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늘그막에 할 일이 없어 글자를 만들었겠냐.”

1443년(세종 25년) 12월30일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은 이듬해 2월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1445) 등과 논쟁을 벌인다. 최만리는 “언문(한글)은 사대주의에 어긋나는 부끄러운 문자”라며 “설총(655~?)의 이두는 비속하지만 중국 글자를 빌려 어조(語助)에 사용해서 학문을 일으키는 데는 일조했다”고 나름 평가했다. 그러면서 “언문으로 입신출세한다면 무엇 때문에 어려운 성리학을 공부하겠느냐”며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일 뿐”이라고 깎아내렸다.

<선조국문유서>(보물 제951호).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 와중에 평안도 의주로 줄행랑친 선조는 포로가 되어 왜적에 협조하는 백성들에게 한글교서를 내려 “백성들이여! 돌아오라!”고 권했다. 당시 김해성을 지키던 장수 권탁(1544∼1593)은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몰래 들어가 적 수십 명을 죽이고 우리 백성 100여 명을 구해 나왔다. 

이에 세종은 “설총의 이두처럼 지금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인데, 너희는 설총은 옳다 하면서 너희의 군상(君上)은 그르다는 것이냐”고 힐난한다. 세종은 “너희 죄는 벗기 어렵다”면서 반대파들을 의금부에 가두는 강수를 두었다.

세종이 짜증 섞인 독설로 반대파들을 진압하면서까지 한글을 창제한 이유가 있었다. 친히 밝혔듯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세종실록> 1446년 9월29일)이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문자였기에 쉽게 만들어야 했다. 예조판서 정인지(1396~1478)의 언급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문자’를 창제했다. 또 “이로써 백성들은 송사에 휘말릴 때 언문 법조항이나 판결문 등을 자세히 보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 있게 됐다”고 정인지는 평가했다. 이것이 한글 창제의 첫 번째 이유다.

 즉 ‘해동의 성군’인 세종의 즉위 무렵(1418년)은 개국 초기 민심을 반영하듯 무척 어수선했다. “사형수가 190명에 이르러 옥사가 넘쳤고 … 내탕고(왕실 재산 관리)의 금술잔과 봉상시(제사 관장)의 제기까지 털릴 지경”(<세종실록> 1436년)이었다. 세종은 “백성들이 법을 몰라도 너무 모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1818년(순조 18년) 서울 본가에 있었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대구 감영에 있었던 아내 예안 이씨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김정희의 생부 김노경(1766∼1837)이 경상 감사로 대구 감영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김정희 내외는 시부의 봉양을 위해 교대로 대구에 내려가 있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도 그럴 것이 조선 초에는 중국 형법(‘대명률’)에 따라 법을 집행했는데, 어려운 한문으로 쓰여진 법전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글 모르는 백성들은 무엇이 법에 저촉되는지 알 수 없었다. 세종은 ‘대명률’ 가운데 일부 조항을 이두문으로 번역해서 배포했다. 그러나 이두문 역시 “… 모두 글자를 빌려 썼고 …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었기 때문”(<훈민정음> ‘서문’)에 백성들에게는 ‘대략난감’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10일이면 습득할 수 있는 혁명적인 글자를 창제한 것이다.

정조(재위 1776~1800)가 원손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 한글은 일반백성 뿐 아니라 임금에게도 좋은 소통의 도구였다.|국립한글박물관 소장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세종실록>은 “세종이 1428년(세종 10년) 경상도 진주에서 김화라는 백성이 아비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라 낯빛이 확 변했다”고 기록했다. 세종은 즉시 대소신료들을 소집해 “가문의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할 방책을 마련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집현전은 조선과 중국의 효자·충신·열녀 각 110명을 선정해서 삽화(그림)를 그리고, 그림 설명과 시(詩)까지 붙인 <삼강행실도>를 제작했다(1434년). 하지만 세종은 “문자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에게는 <삼강행실도>를 나눠줘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세종은 “한글 <삼강행실도>를 배포하면 충신·효자·열녀가 쏟아질 것”(<세종실록> 1444년)이라고 기대했다.

이렇게 창제한 훈민정음(한글)의 핵심 가치는 ‘소통’이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백성 스스로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1449년(세종 31년) 10월5일 기념비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세종의 <월인천강지곡>(국보 제320호). 세종이 죽은 부인(소헌왕후)를 추모하기 위해 석가모니를 찬양하는 노래인 월인천강지곡을 지으면서 부인을 향한 비밀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즉 <월인천강지곡> ‘기이’편에 “(부인은)~눈에 보이는듯 생각하소서. 귀에 들리는 듯 생각하소서”라는 대목을 넣었다는 것이다.   

“하연을 영의정부사로 … 삼았다. 하연은 까다롭게 살피고 또 노쇠하여 행사에 착오가 많았다. 어떤 사람이 언문(한글)으로 벽 위에 ‘하 정승(河政丞)아! 또 공사(公事)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고 썼다.”

누군가 73살의 연로한 나이에 영의정부사가 된 하연(1376~1453)을 조롱하는 벽서를 붙였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한글을 창제했다”는 세종 의도와 부합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글은 창제 3년 만에 꽉 막힌 백성과 양반, 백성과 임금 간 언로를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가교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1485년(성종 16년) 7월17일 종로거리에서 의미심장한 사건이 벌어진다. 즉 ‘종로 시전(시장)의 이전 방침’에 상인들이 종로거리에서 ‘이권을 챙기는 고관대작과 그 자식들을 탄핵하는’ 농성을 벌인 것이다. 상인들은 “시장 이전 계획을 철회하라”고 외쳤고 판서·정승 등 고관대작의 비위를 고발하는 한글 투서를 던졌다. 이 투서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한 (신숙주 아들인) 신정(?~1482)과 영의정 윤필상(1427~1504) 등 고관대작의 이름까지 적시했다. 

훈민정음의 창제이유를 밝힌 훈민정음 서문.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서 서로 통하지 않음으로써 우매한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었다’는 유명한 내용이다. |간송미술관 제공 

그러나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라는 성종도 이런 식의 집단 의사 표현에 두려움을 느낀 것 같다. 성종은 “윗사람을 업신여겨 국가 기강이 무너진 것”이라며 “한글 투서를 보낸 자들을 색출하라”는 명과 함께 79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성종실록>은 이후 누구에게 어떤 벌을 내렸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한글은 연산군 시대에 들어 고비를 맞는다. 1504년(연산군 10년) 7월19일 왕비(신씨)의 오라버니인 신수영(~1506)이 한글 익명서 3장을 연산군에게 보여줬다. 익명서에는 “개금 등 의녀 3명이 ‘임금이 신하를 파리 머리를 끊듯이 죽이고 있으니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수군댔다”는 등의 끔찍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연산군은 이 한글 익명서를 접하고는 길길이 뛰었다. 급기야 연산군은 “언문(한글)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도 쓰지 못하게 한다”(7월20일)는 명을 내린다. 

그렇지만 연산군의 한글 말살 정책은 제한적이었다. 한글 번역 책은 없애지 않았고, “역서(曆書·책력)와 새로 창작한 악장을 한글로 번역하라”고 명을 내렸다. 심지어는 1506년(연산군 12년)에는 “공사천 노비와 양녀(良女)를 막론하고 한글을 아는 여자를 각 원(院)에서 2명씩 선발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가부장적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던 조선시대, 한글을 아는 여성들을 관리로 선발했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연산군은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 익명서에 발끈해서 ‘사용 금지’라는 철퇴를 내렸지만, 임금의 뜻을 백성들에게 쉽고 빠르게 알리는 데 한글보다 더 좋은 소통로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조도 그랬다. 

세종은 글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그림을 곁들인 한글번역본으로 편찬한 <삼강행실도>(시도유형문화재 제160호). 한글이 창제되기 10년전인 1434년 세종은 <삼강행실도>에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게 삽화를 섞었지만 그 또한 불편하게 여겼다, 세종은 결국 어리석은 백성리라도 10일이면 배울 수 있는 문자를 창제했다. 사진은 훈민정음 창제후 한글로 번역한 <삼강행실도>(시도유형 제160호).

그 단적인 예가 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년) 민심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임금은 의주로 줄행랑치고 명망대신들조차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 임금과 조정을 믿고 따를 수 없었던 백성들 가운데는 적의 포로가 되고, 심지어 스스로 첩자가 되어 길잡이를 자처한 사람도 있었다. 다급해진 선조가 백성들과의 소통을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한글 담화문 발표(1593년 9월)였다.

“왜놈들에게 휘둘려 다닌 것이 너희의 본마음이 아닌 것은 과인도 알고 있다. … 나라가 너희를 죽일까 두려워 여태껏 나오지 않는구나. 의심하지 말고 서로 권하여 다 나오너라.”

선조는 “왜놈을 데리고 나오거나 … 붙잡힌 조선 백성을 많이 구해 내거나 하는 등의 공이 있으면 평민이든 천민이든 가리지 않고 벼슬도 줄 것”이라고 했다. 실제 김해성을 지키던 장수 권탁(1544∼1593)은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몰래 들어가 적 수십명을 죽이고 우리 백성 100여명을 구해 나왔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임금과 백성이 소통할 수 있었던 도구가 바로 한글이었던 것이다.

그런 훈민정음이 요즘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개봉된 영화가 역사를 왜곡했다는 등의 논쟁이 벌어지고, 모처럼 찾아낸 <훈민정음 해례본> 소장자가 얼토당토않은 거액의 돈을 요구하는 등 좋은 얘기가 아니고 ‘구설’이라는 게 유감이다. 이즈음에 글을 몰라 법을 어기고 인륜지사도 깨우치지 못했던 백성에게 길어야 10일이면 터득할 수 있는 문자를 안겨준 세종대왕의 마음씨와, 그렇게 터득한 문자로 과감하게 ‘주의 주장’을 내건 백성들의 외침을 다시 더듬어본다. 훈민정음이 임금과 백성을 이어준 소통의 가교였음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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