 모두 일리가 있어요. 그래서 수입 동전 중 일부는 화폐로, 일부는 청동대불용으로 나눠 썼다는 수정론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명품 원목에 새겨진 부호
이번 학술대회에서 또하나 눈길을 끈 발표문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신안선 밑바닥에 적재한 자단목 1017점의 주인공입니다.인도나 동남아, 중국 남부가 원산지인데요. 박달나무처럼 단단해서 불상이나 고급 가구, 공예품의 원자재죠.
그런데 자단목마다 표면에 새겨진 한자 부호나 숫자, 혹은 아라비아 숫자가 주목을 끄는데요.
한자 중에는 ‘대일(大一)’명이 51점으로 가장 많고요. 그 뒤를 ‘일정(一丁·32점)’과 ‘품(品·13점)’, ‘팔(八·10점)’자 가 잇고 있습니다. 이외에 ‘주칠호(宙柒號)’와 ‘대길(大吉)’, ‘일본(一本)’, ‘팔팔(八八)’, ‘대+십(大+十)’, ‘품(品)’명 자단목도 있습니다. 로마자를 새긴 자단목이 241점이나 되고요. 이중 Y, L, E, T. V 등은 유럽인이 원자재를 생산지에서 사들였다는 표시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본(本)◈’처럼 글자와 문양이 복합적으로 표현된 명문도 보이고요. 삼각형, 원, 꽃무늬, ‘원안의 팔(八)자와 이(二)’자 문양도 흥미롭습니다. 이밖에 삼각형이나 동그라미, 산(山) 모양의 문양도 독특한데요.
그동안 이러한 명문과 문양, 부호를 두고 이 자단목의 소유주나 상단을 표시한 것으로 해석했는데요.
■일본 무사 가문의 문장?
그런데 이번에 열린 학술대회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주인’이 조심스럽게 특정되었습니다.
즉 자단목에 기재된 문자와 문양 가운데 상당수가 중세 일본의 무사 및 유력 가문의 문장(紋章), 즉 가문(家紋·가문의 표지로 정한 문양)일 가능성이 짙다는 견해입니다.(정순일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기존 연구에서 ‘품(品)’과 ‘클로버’, 두 겹(세 겹) 육각형 문양, 글자 이(二)에 동그라미를 친 것으로 읽었던 문양이 그렇다는 겁니다. 예컨대 ‘세 개의 비늘(三つ鱗·미쓰우로코)’ 문양은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직을 계승하며 가마쿠라(鎌倉·1185?~1333) 시대의 지배자로 군림한 ‘호조(北條)씨’와 관련된 물품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또 ‘동그라미에 두 줄 그은 문양(丸に二つ引き·마루니 후타쓰히키)’ 역시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 가문인 ‘아시카가(足利)씨’와의 연관성이 제기됐습니다. 이밖에도 신안선 적재 화물을 포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름모, 세 개의 별(동그라미), ‘대길(大吉)’ 등 나무상자 겉면의 문양 또한 일본 열도의 특정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정순일 교수)
제가 여기저기 검색해보니 자단목의 ‘괭이밥(片餐·가타바미)’ 문양은 일본의 여러 무사 가문의 문장으로 쓰이고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가문(家紋·かもん)’을 검색해보았는데요. 예부터 스스로의 가계, 혈통, 집안,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표시했답니다. 일본에서 현재 241종류 5116문 정도의 개별 가문이 있다고 합니다. 무사 시대에 들어 펼쳐진 크고작은 전쟁에서 피아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했답니다. 훗날엔 묘지나 가구, 또는 선박에까지 붙이는 관습이 퍼졌고요.
제가 이 논문이 분석한 자단목의 문양과 일본 지식백과 등에 등장하는 무사 가문의 문장을 비교해보았는데요.
비슷한 문양이 제법 있더라구요. 흥미로운 문제제기여서 향후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이 기사를 위해 정순일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와 고은미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 김병근 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고은미, ‘동전을 중심으로 본 전근대 동아시아의 화폐-송과 일본의 사례를 중심으로’, <사림> 69권68호, 수선사학회, 2019
고은미, ‘전근대 동아시아의 무역과 화폐-12~13세기의 사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10권110호, 한국역사연구회, 2018
김병근, ‘신안선 적재 자단목의 고찰’, <해양문화재> 6,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3
문화재청·국립해양유물전시관, <신안선>, 2006
서동인, 김병근, <신안 보물선의 마지막 대항해>, 주류성, 2014
정순일, ‘문자 자료로서의 신안선: 한일학계의 연구성과와 전망’, <침몰선의 문자자료:소생하는 아시아의 해역교류>(신안선 출항 700년 기념 국제 학술 심포지엄 발표자료,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고려대동아시아문화교류연구소, 2023
에노모토 와타루, ‘일원(日元) 무역에서의 시박사 무역과 밀무역’, <침몰선의 문자자료:소생하는 아시아의 해역교류>(신안선 출항 700년 기념 국제 학술 심포지엄 발표자료,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고려대동아시아문화교류연구소, 2023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어도 못보내!", "원한다면 보내!"…문화재 수출논쟁 (69) | 2024.01.03 |
---|---|
‘조선은 똥!덩!어!리!’...박제가는 왜 ‘중국어공용론’까지 설파했을까 (1) | 2023.12.28 |
'고려판 세종대왕'이었던 현종…도무지 비판거리가 '1'도 없었다 (0) | 2023.12.16 |
지독한 ‘빨간펜 정신’…‘역신의 수괴가 편찬한' 실록도 버리지 않았다 (0) | 2023.12.07 |
“환향녀라 손가락질? 남자들이나 잘하세요”…병자호란 여인들의 절규 (164) | 2023.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