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은 신라 1000년 사직을 지킨 궁성인데요. 2016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장기조사를 벌이고 있는데요. 해마다 굵직굵직한 발굴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월성 해자(침입을 막으려고 만든 연못이나 도랑)가 두차례에 걸쳐 조성됐다는 올해 발굴성과가 발표되었습니다. 

뭐 그렇게 대중적으로 관심을 끌만한 내용은 아니어서 심드렁하게 보도자료를 살폈는데요. 그러다 자료 중에 3년 전(2017년)의 발굴내용이 첨가되어 있어서 다시금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서성벽 기단부에서 확인된 인골 두 구. 성벽의 기저부 밑에 정연한 모습으로 누워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성벽 맨 밑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 

그것은 바로 월성의 서벽 기단부에서 발견된 2구의 인골이었답니다. 

이 인골은 다름아닌 사람을 제사에 올린 명백한 증거였거든요. 제가 얼마 전 제가 ‘잔인무도한 순장제도’를 설명드린 일이 있는데요. 순장은 무덤 주인공의 사후세계를 함께 할 사람을 죽여 묻는 일종의 장례의식이잖습니까. 고대 사회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웠던 이 제도는 신라의 경우 502년(지증왕 3년) 폐지되었다고 했죠. 정복전쟁과 노예제도가 시작된 청동기 및 고대사회의 풍습이었지만 사회가 발달하면서 ‘잔인무도’하다고 해서 폐지된 거죠. 그래서인지 그 이후에 조성된 신라 고분에서는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생사람을 죽이는 이벤트는 순장뿐이 아니었습니다. 월성 성벽의 기저부에서 발견된 인골 2기가 웅변해주듯이 조성 중인 구조물을 튼튼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지낸 ‘사람 제사’가 있었는데요.

역시 사람제사의 원조는 중국 상나라(기원전 1600~기원전 1046)인데요. 상나라 말기의 도읍인 안양 샤오둔춘(小屯村) 유적에서는 21기 건축물 기초에서 641명의 인간희생물이 301마리의 짐승 뼈와 함께 확인됐는데요. 사람이 짐승과 동격의 희생물 취급을 받았던 셈이죠. 상나라 종묘로 추정되는 건축물의 기초에서도 사람과 동물들이 일부는 목이 잘린 채, 일부는 불에 탄 채 확인됐습니다.

인골이 발견된 월성 서성벽 현장. 성을 쌓기 직전 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여 묻어 놓은 흔적이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나뭇잎 나무줄기 껍질로 얼굴 가린 흔적 

뭐 굳이 중국의 예를 찾을게 있나요. 5세기 후반 월성벽을 쌓으면서 맨 밑바닥에 가지런히 뉘워 놓은 두 사람의 유골이 바로 사람제사의 명백한 흔적이죠. 한사람은 키 166㎝에 이르는 남성, 다른 한 구는 키 154㎝의 여성으로 추정됩니다. 우연히 성벽에 박힌 것은 아닐까요. 아니랍니다.

성벽 바닥의 토층에 아주 정연한 상태로 묻혀있었거든요. 흥미있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얼굴 주변에 나무껍질과 초본류로 덮은 흔적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장례의식이 있었음을 웅변해주는 대목이죠. 두 사람을 죽여서 성벽 바닥 부분 토층에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흔적이죠. 왜냐구요? 성벽이나 제방, 궁궐을 지을 때 땅의 기운을 다스리고 무사안전을 기원하려고 바친, 사람제사를 지낸거죠. 

월성 서성벽에서 확인된 남녀 인골. 왼쪽 남자 인골 얼굴(왼쪽)에는 수피(나무줄기 바닥조직)가, 고개를 돌리고 있는 여성의 얼굴엔 초본류의 흔적이 역력하다. 제사의 흔적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거꾸로 박힌 통일신라시대 10살 어린이

희한한 것은 순장제도는 502년 폐지됐지만 ‘사람 제사’ 이야기는 16세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신관 공사터의 9세기 통일신라 시대 우물에서 10살 가량의 어린아이 유골이 확인됐는데요. 유골은 거꾸로 박힌 형태였습니다. 그렇다면 장난치다가 그만 추락한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우물에는 제사음식이나 제사의 희생물로 사용된 동물뼈의 존재, 토기병의 입부문을 파손하고 던져놓은 제사행위의 흔적이 보였거든요. 때문에 이 어린아이도 나라의 큰 제사를 지낼 때 산채로 우물 속으로 던져진 희생물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어요. 민심이 흉흉했던 9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낼 때 이 가련한 아이가 희생됐을 가능성이 있는거죠. 

국립경주박물관 신축 공사장에서 확인된 9세기 통일신라시대 우물에서 10살 정도의 어린이 인골이 거꾸로 박힌 모습으로 출토됐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호화저택 네 귀퉁이 주춧돌 밑에 어린이를 생매장? 

고려시대 때도 흉흉한 소문이 민간에 돌았어요. <고려사> ‘열전 최충헌전’에 등장하는데요. 당시 무신정권의 실권자였던 최충헌(1149~1219)이 새로운 저택을 지을 때 흉흉한 소문이 돌았답니다. 즉 “최충헌이 땅기운을 제압하려고 비밀리에 동남동녀를 잡아 오색옷을 입혀서 공사중인 저택의 네 귀퉁이에 생매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집마다 난리가 났대요. 백성들은 자기 아이를 숨기느라 혈안이 됐구요. 어떤 이들은 아이를 업고 도망쳤답니다. 이 틈에 무뢰배들이 아이를 유괴한 뒤에 몸값을 빼앗고 돌려주는 일까지 생겼답니다.

그뿐이 아니었어요. 1343년(충혜왕 4년)의 일인데요. 이번에는 다름아닌 충혜왕(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이 주인공이었는데요. 충혜왕이 민가의 어린아이 수십명을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 묻는다는 소문이 돌았답니다. 이후의 상황은 최충헌 때와 똑같이 민심이 흉흉해졌답니다. <고려사절요>에는 희생된 어린아이의 숫자를 50~60명이라 구체적으로 적시해놓았어요.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싹해집니다

나라의 큰 제사를 지내면서 어린아이를 우물 속에 밀어넣는 잔학한 짓을 벌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국립경주박물관의 2011년 ‘우물 속에 빠진 신라시대 동물들’ 특별전 도록에서

■“어린아이 잡아간다” 소문에 텅텅 빈 마을 

그런데 이와 같은 사람 제사 이야기가 조선조까지 이어진다는 겁니다. 아니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라는 성종(1469~1494) 연간인 1494년(성종 25년) 5월이었는데요. 아니 “서울의 왕자 공주가 집을 지으면서 어린아이를 묻어서 재앙을 물리치는 제사를 지내려 한다. 그래서 지방의 어린아이들을 잡아 배에 싣고 간다”는 소문이 황해도 해주까지 퍼졌다는 상소문이 올라왔습니다. 

역시 이런 소문 때문에 어린아이를 가진 백성들이 산과 들로 피하느라 바쁘다는 것이었어요. 성종 임금이 화들짝 놀라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들을 색출하라”는 명을 내리는데요. 이 소식을 전하는 <성종실록>의 사관은 흥미로운 평가를 내립니다.

“여러 군(君)과 옹주(翁主)의 집을 해마다 지어…이런 소문이 퍼지니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경기·충청·황해 등 각 도의 백성들이 모두 아이를 안고 산에 올라가 피하느라 마을이 텅비었다.”

황해도 뿐 아니라 경기·충청도까지 그 해괴방측한 소문이 퍼졌다니 정말 심각했던 것 같아요.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구전설화로 확대재생산되는데요.

“옹주의 저택을 지었을 때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면 넘어지고, 다시 세우면 또 넘어졌다. 대책이 없었다. 하루는 지나가던 어떤 풍수쟁이가 한마디 툭 던졌다. ‘어린애를 주춧돌 밑에 묻으면 땅의 기운을 잡아주어 기둥이 튼튼해질 거요.’ 이 말을 들은 공사책임자들이 풍수쟁이 말대로 어린아이 한 명을 잡아 주춧돌에 묻었다. 그랬더니 기둥이 넘어지지 않았다. 집도 튼튼했다. 이 말이 퍼지자 경향 각지의 백성들이 아이를 업고 숨었다.”(<한국민간전설집>)

통일신라시대 우물에서는 어린아이 유골과 함께 제사에 올린 동물과 토기 등의 흔적이 역력했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흉흉한 소문이 돈 이유

이 일화의 핵심은 바로 ‘해마다 저택을 짓는 여러 군(왕자)와 옹주’들입니다. 당시 성종 임금의 아들·딸(부마)들이 호화저택을 지을 때 이와같은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는 얘기인데요. 이 때문에 “이분들의 호화저택 공사를 당장 그만두라”는 상소문이 빗발칩니다. 가뭄 때문에 곡식이 익지 않았고, 초가을인데도 우박은 물론 눈까지 내렸으며, 그나마 남아있던 곡식마저 큰 손상을 입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백성들은 도탄해 빠져있는데 왕자와 공주들은 호화저택은 물론이고, 한강변에 정자까지 조성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홍문관 부제학인 성세명(1447~1510)의 상소문이 심금을 울립니다. 

“백성들의 신음이 ‘영차’ 하는 소리와 어우러집니다. 목불인견입니다. (쓸데없는 공사에) 쓸 돈을 돌려 기근 구제에 사용한다면 백성 1000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1000명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다면 (임금이) 백성의 부모라 할 수 있습니까.”(<성종실록> 1494년 8월25일)

1554년(명종 9년)에도 “어린아이 생매장의 참언이 퍼졌다”는 상소가 올라옵니다. 1년 전인 1553년 경복궁 화재로 불에 탄 사정전·흠경각·강령전 등을 중건하는 공사가 벌어지던 때였는데요. ‘2~3살 영아를 산 채로 대궐 주춧돌 밑에 묻으려 한다’는 요망한 말이 퍼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상소문은 “지금 서울 시내가 그 때문에 난리 났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그때 영경연사 상진(1493~1464)의 한마디가 인상 깊습니다.

“이런 요망한 말이 떠도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백성을 어린 아이처럼 돌본다면 백성은 임금을 부모처럼 우러러 볼 것입니다. 어찌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 한다고 임금을 의심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상진이 덧붙인 말이 무시무시합니다.

“백성들이 곤궁하고 심지가 안정되지 않으면 이런 유언비어가 소문이 돕니다. 전에도 여자가 용(龍)을 낳았다는 말이 있어 온 성안이 웅성거렸습니다. 민심이 흉흉한 때에 갑자기 호걸이 나와 교화를 막는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장차 어떻게 막겠습니까.”(<명종실록> 1553년 2월12일) 상진은 이처럼 어지러울 때 호걸이 나타나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최충헌이 저택을 지을 때 남녀 어린아이들을 주춧돌 밑에 묻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사실을 기록한 <고려사>.

■인심을 잃으면 유언비어가 돈다

<명종실록>을 쓴 사관의 논평도 당대 뒤숭숭한 세간의 민심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경복궁 중창 공사가 있었는데 ‘어린 아이를 땅에 묻어야 한다’는 시중에 떠들썩하게 돌았다. 백성들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어수선한 틈을 타 아이가 있는 백성들을 협박해서 뇌물을 챙기는 자까지 생겼다.”

흥미롭죠. 통일신라 시대 이후 고려~조선 중종 시대까지 ‘주춧돌 밑 사람제사’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지만 그것이 정말 있었던 일인지는 밝혀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저도 ‘주춧돌 밑 사람제사’가 조선조 중종 때까지 이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임금을 비롯한 권력층이 민심을 거스르는 정치를 펼칠 때마다 이와같은 해괴한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명종실록>을 쓴 사관의 한마디가 핵심을 찌릅니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면 유언비어가 아주 신나게 돌게 된다. 그러니 민심이 동요하기 쉽고, 이런 유언비어를 진압하기는 힘들었다. 이와 같은 일들이 많았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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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flower-thief20..tistory.com 꽃도둑 2020.12.15 1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벽을 쌓거나 궁궐을 지을 때도 순장을 하였다니...잔인한 풍습이었지만 그때 당시의 인간들이 인식하던 세계는 아무래도 주술에 기대어 있었겠죠.

  2. 아무개 2020.12.16 1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엔 기자들이 유언비어를 생성하죠.
    독감 백신 맞아 죽은 사람이 100명이 넘었네 어쩌네 실시간 보도를 하더니 결국 관련성 있는 사망자는 0였다죠.
    기자들은 칼보다 펜이 더 강하다는 말을 자랑스레 하면서 칼보다 펜이 더 큰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말엔 고개를 돌립니다.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주워 먹는 체리 픽킹은 정말 파렴치한 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