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해보이기도 하고…좀 생경해보이기도 하고….”
지난 10일 3년3개월의 공사 끝에 사실상 복원을 마무리지은 경복궁 흥복전 안에서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개최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올 1월 기존의 궁·능 유적관련부서들을 통폐합해서 새롭게 출범한 궁능유적본부가 흥복전의 복원공사와 4대궁 40개릉의 중장기 발전방안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옛 모습 그대로의 복원을 금과옥조로 삼았던 기존의 관례였다면 이날처럼 말끔하게 복원된 궁궐 전각에서 기자회견을 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복원을 사실상 끝낸 경복궁 흥복전. 단청공사만 마무리 되지 않았을 뿐 사실상 공사를 끝내고 외부관람이 허용됐다. 흥복전은 지금 백골집(단청을 하지 않은 상태)의 형태이다.|우철훈 선임기자
분명히 옛 궁궐, 그것도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전각을 복원한 것인데 여느 복원건물과는 사뭇 달랐다. 기자간담회가 한창인 흥복전 내부는 환한 LED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전기시설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그랬으니 요즘 같은 무더위를 식힐 냉방기구가 가동되었다. 한겨울이라면 당연히 난방기구가 가동되었을 것이다.
궁능유적본부 관계자는 수십명의 기자 앞에서 빔프로젝트를 쏘아가며 PPT로 만든 간담회 자료를 설명했다. 흥복전 안에 조성한 현대식 화장실을 다녀온 기자들 중 일부는 ‘좀 적응이 안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활용 차원에서 전기시설을 갖춘 것까지는 좋지만 옛 궁궐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화장실을 보고는 ‘적응이 안된다’는 반응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이왕 활용하겠다고 나섰으니 어쩔 수 없는 시설이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궁·능의 복원사상 처음으로 활용기반시설을 구축한 최초의 전각이 된 경복궁 흥덕전. 전기시설을 갖췄으니 냉난방 기구를 설치했고, 빔프로젝트를 통해 프레젠테이션(PT)도 할 수 있다. 10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의 기자간담회도 흥복전에서 열렸다.|우철훈 선임기자
이렇게 기자간담회를 열면서 공개된 흥복전은 궁·능의 복원사상 처음으로 활용기반시설을 구축한 최초의 전각이 됐다.
이재준 궁능서비스기획과장은 “궁궐을 좀더 활용할 수 있게 복원하자는 취지에서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사철내내 회의장과 발표장, 교육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흥복전은 2015년 5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3년3개월간의 공사를 사실상 끝내고 공개를 기다려왔다.
물론 전각 건물은 아직 ‘백골집(단청을 하지 않은 상태)’의 형태를 띠고 있다. 현재 흥복전을 비롯, 건축문화재 전반의 복원을 위한 전통안료를 개발해놓았지만 아직 개발에 따른 품셈(건축 부분공사에서 단위당 자원 투입량) 등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정연 복원정비과장은 “품셈과 시방서(공사 따위에서 일정한 순서를 적은 문서)가 확정되는 2022년 이후에 단청이 마무리될 것”이라면서 “하지만 일반 공개에는 아무런 걸림돌이 없다”고 밝혔다.
복원된 흥복전의 내부, 왼쪽엔 현대식 화장실이, 오른쪽엔 복도가 조성되어 있다.|우철훈 선임기자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흥복전 내부를 관람하고 활용하는 것은 준비기간을 거쳐 내년초부터가 될 것”이라면서 “그러나 흥복전을 밖에서 관람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부터 허용된다”고 밝혔다. 이날 열린 기자간담회처럼 내년부터는 흥복전 안에서 각종 회의나 발표회 등을 열 수 있다.
경복궁 흥복전은 조선 말기의 운명처럼 파란만장한 사연을 지닌 전각이다. 조선 전기 경복궁을 처음 건립했을 때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1867년(고종 4년) 중건 당시 영조의 잠저(임금 되기 전의 거처)인 통의동 창의궁 전각인 함일재를 뜯어와 지은 것이 흥복전이었다.
중전의 침전인 교태전의 후원동산인 아미산 뒤 넓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 흥복전의 용도는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용도 건물이었다. 그러나 중전의 침전 근처이니 구중궁궐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는 뜻이며, 주로 여인들의 공간이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뒤편에 빈궁내소주방과 빈궁생물방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빈궁(세자빈의 거처) 역할을 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흥복전 내부에 조성된 현대식 화장실. 활용차원에서 만들었다. 궁궐의 시설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고, 이왕 활용한다는 차원에서 복원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이곳에는 내명부의 조직원인 후궁과 궁녀들이 거처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 이곳은 철종(재위 1849~1863)의 부인인 철인왕후(1837~1878)의 침전(고종 즉위 후 대비전)이었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1888년(고종 25년) 이곳에서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조대비·1808~1890)의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이곳에서 치렀다. 이때 역시 존호와 책보를 받은 중궁전(명성왕후)이 의식을 치른 곳도 흥복전이었다. 또 흥복전은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1859~1872)가 부마(박영효·1861~1939)를 간택할 때 후보자들이 들어오는 처소로 쓰인 적도 있다. 흥복전은 신정왕후가 1890년(고종 27년)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가 작성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경복궁 흥덕전의 옛 모습.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대비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문화재청 제공
흥복전은 1885~1888년 사이 고종의 집무실로도 쓰였다. 1876년(고종 13년) 불에 탄 강녕전. 교태전, 자경전이 재건되지 않은 시점인 1885년(고종 22년) 고종이 경복궁으로 이어했기 때문이다. 강녕전을 재건하지 못한 고종은 자연히 교태전 뒤쪽 아미산 너머에 있는 흥복전 영역을 이용했다. 흥복전은 이때 외국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활용된다.
1885년(고종 22년) 독일공사(돔케)를 접견하는 등 1890년(고종 27년) 강녕전이 재건될 때까지 모두 15차례에 걸쳐 흥복전에서 외국사신을 접견했다.
고종이 이때 만난 외국사절은 일본·영국·이탈리아·프랑스·미국·러시아 등 각국 공사와 외교관이었다. 이 중 1889년(고종 26년) 6월5일 접견한 중국 제독 정여창(?∼1895)의 접견례가 <승정원일기>에 남아있다.
경복궁 내에서 흥복전의 위치. 국왕과 왕후의 침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의 후원동산인 아미산 뒤 넓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문화재청 제공
즉 “중국 제독이 건물에 오를 때 고종이 흥복전의 기둥 밖에까지 나와 맞이하고 서로 읍례를 행하고, 물러갈 때 거수경례를 했다”는 사실은 다른 사신과의 접견례에서는 볼 수 없는 대우다. 고종은 또 음식상을 차려 같이 식사하는 등 중국 제독을 특별히 배려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종이 경연을 열고(54차례), 과거장소 및 과거급제자의 성적을 매긴(8차례) 장소였다. 흥복전은 이외에도 신하들이 전문(나라에 길흉이 있을 때 임금에게 써 바치던 사륙체의 글)을 올리고(2차례), 사은(관직을 제수받은 자 등이 임금에게 인사하는 의식)이 벌어졌으며(4차례), 신하들을 접견한(54차례) 곳이었다.
흥복전은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조선총독부 부지와 물산깅진회 등을 명분으로 자행된 일제의 무자비한 경복궁 훼철에도 용케 살아남았다. 그러나 1917년 창덕궁 화재에 따른 복구공사를 위해 목재를 구한다는 이유로 교태전·강녕전 등 침전권역과 함께 철거되어 창덕궁으로 녹아든다. 이후 흥복전 영역은 일본식 정원으로 둔갑한다.
나명하 궁능유적본부장은 “전기시설 등 기반시설을 갖춘 상태로 복원된 흥복전은 시민들이 교육·회의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경복궁 안 전각에 전기시설을 구비한다는 것은 그만큼 화재에 노출된다는 의미이다. 흥복전 내부 천정에는 화재방지용 불꽃감지기 여러 대가 반짝거리고 있다. 하지만 화재에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문화유산 활용 차원에서 기반시설을 갖춘 것이라면 그에 합당한 철저한 관리방안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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