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펜(주묵사) 정신’을 잊지 마세요.” 강원 평창에 설립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 ‘오대산 사고본 실록과 의궤’가 상설 전시된다는 자료를 받고 단박에 ‘빨간펜’이 떠올랐습니다. 우선 ‘오대산 사고본’ 실록이 뭔지 잠깐 소개해보죠.
실록은 태조~철종까지 25대 472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일어난 순서대로 서술하는 방식)로 기록한 책이죠. 책은 춘추관(서울)·정족산(강화)·태백산(봉화)·적상산(무주)·오대산(평창) 등 ‘5대 사고’에 한 부씩 보관했습니다.
이중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일본 도쿄대(東京大)로 반출됐다가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대부분 불타 없어졌고요. 용케 살아남은 75책(<성종실록>·<중종실록>·<선조실록>·<효종실록>)이 국립조선왕조실록 박물관에 상설 전시된 겁니다.
■‘빨간펜’(붉은 먹글씨)의 흔적
그중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은 정본이 아닌 교정본이라는 특징이 있는데요.
임진왜란을 거치며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주사고본을 토대로 5대 사고에 보관할 인쇄본을 다시 찍어냈는데요.
이때는 전란 때문에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교정을 본 흔적이 남아있던 이른바 ‘교정쇄본’을 버리지 않고 ‘오대산 사고’에 보낸 겁니다. ‘교정본을 그냥 버리기 아깝다’는 이유였죠.
물론 현존하는 오대산 사고본 중 나중에 편찬된 <선조실록>과 <효종실록> 등은 교정본 아닌 정본입니다.
그래서 오대산사고본 중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에는 교정을 보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붉은 먹글씨로 교정을 본 두 실록을 보면서 ‘주묵사’ 정신을 떠올렸습니다.
‘주묵사(朱墨史)’는 송나라 역사가인 범충(1067~1141)이 <신종실록>을 수정하면서 <고이(考異·차이점 살펴 비교)>를 쓸 때 활용한 서술기법입니다. 즉 원문은 검은 글씨로, 뺄 것은 노란 글씨로, 새로 삽입하는 것은 붉은 글씨로 썼습니다. 이중 고치는 대목의 역사를 붉은 먹글씨로 썼다 해서 ‘주묵사’라 했습니다.(<송사> ‘열전 범충전’)
여기서 질문 나오겠네요. 그냥 ‘교정’이라 하면 될 것을 왜 어려운 용어까지 동원해서 ‘주묵사 정신’ 운운했냐구요.
이유가 있습니다. 오대산사고본엔 단순한 오자교정용 ‘빨간펜’이 있었죠. 그러나 실록에는 이렇게 ‘보이는 빨간펜’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빨간펜’, 즉 ‘주묵사 정신’이 담겨있거든요.
■‘극과 극’의 인물평
우선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볼까요.
1)“류성룡은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지 않았고 선비의 억울한 죽음에도 입을 닫았다…재상의 그릇이 부족한 인물이다.”(<선조실록> 1603년 10월7일)
“실록 편찬자가 비방하고 배척했다. 류성룡은 나라 걱정을 집안 일처럼 했다.”(<선조수정실록> 1603년 10월1일)
2)“이덕형은 젊은시절 재능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임진왜란 때 군소배와 어울려 예절을 상실….”(<선조실록 1598년 4월26일)“이덕형은 청렴한 인재라는 중망으로…나라를 위해 집을 잊은…어진 재상인데 기자헌 무리가 시기해서…얼토당토 않은 사실 기록….”(<선조수정실록 1598년12월21일)
3)“윤두수는 음험하고 탐욕스러워 나라 사람들이 침을 뱉고 있으며…”(<선조실록> 1598년 3월3일)
“사람됨이 침착하고 정중했는데…사신이 허위로 날조해서 모함하느라 급급.”(<선조수정실록> 1598년 3월1일)
4)“정철은 편협하고 망령되어…원망을 자초했다.…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선조실록> 1593년 12월21일)
“정철을 권간이나 적신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이산해·류성룡 등 다른 정승들도 있는데 어떻게 권세를 부린단 말인가.”(<선조수정실록> 1593년 12월1일)
5)“이이첨은 천성이 영특하고 기개가 있으며 간쟁하는 풍도가 있었다.”(<선조실록> 1597년 10월 17일)
“이이첨은 간적의 괴수다. 실록을 쓸 때 스스로 거리낌없이 칭찬했으니 통탄스럽다.”(<선조수정실록>1597년12월1일)
6)“기자헌은 도량이 넓고 덕망이 있었다.”(<선조실록> 1605년 8월2일)
“기자헌이 실록을 감수할 때 자기 입맛대로 스스로 칭찬했으니 주벌을 가해도 모자라다.”(<선조수정실록> 1605년 8월1일)
■‘적신의 괴수’가 편찬한 역사서?
거론된 이들은 선조~광해군대를 풍미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인물평이 극과 극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1623년(인조 원년) 8월18일 이정구(1564~1635) 등이 “<선조실록>은 적신의 괴수가 편찬한 부끄러운 역사”라면서 “반드시 재편찬되어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섭니다.
요컨대 광해군 때(1609년) 편찬된 <선조실록>은 대북파인 기자헌(1562~1624)과 이이첨(1560~1623)이 중심이 되어 찬술했기 때문에 객관성을 잃었다는 겁니다.
사실 본래 <선조실록>의 편찬 책임자는 기자헌·이이첨 등이 아니었답니다. 처음에는 이항복(1556~1618)과 이정구, 신흠(1566~1628)등이 맡았는데요. 그러나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소북파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옥사)로 이항복 등 3인이 축출되죠. 이후 <선조실록>의 편찬은 기자헌과 이이첨 등 대북파가 주도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세상이 바뀌어 광해군과 대북파가 쫓겨가자 옳다구나 싶어 수정작업에 나선 겁니다.
■부실논란에 휩싸인 실록
<선조실록>은 태생부터가 부실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록 편찬을 위한 원자료인 사초가 임진왜란 와중에 불에 타버렸기 때문입니다. 왜적들의 소행이냐구요.
아닙니다. 선조 임금을 따라 의주로 몽진하던 사관 조존세(1562~?)·김선여(1567~?)·임취정(1561~1628)·박정현(1562~1637) 등 4인이 사초책을 몽땅 불태우고 도망가버렸습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12월1일)
이로써 “선조 즉위년(1567)~임진왜란 직전(1592년 3월)까지 25년의 기록이 송두리째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1609년 <선조실록>의 편찬자들도 난감해했는데요.
여기에 계축옥사 발발로 이항복 등이 쫓겨나고 기자헌 등 대북파가 나서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 남아있는 <선조실록> 221권 가운데 ‘사초실종’ 25년의 기사는 26권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임진왜란과 그 이후의 기사들은 충실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축옥사 이후 <선조실록> 편찬을 맡은 대북파의 편협하고 일방통행식 역사서술도 문제였습니다.
당색을 떠나 인망이 두터운 한준겸(1557~1627)·이덕형(1561~1613)·이현영(1573~1642) 등과, 류성룡(1542~1607)·정구(1543~1620) 등 남인 관료나 학자, 서인 계열의 성혼(1535~1598)·이항복·윤두수(1533~1601)·신흠·이정구·정철(1536~1593), 김상헌(1570~1652) 등은 닥치는 대로 비방했습니다.
반면 기자헌·이이첨 등 자파 인물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군자로 표현했습니다. 올바른 역사서술이라고 볼 수 없죠.
그래서 <선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 중 가장 형편없다는 평을 받고 있죠.
그럴 때 인조반정으로 대북파가 몰락하고 서인 세상이 되었으니 어찌 되었겠습니까.
<선조실록>은 ‘사실을 왜곡시킨 역사’, 즉 무사(誣史)라는 혹평을 들었습니다.(이식의 <택당집>)
■“당신 혼자 써라”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의 편찬도 녹록치는 않았습니다.
이괄의 난(1624년)과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 등 병란이 이어지면서 지지부진했죠.
또 <선조실록>보다 <광해군일기>의 편찬이 급하다는 논의가 우선했습니다. 이이첨 등 대북파 때문에 광해군 초기 시대의 역사를 메모한 사초가 더할 수 없이 왜곡된게 더 심각한 문제라는 의론이 일어났거든요.
반정세력으로서는 갖가지 병란을 겪으면서 실추될대로 실추된 ‘반정의 정당성’을 먼저 입증하는 것이 우선이었겠죠.
그보다 앞선 선조 시대의 사적은 눈앞의 현안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선조수정실록>은 이정구 등의 문제 제기 후 18년이 지난 1641년(인조 19)이 되어서야 재론됩니다.
대제학 이식(1584~1647)이 다시금 <선조수정실록>의 편찬 문제를 제기한 겁니다.
“잇단 변란 때문에 사초는 물론 민간에 떠도는 야사와 각 가문에서 전하는 서책도 거의 인멸되었습니다. 또 옛 일을 아는 신하들이 죽었거나 늙어서…몇년 안에 신들과 같은 무리도 점차 죽게 될 것입니다.”(<인조실록> 1641년 2월12일)
이식의 상소문으로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이 급물살을 탑니다.
처음엔 “송나라 사마광(1019~1086)이 <자치통감>을 편찬했듯이 수정작업은 이식이 전담하게 하고 실록청도 이식의 집에 설치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처럼 사관 1명이 책임을 지고 역사서를 일관되게 찬술하는 편이 효율성면이나 비용절감 측면에서도 낫다는 판단이 든거죠.
■“당대의 역사를 혼자 쓴다고?”
그러나 이식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조선의 실록과 다릅니다. <자치통감>은 전조(당나라)의 역사였다”(<인조실록> 1641년 4월6일)는 겁니다. 이전 왕조의 역사야 개인이 차분히 앉아 편찬할 수 있지만 당대의 역사를 어찌 홀로 감당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식은 “절충하고 필삭할 일은 마땅히 함께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딴은 그렇죠. 역사서술이 개인의견이나 당론에 의해 좌지우지 되면 안되겠죠.
수정작업이 공론의 지지를 받으려면 여러 사람의 논의를 통한 첨삭, 즉 공적인 논의의 필요를 역설한 겁니다.
이런 이식의 주장이 가납되어 <선조수정실록>은 사관 개인의 저술이 아니라 공론에 따라 진행됐습니다.
빈 관사를 정해 편의를 제공하고 전국 팔도의 감사에게 사관을 지낸 적이 있는 사람들의 사초와 야사를 수집하여 올려 보내도록 했습니다.(<인조실록> 1641년 5월7일)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도 수정 작업은 1657년(효종 8년)이 되서야 마무리됐습니다. 인조 원년(1623년)에 시작했으니 무려 44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필요로 했던 겁니다.
■빛나는 포인트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편찬 과정에서 ‘빛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무려 44년만에 수정작업을 마무리 했다면 어떨까요.
‘적신의 괴수가 편찬한 부끄러운 역사’로 지목된 <선조실록>은 폐기하거나 불에 태웠어야 했겠네요.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사이좋게 남겨두었는데요.
이것이 ‘주묵사 정신’입니다. 물론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자들은 첨삭·수정한 흔적인 ‘빨간펜’, 즉 붉은 먹글씨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정신은 살렸습니다.
“야사나 각 가문의 기록을 수습해서 절충하고 첨삭해서 사고에 ‘함께 보관하는 것’은 ‘주묵사’가 남긴 뜻입니다.”(이식·<인조실록> 1641년 2월12일) 역시 <선조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한 채유후(1599~1660)의 말을 들어볼까요.
“역사기록에는 잘못된 곳이 많기 때문에 갖가지 수정서 및 해석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잘못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으니 송나라 범충의 ‘주묵사’가 그것입니다…실록은 신구본을 모두 보존하여 이 ‘주묵사’처럼 참고하도록 하였습니다.”(<선조수정실록> 후기 및 1657년 10월5일조)
■“역사가 없으면 나라가 없다”
이식과 채유후는 잘못된 역사를 고쳤다고 해서 원래의 역사서를 폐기하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묵사’의 교훈이라는 겁니다. 잘못된 역사서 뜯어고친다면서 수정서를 애써 만들어 놓고 ‘예전에 만든 부끄러운 역사서’도 폐기하지 않았던 바로 그정신…. 이것이야 말로 원본과 수정본을 함께 남겨둠으로써 후대의 공정한 평가를 받아보겠다’는 역사가의 정신이 아닐까요.
그 덕에 저같은 기자가 <선조실록>이 어떠니 <선조수정실록>이 저떠니 하며 비교 평가하고 나름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까. 두 분이 남긴 한마디씩을 더해봅니다.(<선조수정실록> 부록)
“나라가 있어도 역사가 없으면 나라가 아니요, 역사가 있어도 공정치 못하면 역사가 아닙니다.”(이식)
“<선조수정실록>에서 무고되고 모욕 당한 사실을 일일이 거론하여 말끔히 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의 처음과 끝을 살피면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사람이 자세히 살필 일이다.”(채유후)
■정세에 따라 실록을 고쳤지만…
이러한 주묵사의 정신은 훗날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과 <숙종보궐정오실록>, <경종실록>과 <경종수정실록> 등의 편찬 때도 이어집니다.
즉 <현종실록> 편찬(1677년 9월) 후 3년 뒤 이른바 경신대출척(1680)으로 남인들이 축출되었는데요.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남인들이 편찬을 맡은 <현종실록>이 부정확하고 왜곡되었다”는 공론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현종실록>을 다시 편찬한다는 기조로 수정작업을 벌였고요. 마침내 <현종개수실록>이 편찬되었습니다.(1683년) 그러나 역시 기존의 <현종실록>을 폐기하지 않았죠,
<숙종실록>과 <숙종보궐정오실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숙종실록>은 숙종 승하 후 반년만인 1720년 11월 편찬이 시작되어 1727년(영조 3)에 완성되었는데요. 그런데 그해 정미환국으로 노론 세력이 파면된 뒤 정권을 잡은 소론이 “<숙종실록>에 왜곡된 사실이 많다”고 주장하면서 개수논의가 시작되죠. 그러나 실록을 전면적으로 다시 쓴다는게 쉽나요.
결국 빠진 기사를 보충·추가(보궐·補闕)하고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는다(정오·正誤)는 뜻에서 <숙종실록보궐정오>를 편찬해서 붙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답니다. 물론 기존의 <숙종실록>은 손대지 않았습니다.
<경종실록>과 <경종수정실록>도 다르지 않습니다. <경종실록>은 1732년(영조 8) 완성되었는데요. 그런데 1755년 정권을 잡은 노론이 “<경종실록>에 노론에 불리한 기사가 많다”고 문제를 계속 제기했구요. 결국 1778년(정조 2) 경종의 즉위년과 재위 4년간을 각각 1권씩으로 한 <경종수정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했습니다.
■구본을 왜 불구덩이에 넣어?
이렇게 <경종수정실록>이 마무리될 즈음 경연관 송덕상(?~1783)이 분위기에 맞지않은 의견을 개진하는데요.
“실록을 바로잡았으니 이제 구본(舊本·경종실록)은 물이나 불에 넣어 버리는게 마땅하다”는 의견을 낸겁니다.
그러자 정조는 “우리나라 실록 중에서도 수정본과 구본을 함께 남겨 둔 일도 있다”면서 ‘주묵사’ 정신을 거론하면서 “수정본과 구본을 모두 남겨 두는 것은 또한 옛 법”(<정조실록> 1779년 7월28일)이라고 일축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실로 뜬금없는 얘기처럼 들렸을 조선의 ‘빨간펜 정신’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겠죠.(이 기사를 위해 오항녕 전주대 교수의 <실록이란 무엇인가>와 <역사가 판단케하리라> 등 두 저서를 참고했습니다. 오교수의 도움말도 큰 참고가 되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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