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개관 15주년을 맞아 조선왕실 문화의 진수가 담긴 대표 소장품 100을 선정해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에 공개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공개된 소장품 100은 조선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유물들이라는데요. 그런데 하나 드는 궁금증은 우리나라 박물관의 역사인데요. 100년이 넘은 우리나라에서 박물관이 처음 설립된 이유가 좀 치욕스러운 대목이 있다는데요. 어떤 역사가 숨어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제강점기 창경궁 모습.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동서양을 통틀어 박물관이 세워진 것은 언제인가요?

 

=박물관을 영어로는 뮤지엄(museum), 프랑스어로는 뮤제(musee), 독일어는 뮤제움(Museum)인데요, 모두 고대 그리스의 뮤즈(Muse)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 안의 보물 창고인 무세이온(museion)에서 유래한답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박물관 형태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역사가 올라가네요?

 

=그렇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박물관 기능을 갖게된 것은 기원전 3세기 무렵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무세이온에서 비롯되었다는데요. 이곳에서 각종의 수집품과 도서를 이용하여 문학·철학·미술의 진흥을 도모했답니다. 그 뒤 로마시대에 들어와서는 가정용 소박물관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중세부터는 사원(寺院)이 박물관 역할을 햇고, 귀족이나 부자들이 독점하고 있던 미술품 기타 수집품들이 일부 예술가나 학자에게 공개하고 그랬습니다.

 

=서양인 입장에서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신기한 신대륙 물건들이 계속 들어왔잖습니까. 이런 물건들을 보관하고 자랑하고싶은 사람이나 기관이 박물관을 세웠겠네요?

 

=그렇죠. 인도항로가 개통되고, 신대륙이 발견되고, 문예부흥기에 이르고 동양 물품들이 대거 들어오니까 신기한 물품 자료가 쏟아져 들어오니 수집품들이 방대해졌죠. 개인은 물론이고 대학이나 공공기관이 박물관을 세운 거죠.

 

창경원에 조성된 동물원 모습. 순종의 소일거리로 박물관, 식물원과 함께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박물관의 역사는 언제 출발하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읽어보면 신기한 물건들을 특별한 공간에 보관했다는 기록들이 더러 나오고요. 대표적인 예로 삼국유사 연오랑세오녀조를 보면 바다건너 왕비가 된 세오녀의 비단을 가져와서 임금의 창고에 보관했다는 기시가 보이고요. 또 유명한 만파식적을 월성내 천존고에 보관했다는 기록이 있잖습니까. 또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남고라는 창고에 있던 신라의 3대 보물인 천사옥대를고려 태조 왕건에게 주자 태조는 이것을 물장이라는 곳에 보관했다고 합니다.

 

=지금과 같은 개념은 아니었겠지만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보물을 보관한 곳, 즉 지금의 박물관 같은 곳이 있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 궁궐의 장화전이라는 것에 나라의 보물을 저장하고 경비를 엄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또 보문각과 청연각에는 임금이 내린 조서(詔書)와 서화(書畫)를 보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고려 예종(1121) 송나라가 보낸 서화를 청연각이라는 곳에 진열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태조 이성계의 옛집이 있던 함흥의 경흥전에 머리에 쓰는 갓과 거울, 활집과 화살 등을 소장하고 있었대요.

 

=그러나 그것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박물관은 아니죠?

 

=그렇습니다. 조선에서 박물관을 처음 처음 접한 이는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김기수라는 인물인데 1876512일 일본 도쿄의 박물원에 들렀더니 새와 짐승 물고기 초목 및 금속유물 등 기이한 물건이 진열됐다고 기록했어요, 1880년 시찰단으로 다시 일본 방문한 박정양은 박물관은 천연물과 옛 사람들이 만든 유물 등을 수집해서 견문을 넓히고 인민을 가르치는 자료로 삼는다고 했어요. 박정양은 교육 학술문화 정책의 하나로 제실박물관 건립을 제시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박물관은 바로 1909년 창경궁 안에 세워진 박물관이라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우리나라 박물관의 역사가 치욕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그렇습니다. 한국박물관의 역사는 아픔과 치욕에서 기작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죠.

 

=어떤 사연이 있는데 그렇습니까?

 

=있죠. 왜 고종이 헤이그에 말시랄 파견하는 사건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뒤 이듬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포츠머스 조약에 체결돼죠. 여기서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도와 보호 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죠. 일본은 여세를 몰아 한일의정서, 1차 한일협약에 이어 을사늑약으로 일컬어지는 제2차 한일협약을 강제로 맺죠. 그때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희의에 특사를 파견하죠.

 

=결국 실패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일본의 집요한 반대와 열강들의 방관으로 실패하고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 되고 순종이 즉위하게 되죠. 그러면서 즉위한 순종은 고종과 함께 머물고 있던 경운궁(덕수궁)에서 나와 홀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순종을 창덕궁으로 유폐시킨 거네요?

 

=그렇습니다. 고종이 양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저항하니까 일제가 강제로 떨어뜨린 거죠. 순종의 새로운 거처로 낙점된 창덕궁은 수리공사에 들어가는데요. 당시 공사 총책임자는 궁내부 차관이던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였습니다.

 

1936년 이왕직이 발행한 창경원 안내도

=일본인이 궁궐수리공사 총책임자가 되다니 참 한심하네요?

 

=원래 을사늑약은 외교관 박탈과 통감파견이 핵심인데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트집삼아 일본과 정미 7조약을 맺어 군대가 해산되고, 조선통감이 대한제국의 입법 사법 행정 전반에 걸쳐 통치권을 발휘하게 됐고요. 종래의 고문정치제도를 폐지하고 통감이 대한제국 정부의 각부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게 됐어요. 일본인 관리가 대한제국의 관리가 되었고, 고미야는 궁내부 차관직 뿐 아니라 제실재산관리국장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도 관리한 셈이죠.

 

=완전히 대한제국은 허울만 있고 국권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 없었네요?

 

=그렇습니다. 이 무렵 대한제국 정부는 통감부와 고미야 궁내부 차관의 내정간섭을 받았는데, 1906년에는 악명높은 궁금령(宮禁令)까지 내렸습니다.

 

=궁금령이 뭔가요?

 

=궁궐이 무질서하다는 이유로 궁궐출입을 제한하는 법령을 만든겁니다. 궁중에 출입하려면 일본 경무고문부의 허가증을 얻어야 한다는 일제의 강압적인 법령이죠. 임금을 연금한거죠.

1907년에는 궁궐내 인원을 1만명 삭감했답니다

 

=19세기말 20세기 초 상황을 알아가면 갈수록 울화통이 치밉니다. 그런데 고미야라는 자는 어떤 자이기에 대한제국 궁궐과 황실 재산까지 관리하게 된거죠?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랍니다. 고미야의 장인이 이토와 같은 조슈번(長州藩^야마구치 지역을 통치한 영지) 출신이어서 이토의 측근이 되었다는데요. 조슈번은 지금의 야마구치현(山口縣) 지방을 통치했던 영주의 영지였답니다.

=그러면 고미야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이토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네요?

 

=그렇습니다. 창덕궁 수리공사가 끝나고 순종이 거처를 옮길 무렵인 190811월 초 이 문제의 고미야 하고 매국노 형제인 이완용(1858~1926)과 이윤용(1854~1939)이 모종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당시 이완용은 매국 내각의 총리대신이었고, 이완용의 형인 이윤용은 고미야가 차관으로 있던 궁내부 대신이었답니다.

일제와 이완용 형제 등 매국노는 신성한 궁궐을 훼손해서 동식물원을 조성했다. 거기에 박물관도 포함됐다.

=어떤 이야기죠?

 

=당시 순종은 부왕하고 떨어져서 격리된 창덕궁에 혼자 살아야할 운명이라 매우 우울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완용 이윤용 형제가 혼자 떨어진 순종에게 소일거리가 없냐고 물었고, 고미야가 그럼 창경궁 선인문 안 예전 보루각이 있던 일대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조성하면 어떠냐고 했다는 겁니다. 이완용 형제가 제안한 지 이틀 만에 동식물권 박물관 설립 계획을 제안한거죠.

 

=아니 창경궁이 궁궐인데 궁궐 안에 그런 시설을 만든다는 겁니까?

 

=창경궁 역시 유서깊은 궁궐이죠. 원래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위해 조성한 궁궐인데, 성종 때는 대비전의 세 어른인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인수대비),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를 모시려고 수리했습니다. 이후 여러차례 불에 타고 수리하기를 거듭했지만 그래도 국왕과 왕가의 출입이 잦았고, 잘 관리 되어 있어서 임금이 문신들하고 경전이나 역사서 등을 강론하고 그랬던 곳입니다. 경내가 잘 정돈되고 건물들도 잘 수리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국권침탈 직전에 험한 꼴을 당하게 되는거죠.

 

=그렇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경성 안내를 보면 경성 박물관 및 동^식물원은 최초에 이토 히로부미가 왕가의 오락을 겸하고 공중의 관람에 이바지 할 목적으로 계획했다고 설명했고, 박물관 설립을 총괄한 스에마츠 구마히코(末松熊彦)창덕궁 박물관은 원래 이왕가(순종) 일가에 취미를 공급하고 조선의 고미술을 보호 수집하려는 희망으로 만들었고 고미야 차관의 건축으로 나온 것이라 했습니다.

 

=창경궁에 박물관 동식물원은 일본인들이 순종 일가의 소일거리를 위해 선심 쓰듯 만들어준 것이라고 소개한 인상이 짙네요?

 

=그렇죠. 동식물원하고 박물관 조성을 주도한 고미야의 이야기가 자랑스레 말합니다. 이완용 이윤영이 1907114일 자기한테 새 황제께서 새로운 궁(창덕궁)에서 새로운 생활을 할 때 즐거우시도록 모든 시설과 설비를 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래서 자기가 이틀 뒤인 6일 동식물원과 박물관 창설을 제의했더니 두 사람이 아주 기뻐했더라 하고 말합니다.

 

=순종 더러 심심하면 진귀한 동식물하고 유물이나 실컷 보고 딴 생각 품지말라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문제는 창경궁이 위락시설로 마구 훼손된다는 건데요. 우선 1908년 봄부터 창경궁에는 경성에서 사립동물원을 경영하고 있던 유한성이라는 사람의 동물, 즉 곰·원숭이·낙타·사슴·공작·타조·앵무 등을 구입하여 동물원을 만들었구요. 유한성을 직원으로 채용했답니다. 그리고 일본인이 주동이 되어 식물원을 만들었답니다.

1971년 창경원 앞에 모인 상춘인파.

=궁궐인 창경궁이 결국 동식물원이 조성된 창경원으로 격하된게 그 무렵이군요.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된 것은 1911년인데요, 창경궁 자체를 창경원으로 격하시켰죠. 그러나 이미 1909111일부터 박물관과 동식물원을 합해 창경원으로 불렸습니다.

창경궁의 전각에 전시품들을 진열했죠. 사실 당시 박물관의 공식명칭은 지금도 잘 모릅니다. 대한제국 제실박물관이라는 설이 많지만 공식명칭은 아닙니다.

 

=안타까운 일이네요. 박물관에는 어떤 유물을 진열했나요?

 

=당시 전국 각지에는 도굴꾼이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개성과 강화도 등 고려 왕족과 귀족들이 살았던 곳의 무덤을 일본인들이 백주에 총칼을 들고 마구 파헤쳐 고려자기와 고려시대 유물들을 경쟁적으로 수중에 넣었는데요, 어떤 경우엔 지금 막 파내 흙이 잔뜩 묻어있는 채로 신문지에 싸여 매매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도굴품들을 막 문을 연 창경궁 박물관이 사들였다는 겁니다.

 

=아니 그럼 제실박물관이 도굴품을 사들였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원래 세키노 다다시 같은 일본학자는 19~20세기초 마구잡이 도굴이 성행하니까 이것을 막기 위해 제실박물관을 설립한 것이라고도 했는데요. 그러나 박물관이 세워져서 앞장서서 도굴품들을 사들이나까 오히려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던 많은 유산이 파괴됐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즉 의친왕(1877~1955)의 고문인 일본인 사토 히로시(佐藤寬)박물관이 오히려 물건의 가격을 올리고 도굴을 조장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사토의 한국박물관설립에 대하여, <조선> 1~3, 일한서방, 1908)고 말했습니다.

 

창경원에는 해마다 봄이 되면 벚꽃을 구경하려는 인파들도 북적였다.

=대체 얼마나 비싼 돈을 주고 사들였기에 그런가요?

 

=1908년 이후 4년 동안 12000여점의 소장품을 확보했습니다. 당시 고려자기 값은 대략 5원에서 20원 사이였는데요. 청자 포도 동자문 표주박모양 병의 경우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라는 골동품업자에게서 950원이라는 고가에 구입했어요. 뭐 지금 돈으로 10억원 가량 된다고 합니다.

 

=아니 당시 고려자기 시가가 5원에서 20원 사이였다면서요?

 

=그러니까 폭리죠. 역시 같은 날 곤도에게서 사들인 청자상감모란국화문참외모양병(靑磁象嵌牡丹菊花文瓜形甁)은 훨씬 싼 150원을 줬지만, 훗날 국보(114)로 지정됐습니다. 어쨌거나 곤도를 비롯해서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같은 중개상도 폭리를 취했죠.

 

=뭐 고려자기만 그런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렇습니다. 불상 같은 유물도 옛 절터에서 무단반출한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창경궁박물관이 구입한 유물 중에 1912년 가지야마 요시히데(楣山義英)에게서 당시 돈 26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사들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일 겁니다.

이 외에도 금속품, 옥석류, 삼국시대 조각상. 조선시대 회화, 공에품들도 구입했습니다.

 

=그래도 확보한 유물 태반이 출처 불분명이잖습니까?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죠. 고려자기는 물론이고 불상 역시도 그렇습니다. 국보 중 국보라는 국보 8378호 반가사유상 역시 정확한 출토지점을 모릅니다. 그저 추측만 할 뿐 근본을 모르는 문화유산이 된거죠.

 

창경원(궁)은 학생들의 단골 소풍장소였다. 사진은 1973년 소풍나온 국민학생들. 

=안타까운 일이네요. 원래 순종의 소일거리로 만든 것이 창경원인데 일반에 공개된 것은 언제인가요?

 

=창경원에 동식물권 박물관을 조성한 이유는 분명히 순종의 소일거리였는데요. 그래도 순종은 예부터 명군은 백성() 즐거움을 함께 나눴다.(諧樂) 진기한 동식물과 문화유물들을 백성과 함께 즐기고 싶다”(‘이왕궁 비사’, 조선신문사, 1926)고 강조했습니다. 그때가 190911월입니다. <순종실록> 1908111일 기사에도 창경궁 안에 동식물원을 설치하고 개원식을 진행한 다음 군중에게 관람시키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바 있습니다.

 

=순종이 그래도 100% 못난 왕은 아니었네요?

 

=그랬겠죠. 그래도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있었겠죠. 물론 일제는 궁궐을 개방함으로써 대한제국과 황실의 위상이 추락되고 왕제가 더 이상 존경과 위엄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창경궁에 동식물원과 박물관을 조성한 거겠죠.

어쟀거나 창경궁은 매주 목요일은 순종에게만 허락되고, 그 외의요일은 백성들의 오락과 지식개발을 위해 개방했습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엔 이왕가박물관으로 격하되죠.

 

=이왕가라는 표현이 너무 거슬립니다.

 

=그렇죠. 경술국치로 일제는 순종 황제를 일본의 천황보다 낮은 신분으로 격하시키면서 이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렀죠. 왕이라는 명칭도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가 아니라 그저 신분의 명칭이었죠. 대한제국의 황족은 일본 명치천황으로부터 왕족과 공족으로 명명되어 일본의 황실과 귀족의 신분제 속에 편입된거죠. 뭐 일본의 왕공족으로 대우해준다는 거였죠.

=그렇다면 의문점이 드네요. 맨 처음에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 15주년 맞았다고 했는데, 고궁박물관이 대한제국 제실박물관의 맥을 이은 것이 아니었나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개관 15주년 특별전을 연다고 해서 같은 질문을 했어요. 하니 고궁박물관 역사가 100년 넘지 않았나. 15주년이 말이 안되지 않나 뭐 이런 질문을 했어요. 그런데 박물관 관계자들이 헷갈려하는거네요.

 

=왜 헷갈려 할까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박물간 역사가 헷갈리기는 합니다.

이왕가박물관과는 별도로 1915년 조선총독부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이 건립됩니다.

그리고 이왕가박물관 소장품은 1938년 덕수궁으로 이전됐다. 이왕가미술관으로 이름도 바뀌고요. 또 해방 후인 1945년 덕수궁 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고, 1969년 마침내 국립박물관(훗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통합됩니다.

 

=! 국립박물관하고 통합되어서 정체성을 잃었군요?

 

=그렇죠. 통합 당시 국립박물관에 이관된 덕수궁 미술관 유물 11000여 점은 덕수라는 관리번호로 분류되었거든요.

 

=모든 유물이 국립박물관으로 이전된 건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 유물들이 있습니다. 제실박물관(혹은 창경궁박물관)~이왕가박물관 수장품 중 일제강점기 창경궁 명경전을 비롯해 원내에 그대로 방치됐던 문화유물 일부(‘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창덕궁 측우기’), 그밖에 궁중에서 계속 사용되던 전래품 등은 궁중유물전시관(1992)을 거쳐 2005년 신설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렇다면 국립고궁박물관이 최초의 박물관이라는 제실박물관과 완전히 단절된 역사는 아니에요?

 

=그러게요. 이게 여전히 모호합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1908년 건립된 한국 최초의 박물관이었던 제실박물관(창경궁 박물관)과는 단절된 역사를 갖게 된 것일까요. 필자의 궁금증에 국립고궁박물관 관계자들조차 아직 연구가 되지 않았다고 모호한 입장을 보입니다.

 

=헷갈리기는 하네요?

 

=그렇습니다. 따지고보면 1969년 국립박물관에 흡수통합되면서 제실박물관(창경궁박물관)~이왕가박물관의 공식컬렉션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된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한국 최초의 박물관 계보에서 국립고궁박물관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주장해도 할 말은 없어요. 그러나 창경궁 등 각 궁궐에 남아있던 궁중유물 일부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온 것 역시 분명하거든요. 게다가 조선왕실 및 대한제국 유물을 소장·관리하는 곳이 국립고궁박물관이니까.

 

=그럼 국립고궁박물관이 1908년 세워진 제실박물관을 국립고궁박물관의 뿌리로 삼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게요. 여하간에 박물관의 뿌리가 그렇게 모호해서는 안되죠. 이번 기회에 한국박물관의 뿌리를 제대로 찾는 노력을 해나갈 것 같아요. 그것이 부끄러운 역사든 아니든간에...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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