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재위 1418~1450)이 누구입니까. 중국 역사에는 요순이 있다면 한국 역사에는 바로 세종대왕이라는 성군이 계시죠. 그 분의 업적을 언급하라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겠죠. ‘훈민정음 창제’, ‘대마도 정벌’, ‘4군6진 개척’,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측우기 등 과학기술의 발명, 신기전 등 각종 화약무기의 개량 개발, 조선의 풍토에 맞는 농서 <농사직설> 편찬, 한양을 기준으로 한 역법 ‘칠정산’의 편찬, 17만명을 대상으로 한 백성 여론조사를 실시해서 확립한 조세제도(공법)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죠.

1992년 개성 왕건릉(현릉) 곁 땅밑에서 출토된 태조 왕건 동상의 출토당시(오른쪽)과 정비된  모스(왼쪽). 어진이라면 실물처럼 사실적으로 그렸을테지만 동상이기 때문에 출가자인 부처와 재가자인 전륜성왕의 신체적 특징을 종합한 32대인상의 형태로 제작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세종의 실정

그러나 그러한 업적에 견준다면 사소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다른 분도 아니고 세종대왕이기에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른바 ‘세종대왕의 분영갱상(焚影坑像)’입니다. ‘분영갱상’이 뭐냐. 바로 고려 역대 임금들의 어진(초상화)과 동상을 불태우거나 땅에 묻어 없애버린 사건을 그렇게 표현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께서는 왜 그런 ‘만행’을 저질렀을까요.

1426년(세종 8년) 일어난 일입니다. “1426년(세종 8년) 5월 19일 고려 멸망 후 도화원이 간수하고 있던 고려 역대 군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불태웠다”는 <세종실록> 기사가 보입니다. 

2년 뒤인 1428년(세종 10년) 8월1일 더욱 지독한 기록이 등장합니다.

“충청도 천안군이 소장한 고려 태조(918~943)의 진영과, 문의현(청원)의 태조 진영, 쇠로 만든 주물상 및 공신들의 영정을 모두 각각의 무덤에 묻었다. 전라도 나주가 소장한 고려 2대왕 혜종(943~945)의 진영과 조각상, 그리고 전라도 광주에 있던 태조 왕건의 진영도 개성으로 옮겨 능 곁에 묻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433년(세종 15년) 6월 15일 세종이 고려 역대 임금 18명의 어진이 마전현(경기 연천 미산면)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전현의 정갈한 땅에 묻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437년(세종 19년) 7월 17일에는 경기 안성군 청룡사에 봉안돼있던 공양왕의 어진을 고양현의 무덤 근처에 있던 암자로 이장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합니다.

태조 왕건 동상이 출토된 지점. 왕건릉 북쪽 5m 떨어진 곳에서 나왔다. 조선조 세종은 1428년(세종 10년) 충청도 천안과 청원, 전라도 광주에 있던 태조 왕건의 초상화와 동상을 개성의 왕건릉 과 능 옆에 묻으라고 지시한 바 있다.|노명호 교수의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 지식산업사, 2012에서 

■왕건 동상이 왜 거기서 나와? 

그런데 말입니다. 1992년 10월 개성 서북쪽 고려 태조 왕건릉(현릉)의 확장공사를 진행하던 포크레인 삽날에 희한한 유구가 걸렸답니다. 무덤 내부도 아니고 무덤에서 북쪽으로 약 5m 떨어진 곳을 굴착작업 하던 중에 지하 2m 정도에서 노출된 석판을 별 생각없이 파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답니다. 지하공간의 덮개인 석판 안에서 포크레인 삽날에 걸려나온 것은 다름아닌 동상이었는데요. 

처음엔 청동불상으로 판단했다가 남한학자(노명호 서울대 명예교수)에 의해 왕건 동상으로 밝혀졌고, 지금은 그것이 정설이 됐는데요. 이 왕건의 초상화, 즉 어진은 실제의 모습대로 그렸갰지만 동상의 경우 불교에서 출가자인 부처와 재가자인 전륜성왕의 신체적 특징을 종합한 32대인상으로 제작됐을 거라네요.

불교에서 전륜성왕은 진리의 수레를 굴리면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세계를 평정한다는 이상적인 제왕이거든요. 인도 전역을 통일한 아쇼카왕(재위 기원전 268?~기원전 232?)과, 이를 본받고자 한 후대의 중국 양무제(502~549), 진무제(557~559), 수문제(581~604) 등 전륜성왕을 자처한 통치자들은 모두 통일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는데요.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이야말로 당연히 ‘전륜성왕’을 자처했을 것이라는 추정이죠. 왕건의 동상에 32대인상의 요소가 한껏 가미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감신총 벽화의 인물 뒤에 드리워진 비단장막에 왕(王)자가 수도 없이 쓰여있다. 인물이 임금일 가능성이 짙다는 뜻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무엇보다 이 동상은 왜 왕건릉(현릉)의 무덤방에서 5m 떨어진 곳에 묻혀 있었다는 것이 심상치 않았는데요. 원래 이 동상은 951년(광종 2년) 태조 왕건의 원찰인 개경 봉은사에서 어진(초상화)와 함께 극진히 모셔졌는데요. 몽골과 합단(哈丹·원나라의 반란세력)의 침공 때도 왕건 동상은 강화도에 피란했다가 돌아왔다네요. 당연했겠죠. 고려 창업주 태조 왕건의 동상이야말로 고려의 상징이었을 거 아닙니까.

그랬으니 조선개국과 함께 태조 이성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조(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을 연천 마전군으로 옮기라”(<태조실록> 1392년 8월8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인용한 <세종실록>에서 보았듯이 해동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께서 1428년 “…충청도 청원에 있던 태조 왕건의 어진 및 동상을 개성의 왕건릉(현릉) 옆에 묻으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 때 묻은 동상이 1992년 왕건릉(현릉)의 5m 북쪽 지하에서 매장된 채 발견된 것이라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죠.

아무리 만고의 성군이신 세종대왕이라고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세종은 고려 역대 임금들의 초상화는 물론이고 쇠로 만든 동상까지, 심지어는 고려공신들의 초상화까지 모두 불태우거나 땅에 묻는 이른바 ‘분영갱상(焚影坑像)’의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너무하신거 아닙니까. 고려 임금과 공신들의 얼굴이 얼마나 꼴보기 싫었으면 보는 족족 불태우거나 묻어버렸을까요.

고구려 감신총 벽화에 그려진 인물상. 흑립라관에 홍포를 쓰고 있어서 혹시 왕의 초상화일 가능성이 제기된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구려 벽화고분에도 임금 초상화가?

사실 어진으로 통하는 임금 초상화의 유래는 뿌리깊습니다. 5세기 전반대 조성된 고구려 벽화고분(감신총·평남 용강 신덕리)의 인물상은 심상치 않답니다. 이 인물은 임금이 쓰는 흑립라관(黑笠羅冠·비단을 재료로 만든 관모)에 홍포(紅袍)를 입고 있는데요. 전문가(조선미 전 성균관대 교수)는 “다른 쪽에 그려진 인물상의 경우도 얼굴 부분은 떨어져 나갔지만 뒤에 드리워진 비단장막에 왕(王)자가 수도 없이 쓰여있다”고 설명합니다. 인물상이 감신총의 주인공인 임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신당서>에 “고려음악을 연주하는 악기의 상아 장식 위에 국왕의 형상을 그렸다(畵國王形)”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고려기(高麗伎)’는 당고조(재위 618~626) 즉위 직후 수나라 제도에 따라 만든 9가지 악 가운데 하나인데 고구려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부부초상화로 알려진 그림. 조선조들어 고려 역대 국왕과 왕비 초상화들은 수난을 당했지만 공민왕의 초상화는 화를 면한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은 변방세력에 불과한 이성계의 아버지(이자춘)에게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라는 벼슬을 내림으로써 중앙무대로 진출시켰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5년(태조 4년) 종묘를 만들면서 공민왕의 영당을 곁에 세우고 그의 초상화를 받들었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삼국유사> ‘김수로왕진’조에는 신라 충지 장군이 가야의 금관성(김해)을 공략한 뒤 온갖 괴이한 현상이 일어나자 석자 크기의 비단에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진영을 그려 봉안한 뒤 아침 저녁으로 치성을 들였답니다. 그러나 3일 만에 김수로왕의 진영에서 피눈물이 흘러 거의 한 말이나 되었답니다. 충지는 “진영(어진)을 그려 모신 것이 오히려 불경죄였던 것 같다”고 후회하며 불태워 버렸답니다. 

고구려의 멸망 전인 646년(보장왕 5년) “동명왕 어머니의 조각상에서 3일간이나 피눈물이 흘렀다”는 <삼국사기> ‘보장왕조’ 기록도 있습니다.  또 신라에 원한을 품은 궁예가 경북 영주의 부석사 벽에 그려진 신라 임금의 초상을 보고 칼로 내리쳤고, “지금도 궁예의 칼 자국이 남아 있다”(<삼국사기> ‘열전·궁예조’)는 기록도 있습니다.

 

■임금의 초상화를 어진이라 하는 이유

표암 강세황(1713~1791)은 자화상을 그린 뒤 그림에 ‘기진자사(其眞自寫) 기찬자작(其贊自作)’라 해서, ‘그 초상화는 내가 그리고, 그 찬문도 내가 썼다’고 했답니다. 자화상을 초상(肖像), 즉 ‘닮을 초(肖)’에 ‘본뜰 상(像)’이라 하지 않고 ‘사진(寫眞)’이라 해서 ‘내면의 ‘참됨(眞)’을 ‘그대로 드러낸다(寫)’고 했습니다.

오죽하면 북송의 유학자 정이(1033~1107)가 “터럭 한 올이 달라도 내가 아니다(一毫不似 便是他人)”라고 했을까요. 그래서 임금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제 짐작할 수 있겠죠. 조선조 세종도 마치 살아있는 듯 사실적으로 그린 고려 임금들의 초상화를 보는 일이 불편하다는 판단이 들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어진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왕조를 상징한다고 봤을 겁니다. 그러니 색출작업까지 해서 없애버릴 생각을 했던 겁니다.

경기 장단군 진서면 대원리의 화장사에 있던 고려 공민왕의 초상. 가장 믿을만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낮은 복두를 쓰고 얼궁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정면상이다.

■공민왕 부부의 초상화는?

세종이 그렇게 ‘분영갱상’의 만행을 저질렀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고려 임금들의 초상화가 몇 점 있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공민왕(1330~1374·재위 1351~1574) 부부의 어진입니다. 이상하죠? 그건 왜 세종대왕이 손을 대지 않았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세종의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가 조선을 개국한 지 3년 만인 1395년(태조 4년) 종묘를 만들면서 고려 공민왕의 영당을 곁에 세우고 공민왕의 초상화를 받들었답니다.

이상하죠? 조선 태조 이성계의 직계 선조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 왜 왕(王)씨인 공민왕을 섬겼다는 겁니까. 구전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가 종묘를 세울 때 강한 바람이 불었는데 그 바람을 타고 공민왕의 어진이 날아들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성계로서는 공민왕을 허투루 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성계 가문은 원나라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 지역에 머물러있던 변방세력에 불과했거든요. 그런데 공민왕이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에 나설 때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1315~1361)이 적극 도왔어요. 

쌍성총관부를 탈환한 공민왕은 이자춘에게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라는 벼슬을 내렸습니다. 당시 20대였던 이성계도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데 일조했습니다. 이성계 가문은 공민왕 때 중앙무대로 진출했던 겁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로서는 변방의 세력으로 머물던 가문을 발탁한 공민왕을 잊지 않았던 겁니다.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는 공민왕과 부인 노국공주(?~1365)의 부부 초상화가 남아있습니다.

이 공민왕 초상화는 1395년 당시 공민왕 영당에 봉안됐다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건물을 복원하면서 이모(移模·원본을 베껴 그린 그림)한 겁니다. 공민왕은 그렇다치고 부인인 노국공주 초상까지 남아있네요? 시쳇말로 잉꼬부부 처럼 말입니다. 알다시피 공민왕의 노국공주 사랑은 필설로 다할 수 없죠.

“공민왕은 사랑했던 부인이 죽자 손수 영정을 그려놓고 밤낮으로 슬피 울며 3년간이나 고기를 먹지 않았다. 특히 노국공주의 능인 정릉을 지키는 수릉관(守陵官)과 시릉관(侍陵官)을 두어 머리를 풀어헤친채 마치 효자처럼 지내도록 했다.”(<성호사설> ‘인사문·수릉관’)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공민왕 부부상을 봐도 공민왕 부부의 사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마주하듯 약간 몸을 틀어 앉아있는데요. 장중하고 단아한 분위기가 풍깁니다. 공민왕 부부가 나란히 앉은채 그린 초상화의 형식은 이후 역대 3대 악성으로 꼽히는 박연(1378~1458) 부부와, 문신 하연(1376~1453) 부부의 초상화 등 조선 전기의 부부초상화 형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하네요.

왼쪽 사진은 경기 연천군 숭의전에 모셔져있던 고려 태조의 어진. 복식도 사실적 고증이 결여되어있고 작품수준도 낮은 소략본이다. 오른쪽 사진은 북한측이 그린 태조 왕건의 영정이다. 한 인물을 두고 그린 두 초상화가 너무도 판이하다.

■태조 왕건의 초상화는?

아까 태조 왕건의 동상이 1992년 발견됐다고 말씀드렸죠. 그분의 어진도 남아있기는 해요. 7명의 고려 임금 위패를 모신 마전(연천)의 숭의전에 소장돼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는데요. 그러나 태조의 초상화는 근대에 제작된 소략본입니다. 이 어진은 장막을 치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인데 얼굴을 왼쪽으로 약 30도 돌리고 두손을 앞으로 모은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세종대왕이 역대 고려 군왕과 왕비의 어진, 그리고 공신들의 초상화를 불태우거나 묻어버린 이른바 ‘분영갱상’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세종대왕의 업적이 사소한 잘못을 덮고도 남지만 재차 말씀 드리자면 다른 분도 아니고 세종대왕이기에 아쉬움이 남는다는 겁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