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 예전에 부모님이 말 듣지않은 아이를 달래고 어르기 위해 쓴 말이다. \
‘무서운 괴물이 나타난다’는 경고성 메시지인데, 이 말의 유래를 아는 이는 드물다. 이 말은 ‘이비야(耳鼻野)’의 줄임말인데, 임진왜란 때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간 야만적인 일본인이라는 소리다. 말 듣지않은 아이를 어르려고 ‘코와 귀를 베어가는 일본 야만인이 온다’고 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가 전국시대의 오랜 전쟁에 지친 다이묘(大名)를 무마하려고 베어온 코의 숫자에 따라 조선땅을 분배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의 막사발 기자에몬 이도(喜左衛門 井戶). 이런 막사발들은 경남 진주지방에서 제삿날 김치를 담는 그릇이었다고 한다, 소장자였던 기자에몬(喜左衛門)의 이름을 땄다.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었는데 1781년 다도구 수집가이자 마츠에(松江)의 영주였던 마츠다이라 후마이(松平不昧)가 구입할 때는 금 550냥을 지불했다고 한다.|교토 고호안(孤蓬庵) 소장
■도공의 납치를 지시한 도요토미
그런데 조선인의 코와 귀 말고도 일본땅에 끌려간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조선의 기술자들이다.
얼마나 끌려갔을까. 문헌자료에 따라 2만~3만명설(일본측 자료)에서 10만~40만명설(조선측 자료) 등 다양하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사가번주(佐賀藩主)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武·1538~1618)에게 보낸 주인장(朱印狀·해외통상을 허가하는 공문서)을 보라.
“조선인 포로 중 세공을 하는 자와 손재주가 있는 자는 여자라도 일을 시킬 수 있게 상부로 보내줄 것이며….”
이 명령에 따라 나베시마는 1593년과 1598년(선조 31년) 2차례에 걸쳐 도자기를 만드는 사기장과 봉제공, 잡화공, 대장장이 등 수많은 조선인 기술자를 끌고갔다. 그중 일본이 특히 관심을 갖던 기술자는 사기장, 즉 도공이었다. 도요토미는 또 임진왜란이 소강상태로 빠진 1595년(선조 27년) 6월 잠시 귀국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1535~1619)에게 직접 차를 따라주고 차 도구도 하사하면서 조선인 도공의 납치를 지시했다.
시바타이도. 오다 노부나가가 시바타 가츠이에에게 선물로 준 조선제 막사발, 사발에 ‘시바타이도(柴田井戶)’라는 이름을 새겨 주었다. 이 찻잔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돼있다. |네즈(根津)박물관 소장
■화려한 중국제 찻잔에서 수수한 조선제 막사발로
그렇다면 일본은 왜 그렇게 조선의 사기장(도공) 납치에 혈안이 되었을까.
일본인들은 8세기 이후 말차(抹茶·분말차) 마시는 법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말차를 다도의 범주로 끌어올린 것은 바로 일본의 다인(茶人)들이었다. 말차 문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말차 전용 사발, 즉 찻사발(다완·茶碗)이었다. 14~15세기만 해도 도자기 산업은 지금의 반도체 산업이라 할만큼 최첨단 산업이었다. 일본에서도 찻사발, 즉 다완을 구워 라쿠다완(樂茶碗)을 만들기는 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당시 어엿한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 밖에 없었다. 초창기 일본 다인들은 흑갈색의 유약을 바른 중국제 흑유다완을 말차전용 사발로 사용했다. 하지만 일본의 다성(茶聖)이라는 센(노)리큐(千利休·1522~1591) 시대부터 일본의 차문화가 완전히 바뀐다. 형식과 화려한 연회 등을 강조한 일본의 차문화가 내용과 정신에 치중한 차문화로 탈바꿈한 것이다. 다도를 통해 불교에서 선(禪)의 경지에 이른다는 이른바 ‘와비차(わび茶)’을 완성시킨 것은 센리큐였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도공의 후예가 17세기 초 야마구치현(山口縣) 하기(萩)지역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묵서다완(일본명 추철회시문다완·萩鐵繪詩文茶碗)’에 처량한 자신의 심경을 새겼다.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다 도둑이냐. 자묵땅(다목지·지금 혹은 인명) 호고려개도 호고려 개로다. 듣고 잠잠하구나”는 내용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와비차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다만 고요하고 쓸쓸하면서 뭔가 부족하지만 그 속에 아름다움이 있고, 불완전한 미를 더욱 숭고한 것으로 추앙하는 차문화를 일컫는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수수하고 소박한 다도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일본 차문화가 화려함에서 소박함으로 바뀌면서 찻사발의 유행 또한 화려한 중국제보다는 투박하지만 소박한 조선제로 선회했다.
일본인들이 ‘바로 이거야!’하고 무릎을 친 투박하지만 소박한 말차 전용 조선제 막사발은 이도다완(井戶茶碗), 혹은 고려다완으로 일컬어졌다. 조선의 경남 진주에서 제작된 쯔쯔이쯔쯔이도(筒井筒井井戶)라는 사발이 있는데, 일본인들은 이 사발의 첫소장자인 ‘정호약협수(井戶若狹守)’의 이름인 이도(井戶)를 따서 조선제 막사발을 ‘이도다완’으로 통칭했다.
■살인면허와 다도의 상관관계
이쯤에서 한가지 궁금증이 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자들은 왜 다도에 심취했을까. 칼을 쓰는 자들이 차문화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가. 사실 당대의 무사들에게는 이른바 부레이우치(無禮討)라는 특권이 주어졌다.
‘부레이우치’는 성(姓)을 가질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상공인, 농민 등의 계층이 무사에게 무례를 범하면 칼로 목을 칠 수 있는 권리를 일컫는다. 이른바 살인특권, 혹은 살인면허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에도 막부(江戶幕府)의 법률인 ‘공사방어정서’ 71조 추가조에 명시되어 있다.
다이묘 간 전쟁에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일이 허다한데다 평시에도 사람을 멋대로 죽일 수 있는 특권을 보유한 무사들은 그들이 지고있는 살인의 업보를 내려놓기 위해 다도회를 이른바 희생제사의 형식으로, 혹은 무사들간의 결속과 충성예법으로 여겼다.
백자 채색 넝쿨무늬 마름모 모양 접시. 14~15세기 무렵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낙후되어 있었다. 당대 도자기를 제작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 뿐이었다. |사가현립 규슈도자문화관 제공
■충성차를 나눠마신 도요토미
단적인 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휘하의 무사 수십명을 소집하고는 조선제 막사발인 이도다완(井戶茶碗·고려다완)에 농차를 가득 담아 잔을 돌려가며 마셨다. 도요토미는 먼저 자신이 한모금 마셨는데, 이는 독을 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다음 찻잔을 돌려 한모금씩 돌려 마셨다. 이것은 무사들간 결속을 다지면서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이었다. 다른 예도 있다.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조선제 막사발(이도다완)을 하사받은 다이묘들은 다른 다이묘가 침략해올 때 도요토미 사인이 직힌 막사발을 보여주면 상황 끝이었다고 한다. 만약 ‘도요토미의 증표’를 보여줬는데도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그것은 곧 도요토미를 공격하는 의미였다.
다도는 이렇게 전략적인 포상이나 정치적 흥정물로도 이용됐다. 예컨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는 초창기에 시바타 가츠이에(柴田勝家·1522~1583년)를 회유하려고 ‘시바타’라는 이름을 새긴 조선제 막사발을 ‘시바타이도(柴田井戶)’라 해서 선물로 주었다. 이 찻잔을 선물로 내림으로써 오다는 피한방울 묻히지않고 시바타 군대를 복속시켰다고 한다. 이 찻잔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돼있다.
일본 등록문화재인 백자사발(왼쪽)과 백자 청화 국화·넝쿨무늬 접시(오른쪽). 일본 사가현립 규슈도자문화관 소장품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막사발 정치
그런데 일본의 국보로 추앙받는 조선제 막사발들이 16세기 조선의 경남 진주 민가에서 사용되는 제기용 그릇이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제사 때 김치를 담아올리던 사발이 일본에서는 정치적 흥정물로 각광을 받은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오다 노부나가의 ‘막사발 정치’를 계승해서 천하를 호령했다. 도요토미는 오다의 은덕을 기리는 편지에서 “다도는 정치의 도”라는 말을 남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조선제 막사발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일본 다인 가운데는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이도다완, 즉 조선 막사발을 소장하고 싶다는 이들이 생겼다. 그러나 조선제 막사발을 제작할 기술이 없으니 품귀현상을 빚었고, 고급 이도다완은 일본성, 심지어는 오사카성(大阪城) 한채 값을 호가할 정도였다.
그랬으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인 사기장(도공) 납치에 혈안이 됐던 것이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일컫는 것이다.
백자 채색 꽃·새무늬 육각 항아리. 일본의 도자문화는 조선의 장인과 도자기술이 밑거름이 되어 발전했다.|규슈국립박물관 소장
■“개야 짖지마라 호고려님…”
도요토미의 지시에 의해 끌려간 조선인 사기장(도공)들은 이역만리에서 생고생했다.
그렇게 끌려간 조선도공 후예가 17세기 초 지금의 야마구치현(山口縣) 하기(萩)지역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묵서다완(일본명 추철회시문다완·萩鐵繪詩文茶碗)’에 새긴 싯구는 심금을 울린다.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다 도둑이냐. 자묵땅(다목지·지금 혹은 인명) 호고려님 ‘지슘’(계시는 곳?) 다니는 구나, 그 개도 호고려 개로다. 듣고 잠잠하구나.”
‘호고려’는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인을 일본인이 부르던 호칭으로 추정된다. ‘되 고려사람’ 혹은 ‘오랑캐 고려사람’의 뜻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납치된 조선인’을 일컫는 보통명사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7세기 초면 납치 후 50년 이상 지났던 때다. 고된 도자기 제작 일 때문에 밤에만 돌아다닐 수 있는 조선출신 도공들 처지를 빗대 푸념하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끌려간 도공들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백자 채색 꽃바구니 무늬 팔각 큰 항아리. 국립진주박물관은 특별전을 위해 12점의 히젠 도자기 명품을 선별해서 일본 도자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사가현립 규슈 도자문화관 소장
■수백년 지나도 조선의 풍습을
물론 상당수 도공들은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갈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가마를 짓고 조잡한 일상잡기를 제작하면서 토착민과 물물교환하고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물론 일본인들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냥 눌러앉으려는 이들도 생겼다.
조선인의 귀환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이경직(1577~1640)의 기행문인 <부상록>은 “돌아가려는 자는 조금 식견있는 사족이거나 일본에서 고생하는 사람이지만, 삶이 안정된 이들은 귀국의 뜻이 전혀 없었으니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끌려가는 제 백성을 돌보지 못한 조선 조정이 무슨 낯으로 그들을 비판한단 말인가.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엄격한 분리정책도 영향을 끼쳤지만 수백년이 지나도 조선의 풍습을 버리지 않았다.
“임진년에 포로가 된 자들인데 지금 수천호가 됐다, 서로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일본사람과는 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그 풍속이 변하지 않았다.”(박대양·1848~1888의 <동사만록>)
1780년대 일본기록인 <서유잡기>는 일본 속 조선인을 두고 “누구든 비녀를 꽂고 있었고, 키가 크고 얼굴도 갸름했다”면서 “그렇지만 천하게 보이지는 않는다”고 품평했다. 그러나 조선인 기술자와 일본인 간의 혼인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고, 머리카락도 일본무사처럼 깎는 것을 금했다. <서유잡기>는 “5~6대를 일본에 살면서도 머리조차 일본식으로 따라하는 것을 허락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백자 채색 꽃무늬 맥주잔. 다양한 색상으로 화려하게 만든 히젠 자기의 기원은 조선 장인이 만든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조선도자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사가현립 규슈도자문화관 소장
■도자기의 신 이삼평
이런저런 이유로 눌러앉은 이들은 때로 소속 영주들의 보호로 정착금과 토지를 받고 자치읍을 형성하면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일으켰다.
이중에 일본이 자랑하는 ‘아리타(有田)자기’의 시조로 추앙 받는 이삼평(李參平·?~1655)이 포함돼 있었다. 이삼평(일본명 가네가에 삼베에·金カ江三兵衛)은 일본에서 도자기의 신으로 일컬어진다.
가라쓰(唐津) 근방에 닿은 이삼평은 다쿠번(多口藩)에 맡겨져 가마를 짓고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쿠고가라쓰(多久古唐津)는 바로 그가 시작한 가라쓰 도자기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양질의 점토를 구할 수 없었기에 계속 장소를 옮겨 가마를 만들다가 규슈(九州) 히젠번(肥前藩) 아리타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자광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도예촌(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열었는데 이것이 일본자기의 시초가 됐다.
이삼평 덕분에 30년도 지나지 않아 아리타에는 수많은 도공들이 집결해 번성을 이뤄 이른바 대도향(大陶鄕)이 됐다. 생산된 도자기는 이마리항(伊万里港)을 통해 널리 수출됐다. 언젠가부터 아리타의 도자기는 ‘아리타 자기’ 혹은 ‘이마리자기(伊万里燒)’라 알려졌다. 지금도 ‘올드 이마리’, ‘이마리야키(伊万里燒)’ 등은 도자기 애호가들에게 사랑받는 ‘히젠 도자기’의 애칭이기도 하다.
백자 청화 사자무늬 큰 접시. 조선장인과 도자기술이 밑거름이 된 일본의 도자문화는 중국의 명·청 교체기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자체적으로 기술혁신을 거듭하면서 발전했다.|사가 현립 규슈도자문화관 제공
■도자기로 문명국이 된 일본
사실 16~17세기 유럽에서는 동양의 도자기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도자기는 당시 금과 똑같은 무게로 거래된 적이 있고 도자기 한 개 가치가 좋은 집 한 채 가격이었다. 유럽에서 귀족들은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도자기를 진열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상황에서 조선 기술자를 납치해 간 일본은 졸지에 당시의 하이테크 산업인 도자기를 제작할 수 있는 문화민족이 됐다. 단순히 도자기로 돈을 번 것 뿐이 아니다.
유럽에 ‘일제’에 대한 좋은 인상을 주게 되어 다른 상품들에게까지 좋은 파급효과를 얻게 됐다. 가구와 각종 공예, 실크 등이 그렇다. 게다가 17세기(1618~1644) 중국에서 명-청나라 전쟁이 벌어지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재빨리 중국을 대신할 시장으로 일본을 선택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도 앞다퉈 일본에 진출해서 도자기를 수입해갔다.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이때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됐다.
지금 국립진주박물관은 12월8일까지 ‘조선도자, 히젠의 색을 입다’를 주제로 한·일 문화교류 특별전을 개최한다. 진주가 이른바 조선제 막사발, 즉 이도다완(고려다완)의 본향이라는 점에서 이번 전시회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모쪼록 이번 기회에 투박한 조선의 막사발 속에 담겨진 파란만장한 역사를 보듬어보기를 바란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이 기사는 이홍림의 ‘일본의 다도와 대한민국의 세라믹 다완(찻사발)’, <새라미스트> 18, 한국세라믹학회, 2015를 참고했습니다. 또 백두현의 ‘도자기에 쓰인 한글명문 해독’, <미술자료> 798, 국립중앙박물관, 2009와, 정광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의뢰받아 작성한 ‘萩燒き다완 명문해독’ 자료 등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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