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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원나라 법전이 대한민국 보물 되는 이유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내에만 남아있는 원나라 법전이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예고됐다. 문화재청은 최근 현존하는 단 하나뿐인 원나라 법전인 <지정조격> ‘권1~12, 23~34’와 ‘장용영 본영 도형 일괄’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또한 보물 제419-3호인 <삼국유사> ‘권4~5’는 국보로 승격하기로 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내에만 남아있는 원나라 법정인 <지정조격>. 이번에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예고됐다.|개인소유(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관리)

이중 ‘지정조격 권1~12, 23~34’는 비록 완질은 아니지만 국내외를 통틀어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된 현존하는 유일의 원나라 법전이다. 경주 양동마을의 경주 손씨(慶州孫氏) 문중에 600년 넘게 전래되어 온 문적이다. 학계에서는 조선초기에 활약한 경주 손씨의 손사성(1396~1435)과 손소(1433~1484) 등이 승문원(조선 시대 외교문서를 담당한 관청)에서 일할 때 외국의 법률, 풍습 등을 습득하기 위해 이 <지정조격>을 접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지정조격>(至正條格)은 1346년(고려 충목왕 2년·원나라 순제 6년)에 간행된 원나라 최후의 법전이다. 순제의 연호인 지정 연간(1341~1367)에 법률 조목의 일종인 ‘조격(條格)’을 모았다는 뜻이다. 원나라는 1323년(고려 충숙왕 10년)과 1346년 두 차례에 걸쳐 법전을 편찬한 바 있다. 그러나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선 직후 이미 중국에서는 원본을 찾을 수 없게 됐다. 중국에서는 <지정조격>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서명과 목록만이 <흠정사고전서총목(欽定四庫全書總目)>(청나라 건륭제 명에 의해 간행한 역대 중국서적 목록) 등 후대의 문헌에 개략적인 내용만 알려져 왔다. 

보물로 지정예고된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 정조(재위 1776~1800)의 친위부대였던 장용영(壯勇營)이 주둔한 청사의 본영(本營)을 1799년(정조 23년·기유본), 1801년(순조 1년·신유본)에 그린 건축화이다. 채색화 1점과 일종의 평면도안인 간가도(間架圖) 2점으로 구성됐다.|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이후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나 2003년 국내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조사 연구진이 발견해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됐다. <지정조격>은 고려 말에 전래되어 형사법 등의 기본법제로 채택된 바 있다. 조선 개국과 함께 <경국대전> 반포 이전까지 중국의 법률과 외교, 문화 제도를 연구하는데 주요 참고서로 활용됐다. 1423년(세종 5년) 원나라 간행본을 토대로 따로 50부를 간행했고, 1493년(성종 24년) 성종이 문신들에게 하사해 읽게 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황정연 학예연구사는 “비록 <지정조격>은 중국 문화재이지만 ‘외래품이지만 한국 문화에 중요한 의의가 있는 회화·조각·공예품 등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 수 있다’는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제11 1항)에 따라 지정문화재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지난 2010년에는 남바린 엥흐바야르 전 몽골 대통령을 비롯한 몽골 방문단이 한국학중양연구원을 찾아 <지정조격>을 관람하기도 했다.   

이번에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예고된 보물 제419-3호 <삼국유사> ‘권4~5’는 부산 범어사 소장본(1책)이다. 전체 5권 중 권4~5만 남아 있다. 범어사 초대 주지를 역임한 오성월(1865~1943)의 옛 소장본으로 1907년경 범어사에 기증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동일판본으로 지정된 국보 2건(국보 제306호·국보 제306-2호)과 비교했을 때 범어사 소장본은 비록 완질(完帙)은 아니다. 그러나 1394년(태조 3년) 처음 판각된 후 인출 시기가 가장 빠른 자료로서 서지학적 의미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기존 지정본에서 빠진 제28∼30장을 보완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또 1512년(중종 7년) 간행본의 오탈자를 확인할 수 있어 현재까지 알려진 삼국유사 판본에 대한 교감(校勘)과 원판(原板) 복원을 위한 자료로서 역사·학술적인 중요성이 크다.

국보로 승격지정예고된 <삼국유사>. 동일판본으로 지정된 국보 2건(국보 제306호·국보 제306-2호)과 비교했을 때 범어사 소장본은 비록 완질(完帙)은 아니다. 그러나 1394년(태조 3년) 처음 판각된 후 인출 시기가 가장 빠른 자료로서 서지학적 의미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범어사 소장

아울러 범어사 소장본은 서체, 규격, 행간(行間) 등에 있어 후대에 간행된 1512년 간행된 판본과 밀접한 양상을 보여 조선시대부터 판본학적으로도 중요하게 인식됐다. 이 책에서 단군신화를 비롯해 향찰(신라식 음운 표기방식)로 쓴 향가 14수가 수록되어 있어 고대 언어 연구에도 많은 참고가 된다.

보물로 지정예고된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은 정조(재위 1776~1800)의 친위부대였던 장용영(壯勇營)이 주둔한 청사의 본영(本營)을 1799년(정조 23년·기유본), 1801년(순조 1년·신유본)에 그린 건축화이다. 채색화 1점과 일종의 평면도안인 간가도(間架圖) 2점으로 구성됐다. 장용영은 도성 안에 본영을, 수원화성에 외영을 두고 운영되었다. 따라서 이 자료는 도성 안(지금의 서울 종로 4가 이현궁 터 추정)에 설치된 장용영 본영의 현황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장용영은 1793년(정조 17년)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군영이다. 1785년 설치된 장용위(壯勇衛)라는 국왕 호위 전담부대를 개편한 것이다. 정예부대로 강력한 왕권을 호위하고자 운영됐지만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등극한지 2년 만인 1802년 폐지되었다. 이 도형은 장용영의 전반적인 현황과 관청의 증개축 변화를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든 자료이다. 따라서 정확한 축적에 기초한 평면도와 정교한 필치로 건축물을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문화재청은 지정 및 승격예고된 문화재 3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로 최종 지정할 예정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