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고무대야와 고무양동이, 그리고 삼립빵 봉지까지….’ 28일 경남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내에서 도굴의 화를 입지않은 63호분 덮개돌 개방행사를 현장취재하던 기자의 눈을 찌푸리게 한 장면이 있었다.
제비뽑기로 TV 기자들을 위한 공개가 시작돼 신문기자들은 차례를 기다리던 차에 63호분 위에 조성된 39호분 발굴성과를 양숙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으로부터 듣고 있었다. 5세기 후반 무덤으로 보이는 39호분은 교동·송현동 고분 250여기 중 세번째로 규모가 큰 무덤이다.
창녕 교동 송현동 고분군 중 39호분애서 눈에 띈 빨간 고무대야와 고무양동이….무자비한 도굴으 흔적이다.창녕|이기환 선임기자
450~500년 사이 가야연맹의 소국 중 하나인 비화가야를 다스린 39호분의 주인공은 약 50년 가량 먼저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뻘 조상의 무덤 위에 자신의 무덤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덕분에 밑에 있던 63호분은 교동·송현동 고분군 중 유일하게 도굴 피해를 입지 않았다. 무덤 밑에 또 다른 무덤이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한창 설명을 들으면서 39호분 사진을 찍고 있던 기자의 눈에 명색이 언론공개행사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장면이 잡혔다. 길이 6.9m 너비 1.6m, 깊이 1.7m 규모인 무덤방에 흙이 덮여 있고, 토기류가 일부 보였는데, 아 글쎄 안쪽에 빨간 고무 양동이(속칭 바케쓰)이 버젓이 드러나 있는게 아닌가. 버킷에는 줄이 달려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무덤 입구 쪽에는 역시 흙이 묻은 빨간 고무대야가 보였다. 기자는 내심 ‘조사원들이 발굴하다가 놓고 올라온 물품이겠거니’ 하고 ‘그래도 뒷정리는 제대로 하고 공개해야지 저게 뭐냐’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양숙자 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의 설명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저 빨간 고무대야와 고무양동이는 도굴범이 놓고 간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을 해서 물어보니 “대야와 양동이 뿐 아니라 흙묻은 빵 봉지까지 있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굴범이 놓고 갔다? 그렇다면 도굴범은 저 커다란 빨간 고무대야와 양동이로 흙을 파고 유물을 실어날랐으며, 심지어 무덤방에서 유유히 빵까지 먹었다는 것이 아닌가.
박종익 연구소장은 “수습한 흙묻은 빵 봉지를 파악해보면 어느 회사의 어느 때 제품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양숙자 실장은 “잘못 세척했다가는 봉지의 포장 디자인과 글씨가 지워질 수 있어 조심히 다룰 것”이라고 덧붙였다. 발견된 빵 봉지 위에는 ‘주식회사 기린’과 ‘삼립빵’이란 상표, 300원의 권장소비자가격이 선명하게 보였다. 회사가 당초 삼립식품에서 1981년 (주)기린으로 바뀌고, 이후 1980년만 ‘삼립빵’이란 상표를 같이 쓴 것을 감안하면 도굴은 80년대 중·후반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동 39호분에서 확인된 삼립빵봉지. 투유, 기린, 300원 등의 글자가 보인다. 유통기간만 알면 도굴이 언제 자행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하지만 무덤방의 양상으로 보아 도굴이 몇차례 자행됐는지 파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39호분에서는 두 개의 도굴 구덩이가 확인됐다.
양숙자 실장은 “2개의 도굴 구덩이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크다”면서 “그러나 두차례 도굴로 생긴 구덩이인지, 혹은 도굴범이 한차례 구멍을 뚫었다가 실패한 뒤 다른 새로운 구덩이를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전했다. 한 개의 도굴 구덩이는 무덤방 옆을 두른 1.5m, 두께 10㎝의 판석에 막힌 흔적이 보였다. 반면 다른 도굴구덩이는 판석과 판석 사이를 뚫고 무덤방과 통한 모습이었다.
사실 창녕을 비롯한 고령·함안·김해·성주·선산 등 영남지방은 일제강점기부터 무단발굴과 도굴의 무대였다.
일제관학자들은 ‘가야지역에 고대 일본의 식민지라는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고 믿고 1900년대 초부터 그 증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됐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369~562년 사이 야마토(大和) 정권이 백제, 가야, 신라를 정복하고 한반도 남부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관청을 세워 200여년간 지배했다는 학설이다.
일제는 그렇게 대대적으로 발굴해간 가야유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해갔다. ‘임나일본부 증거를 잡기 위해서’ 였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15년 7월24일자 보도를 보자.
“남조선은 내궁가(內宮家·209년 일본이 신라정벌 후 설치했다는 관청)를 둔 곳이고, 조정의 직할지가 되어 일본의 영토가 된 일이 있다. 한국병합은 임나일본부의 부활이니~동국동문화(同國同文化)라는 사상이 있으면….”
39호분의 도굴흔적. 무덤 덮개돌 양옆으로 도굴구멍이 뚫려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하지만 일제 관학자들은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끝내 찾지 못한다. 단적인 예로 도쿄대(東京大)의 명을 받고 가야지역 발굴에 나선 구로이타 가쯔미(黑板勝美)는 이렇게 토로했다.
“막상 임나일본부라고 해도 연구해보면 조선풍이다. 조사결과 함안·김해는 모두 임나일본부 소재지라고 추정할만 하나, 그 자취는 이미 사라져서 찾을 방법이 없다는 게 유감이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가 발굴을 맡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야쓰이는 창녕·교동 고분군 중에서도 규모가 큰 7호분과 89호분 발굴에서 출토된 유물을 대거 일본으로 빼돌렸다. 7호분에서만 700여점의 유물을 가져갔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역시 임나일본부와의 관련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의 마구잡이식 발굴과 유물반출의 결과는 처참했다. 임나일본부와의 관계를 입증하지 못한 일제는 ‘용도폐기’된 가야고분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결국 창녕의 교동·송현동 고분 역시 도굴꾼의 소굴이 됐다. 물론 일제에게만 화살을 돌릴 수 없다. 해방 이후에도 이와 같은 문화유산의 방치가 이어졌고, 결국 기자가 1500년전 비화가야 지배자의 무덤에서 빨간 고무대야와 고무버킷, 빵 봉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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