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가야=철의 왕국’이라는 등식은 공리처럼 여겨졌다. 

그 근거는 3세기 역사서인 <삼국지> ‘동이전·한조’의 ‘나라(國)에서 철(鐵)이 생산된다(出)’는 기사였다. 즉 “한(韓·마한)과 ‘예(濊)’, 왜(倭)가 모두 이곳의 철을 가져갔고, 또 2군(낙랑·대방군)에도 공급했다”는 것이다. 

특히 “시장에서 중국의 돈을 사용하듯 모두 철을 거래수단으로 삼는다”는 내용은 ‘철의 왕국’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기록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삼국지> ‘동이전’의 내용을 뜯어보면 한가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울산박물관이 진시중인 ‘달천철광(광산)’ 코너 전시품. 기원전 1~기원후 3세기 토기들이 발굴됐고, 이중에는 왜와의 교역사실을 일러주는 야요이 토기편이 조사됐다.|이도학 교수 촬영 제공

■헷갈리는 <삼국지>

<삼국지>는 알려지다시피 중국 서진의 역사가 진수(233~297)이 편찬한 사서이다. 그런데 이 <삼국지> ‘동이전·한전’에 등장하는 진한과 변진의 서술이 헷갈린다. “~처음엔 6국이었다가 12국이 되었다”는 ‘진한’을 서술한 뒤에 역시 12국으로 구성된 ‘변진’을 소개한 후 이상하게도 “변한과 진한을 합해 24개국이었다”고 표현한다. 그런 뒤 그곳의 풍속을 쭉 서술하는 과정에서 “나라에서 철이 난다(國出鐵)…”는 유명한 설명이 이어진다. 다시 그 음주가무를 좋아하고, 아이를 낳으면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하는 이른바 편두의 풍속을 소개한 다음 다시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산다(弁辰與辰韓雜居)’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달천광산에서 출토된 왜계 야요이 토기. <삼국지>에 등장하는 ’나라에서 철을 생산해서 마한과 예, 왜, 그리고 2군(낙랑군 및 대방군)에 공급한다는 내용과 부합된다,|이도학 교수 제공   

한마디로 <삼국지>는 진한과 변한을 구별해서 소개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내용상으로는 ‘변·진 24개국’ 운운하면서 섞어 서술하고 있다. 그러니 ‘철이 생산되는 나라’가 진한인지 변한(진)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헷갈리는데 왜 ‘가야(변진의 후예)=철의 왕국’으로 굳어졌을까.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융합고고학과)는 학술지 <단군학연구> 최근호(제39집)에 발표한 논문(‘변한 국출철론의 검증과 의미’)에서 “철의 왕국은 신라이지 가야일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사>(1937년 간)의 영향으로 ‘철이 생산되는 나라(국출철·國出鐵)’의 주체가 변한으로 굳어졌다”고 주장했다. 

‘철자원(鐵資源) 확보를 하기 위하여  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왜국(야마토 정권)도, 백제, 가야와 함께 고구려와 싸우게 되었다’고 기술한 일본자료, ‘사이토 마코토(佐藤信) 외의 <개정판 상설 일본사 연구>, 야마카와( 山川) 출판사, 2008, 36쪽’에 나와있다. |이도학 교수 제공

즉 <조선사>가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한국 관련 기사를 연대기순으로 정리한 ‘별록(別綠)’에서 ‘변진조’에 수록됐다는 것이다. 이 별록은 매우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편리함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이 즐겨 인용했다는 것이다. 

그 중 이병도(1894~1989)의 서술이 눈에 띈다. 이병도는 1939년 논문(‘삼한시대의 신고찰’)과 1959년 저작(<한국사 고대편> 등)에서 “한가지 주의할 점은 변진의 철인데, 위지(<삼국지>)에 의하면 변진 제국에서 철을 산출해서…변진의 철은…” 운운함으로써 ‘국출철’의 주체를 변진으로 못박았다. 이기백(1924~2004) 역시 이병도의 견해에 영향을 받았는지 ‘변한의 철은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됐다’고 주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철생산국=변진(한)’ 견해가 각종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실림으로써 정설로 굳어졌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이후 바뀐 서술

하지만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서술을 꼼꼼히 살피면 다른 해석을 얻을 수 있다. 즉 ‘철이 생산되는 나라’는 변진이 아니라 진한(신라의 전신)이라는 것이다. 이도학 교수는 “변한과 진한의 기사가 뒤섞인 <삼국지> 기사의 서술 차례를 살펴보라”고 권한다. 

‘나라에 철이 생산된다’는 기사 뒤에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산다’는 내용과 함께 변진의 풍속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그렇다면 앞에 나온 ‘철이 생산되는 나라’의 주체는 변진이 아니라 진한을 가리키는 것”이라 풀이한다. 

무엇보다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역사가인 범엽(396~445)이 편찬한 <후한서> ‘동이전·한조’는 “‘나라에서 철을 생산한다(국출철·國出鐵)’기사를 ‘진한’에 배치하고 ‘변진’은 따로 서술한다.

‘진한=철생산국’임을 입증할 자료가 된다는 울산 달천 광산의 발굴모습. 달천광산은 세종시대에도 1만2500근의 철을 조저엥 바칠 정도로 유명한 광산이었다.| 최수형의 논문에서

“진한에서는 철이 나오는데, 예(濊)·왜(倭)·마한(馬韓)이 철을 사들인다. 모든 무역과 교역에 모두 철을 화폐로 삼는다…변진은 진한과 섞여 살며, 성곽과 의복이 모두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

<후한서>는 진한·변진(한)의 역사를 ‘섞어찌개’로 서술한 <삼국지>보다 150년 정도 뒤에 편찬된 역사서다. 아무래도 <삼국지> 내용을 제대로 정리해놓았을 것이다. 또 당나라 재상 두우(735∼812)가 편찬한 <통전>과 <책부원구> <한원> <태평어람> 등에서도 예외없이 ‘철을 생산한 나라=진한’으로 서술했다. 

돌이켜보면 진한의 후신인 신라의 제4대 탈해왕이 본래 대장장이 출신이었다는 <삼국유사>의 ‘탈해의 야장(冶匠)설화’가 있다. 진한의 철 생산 및 수출 기사는 조선 후기의 역사가인 순암 안정복(1712~1791)도 이어받았다.

즉 “경주는 진한의 옛터인데…이 나라에는 철이 나고 한·예·왜가 여기서 가져간다…”(<동사강목>)고 서술했다. 이도학 교수는 “심지어 1892년 간행된 일본 최초의 한국사 개설서인 임태보(林泰輔·하야시 다이호)의 <조선사>에서도 ‘철생산국을 진한’으로 지목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제감점기 조선총독부가 1933년 펴낸 <조선사> 이후 변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와 철생산국 논란

그런데 ‘철생산국=변진’설이 굳어지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병도는 ‘일본의 소위 임나일본부를 일종의 공적 상관(후일의 왜관)’으로 파악하면서 “변진의 철·금은·직물·곡물·재보 등이 왜인의 주요한 무역품이 됐고, 왜인의 무력은 이들 제국의 후원거리가 됐다”고 주장했다. 변진의 철 등의 매입을 통해 설치된게 임나의 왜(倭) 상관(商館)이라는 것이었다.

이도학 교수는 “심지어 임나일본부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임나흥망사>에서도 야마토(大和) 정권의 임나 진출과 관련해서 철을 거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변진=철’이라는 이병도의 논고 제출 이후 왜 세력의 한반도 남부 진출의 경제적 이유로 ‘변진=철 생산 수출설’이 수용됐다”는 것이다. 

달천광산에서 확인한 토층. 노천에서 채취한 토철과 철광석. 이곳의 철은 자철광이며 비소가 다량 함유되어 있다. |김권일의 논문에서  

이교수는 “일본의 요시다 아키라(吉田晶)는 ‘4세기 이후 왜는 가야의 철 소재와 생산기술을 공급받았고 나아가 왜가 파견한 관료로 구성한 기구가 바로 임나일본부’라며 임나일본부의 교역기관설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이것은 이병도의 논지와 본질적으로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이도학 교수는 “이후 일본의 역사교과서 등은 일본이 가야를 확보하려 한 주요 요인으로 철을 지목했으며 이른바 임나일본부설도 이렇게 포장됐다”고 주장했다. 2001년 파문을 일으킨 일본 우익성향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후소샤·扶桑社)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백제가 야마토 조정에 도움을 구했다. 일본 열도 사람들은 철자원을 구하려고 반도 남부와 깊은 교류를 갖고 있었으므로 바다를 건너 출병했다. 그 때 야마토 정권은 반도 남부의 임라라는 곳에 거점을….”


■‘진한(신라)=철생산국’일 경우 달라질 역사서술 

이도학 교수는 “그런데 만약 변진이 아니라 ‘진한(신라)=철 생산국’이 될 경우 역사서술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즉 ‘후세 신라와 일본 사이에 일어난 부단한 투쟁의 중대 원인 중 하나도 이 철의 쟁탈에 있었을 것’이라는 손진태(1900~?)의 주장이 새삼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 경우 ‘광개토대왕비문’에 증당하는 왜군의 신라 침공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한=철생산국’일 경우 애당초 임나일본부라는 헛소리가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주 황성동과 밀양 사촌, 울산 방리 등에서 나온 제철유적들. 황성동 유적에서는 비소(As)가 함유된 자철광이 확인됐다. 울산 달천광산에서 채광한 철광석일 가능성이 크다. |김권일의 논문에서   


■‘가야=철생산국’을 입증할 고고학 증거는?

사실 ‘변진(가야)=철생산국’임을 입증할 고고학 자료도 박약한 실정이다.

이교수는 “변진과 가야의 철 생산 관련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으로 김해 여래리·하계리와 창원 봉림동, 성산 패총, 부산 낙민동. 마산 현동 등 대략 6곳 정도”라고 밝힌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제련로와 송풍관 등 철생산 관련 시설이 일부 확인됐을뿐 철광석을 채굴한 이른바 철광산 유적이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철생산국=변진(가야)’을 입증할 직접 자료로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도학 교수는 “게다가 (철을 두들겨 형태를 만드는 단야 관련 유구와 유물을 통해 가야철기의 생산과 유통과정을 추정할 수 있다는) 김해 여래리 유적의 연대는 4세기로 편년된다”고 밝혔다. 3세기 중후반대의 역사서인 <삼국지> 연대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해 주변의 철 관련 유적들은 <삼국지>에 나오는대로 중국의 군현(낙랑·대방)이나 왜와 교류했음을 입증할 물증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진한=신라’ 지역에서는 경주 황성동과 밀양 사촌·임천리, 양산 물금, 울산 달천 광산 등 비교적 풍부하고 집중적인 정보를 알려주는 제철 관련 유적들이 많다. 


■울산 달천광산에 쏠리는 이목

이 가운데 특히 주목을 끈 곳이 바로 울산 달천(철장) 유적이다. 

문경현 전 경북대 교수(사학과)는 1973년 발표한 논문(‘진한의 철산과 신라의 강성’, <대구사학> 제78집)에서 “달천철장(광산)은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등장하는 ‘철생산국=진한’을 증명할 가장 유력한 후보지”라고 주장했다. 

달천 광산은 조선시대 때도 “백동철과 수철 등이 생산되어 해마다 조정에 바치는 철만 1만2500근에 달했다”(<세종실록 지리지>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유명한 철광산이었다. 임진왜란 때 이장순이라는 무기과학자가 발명해서 왜적을 공포에 떨게 한 ‘비격진천뢰도 토함산 계곡에서 달천 광산의 철로 만들었다’(류성룡의 <징비록>)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달천 광산은 한동안 폐광됐다가 ‘솥과 농기구 제작에 무쇠가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통감한’ 이의립(1621~1694)이 전국을 찾아 헤매다 1657년(효종 8년) 재발견해서 1993년까지 채굴됐다. 1973년 자료에는 달천 광산의 규모는 캐낼 수 있는 매장량이 100만t으로 추정됐다. 

삼한시대 채광장 및 채광구덩이.달천광산에서는 기원전 1세기 중엽부터 철이 생산됐다.|김권일의 논문에서


■경주의 길목에 있는 달천광산 

달천광산에서 나는 철은 자철광인데 비소가 많이 함유되어 제련단계에서 공해문제를 일으킨 단점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환경을 중요시하는 지금의 관점이다. 과거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이른바 노천 분광맥이라는 게 큰 장점이 됐다. 깊게 채굴할 필요가 없었기에 고대인에게는 천혜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달천 광산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문경현 교수는 당시 “달천의 철산을 바탕으로 국력을 쌓은 사로국이 진한의 패자가 된 것은 의심할 바 없다”고 주장했다. 문경현 교수 뿐 아니라 권병탁 영남대 교수(농경제학과) 등도 ‘철생산국=진한’설은 주장했다. 하지만 ‘철생산국=진한설’은 이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교과서의 내용이 바뀌지 않는 한 고정관점화한 ‘철의 왕국=변진-가야설’을 뒤집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달천=진한 탄광이라는 고고학 증거

달천 광산이 ‘철생산국=진한’설을 뒷받침하는 철광단지라는 증거가 있다면 그에 합당한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입지조건이다. 교통로가 구비되지 않았던 고대에는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 나타난 양질의 노천 광맥을 발견해서 채굴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한조’에 언급된대로 ‘마한·예는 물론 왜와 낙랑군 및 대방군 등 한나라 군현에 철을 공급했다’면 그에 합당한 포구가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동해안의 양항으로서 진한의 관문이면서 맹주인 사로국과 연결되는 울산지역이 주목된다. 

신라 박제상이 왕의 동생인 미사흔을 구하려고 왜로 출발한 항구가 바로 울산의 율포(울산 강동면)였다. 태화강 하류의 반구동 유적은 신라최대의 무역항으로 알려져 있다. 권병탁 교수에 따르면 노천인 달천 광산에서 생산된 철의 함유량은 70%에 이르는 철광석이었다. 또 달천에 인접한 동천강은 제철에 필요한 용수가 되었고, 동대산(해발 444m)의 산림은 목탄연료의 공급처가 되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지금까지의 고고학 조사를 보면 울산 지역에서 무려 20곳에 이르는 초기철기~삼국시대 야철 유적이 확인됐다. 

조선시대 채광했던 구덩이(왼쪽)과 일제시대에 채광한 흔적인 채광선로. |김권일의 논문에서

■달천 광산의 비소와 경주 황성동 유적의 비소 

이도학 교수는 “달천 광산에서의 고고학적인 조사 성과도 무시할 수 없다”고 전한다.

즉 달천광산에서 발굴 조사된 유구는 대부분 채광(채굴)과 관련된 것인데, 채광 구덩이와 채광장 등이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삼각형 덧띠토기와 긴목 항아리, 뚜껑, 작은 항아리, 굽다리 접시, 무늬없는 토기 등 기원전 1세기 중엽~기원후 3세기까지의 유물이 확인됐다. 

또 이곳에서는 일본과 한사군(낙랑 및 대방 등)과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는 야요이(彌生)토기와 낙랑계 토기가  보였다. 이는 3세기 후반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동이전·한조’의 기록과 부합된다. 

무엇보다 신라 유적인 경주 황성동 유적의 시료를 분석한 결과 자철광을 원료로 삼았고, 철에 비소(As)가 다량 함유된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자철광이며, 비소가 다량 함유된 달천 광산의 철광석을 연상시킨다. 결국 경주 황성동에서 사용된 철광석은 ‘달천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곳 뿐이 아니라 울산 천상리와 덕천리 유적에서도 비소(As)가 나왔다.

역시 달천 광산에서 채광한 철광석을 사용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울산 창평동 목곽묘에서 출토된 한나라 거울 2매와 3세기대의 유적인 울주 다대리 목곽묘에서도 청동솥도 대외교류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 모두가 달천 광산을 기반으로 형성된 유적일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부산 복천동에서 출토된 갑옷. 가야고분에서는 유독 철제 유물이 많이 쏟아져 나온다.

■가야는 철의 생산국이 아닌 소비국?

그렇다면 가야 지역 유적인 부산 복천동과 김해 대성동 및 양동리에서 쏟아진 어마어마한 덩이쇠(철정)와 갑옷을 비롯한 철제 무기류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지만 철정과 갑옷 등은 가야의 전유물은 아니다. 예컨대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덩이쇠는 1200여점(김해 420여점·부산 520여점·함안 150여점)이지만 신라 유적인 경주 황남대총 남분(1300여점)과 금관총(700여점)에서만 2000여점이 나왔다. 갑옷도 가야의 종장판갑(철판을 구부려 가죽끈 혹은 못으로 연결한 갑옷)이 유명하지만 신라 영역인 경주 사라리와 구정동 등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다만 가야의 고분의 부장품으로 유독 인기를 끈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철의 생산과 소비·유통은 구별해야 할 필요는 있다.

 이 대목에서 이도학 교수는 “적어도 3세기 중반 이전, 즉 <삼국지> ‘위지·동이전’ 시기 이전의 대규모 광산(철장)이 변진(가야)의 근거지인 김해 지역에서는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따라서 변진과 변진의 후예인 금관가야(구야국)는 가장 활발한 ‘철의 소비국’이자 ‘철의 유통국’이었을 뿐 ‘철의 생산국’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철 생산지(울산 달천광산 등)와 소비 및 유통(경주와 울산 등)가 어우러진 진한(신라)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철의 왕국’이라는 것이다.  

가야고분인 복천동 고분에서 나온 덩이쇠. 철도 레일처럼 관 밑바닥에 깔아놓았다.|복천박물관 

■경계해야 할 가야지상주의

그러나 이같은 단정은 시기상조라는 주장도 있다. 아직까지 가야인들이 대단위로 철광석을 채광한 흔적을 찾지는 못했을 뿐 그 여지는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권일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 1팀장은 “금관가야의 핵심 지역은 개발로 인해 유구가 파괴된 김해 도심”이라면서 “이런 이유 때문에 아직까지 철광석 생산지가 확인되지 않은 것 뿐이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물론 고고학에서는 차후에 어떤 자료가 불쑥 튀어나올 수 있으므로 단정은 금물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지난 2017년 6월 ‘소홀히 여겼던 가야사를 복원해보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언급 이후 전국에서 우후죽순처럼 벌어지고 있는 가야유적 조사와 관련해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물론 고구려·백제·신라 등 3국의 역사에 밀려 소홀히 다뤘던 가야사를 제대로 조사·연구해서 복원한다는 취지에 딴죽을 걸 이유가 없다. 

다만 이 기회를 틈타 가야지상주의를 외치는 지자체와 학계 일부의 부화뇌동은 경계해야 한다. 예컨대 전라도 지역에서 조사되는 제철 및 성곽 유적을 모두 가야의 것으로 유도하는 것 또한 위험한 시도일 수 있다. 김권일 팀장은 “가야시대가 아닌 백제나 통일신라 시대의 유구와 유적 또한 중요한데 요즘들어 너도나도 가야시대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우려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고구려 연구에 총력을 기울일 때 모든 한강 및 임진강의 유적 유구를 고구려 시대로 몰아간 전철을 다시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이도학 교수의 논문발표를 계기로 ‘철의 왕국’을 둘러싼 건전한 논쟁이 다시 불붙기를 바란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이도학, ‘변한 국출철론의 검증과 의미’, <단군학연구> 제39집, 단군학회, 2019

문경현, ‘진한의 철산과 신라의 강성’, <대구사학> 제78집, 1973

김권일, ‘울산 중산동 고분군 집단의 성격연구-달천 광산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울산지역문화연구>제 3집, 울산 문화원 연합회, 2015

         ‘경주 황성동 유적 제철유구의 검토’, <원삼국시대 경주 황성동 유적의 성격>(영남문화원 제22회 조사연구회 발표자료집), 영남문화재연구원, 2009

최수형, ‘울산 약사 동북동 유적-삼국시대 고분군 출조집단의 기능적 성격검토’, <박물관학보> 제31집, 한국박물관학회, 2016

이경인, <울산 달천유적 제1차 발굴조사보고서>, 울산문화재연구원, 2008

성정용, ‘가야철생산’, <가야고분군Ⅱ-가야고분군연구총서>, 제3권,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2018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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