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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제2의 무령왕릉 출현하나…공주 송산리서 확인된 46기 고분의 실체

“‘중방(中方)’ 명 벽돌의 원 위치를 찾아라.”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무령왕릉 및 6호분과 같은 성격의 벽돌무덤을 포함, 새로운 백제고분 41기가 존재할 가능성이 확인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백제역사유적지구·2015년 등재) 중 한 곳인 송산리 고분군의 중장기 학술조사 수립을 위한 첫 정밀현황조사 결과 무령왕릉 인근에서 ‘중방(中方)’ 명 벽돌을 수습했다고 밝혔다. 

이성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무령왕릉 남쪽 80m 지점의 지표면에서 ‘중방’ 명 벽돌을 수습했다”면서 “이 벽돌은 일제강점기에 보고된 파괴벽돌무덤(17호분)의 추정위치와도 70m 정도 떨어져 있다”고 전했다. 

무령왕릉 서벽 창문모양 장식에 사용된 ‘중방(中方)’명 벽돌(좌)과 이번 조사에서 수습한 ‘중방’명 벽돌(우). 벽돌의 크기와 글자의 위치로 볼 때, 무덤방 벽면에 세워 창문모양을 장식한 것과 유사하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중방’ 명 벽돌의 실체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은 틀로 찍어낸 벽돌을 쌓아 터널 형태의 무덤방을 조성한 벽돌무덤(전축분)이다. 벽돌무덤은 한나라~송나라까지 유행했으며, 황토가 많은 중국의 특성을 살린 무덤형태이다. 송산리 6호분에서 “중국 남조시대 양나라(502~557) 관영공방의 기와를 본보기로 삼았다(梁官瓦爲師矣)”라는 명문 벽돌이 출토됨에 따라 6세기 백제가 중국 양나라의 양식을 채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백제 왕릉인 무령왕릉과 6호분에서는 대방(大方)이나 중방, 중(中), 급사(急使) 같은 글자를 새긴 벽돌이 확인된 바 있다. 이성준 학예연구관은 “이런 명문은 벽돌이 사용된 위치 등의 쓰임새를 의미한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라 밝혔다.

무령왕릉에 사용된 총 7927점의 벽돌 중 ‘중방’ 명 기와는 30점 정도이다. 그런데 이번에 지표면에서 수습된 ‘중방’ 명 기와는 벽돌의 크기나 글자의 위치로 볼 때 무령왕릉의 긴 벽면에서 창문모양을 장식한 8점과 유사하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올해 조사한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현황.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정비된 고분은 7기다. 일제강점기에 보고됐지만 현재까지 위치를 알 수 없었던 고분은 6기, 새롭게 확인된 추정 고분은 41기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이성준 학예연구관은 “물론 인근 무령왕릉이나 17호 벽돌무덤에서 떨어져 나간 벽돌일 수도 있다”면서도 “그러나 ‘중방’ 명 벽돌이 무령왕릉에서는 80m, 17호분에서는 70m 이상 떨어져 있으니 두 무덤과는 또다른 벽돌무덤이 근처에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기대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확인된 ‘중방’ 명 벽돌 역시 새로운 벽돌무덤의 벽면 창문 모양 장식기와일 가능성이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또 전기나 진동을 활용해서 땅 속 구조물이나 매장문화재의 분포를 판단하는 기술인 지하물리탐사와 고고학 지표조사 결과 41기 고분이 남아있을 가능성을 확인했다. 특히 이번 탐사에서는 일제강점기 이후 위치를 알 수 없었던 7~8호 및 29호분의 관련 흔적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성준 학예연구관은 “7~8호분은 1~4호분의 남쪽 밑 지하에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번에 새롭게 찾아낸 송산리 8호분 석실의 유리건판 사진. 고분 주변의 상황이 좀 더 선명하게 촬영됐다, 고분 위쪽으로 사람의 모습도 확인된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송산리고분을 무단발굴한 가루베의 분탕질  

송산리 고분군(사적 제13호)은 웅진 백제 시기(475~538) 왕실 묘역이었다.

1530년(중종 25년) 편찬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미 “향교 서쪽 3리에 속설에 백제의 왕릉이 있다”는 내용이 나와있었다. 그런데 백제 임금과 왕비, 왕족이 묻혔을 이 송산리 고분군을 마구 파헤친 자가 있었으니 바로 일제강점기 공주고보 일본어 선생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1897~1970)이었다. 

와세다대(早稻田大)에서 국어·한학과를 전공한 가루베는 역사 및 고고학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비전문가였다. 그런데도 가루베는 “1927~32년 사이 실견한 백제고분이 1000기에 이른다”고 자랑할만큼 공주 지역 백제유적을 샅샅이 뒤졌다. 가루베는 특히 “천정구조에 주목해서 분류한 고분이 738기에 이르며 그중 182기는 실측조사까지 했다”고 떠벌렸다. 오죽하면 조선총독부 박물관 전문가들조차 “연구 목적의 미명 아래 저지른 유례없는 사굴(私掘) 행위”라고 가루베를 비판했을까. 

1933년 가루베가 일본 <고고학잡지>(23-9호)에 게재한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전경과 고분의 위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전문가도 아닌 문외한이, 그것도 무허가 실측조사를 했다는 것은 곧 도굴이다. 가루베는 송산리 6호분 등 도굴이나 다름없는 무단발굴 과정에서 상당수 유물을 빼돌렸다. 1927~1933년 사이 가루베가 무단발굴하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뒤늦게 뛰어들어 보고한 송산리의 백제고분은 공식적으로 29기에 이른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사에서 발굴기록이 남아있는 고분은 송산리 6호분(벽돌무덤)과 돌방무덤(1~5호, 7~8호분, 29호분) 등 불과 8기 뿐이다. 그것도 가루베의 자료와, 조선총독부의 보고가 서로 달라 송산리 1~5호분 중 공식기록이 남아있는 고분이 2호분인지 3호분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번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표조사와 정밀탐사 등을 통해 백제 고분 41기의 존재 가능성을 확인했다지만 일제강점기에 보고됐다는 29기와 중복됐는지 아닌지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가루베가 얼마나 이 송산리고분군을 분탕질했는지,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뒷정리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송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 가루베는 송산리고분군에서는 도굴 때문에 유물이 거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송산리 고분군의 주인공은?

모골이 송연한 대목이 있다. 가루베가 1933년 무단발굴한 6호분의 뒤쪽 배수로 공사도중 도굴되지 않은 완벽한 벽돌분이 발견됐다(1971년)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무령왕릉이다. 6호분과 바로 붙어있는 무령왕릉이 가루베의 손끝을 아슬아슬 비껴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정비되어 있는 고분은 1~6호분과 무령왕릉 등 7개 뿐이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묻힌 백제임금은 과연 누구일까. 웅진백제 시기(475~538년)의 백제 임금은 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 함락 후 웅진(공주) 천도를 이끈 문주왕(재위 475~477)을 비롯해 삼근왕(477~479), 동성왕(479~501), 무령왕(501~523), 성왕(523~554·538년 사비로 천도) 등 5명이다. 

그중 무령왕릉은 1971년 확인됐으니 남은 임금은 문주왕·삼근왕·동성왕·성왕 등이다. 문주왕과 삼근왕은 재위 3년만에 정변(문주왕)으로, 혹은 어린 나이(15살·삼근왕)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벽돌무덤의 주인공이 되지말라는 법은 없다. 중국 남조의 남제(479~502)와 활발하게 교류했던 동성왕은 어떨까. 물론 재위 도중(538년) 사비(부여)로 천도한 성왕이 이곳에 묻히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성준 학예연구관은 “1988년과 지난해 제단으로 추정되던 주변의 석축시설 등을 조사한 것을 빼면 백제왕릉과 왕실묘역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학술조사가 미진했던 것이 사실”이라면서 “향후 20년 장기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