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서리 찬 기운에 수심만 더욱 깊어지고 등불 아래 한 많은 여인은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그대와 이별 7년. 서로 만날 날 아득하네.” 1806년(순조 6년) 겨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부인(홍혜완·1761~1838)이 남편에게 ‘절명시’에 가까운 애끓는 시를 쓴다. 병들어 약해진 마음에, 언제 유배에서 풀려날 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는 부인의 안타까운 그리움을 한껏 담은 시였다. 아내는 이 시와 함께 시집 올 때 입었던 빛바랜 다홍치마를 전남 강진의 남편에게 보냈다. 시를 쓴 1806년은 다산과 부인의 결혼 30주년 되는 해이기도 했다. 

‘하피첩’. 다산의 부인이 유배중인 남편에게 혼인 때 입었던 다홍치마를 보냈다. 다산은 빛바랜 다홍치마가 “글 쓰기에 훌륭하다”면서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이 이별은 어쩔 수가 없다”

사실 그 무렵에는 부인이나 다산이나 몸과 마음이 아팠던 때였다. 무엇보다 20대 초반 한때 천주교에 심취했던 이력이 두고두고 다산의 발목을 잡았다. 그래도 다산을 그토록 아꼈던 정조 임금이 재위했을 때는 괜찮았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하면서(1800년) 위기에 빠졌다. 신유박해(1801년)에 연루된 다산은 장기(경북 포항)로 유배형을 떠났다. 사형 당하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해(1801년) 10월 이른바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터졌다. 황사영이 청나라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낸 편지는 놀라웠다. 신앙의 자유와 천주교 보호를 위해 외국 군대를 개입시키자는 제안이 담겨 있었다. 모반 대역죄에 해당됐다. 이 사건의 불똥이 다산에게 튀었다. 장기에서 유배중이던 다산은 서울에서 문초를 받은 뒤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됐다. 이때부터 다산의 18년 유배생활이 시작됐다. 유배를 떠날 때 부인은 막내 농장(농아)를 안은채 배웅했다. 그런 아내에게 다산은 시 한편을 지어 미안하고 애틋한 심정을 전했다.

“산바람 불어와 가랑비 뿌리는데 서로가 가기 싫어 망설이는 듯 하구나. 주저하고 망설인들 무슨 소용 있으리오. 끝내 이 이별은 어쩔 수 없는 것을….”(‘사평촌의 이별’) 

다산 정약용이 부인(홍혜완)이 보낸 다홍치마를 5폭으로 잘라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첩을 만들어 보낸 ‘하피첩’. 및바래 다홍치마에  쓴 편지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라”

다산보다 1살 연상인 부인과의 금슬은 좋았다. 6남 3녀를 두었다. 그러나 가족사는 그리 순탄치 않은 역정을 걸었다. 6남 3녀 중 4남2녀를 천연두·학질·조산 등으로 잃었기 때문이다. 학질에 걸려 8개월만에 낳은 첫딸은 출산 4일만에 죽어 이름도 남기지 못했다. 셋째 아들(구장)은 만 2살이 겨우 지나, 둘째딸(효순)와 넷째아들(삼동)은 모두 22개월만에 천연두를 앓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다섯째 아들 역시 태어난지 10여일 만에 이름도 짓기 전에 죽었다. 특히 강진 유배 후 1년이 지난 1802년(순조 2년) 들려온 4살 막내아들(농장)의 사망 소식은 다산에게나 부인에게나 감당할 수 없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유배 길에 나설 때 아내의 품에 안겨 과천까지 배웅했던 막내였기에 다산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나의 홍역이 낫고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천연두가 낫을 것”이라며 아버지를 기다리던 막내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유배지의 아버지는 ‘아비로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졌다. 그러면서도 다산은 더욱 큰 충격에 빠졌을 아내를 걱정했다.  

“너희 어머니가 목숨을 의탁하던 한가닥 희망이 오직 그 아이뿐이었는데…. 나는 너희 어머니 처지를 생각하며 내가 그 아이의 아비라는 것은 잠시 잊은채 너희 어머니를 위해 슬퍼한다. 너희는 모쪼록 마음을 다해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해서 어머니 목숨을 보전하도록 해라.”(‘두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1802년 12월)   


■‘서글픈 꿈 속에서 본 아내의 얼굴’

유배가 언제 풀릴 지 알 수 없게 되면서 아내와 자식들을 향한 그리움은 쌓여 갔다. 1806년 어느날 다산은 아내를 만나는 꿈을 꾸고는 ‘꿈속에서나마 느꼈던 애틋한 사랑’을 시로 표현한다.

“그리워 말아야지. 그리워 말아야지. 서글픈 꿈 속에서 본 그의 얼굴….”(‘꿈속에서 본 아내에게’)

그 해 겨울, 남편의 마음을 알았는지 부인은 시 한 편과 함께 시집 올 때 입은 붉은 치마를 동봉해서 남편에게 보낸 것이다. 그리움을 한가득 담아 보낸 정표였다. 결혼 30주년을 맞이한 다홍치마는 빛이 바래 담황색으로 변해있었다. 아내는 외로운 남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한다.

“집을 옮겨 남쪽으로 내려가 끼니라도 챙겨드리고 싶지만 한 해가 저물도록 병이 깊어져 이 내 박한 운명 어찌 하겠습니까. 이 애절한 그리움을….”

<매화병제도>. 다산은 부인 홍씨가 보내온 치마를 재단해서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4책을 만들었고, 남은 치마폭으로는 외동딸의 행복한 혼인생활를 기원하는 매조도를 그렸다.|고려대박물관 소장

■홍군보다 하피

다산은 부인이 보내온 이 빛바랜 다홍치마를 5폭으로 나눈다. 왜 그랬을까.

“병든 아내가 시집올 적에 가져온 예복은 붉은빛이 담황색으로 바래서 서본(書本)으로 쓰기에 알맞았다. 이것을 잘라 조그만 첩(帖)을 만들어 훈계하는 말을 써서 두 아들에게 전해 준다.”(<다산시문집>)

다산은 두 아들(학연·학유)에게 보낸 편지첩을 ‘하피첩’이라 이름붙였다. 다산은 “하피는 곧 홍군(紅裙·다홍치마)의 전용된 말”이라 부연설명했다. 사실 홍군, 즉 다홍치마는 다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처녀와 미인이라는 뜻도 있지만 기생이라는 말도 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도 있는데, 이것은 ‘기왕이면 처녀가 좋다’는 성희롱의 의미도 담겨있다. 하피는 원래 궁중의 비빈들이 입는 옷이었지만 중국 당·송 시대부터 신부가 입은 혼례복이었다. 그래서 다산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홍군’보다는 ‘하피’라 표현했을 것이다. 


■멋없는 남편인가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병든 아내가 ‘부디 날 잊지 말아 달라’며 보낸 빛바랜 다홍치마를 다산은 왜 ‘서본으로 남기기에 제격’이라며 5등분했을까. 남편으로서의 다산은 낭만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아내가 그리울 때마다 꺼내봐야 할 치마를 두고 고작 생각해낸다는 것이 “세월이 흘러 담황색으로 바랜 다홍치마를 보니 글을 써서 서책으로 남기기에 꼭 알맞았다”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다산의 다음 말을 보면 나름 이해할 대목은 있다. 

“내가 이 치마에 쓴 글을 보고 (두 아들이) 감회를 일으켜 두 어버이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그리는 감정이 뭉클하게 일어날 것이다.”

다산은 그동안 아내의 치마를 잘라 써내려갔던 편지 26편을 두 아들(학연·학유)에게 보냈다. 그때가 1810년(순조 10년) 초가을이었다. 1801년 40살의 나이로 유배를 시작했을 때 19살과 16살이던 아들 둘은 어느 덧 28살(학연)과 25살(학유)이 됐다. 두 아들에게만 부모의 정을 담은 것은 아니었다. 

2년 뒤인 1812년(순조 12년) 다산은 모처럼 기쁜 소식을 접했다. 어엿한 숙녀(20살)가 된 외동딸이 아버지의 오랜 벗인 윤서유의 아들(윤창모)과 혼인했기 때문이다. 다산은 남편과 함께 고향인 마재로 떠나게 된 딸을 위해 고이 간직하고 있던 빛바랜 다홍치마 한 폭에 화조도를 그려주었다. 하얀 매화 꽃가지에 새 두마리가 다정하게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부부가 평생 한 곳만 바라보고 살라는 뜻이었다. 다산은 아마도 부인과 30년 동안 한 곳만 보고 살아온 스스로의 삶을 떠올렸을 것이다.   

강진 유배지에 도착한 이듬해인 1802년 10월17일, 다산이 황상(자는 산석)에게 학문하는 자세를 일깨워 준 글이다. “내가 산석에게 문사(文史)를 닦도록 권하니 그는 머뭇머뭇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저는 세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둔하고, 둘째 막혀있고, 셋째 미욱합니다”라고 대답했다.황상은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고 간직했다. 이유묵은 정약용의 친필이 아닌, 다산의 큰아들 정학연의 필체다.

■폐족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법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하피첩을 보면 유난히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폐족(廢族·망한 가문)’이라는 말이다.

“이제 너희는 망한 가문의 자손이다.…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가지 밖에는 없다.”

“폐족으로서…너희 스스로 천하게 여기고 얕잡아 보면 스스로 비참해진다.”

“폐족이 배우지 않으면 도리에 어긋나고 비천하고 더러운 신분으로 타락하게 된다.”(<다산시문집>)

아비 때문에 출세길이 막힌 두 아들에게 ‘폐족의 자손’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몸가짐을 어찌 해야 할지, 친척끼리는 어찌 지내야 할 지, 어떤 친구를 사귀고, 어떻게 공부해야 할 지 구구절절 타이르고 있다.

다산은 특히 천주교를 믿은 전력 때문에 가문이 폐족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한 일들이 뼈에 사무쳤다.

다산 정약용이 아들에게 남긴 ‘하피첩’ 중 삶의 자세를 강조한 ‘경직의방’. 공경하는 마음을 다잡고. 의리로 자신의 행동을 반듯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우리 가문은 선대부터 붕당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 사귄 벗들이 우리 가문을 연못에 밀어넣고 그 위에 돌까지 던지고 있다.”

그럼에도 다산은 “너희는 당파적 사심을 철저하게 씻어버려라”고 신신당부하면서 “그렇지만 너희는 베풀며 살라”고 이른바 메기론을 제기한다. 

“재물을 저장하는 것은 남에게 베푸는 것보다 못하다.…단단히 잡으려 할 수록 더욱 미끄럽게 빠져나가니 재물이란 메기와 같은 것이다.”(<하피첩> ‘3첩’)

다산은 또한 ‘검소’를 주장하면서 “의복은 몸만 가리면, 음식은 생명만 연장하면 된다”고 단언한다.

“난 벼슬이 없으니 농장을 물려줄 수 없다. 야박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전해줄 것은 하나는 근면이요, 다른 하나는 검소이다. 두가지는 좋은 전답보다 낫다.…놀고 먹는 식구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근면이다.”

다산은 “두꺼운 베로 만든 옷은 볼품은 없어도 오래 입는다. 맛있는 횟감이나 생선도 입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더러운 물건이 된다”(<하피첩> ‘2첩’)고 역설했다. 


■“아비가 죽으면 제사보다 책을 읽어주어라”

그런 다산이 <하피첩>에서 두 아들에게 남긴 성어가 있었으니 ‘경직의방(敬直義方)’이다. 공경하는 마음을 다잡고. 의리로 자신의 행동을 반듯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경직의방’은 <주역> ‘곤괘’에 나와있는 “공경함으로 마음을 고르게 하고(敬以直內) 의로움으로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한다(義以方外)”를 줄인 것이다. 다산은 자녀들의 출세길이 막혔지만 ‘경직의방’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처사로서의 삶을 살기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아비 때문에 벼슬길이 막힌 자식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을까.    

다산은 하피첩에서 자신이 강진 유배시절 남긴 500여권의 저서가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다산은 “아비가 곁에 없어서 자식들을 직접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학문을 좋아하지 않게 된 너희 형제로 인해 후세에 날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겠다”고 걱정했다. 그러면서 다산은 “너희가 학문에 전념하는 것이 곧 아버지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심지어 “내가 죽은 후에도 제사를 올리기 보다 내 책을 읽어주고 베끼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나 죽은 후에 아무리 깨끗한 희생과 풍성한 음식으로 제사를 지내준다 해도 다 소용없다. 내 책 한 편 읽어주고 내 책 한 부분이라도 베껴두는 것이 훨씬 기쁠 것이다. 이 점 꼭 새겨두기 바란다.”

다산 정약용은 1801년부터 18년간 전남 강진 다산초당 등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했다. 6남3녀중 4남2녀를 잃은 다산과 부인은 남은 2남 1녀를 부끄럽지 않은 가문의 자식으로 키우려 노심초사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나를 위해 로비를 벌이지 마라”

18년 유배생활에 다산 가문의 가세는 기울어갔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실용적인 경제활동으로 양잠과 채소밭 가꾸는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양잠은 선비로서의 명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는 방편이라고 여겼다. 또 계절에 맞는 채소를 가꿀 것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산은 아무리 형편이 나빠도 이자놀이나 약장사 등 상업행위는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다산은 장남 학연(1783~1859)이 아버지의 방면을 위해 벼슬아치들들에게 의술을 베풀고 있다는 소문을 들고는 길길이 뛰었다.

“네가 갑자기 의원이 되었다고? 의술을 빙자해서 벼슬아치와 사귀면서 아버지의 석방을 도모하고 싶어서 그러느냐. 아서라. 그런 일은 해서도 안되지만 그럴 수도 없다…네가 그 일을 그만 두지 않으면 살아서는 연락도 안할 것이고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네 마음대로 하여라. 다시 말도 하기 싫다.”

다산은 근본도 내력도 모르는 사람들과 사귀면서 혹여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벌인다면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을 뿐이라고 우려한 것이다. 아버지 다산의 질타는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다. 

두 아들의 ‘술버릇’도 도마 위에 오른다. 다산은 “둘째(학유·1786~1855)의 주량이 형(학연)의 2배라 들었다”면서 “너희는 어찌 글공부는 아비의 버릇을 이을 줄 모르고 주량만 훨씬 아비를 넘어서는 거냐”고 질타했다. 다산은 “나는 예전에 상감(정조)께서 하사한 술을 그렇게 마셨고, 다른 이들이 인사불성이 되어도 나만은 끄떡 없었다”고 주량을 자랑한 뒤 “그렇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절대 한 잔 이상을 마시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산은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데 있다”면서 “입술이나 혀에는 적시지도 않고 소가 물마시듯 목구멍으로 들이붓는다면 어찌 술마시는 정취를 알겠느냐”고 질타했다.


■두 아들의 진정한 출세

아버지로서 자녀를 곁에 두고 가르칠 수 없다는 미안함과, 폐족이 된 가문을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는 조바심 등이 겹쳐 어머니의 때가 묻은 다홍치마를 잘라 하피첩과 매조도 등을 통한 원격교육을 서슴치 않은 것이다.

그 덕일까. 정상적인 출세길이 막힌 두 아들이었지만 나름 훌륭하게 자라주었다. 장남(학연)은 다산의 강진 제자들과 교유하면서 <삼창관집>이라는 시집을 남긴 문인으로 자랐다. 둘째(학유)는 한 해 동안 힘써야 할 농사일과 철마다 알아두어야 할 풍속 및 예의범절 등을 518구의 국한문 운문체로 기록한 ‘농가월령가’를 지었다. 이 ‘농가월령가’는 농부들이 농업기술 내용을 철마다 음률에 맞추어 흥겹게 노래로 부를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농업기술 보급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우리말 노래로써 농업기술의 보급을 처음 시도하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이렇듯 부인의 다홍치마를 잘라 쓰고 그린 <하피첩>과 ‘매조도’에는 부인과 자식을 향한 남편과 아버지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홍동현,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생활과 하피첩', <다산과 현대> 9, 연세대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6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창비, 2004

국립민속박물관, <하피첩-부모의 향기로운 은택>, 국립민속박물관, 2015

홍현순, '다산 정약용의 서예연구-하피첩을 중심으로', 대전대 석사논문, 2012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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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심 2019.09.27 15: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산의 사상과 삶이 더욱 그리운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