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0일 경남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중에서 63호분의 덮개돌을 확인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발굴단원의 심장이 떨렸다. 무덤을 밀봉한 점질토, 그리고 그 점질토를 걷어내자 길이 2m의 평평한 돌 7개가 무덤을 덮고 있었다. 어떤 도굴구덩이도 보이지 않았다. 짐작은 했지만 과연 1500년 이상 도굴의 화를 입지않은 싱싱한 고분이 분명했다.
28일 현장공개한 창녕 교동 송현동 고분 63호분 모습. 덮개돌을 들어올리자 토기류와 무구류, 피장자와 순장자 공간이 드러났다. 1500년만에 드러난 생생한 현장이다. 창녕|권도현 기자
“우선 휴대폰으로 무덤 내부를 들여다 봅시다.” 7개의 덮개돌 사이를 메워놓은 잔돌들을 걷어내자 틈이 생겼고, 그 틈 사이로 휴대폰을 밀어넣어 사진을 연신 찍어댔다.
“무덤 안은 어두웠고, 흙으로 약간 덮여 있었지만 잘 보였습니다. 무덤 제일 안쪽에 토기들이 한무더기 쌓여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앞 공간에는 시신을 안장한 흔적이 보였고, 그 앞에는 다시 토기가 한무더기 보였습니다.”(박종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
양숙자 학예연구실장은 “대부장경호(아래위가 좁고 배가 나온 저장 질그릇) 등의 토기가 보이는데, 형태는 다른 가야지역에서 보이는 나팔형이 아니라 팔(八)자형이었고, 투창(굽구멍) 모양도 엇갈린 문양인 ‘창녕식 토기’였다”고 전했다. 63호분은 비화가야의 전성기인 5세기 중반 활약한 최고지도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그 후 8일이 지난 28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도굴없이 모습을 드러낸 63호 고분의 덮개돌을 들어올리는 언론공개회를 열었다. 크레인으로 3.8t, 2.8t이나 되는 덮개돌 2장을 들어올리자 과연 무덤안은 온갖 유물로 차있었다. 벽면은 주칠, 즉 붉은 색으로 칠했다. 이것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僻邪)의 의미였다.
크레인으로 덮개돌을 드러내는 모습. 7장의 덮개돌 중 2장을 들어냈다. 덮개돌은 3.8톤, 2.8톤이나 됐다. 창녕|권도현 기자
이 지역 고분에 흔히 보이는 무덤치장법이다. 정인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무덤방은 크게 5구획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설명했다. 즉 가장 안쪽은 토기 등 유물들이 가득 차 있었고, 그 앞에는 피장자 공간이 있었다. 피장자 앞에는 다시 토기류가, 그 앞에는 순장자의 공간(추정)이 보였다. 무덤 입구에는 다시 토기류가 부장되어 있었다.
목긴 항아리(장경호)와 제사용으로 흔히 쓰이는 굽다리 접시 등 토기류가 주종을 이뤘지만 높은 신분의 무덤에서 흔히 권위의 상징으로 묻는 살포(논에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 쓰는 농기구)와 마구류가 드러났다. 정인태 학예사는 “토기류에서 보이는 꼭지, 흔히 애벌레 문양이라 하는 점열문, 검은 색깔 등도 이른바 창녕식 토기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박종익 소장은 “아직 흙으로 뒤덮여 있는 무덤 주인공의 경우 각종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을 지 모른다”면서 본격적인 발굴에서 인골을 포함한 유물의 출토가능성을 기대했다.
63호 무덤 안 모습. 전형적인 비화가야 식 토기인 창녕식 토기류와 살포(농기구), 마구류 등이 보인다. 비화가야 수장의 무덤이 틀림없다. 창녕|권도현 기자
이밖에도 순장자가 묻혔을 가능성도 있는 빈공간의 추가 발굴도 관심거리다. 2006년 이곳 송현동 고분에서 ‘나이 16살, 키 152.3㎝, 허리 21.5인치’로 복원된 ‘완전체’ 여성 인골이 확인되기도 했다. ‘송현이’로 명명된 이 여인은 무덤의 주인을 따라 순장된 비운의 여성이었다. 박종익 소장은 “이곳은 교동과 송현동 고분을 합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면서 “‘송현이’에 이어 ‘교동이’까지 발굴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양숙자 학예연구실장은 “무덤 안에서 수습되는 유물과 유구의 상태 등을 면밀히 검토해서 비화가야 지배자의 참모습을 복원해 볼 것”이라고 밝혔다.
1500년 만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창녕 교동 및 송현동 고분군의 63호분 주인공은 어떻게 도굴의 화를 피했을까. 이 고분의 수수께끼 같은 구조 덕분이었다. 가야연맹체 중 소국인 비화가야 지배자의 무덤군으로 추정되는 창녕 교동 및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에는 모두 250여 기의 무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도굴 흔적없이 깨끗한 상태로 발굴된 것은 63호분이 처음이다.
도굴의 화를 입지않은채 1500년 버텨온 창녕 교동 및 송현동 고분군 중 63호분 전경. 50여년 뒤 63호분 주인공의 손자뻘 되는 이가 2m 위에 자신의 무덤을 조성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어떻게 발견된 걸까.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2016년부터 고분군 맨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39호 대형고분(지름 27.5m)을 발굴하던 중 특이구조를 확인했다. 즉 39호분 발굴을 트렌치(바닥을 파서 만든 도랑)를 조성하다가 그 밑에서 또 다른 고분의 호석(무덤 보호를 위한 둘레돌)이 노출된 것이다. 39호분 밑에 또 다른 고분이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조심스레 발굴해보니 과연 39호분의 2m 밑에 새로운 무덤이 묻혀있었다.
연구소측은 새롭게 발견한 무덤에 63호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63호분은 봉토 표면에 점토덩어리를 바른 흔적이 온전히 남아있고 호석이 노출된 모습이었다.
먼저 조성된 63호분은 5세기 중반에, 나중에 만들어진 39호분은 5세기 후반에 조성된 고분으로 각각 편년된다. 그렇다면 시차는 50년이다. 39호분은 교동·송현동 고분군 가운데 3번째로 큰 고분이며,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39호분 피장자는 비화가야 지도자 가운데서도 가장 지위가 높은 인물 중 한 명으로 추정될 수 있다. 그런데 39호분보다 50년 가량 먼저 묻힌 63호분 주인공은 아마도 39호분의 직계 조상, 즉 할아버지일 가능성이 짙다.
63호분의 덮개돌 부분, 밀봉토로 무덤을 싸발랐다. 도굴의 흔적이 없다(위사진). 밀봉토를 걷어내자 길이 2m 크기의 뚜껑돌 7개가 무덤방을 덮고 있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또한 39호분 조성자가 63호분의 존재를 모르고 무덤을 만들었을 가능성은 크지않다. 양숙자 실장은 “두 무덤의 입구 부분이 나란히 조성된 것으로 보아 39호분 조성자는 63호분의 존재를 알고 일부러 그 위에 무덤을 조성한 것 같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무덤을 더욱 높게 보여 위세를 자랑하려고 한 것인지, 비화가야의 전성기(5세기 전반)를 이끈 할아버지(63호분 주인공) 권위를 빌리려고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무튼 무덤(39호분)의 2m 아래 또 1기의 무덤이 있을 줄 알 수 없었기에 63호분은 도굴의 화를 당하지 않은채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밖에도 63호분 봉토에서는 또 하나의 소형 석곽묘가 나왔다. 이 63호 무덤의 주인공과 관련있는 인물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2006년 송현동 고분에서 확인된 인골로 복원한 여성. 송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직 63호분의 발굴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발굴한 39호분의 구조와, 주변의 소형분(62호 및 38호분)에서 출토된 400여점의 유물 양상에서 당시 비화가야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39호분 남동쪽 호석에 접하여 약 2m 간격으로 큰 항아리들이 놓여있었다. 이처럼 한쪽에만 집중적으로 의례용 토기를 놓는 사례는 최근 경주 쪽샘 44호분에서도 확인되었다. 또 약 1.5m 길이의 큰 돌을 세우거나 눕혀서 매장주체부의 4벽을 만들었다.
이와 유사한 구조가 성주 성산동고분군 등 대구·경북지역과 일본 나가노(長野)의 키타혼죠(北本城) 고분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당시 비화가야와 주변국과의 관계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 62호분에서 출토된 ‘양쪽에 잔 달린 등잔토기’와 ‘6개의 잔 달린 등잔토기’, 주전자형 토기 등은 주로 신라 및 가야에서 출토되던 것들인데 창녕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찾은 셈이 됐다. 큰 토기 안에 작은 토기를 넣고 같은 종류의 토기를 위 아래로 포개거나 열을 지어놓는 등 다양한 매납방식도 확인됐다.
비화가야는 <삼국지> ‘동이전·한조’에 등장하는 삼한 78여국 중 하나인 진한의 불사국(不斯國)으로 알려졌다. 비화가야는 5세기초인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으로 전기가야연맹체를 이끈 금관가야가 급격히 쇠퇴하고 아라가야 역시 일시적으로 세력이 약화되는 틈을 타 소가야(경남 고성)와 함께 부상한 소국으로 알려져 있다.
39호분과 그 밑에서 우연히 발견된 63호분. 비슷한 방향으로 무덤입구가 확인된 것으로 보아 후대에 39호분을 조성한 이들이 63호분의 존재를 알고 일부러 그 위에 무덤을 쓴 것으로 파악된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비화가야의 지정학적 위치는 독특하다. 높고 험준한 동쪽의 비슬산맥 때문에 신라의 침공을 받기가 어려웠다. 덕택에 5세기까지 비화가야는 신라에 복속되지 않았다는 견해가 있다. 다른 가야 연맹체와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이 무렵, 즉 광개토대왕 남진 직후인 5세기 전반의 창녕식 토기, 즉 비화가야산 토기는 김해 대성동 고분(금관가야 왕묘)와 합천 옥전고분군(다라국 왕묘), 의령 유곡리고분군 등 각 지역 수장 무덤에 출현한다. 또 전남의 여수·장흥·해남 일대, 즉 마한 영역까지 퍼지고, 세토나이해(瀨戶內海)에 연한 일본열도에서도 출토된다.
62호분에서 나온 토기류. 팔(八)자형 토기와 엇갈린 문양의 굽구멍(투창)이 전형적인 창녕식 토기임을 보여준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게다가 이 창녕식 토기, 즉 비화가야산 토기는 신라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성을 유지한다. 이 모든 고고학 발굴자료는 비화가야가 가야와 신라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면서 마한은 물론이고 멀리 일본 열도와도 교역했다는 근거로 삼을 수 있다. 그러니 이번에 도굴의 화를 입지않고 발견된 교동 및 송현동 63호분은 5세기 전반 비화가야의 전성기를 이끈 최고지도자가 묻힌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박종익 연구소장은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비화가야 최고 지배자 무덤의 축조기법과 장송의례, 출토 유물 자료는 가야와 신라의 접경지역에 있으면서도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가 나타나는 비화가야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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