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 1979년 충북 중원(충주)에서 발견된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대에 세운 제2의 광개토대왕비라는 근거자료가 제시됐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충주고구려비 발견 40주년을 맞아 지난 22일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서 열린 고구려비 학술회의 발표문(‘충주 고구려비 판독문 재검토’)애서 “충주 고구려비문을 최첨단 기법, 즉 3D 스캐닝 데이터와 RTI 촬영으로 판독한 결과 맨 첫머리 제액에서 ‘397년(광개토대왕 영락 7년)’을 의미하는 연호(영락 7년) 등 8자를 읽어냈다”고 밝혔다. 

고광의 연구위원이 읽어낸 글자들. 영락 7년, 즉 397년 광개토대왕 7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대박사는 안오고 소박사들만

충주지역 향토답사동호회(예성동호회)가 발견한 충주 고구려비는 발견 이후 건립연대를 두고 첨예한 논쟁을 벌여왔다. 총 500여자가 새겨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까지 판독가능한 글자는 200여자에 불과했다. 내용 또한 난해했다.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총출동해서 해독했지만 역불급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마을 주인들조차 “아직까지 대박사(大博士)님들이 안왔나보다. 이 소박사(小博士)들은 (해석이) 잘 안되나보다”라며 쩔쩔매는 학자들을 딱하게 여길 정도였다. 

여러 각도로 빛을 쏘아보고 판독한 ‘영(永)’자. 두계 이병도는 1979년 당시 ‘꿈에서 나타났다’면서 ‘건흥’으로 읽었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1979년 6월9일 7시간에 걸친 고구려비 학술대회에서는 두계 이병도(1896~1989)가 “밤늦도록 고구려비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비문 전면에 ‘건흥(建興)’과 ‘4년’ 글자가 보였다”고 주장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여든이 넘은 두계(당시 83살)가 다소 황당무계한 ‘꿈 이야기’까지 꺼냈다. 이에 당시 젊은 학자인 이호영 단국대 교수가 “저는 양원(陽原)으로 읽을 수 있고, 4년이 아니라 7년으로 보고있다”고 반박했다. 이후 끝없는 논쟁이 벌어졌지만 충주 고구려비의 건립연대는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설, 장수왕(413~491)설, 문자명왕(492~519)설 등 다양한 설을 주장해왔다. 요즘 들어서는 장수왕설과 문자명왕설이 유력한 설로 운위되고 있다. 

고광의 위원이 읽은 '락'자. 두번째 글자의 상부와 하부의 형태를 결합해서 읽었다. 

■꿈의 계시까지

그러다 충주 고구려비 발견 40주년을 맞이한 올해 이른바 ‘3D 스캐닝’과 ‘RTI 촬영(Reflectance Transformation Imaging)을 활용해서 비문의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냈다. 두 방식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360도 돌아가며 다양한 각도에서 빛을 쏘아 글자가 가장 잘 보이는 순간 읽어내는 기법이다. 동북아역사재단과 고대사학회 연구자들은 이 기법으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두차례에 걸쳐 ‘충주 고구려비문’의 판독회를 열었다. 학자들은 고심 끝에 기존 판독과 견해 차이가 있었던 글자 중 5자를 새로 확정했고, 새롭게 총 19곳에서 23자를 제시했다.

‘칠’자. ‘영락7’이라면 397년을 의미한다. 충주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 시대에 일어난 일을 새긴 ‘제2의 광개토대왕비’라 할 수 있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이 중 확정한 글자는 전면의 ‘조(祖)’와 ‘공(公)’, ‘기(忌)’, ‘제(諸)’, ‘지(支)’ 등이다. 또한 새롭게 제기된 글자는 전면의 ‘구(句)’, ‘방(方+△)’, ‘불(不)’, ‘耳+令’, ‘구(九)’, ‘유(有)’, ‘공(恭)’, ‘제(諸)’, ‘지(支)’, ‘고(告)’, ‘부(扶) 혹은 말(抹)’, ‘△+衣’, ‘병(兵) 혹은 선(先)’, ‘탈(奪)’자이다. 왼쪽면은 ‘공(工+△)’(상), ‘이(二)’(하), ‘백(百)’, ‘육(六)’(상), ‘십(十)’(하), ‘사(四)’, ‘왜(倭)’자이다. 학자들은 특히 제액(비문의 제목)에 해당되는 전면(前面)의 윗단 부분’에 대해, 글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까지는 합의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것이 어떤 글자인지 의견을 모으지 못한채 유보했다.

‘영락7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글자인 ‘년(年)’자. 광개토대왕 비문의 ‘年’자와 비슷한 형태라 한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영락7년을 읽었다  

하지만 고광의 연구위원은 발표문에서 “비문의 핵심인 이 재액부분과 관련해서 8자를 읽어냘 수 있다”고 밝혔다. 고 연구위원은 “두계 이병도가 읽은 부분은 비석의 전문에 가로쓰기 형태로 새겨진 제액(비문의 첫머리에 새기는 비석의 제목)인데, 이번에 이 부분을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로 읽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고위원은 제액의 첫번째 글자를 ‘영(永)’자로 판단했다. 자획의 판별이 쉽지 않지만 하부에서 ‘水’자 형태가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나고, ‘水’자 우측에는 점획이 분명하고 상부에도 패인 부분을 가로지르는 획이 보이기 때문이다. 

‘세(歲)자 부분,  광개토태왕비나 천추총 출토 ’천추만세영고명(千秋萬歲永固)’명 전돌의 자형과 비슷하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고광의 위원은 “RTI 촬영 사진과 3D 스캐닝 사진 등을 통해 전체적인 글자의 형태는 ‘永’자로 확인된다”고 밝혔다, 고위원은 “이 글자는 광개토태왕비나 천추총에서 발견된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명 전돌의 ‘永’자와 비슷한 형태”라고 밝혔다, ‘永’자 좌측에도 다소 복잡한 형태의 필획들이 보인다. 이는 1500년 이상의 세월을 겪은 비석은 자연적 풍화의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흔적 지우기’의 하나로 인위적인 훼손일 수도 있다. 

 ‘재(在)’자. 3D 자료를 보면 아래쪽 삐져나간 흔적은 뒤집힌 부채꼴 형태로 떨어져 나간 훼손 흔적이 분명하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또 두번째 글자의 상부와 하부의 형태를 결합해 보면 전체적으로 ‘낙(樂)’자에 가깝다. 상부에 ‘백(白)’자 형태가 비교적 뚜렷하고 그 양옆으로 삼각형에 가깝거나 혹은 역삼각형 형태의 필획들도 나타난다. 하단부에는 가로획과 세로획들이 다수 엉켜있지만 ‘목(木)’자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고광의 위원은 “전체적으로 광개토태왕비의 ‘낙(樂)’자 형태와 유사한 결구로 보인다”고 밝혔다. 세 번째 글자는 ‘칠(七)’자가 확실했다. 가로획은 우측으로 약간 올라가는 형태이고 획의 끝 부분에서 미세한 파책의 흔적이 나타난다. 

세로로 쓰여진 ‘정유(丁酉)’ 간지. 이렇게 종서에서 횡서로 또는 횡서에서 종서로 서사 방식을 혼합하는 경우는 고대의 간독이나 서간문 등에서는 보이지만 금석문에서는 흔치 않은 사례라 한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새로 읽어낸 8자

고 위원에 따르면 네 번째 글자는 ‘연(年)’자이다. 두계 이병도는 마멸된 것으로 보았으나 이호영 교수는 ‘年’자로 읽었다. 이 글자의 좌측 부분은 물갈이 흔적이 잘 남아 있어 필획의 구별이 비교적 잘되며 2000년 고구려연구회 판독회에서도 제액의 글자 중에서 유일하게 확인하였던 글자이다. 첫 번째 획은 세로가 짧은 ‘ㄴ’ 형태이고 그 아래로 3개의 가로획이 있다. 그리고 이들 필획을 중간에서 관통하는 세로획으로 구성되어 있어 광개토태왕비와 유사한 자형 결구이다.

고 위원에 따르면 다섯 번째 글자와 여섯 번째 글자는 ‘세재(歲在)’이다. ‘세(歲)’자 부분은 상부의 ‘山’자 형태가 비교적 명확하고 그 아래쪽에 비스듬한 세로획들과 이 세로획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획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광개토태왕비나 천추총 출토 ‘천추만세영고명(千秋萬歲永固)’명 전돌의 자형과 비슷하다. 여섯 번째 글자는 ‘재(在)’자이다. 3D 자료를 보면 아래쪽 삐져나간 흔적은 뒤집힌 부채꼴 형태로 떨어져 나간 훼손 흔적이 분명하다. 고광의 위원은 그 다음 글자에서 세로로 쓰여진 ‘정유(丁酉)’ 간지를 읽었다. 

3D 촬영과 RTI촬영을 위해 포토샵으로 처리한 충주 고구려비.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따라서 고위원은 “이렇게 종서에서 횡서로 또는 횡서에서 종서로 서사 방식을 혼합하는 경우는 고대의 간독이나 서간문 등에서는 보이지만 금석문에서는 흔치 않은 사례”라고 밝혔다. 고광의 위원은 “이번에 읽어낸 제액은 총 8자이며,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고 전했다. 고구려에서 이러한 연호와 간지를 기재하는 방식은 광개토태왕비의 ‘영락5년세재을미(永樂五年歲在乙未)’ 등을 비롯하여 ‘건흥오년세재병진’명 금동광배 등에서도 보인다. 

또한 충주 고구려비의 건립연대는 지금까지 전면 7행 15~22자 사이의 ‘12월23일 갑인(十二月입三 甲寅)’ 날짜와 좌측면의 ‘신유년(辛酉年)’이라는 연간지 중심으로 추정해왔다. 하지만 이번에 최첨단 촬영으로 판독한 글자는 ‘23일’이 아니라 ‘27일(입七)’이었다. 제액에서 확인된 ‘영락7년세재 정유’가 397년이라면 그해 12월27일은 ‘경인(庚寅)’이 되어야 한다. 그동안 경(庚)자를 갑(甲)자로 잘못 읽은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신유’로 읽었던 부분도 ‘공이백육십(功二百六十)’일 가능성이 크다. ‘신유년’이 아니라 ’공이백육십’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3D촬영과 RTI 촬영의 기초자료를 확보하려고 준비하는 모습.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397년 일어난 일

고광의 연구위원은 “이 충주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 때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며 이 비석을 세운 연대는 397년 12월 27일 이후일 것”이라면서 “이 비석의 건립연대가 광개토대왕 재위시절로 소급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중원고구려비에서 읽은 주요 내용은 ‘高麗大王○○○○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이다. 즉 “고려왕은 신라매금(왕)과 오래도록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여형여제’ 즉 형제사이임을 영원히 맹세했다는 뜻이다 물론 고구려가 형이고, 신라가 동생이다. 또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일컬었다. 고구려왕이 신라왕(매금)을 오랑캐의 뜻인 ‘동이’로 지칭한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구려는 스스로 천자국의 입장에서 신라를 주변국으로 폄훼한 것이다.

또 ‘동이매금지의복(東夷寐錦之衣服)’과 ‘상하의복(上下衣服)’, ‘대위제위상하의복(大位諸位上下衣服)’이라 해서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대목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고구려군의 신라주둔과 관련된 대목이다. 즉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신라 영토 내에 있는 고구려 당주(고구려 군부대의 지휘관)’라는 뜻이다. 

그동안 ‘신유년’으로 읽었던 부분. 그러나 이번에 판독결과 ‘공이백육십(功二百六十)’인 것으로 판명됐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동쪽 오랑캐 신라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와 신라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신라 자비왕) 때 이미 친선(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대에는 신라가 왕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는 예속관계가 이어졌다. 즉 광개토대왕 2년(내물왕 37년·392년) 신라 왕족 실성(훗날 실성왕으로 등극)이 고구려 인질로 떠났다. 401년 귀국한 뒤 내물왕의 후계자가 된 신라 실성왕은 412년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인질로 보낸다. 또한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10년(400년) 신라가 왜구의 침입을 받자 고구려는 5만 보기병을 파견, 왜병을 쫓아낸 적도 있다. 하지만 424년 장수왕 12년(눌지왕 8년)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교빙(交聘)의 예를 닦았다”(삼국사기)는 기록을 끝으로 고구려·신라의 우호관계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신라가 고구려의 예속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판독이 맞다면 충주 고구려비가 고구려와 신라가 형제국 사이이고, 밀월관계를 맺고 있을 때 건립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고광의 연구위원은 “그러나 아직까지 비문에 등장하는 간지 등의 해석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100% 확증할 수는 없다”면서 “향후 비문을 더 판독하겠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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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ttps://books.google.co.jp/books?id=WFawAwAAQBAJ&printsec=frontcover&dq.. kimduhan 2019.11.29 1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족을 보낸 것이 주종 관계의 의미라면 똑같이 왕을 왜에 보내는 백제와 신라는 왜의 속국이다.적어도, 주종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2. Abe 2019.11.30 16: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글에서 혐한과 한국비하의 이유를 한강에서 동전 찾듯이 끄집어내는 그 상상력이 참 대단하오. 그런 망상적 몽상이 지배하니 100년 내외의 명백한 과거사도 부정하고 왜곡하는거 겠지요 !

    난 이글에서 1600년 전에도 일본 왜구들은 우리를
    침략하고 괴롭혔구나 하는걸 인식했는데...

    참으로 호전적이고 몹쓸 종자들이 하필 우리옆에
    있는지... 쯧쯧...

    • kimduhan 2019.12.01 2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백제와 신라는 왜국에 왕자를 볼모로 내밀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삼국 사기의 기록)입니다.

  3. Abe 2019.12.02 0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왜인들은 3세기 4세기에도 지긋지긋하게 신라를 침략하고 노략질 하며 괴롭혔고..... 왜구질한게 주종 괸계인가?

    일본인들이 보물로 여기고있는 칠지도에는 백제의 왕세자가 왜왕에게 하사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지...그럼 주종관계는?

    왜국이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통상을 간절히 요청하며 그 댓가로 백제가 원할때 파병하겠다는 약속했고
    시간이 지나 백제는 파병의 댓가로 왕자를 보냈지요.

    이번에 일본이 야구 한번 이겼으니 주종관계라고
    우겨보세요.... 딱 일본인답게요...

    • kimduhan 2019.12.02 15:36  댓글주소  수정/삭제

      삼국사기
      전지왕이 즉위하다 ( 405년 09월(음) )

      腆支王 或士校勘 010直支., 梁書名映. 阿莘之元子, 阿莘在位第三年立爲太子, 六年出質於倭國. 十四年王薨, 王仲弟訓解攝政, 以待太子還国. 季弟碟禮殺訓解, 自立爲王. 腆支在倭聞訃, 哭泣請歸, 倭王以兵士百人衛送.
      전지왕(腆支王)註 037 혹은 직지(直支)라고도 한다.의 이름을 《양서(梁書)》註 038에서는 영(映)이라고 하였다. 그는 아신왕의 맏아들로서, 아신왕 재위 3년에 태자가 되었고, 6년에 왜국에 인질로 갔다. 14년에 아신왕이 사망하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訓解)가 정사를 대리하며 태자의 귀국을 기다렸는데 왕의 막내 동생 첩례(諜禮)가 훈해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다. 이때 전지가 왜국에서 부고를 듣고 울면서 귀국을 요청하니 왜왕이 1백 명의 군사로 하여금 그를 보호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25_0040_0010

      실성 이사금원년(402년)
      元年 三月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g&levelId=sg_003r_0030_0020&types=r

    • Abe 2019.12.04 21:24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서는 해석하기 나름이고... 유리한 기사는 검색하면 천건도 남고...

      명백한건 1600년 전부터 끊임없이 노략질, 왜구질,
      침략질을 셀수도 없을만큼 많이해온 도적무리들이
      일본인들 이라는 사실...

    • Abe 2019.12.04 2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칠지도 글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니혼진 아자씨?

    • kimduhan 2019.12.05 1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구란, 삼국 시대와 조선 시대에는 의미가 다르다. 삼국 시대의 왜구는 왜국 군이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의 왜구는 바로 일본인의 해적이다.약탈을 했으나 그것은 고려의 일본 침략의 잔학 행위의 복수라고 조선의 학자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에은 "왜구는 몽골·고려의 일본 침략에 대한 복수가 원인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均指出倭寇的起因在於朝鮮人(高麗人)配合蒙古侵日行為所引發的報復。’

    • Abe 2019.12.06 1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백제의 왕이 아닌 왕세자가 제후국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 앞뒷면 내용

      앞면
      泰[和] 四年 十一月十六日 丙午 正陽 造百鍊鐵七支刀 [出]辟百兵 宜 供供侯王□□□□作
      태[화] 4년 11월 16일 병오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 만들었다.
      뒷면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 故 爲倭王旨 造 傳示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가 귀하게 성음聖音으로 태어났다. 그런 까닭에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 kimduhan 2019.12.06 17: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칠지도와 광개토 대왕비는 이른바"금석문"그러니까 문자에 누락과 흐릿한 부분이 많고 그래서 한일 양국에서 그 문장의 해석이 다른 사료입니다. 그런 사료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 것은 저는 없어요.한일 양국에서 해석에 흔들림이 없는 사료들만 제시하고 있습니다.

    • Abe 2019.12.06 2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이 원하지 않은 내용이 있는 사료는 못 믿겠고...일본에 유리할 거 같은 뇌내망상은 사실로 주장하고....같은 물도 소가마시면 우유가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지요.... 사료에서 무엇을 추출해 내느냐가 독사와 젖소의 차이인 법. 침소봉대와 왜곡을 일삼는 일본 역사쟁이들을 어떻게 신뢰 하지요?

      황국사관이나 주작질하고.... 하기야 유물 출토 사기까지 벌이며 역사를 만들어내는 풍토니 뭐....

    • kimduhan 2019.12.06 2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지 않아요. 칠지도의 명문도 광개토 대왕 비문도 일본에 유리한 해석이 있지만 그걸 내가 주장해도 당신은 믿지 않을 테니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제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해석이 다르기 때문.그 점, 역사 책은 문자도 명확하니까 해석은 하나밖에 없다.

    • Abe 2019.12.06 2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100년도 않된 역사의 증인들이 토해놓은 사실도
      불리하니 부정하고 왜곡하고 진실을 호도하는 일본인들.... 그 많은 역사서 극히 일부분을 인용해서 침소봉대하고 망상의 색을 칠해서 혐한의 도구로 삼는 일본인들.... 아직도 군국주의 전범들의 군복입고 백주 대낮을 활개해도 처벌받지 않는 일본....

  4. kimch 2019.12.04 0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야 앞뒤 다 자르고 인질로 보냈다고 속국이냐?
    완전 왜놈 수작질이네,
    눈깔있으면 정확인 보고 전후내용까지 자세히 적어야지
    넌 왜놈보다 더한놈이야, 단순히 내물왕에게 복수 차원으로
    왜놈에게 미사흔을 보내거지 군신의 예를 취하려고 보냈니
    완전 사기꾼새끼네 역사 외곡을 밥먹드시 쳐하는 적 왜구새끼보다
    못한 더러운 새끼네..

    • kimduhan 2019.12.04 1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신 이기환기자님의 이 글을 잘 읽지 않았니?
      왕족을 인질로 내놓기는 주종 관계를 나타낸다.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대에는 신라가 왕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는 예속관계가 이어졌다.’

    • Abe 2019.12.04 2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647년 신라왕족 김춘추가 일본으로 건너와 「질」이 되었는데 「질」은 삼국시대 신라가 일본에 유화정책을 펴고있을 당시 일본과 백제의 제휴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한 일본주재신라의 특명전권대사였으며 김춘추는 2년간 「질」의 위치에 있다가 고구려·백제의 연합에의해 신라가 위태롭게 되자 귀국했고 649년 그와 교대하여 김다수가 왔다고 풀어가고 있다. 그런데 653년 일본과 신라가 단교하자 김다수는 「인질」이 되었다. 김다수는 그러나 일본제38대 텐찌천황(天智)으로부터 영지를 받고 황녀4명을 부인으로 맞았고 차츰 세력을 길렀으며 나중에는 무력으로 천황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 kimduhan 2019.12.05 1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에 간 인질이 "특명 전권 대사".반면 고구려에 간 인질이 "주종 관계의 상징".
      이라는 것은 바로 내로남불의 전형이다.

    • Abe 2019.12.06 1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에 간 인질이 "특명 전권 대사". - 질과 인질은 다른의미로 쓰였음

      반면 고구려에 간 인질이 "주종 관계의 상징".- 이기환기자의 견해

      이라는 것은 바로 내로남불의 전형이다. - 성급한 추론의 오류

    • kimduhan 2019.12.06 15:01  댓글주소  수정/삭제

      특명 전권 대사가 "전지가 왜국에서 부고를 듣고 울면서 귀국을 요청" 할 때가 있군요. 꽤 당당한 대사님이다.

    • kimduhan 2019.12.06 17: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삼국사기를 검색해도, 김춘추가 647년에 왜에 "질"파견된 기록은 보이질 않네요.소스를 제시하고 주시겠어요?

    • Abe 2019.12.07 08: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런글에서 혐한과 한국비하의 이유를 한강에서 동전 찾듯이 끄집어내는 그 상상력이 참 대단하오. 그런 망상적 몽상이 지배하니 100년 내외의 명백한 과거사도 부정하고 왜곡하는거 겠지요 !

      난 이글에서 1600년 전에도 일본 왜구들은 우리를
      침략하고 괴롭혔구나 하는걸 인식했는데...

      참으로 호전적이고 몹쓸 종자들이 하필 우리옆에
      있는지... 쯧쯧...

    • kimduhan 2019.12.07 1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신이 자료 찾지 않도록 그러니까 내가 일러주는데, 김춘추의 왜국 인질의 기사는 당신들이 "왜곡 역사 책!신뢰할 가치도 없어!"이라며"일본 서기"에만 기재가 있습니다. 한편 내가 보내다 사료는 한국 측 사료이다"삼국 사기"입니다.참고로,"일본 서기"에게 밖에는 등장하지 않는 유명인에 왕인 박사, 담징이 있어요.

    • Abe 2019.12.08 0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문장이 독해 불능일 정도로 엉망이네요
      다시 쓰세요

    • kimduhan 2019.12.08 0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김춘추가 일본에 인질로 갔다는 것은 어떤 자료에 있는 것입니까?

    • kimduhan 2019.12.09 1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기에서도 응답이 없네요. 내가 일러줍니다.김춘추가 왜국에 인질이 된 기사는 "일본 서기"에만 기재가 있습니다.

  5. Abe 2019.12.08 0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터뷰] 박노자 "일본, 열강 꿈꾸지만 결국은 2류 밖에..."
    2019-08-09 10:12 | CBS 김현정의 뉴스쇼
    박노자>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 그러니까 자민당 중심의, 관료 국가 중심의 총동원과 비슷한 그런 체제를 다시 길을 잡기 위해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갖다가 적으로 만들고 적이라는 이미지를 메이킹함으로써 아베파가 민심을 꽉 붙잡고 반대자를 억누르는. 그러니까 30년대 후반이면 진짜 전쟁이었던 반면 여기에서는 ‘모의 전쟁’ 입니다

    • kimduhan 2019.12.08 12:3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은 벌써 한국 종주국을 그만두고 싶습니다. 한국은 빨리 정신적으로도 일본에서 자립하세요.보통 국가 간 관계가 됩시다.

    • Abe 2019.12.08 16: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종주국? 낮술 드셨나요?
      한국이야말로 배은망덕하고 구밀복검하는 일본에게
      시혜국이 더이상 되기싫소이다. 불안감에 근거한 유치한 혐한에 기대지 말고 빨리 정상적인 국가로 성장하세요.

      그리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고 갈망은 일본에대한
      복수요...

    • kimduhan 2019.12.08 16:37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 가사를 작사한 안석주(安碩柱)은 친일파 사전에 등록된 친일파죠.

    • Abe 2019.12.08 17: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또 왜곡,사기질이네요... 그저 일본인들은 입만열면
      침소봉대에 허위사실유포.....

      안석주가 작사한것은 우리의 소원은 독립 이란걸 모르시나.... 그래도 뒤늦게 일제의 간악함을 깨닫고
      개과천선해서 다행이네요...

      정말 구제불능 거짓말꾼이네요.... 일본인들 거의가 그렇지요?
      사기 자꾸치면 엉덩이에 뿔나요

    • kimduhan 2019.12.08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친일파 작품

      그는 1939년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고 이윽고 ‘지원병'과 ’조선에 온 포로'라는 친일 색채가 짙은 작품을 만들게 된다.

      1940년에 일본 황실의 도를 따른다는 ‘황도학회’ 결성식에 참가하는 한편 1941년에는 친일어용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황도학회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가입한 조직으로 이른바 ‘내선 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하여 황도 사상의 학습, 보급 그리고 신사참배의 실천과 장려 등을 실천 방책으로 하는 노골적인 친일단체였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을 이루기 위한 세기적 대전환기에 필요한 신시대의 대중교양’을 표방한 친일잡지 ‘신시대’의 1941년 4월호와 5월호 표지 그림을 그린다. 특히 4월호 표지 그림 ‘묵도’는 농사일을 마친 젊은 남녀가 황혼을 향해 나란히 서서 고개를 숙여 기도를 하는 모습으로, 유명한 밀레의 ‘만종’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기도의 대상은 천황일 것이다.
      http://m.saramilbo.com/a.html?uid=5381

    • kimduhan 2019.12.08 2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런 경력을 가진 사람이 작사한 노래를 현대 한국인은 애창하고 계시군요.친일파에서도 문제 없네요.

      1939년 1월 ‘우리 영화의 향상은 어떻게 도모해야 할까’ 좌담회에 참석하였다. 1939년 8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지휘한 조선영화인협회 이사로 위촉되면서 본격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하였다. 1940년 7월 ‘사변 3주년과 반도문화인의 여명’ 좌담회에 참석하여 일제의 영화통제를 옹호하였고, 12월 지원병 훈련소를 견학하고 「문화인도 입소필요」를 기고하였으며 같은 달인 12월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41년 3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지휘하는 조선영화인협회 상임이사에 임명되었으며, 징병을 권하는 영화를 연출하여 지원병제도와 황도정신을 옹호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조하였다.
      1942년 9월 일제가 만든 영화회사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연출과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다수의 평론을 기고하여 전시체제 하에서 일제가 실시한 영화령을 비롯한 영화정책을 옹호하고 선전하였으며, 영화인의 전쟁협력과 전쟁참여를 역설하였고, 징병제 선전선동, 내선일체 강조, 황국신민의 의무를 피력하였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795

    • Abe 2019.12.08 2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어디에도 없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 그 사람 글이라고... '우리의 소원은 독립' 이 그양반 거고...
      거짓말 그만하라고 그랬지요.... 일본인스럽게..

      일본인이 어떤 사람?

      일본인이 어떤 종자인지 잘 알려주는 731부대에 관한 내용....

      생화학 실험
      수용자에게는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예방접종으로 위장된 채 접종되었다. 치료받지 않은 성병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남녀 수용자에게 일부러 매독, 임질을 감염시키고 연구하였다. 수용자들은 간수 등에게 강간당하기도 했다.

      전염성 벼룩, 감염된 의류와 물자가 폭탄 안에 포장되어 다양한 목표물에 투하되었다. 이때 이시이 시로 중장이 직접 개발한 도자기 폭탄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도자기 폭탄은 폭발력을 고의로 약하게 만들어 안에 내장된 세균이 죽는 것을 최소화했다. 이에 따라 흑사병, 콜레라, 탄저 등 전염병으로 약 40만 명의 중국인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민간인에게 야토병 관련 실험이 행해지기도 했다. 731부대와 소속 군부대(주로 1644부대나 100부대)는 생화학무기를 개발하여 전투에서 실험하기도 하였다.

      특히 페스트균 실험을 많이 했는다. 페스트균은 흑사병으로도 잘 알려져있는데, 14세기 지중해 연안, 프랑스, 독일, 영국, 북유럽으로 확산해 4년 만에 유럽 인구 1/3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였다. 이를 살육전에 적용하려 한 731은 '페스트 벼룩'을 개발한다. 균 자체를 그대로 뿌리는 것이 아니라 매개 동물인 벼룩을 페스트균에 감염시켜 완충물에 섞거나 도자기 폭탄에 담아 뿌렸다고 한다. 실제 중국에 살포한 세균의 상당수는 이 페스트균이었다. 미국에서 파견을 나왔던 노버트 H. 펠은 1947년 6월 30일 본국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벼룩 번식법과 쥐를 통해 벼룩을 감염시키는 방법을 방대하게 연구했다.
      페스트 벼룩은 최선의 조건 하에서는 약 30일 생존하는데, 그동안 감염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판명됐다.

      1㎡당 벼룩 20마리가 있는 방에서 실험 대상자를 자유롭게 풀어두는 실험을 했는데, 10명 중 6명이 감염되고 4명이 사망했다.
      — 페스트 벼룩 실험에 대해

      사람을 묶어 헬멧을 씌우고 갑옷을 입혔다. 지상에서 고정해 폭발하는 것, 비행기에서 투하된 시한 기폭 장치가 설치된 것 등 각종 폭탄으로 실험했다.
      — 탄저균 폭탄 실험에 대해

      10명 중 6명의 혈액에서 균이 발견됐고 이 중 4명은 호흡기로부터 감염됐다고 추정했다. 4명 모두 사망했다. 이 4명과 일제히 폭발한 9개 폭탄과의 거리는 불과 26m였다.
      — 다른 폭탄을 사용한 야외 실험에 대해

      연구소에서 키운 벼룩을 저공비행으로 중국 도시에 살포했는데, 1940년에는 닝보 시에서, 1941년에는 창더 시와 허난 성에서 살포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발생한 페스트 전염으로 수천 명이 살해당했다.

    • kimduhan 2019.12.09 06:38  댓글주소  수정/삭제

      쓰고 있습니다.첫번째 기사 부르세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친일파 작품

    • Abe 2019.12.09 09:48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리의 소원은 독립 / 꿈에도 소원은 독립’으로 시작되었다가 이듬 해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 꿈에도 소원은 통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슨말인지 이해 않되요?

      당신이 말한 그 친일파의 소원은 독립,
      우리의 소원은 통일,
      나의 갈망은 일본에 복수,
      나의 바램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처벌
      나의 목표는 일본인들의 야비함을 널리 알리는거

      그런데 나의 목표달성에 당신이 많이 공헌하고 있어서 좀 편하기는 해요...

    • kimduhan 2019.12.09 1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석주(安碩柱)가 친일파임은 인정하나요?

    • Abe 2019.12.09 1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난 당신처럼 유치하게 편린적 지식가지고 OX게임 하기 싫어요.... 당신 혹시 유치원생?

    • kimduhan 2019.12.09 1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면 응답 피하네요. 그는 친일파죠.친일파를 친일파라고 인정할 수 없어서 한국에서는 친일 정산이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 Abe 2019.12.09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석주 친일파 사전에 이미 들어가 있대매 ?
      뭔 소리 하는겨 지금? 그럼 활자로 인정한거 아녀?
      도데체 IQ가 얼마?

      점점 흥미 떨어지네요 답변할 대상인지...

    • Abe 2019.12.09 2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내가 당신이 담에 쓸 내용 맞춰볼까요?
      친일파- 안석주 - 우리의 소원은 통일 - 한국은 친일
      0.5차원 IQ 33 쓸거지요

    • kimduhan 2019.12.09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지 않아요?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이 만든 나라라고?그것이 진보의 입장이다.

    • Abe 2019.12.09 2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휴 !? 수준 떨어져서 여기서 스톱 !
      내가 답 안할테니 하고 싶은말 다 하세요.
      치기뿐인 어린양도 정도껏 해야지 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