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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세종대왕이 성병에 걸렸다?

 “소갈증(당뇨)와 부종의 뿌리가 근절되지 않았는데, 이제 또 임질(淋疾)을 얻은 지 11일이 되었다. 번다한 정무를 처리하면 기운이 노곤하다.”
 <세종실록>은 1438년(세종 20년) 4월 28일자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기록해놓는다. 세종대왕이 ‘임질’에 걸려 고생하고 있음을. 그것도 세종 본인의 입으로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창덕궁에 있는 내의원.  임금의 질병을 관리하는 관청이었다. 당뇨와 두통, 이질 등 다양한 질병에 시달렸던 세종은 임질에 걸려 정무를 볼 수 없는 통증이 발작하는 등 약 4년 동안 고생했다.

임질이 무슨 병인가.
 ‘임질은 임균이 일으키는 성병이다. 주로 성교로 옮아 요도 점막에 침입하며, 오줌을 눌 때 요도가 몹시 가렵거나 따끔거리고 고름이 심하게 난다.’(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한마디로 임질은 성병이라는 것이다. 망측스럽지 않은가. 만고의 성군이자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대왕께서’ 성병에 걸렸다니….
 알려지다시피 세종은 슬하에 22명의 자식(18남4녀)을 두었다. 정후인 소현왕후 심씨에게서 8남2녀를, 후궁인 영빈 강씨(1남)·신빈 김씨(6남)·혜빈 양씨(3남)·숙원 이씨(1녀)와 궁녀인 상침 송씨(1녀)에게서 10남2녀를 생산했던 것이다. 22명이나 되는 자식도 남부럽지 않을텐데 그 중에 아들이 18명이나 되니….
 왕자 생산이 왕실의 번성을 가져온다는 게 당대의 법도라면 세종은 남성으로서의 능력도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세종대왕이 임질에 걸렸다니….

 

 ■세종의 임질 투병 기록
 사실 세종은 ‘앉아있는 종합병원’이라 할만큼 온갖 질병에 시달렸다. 고기가 아니면 수라를 들지 않을 정도로 육식을 좋아했던 세종이었기에 굉장히 뚱뚱했다.
 오죽했으면 1418년(세종 즉위년) 상왕(태종)이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도 않고, 몸도 뚱뚱하시니 건강을 좀 챙겨야 한다”고 걱정했을까.
 세종은 두통과 이질, 다리부종과 수전증은 물론 풍질에 시달렸다. 더욱이 하루에 물을 한동이 이상 들이켰을만큼 당뇨병(소갈증)을 앓았다. 한 걸음 앞의 사람도 불간할 수 없을만큼 눈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것은 아마도 당뇨합병증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랬던 세종이 임질까지 걸렸다는 것이다.
 <세종실록>은 임질을 앓던 세종의 병세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역시 임금의 육성이다.
 “임질을 앓은 사람들은 ‘이 병은 비록 나았다가도 발작한다’고 한다. 의원들은 ‘이 병을 치료하려면 마땅히 희로를 하지 말고 마음을 깨끗히 해야 한다’고 했다.”(1438년 4월 28일)
 이 무렵의 <세종실록>은 임질로 고생했던 세종의 투병기록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성질을 낼 적이 있으면 찌르고 아픈 증세가 즉시 발작하곤 한다.”(1438년 5월 27일)
 “지난해 여름(1438년) 임질을 앓아 오래 정사를 보지 못하다가 가을·겨울에 이르러 조금 나았다.”(1438년 6월 21일)
 “지난해 가을(1438년) 임질이 조금 나아 제릉(세종의 친 할머니인 신의왕후 묘)에 말을 타고 행차했는데, 병이 도져….”(1439년 7월 2일)
 “올 봄(1439년) 봄에 평강에서 강무를 주관하다가 다시 병(임질)이 도져 3일 후에야 진정됐고….”(1439년 7월 4일)
 비단 1438~39년 사이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3년 뒤인 1442년(세종 24년)에도 발작한 것으로 보인다.
 “몸을 움직이고 말을 하면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더욱 심하다. 앞으로 2~3일 동안 말을 하지 않겠다.”(1442년 11월 11일)
 세종은 10여일 고생하다가 11월 23일이 돼서야 겨우 호전됐다. 결국 세종은 41살 때(1438년)부터 45살 때(1442년)까지 약 4년간 임질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 수 있다.
 오죽했으면 세종은 국가의 주요행사인 강무(講武·임금의 친림 아래 실시하는 군사훈련)의 주관을 세자(문종)에게 맡기는게 어떠냐는 의견까지 냈을까.
 물론 대신들의 반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왕의 이동식 변기인 매화틀(매우틀). 어의들은 임금의 배설물(매화) 색깔을 보고, 혹은 그 맛까지 보며 건강을 살폈다고 한다. 

 ■성종의 임질, 권근의 임질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임질에 걸린 이가 세종 뿐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종의 버금가는 성군으로 알려진 성종도 임질에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즉 <성종실록>은 1485년(성종 16년) 성종 임금이 “‘임질 때문에 경연에 도저히 나갈 수 없다’고 승정원에 알렸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또 있다.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성균관 대사성·예의판서를 지낸 권근(1352~1409) 역시 임질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서를 제출한 적이 있다.
 “신은 임질이 더욱 심해 소변이 잦아 그치지 않고 기운이 통하고 막힘이 일정치 않아 몸이 시고 아픔을 참기 어렵습니다. 밥 먹는 사이에도 발작이 일어나고 밤새도록 오줌을 누어 잠시도 평안할 때가 없습니다. 이 병든 몸으로 어찌….”(<태종실록> 1406년 5월1일)
 권근이 누구인가. 지금으로 치면 선비의 대명사인 성균관 대사성과 나라의 예의를 총괄하는 예의판서가 아닌가. 게다가 권근은 세자의 스승인 세자좌빈객과 이사(貳師)를 지낸 사람이다.
 그런 그가 망측스런 임질 때문에 사직을 청했다니….
 <실록> 등 각종 문헌을 보면 임질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줄을 잇는다.
 심지어 임질에 걸린 아버지의 음경을 빨아 병을 고쳤다는 효자의 이야기가 눈에 띈다.
 “1512년(중종 7년) 흥덕현(전북 고창)의 향리 진간의 아비가 임질을 앓아 거의 죽게 됐다. 그 때 진간이 울부짖으면서 몸소 빨아내 병을 고쳤습니다. 진간을 효자로 등록하면….” 
 “1526년(중종 21년) 장성현의 역리 차순년은 아비(차인보)가 임질에 거려 소변이 막혀 기절해서 쓰러지자 아비의 양경을 이틀간이나 빨았습니다. 그러자 요도가 트였습니다.”    

  “1522년(중종 27년) 괴산 사람인 전 직장 김여성은 아버지가 임질 때문에 기절하자 입으로 빨아 낫게 했다.” 

허준의 <동의보감>. <동의보감> 등 한의서를 보면 당시의 임질은 요즘의 성병을 뜻하는 임질 뿐 아니라 일반적인 비뇨기 질환을 일컬었다.

   ■난봉꾼 충혜왕이 걸린 고약한 임질
 이쯤해서 한가지 의문이 든다.
 만약 임질이 성접촉에 의한 성병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세종이나 성종, 권근 등이 “내가 성병(임질)을 앓고 있다”고 대놓고 이야기했을까.
 그리고 그 부끄러운 기록을 사관이 <실록>에 자신있게 남겼을까. 그런데도 세종대왕을 언급할 때 ‘임질’ 부분은 쏙 빼놓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임질과 관련된 심상치않은 기록들이 더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특히 고려조 충혜왕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원나라의 간섭 속에 두 번이나 왕위에 올랐던 충혜왕(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은 천하의 난봉꾼이었다. 그는 특히 성병인 임질을 고려에 퍼뜨린 것으로 악명이 높다.
 <고려사절요> ‘충숙왕·충혜왕조’를 보면 충혜왕의 난잡한 행각이 적나라하게 묘사됐다.
 1339년 복위하자 마자 아버지(충숙왕)의 후비였던 수비 권씨와 경화공주(원나라 공주)를 차례로 강간했다. 
 “충혜왕은 남의 아내나 첩으로서 얼굴이 잘 생겼다는 말만 들으면 친척이나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측근과 불량배들을 시켜 빼앗아 오거나, 혹은 그 집에 가서 음란한 짓을 하기 일쑤였다.” 충혜왕은 특히 자신의 외숙이자 삼사좌사를 지낸 홍융의 후처인 황씨와 간통했다. 홍융이 외숙이라면 황씨는 외숙모인 셈이 아닌가. <고려사절요>를 보라.
 “원래 홍융은 후처인 황씨의 용모가 아름다워 늘 안방에 가두어 놓고 친척들조차 보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 홍융이 죽은 뒤 환관 최화상이 충혜왕에게 황씨의 아름다움을 귀띔했다. 그러자 충혜왕은 그 집에 가서 정을 통한 뒤….”
 그야말로 ‘콩가루 임금’이 아닌가. 문제는 충혜왕이 황씨를 비롯한 여자들에게 몸쓸 성병인 임질을 옮겼다는 것이다.
 “충혜왕이 열약(熱藥)을 복용했기 때문에 그와 정을 통한 여인들은 임질에 많이 걸렸다. 황씨도 임질에 걸리자 충혜왕은 의술에 능한 승려 복산(福山)을 시켜 치료하게 하였다.”
 열약은 몸을 뜨겁게 하고 생물을 왕성하게 하는 약제인데, 부자(附子)·육계(肉桂)·오수유(吳茱萸)·건강(乾薑)이 여기에 속한단다.
 어쨌든 충혜왕은 난잡한 성생활로 임질을 고려 땅에 옮긴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기록이 있다보니 임질이라고 하면 ‘난잡한 충혜왕’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종이나 성종의 임질 관련 기록을 보면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요로에서 빠져나온 결석. 이렇게 큰 결석에서부터 모래처럼 생긴 작은 결석까지 다양하다. 결석이 요도를 막으면 격심한 통증을 느끼다가 빠져나오면 씻은 듯 통증이 사라진다.

 ■임질이라고 같은 임질인가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옛 문헌에 등장하는, 아니 세종·성종·권근 등이 걸렸다는 ‘임질’이 충혜왕이 여러 여자들에게 옮겼다는 임질과 같은 병인가. 그렇지만은 않단다.
 “한의학에서 임질이라는 병증은 몸이 허약하거나 피로누적 등과 함께 방광에 열이 차서 생긴다는, 일반 비교기과 질환의 개념입니다. 꼭 성병의 개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강용혁 분당 마음자리한의원장)
 <동의보감>과 <향약구급방>, <향약집성방> 등이 설명하는 임질의 증세를 보라.
 “임질은 소변이 잘 통하지 않는 병이다. 신이 허하고 방광에 열이 있을 때 생기는 병이다. 소변이 줄고 잦아지며 잘 나오지 않고…. 아랫배가 팽팽하게 당기며 통증이 배꼽에 이른다.”
 임질은 증세에 따라 5~8가지로 나눌 수 있다. 석림(石淋)·노림(勞淋)·혈림(血淋)·기림(氣淋)·고림(膏淋) 등….
 이 가운데 석림(石淋)이란 무엇인가. 모래나 돌 같은 것이 요도 중에 들어있어 오줌이 잘 나오지 않고 급통이 와서 사람이 기절까지 한다.
 그러다가 요로를 막던 막힌 돌이 빠지거나 흘러 내려가면 통증은 언제 그랬냐 싶게 사라진다. 그러다가 다시 막히면 다시 칼로 찌르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옆구리와 하복부에 생겨 떼굴떼굴 구를 정도로 통증을 호소하고…. 이같은 발작이 반복되는 것은 전형적인 요로결석의 증세라 할 수 있다.
 ‘노림’은 피로하면 오줌이 잘 나오지 않고 아랫배에서 급통이 나타나는 증세, ‘혈림’은 오줌 대신 통증과 함게 피가 나오는 증세, ‘기림’은 오줌이 시원하기 나오지 않는 증세 등을 일컫는다. 충혜왕이 걸렸을 가능성이 많고, 지금 성병이라 일컫는 전형적인 임질은 한의학에서 말하는 고림(膏淋)일 수도 있다.
 고림은 오줌이 잘 나오지도 않으면서 아프고, 나와도 고름과 같이 나오는 증세를 보인다. 그러니 오줌이 탁하고 기름같이 떠서 엉기는 모습을 나타낸다.     

 

 ■소변을 참으면… 
 각 문헌을 살펴보면 임질에 대한 온갖 견해가 난무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가 쓴 <추측록(推測錄)>은 “사람의 석림은 모두 기(氣)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 해석했다.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보면 ‘수양총서’를 인용, “소변을 참으며 방사(房事)를 하면 임질을 얻게 되며, 혹은 배가 뒤틀려 배꼽 아래가 몹시 아프며 죽는다”고 기록했다.
 <산림경제>는 또 ‘고사촬요’를 인용해서 “복숭아를 먹은 뒤에 멱을 감으면 임질이 생긴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야담집인 <대동야승>은 이제신의 수필집인 <청강선생 후청쇄어>를 인용, 임질의 특효가 사향노루라는 것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하루는 어떤 이가 이인홍이라는 일가친척에게 임질에 듣는 약을 구했다, 이인홍은 농담으로 말했다. ‘국노루(사향노루)가 임질치료약인데 요도가 통하지 않으면 그 배꼽을 눌러 젖을 짜서 그물에 바르면 완쾌됩니다’라고….”
 하기야 조선시대에 무슨 세균감염의 개념이 있었겠는가. 그랬으니 남성의 비뇨기에 문제를 일으킨 임질을 둘러싸고 갖가지 이야기들이 통용됐던 것이다.  
 
 ■세종의 임질은 요로결석?
 그렇다면 세종은 어떤 종류의 임질을 앓았을까. 그의 증세를 보면 임질 가운데 석림이 눈에 밟힌다.
 <세종실록>에서 세종이 스스로 밝힌 증상을 보라.
 “임질을 앓은 사람들은 ‘이 병은 비록 나았다가도 발작한다’고 한다.” “찌르고 아픈 증세가 즉시 발작하곤 한다.”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더욱 심하다.”
 기절할 정도의 발작을 반복한다는 요로결석의 증세를 연상시킨다. 고고학자인 이선복 서울대 교수는 세종의 임질 증세를 주제로 흥미로운 논문을 썼다.(이선복의 <뇌부와 세종의 임질에 대하여>, ‘역사학보’ 178호, 역사학회, 2003년)
 이 교수는 1441년(세종 23년) 5월 18일의 <세종실록>에서 단서를 찾았다.
 “의관이 아룄다. <대전본초>에 이르길 ‘벽력침(뇌부)은 독이 없고, 대경실심(大驚失心)하고 황홀하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증세와 아울러 하림(下淋·이질과 임질을 아울러 일컫는 말)을 관장하는데, 갈아서 복용하거나 또는 이를 달여서 복용한다.”
 벽력침, 혹은 뇌부(雷斧)는 지금으로 치면 우연히 발견되는 선사시대의 석기를 일컫는다. 돌칼이나 돌도끼, 돌화살촉 등이다. 예전 사람들은 산이나 들에서 수습되는 이같은 인공의 도구를 매우 신비롭게 생각했을 것이다. 뇌부 혹은 벽력침 등의 표현은 천둥과 벼락을 관장한다는 뇌공(雷公)이 떨어뜨린 도구라 여겼다.
 세종 시대의 의관은 <대전본초>를 인용하면서 “임질 치료제로 돌칼과 돌도끼, 혹은 돌화살촉 등을 쓴다”면서 “이를 널리 구하라는 명을 내려달라”고 아뢴 것이다.
 의관이 아뢴 때는 세종이 임질 발작 때문에 무척 고생했던 바로 그 시기이다.
 <의방유취>와 <동의보감> 등은 ‘석림(요로결석)의 치료에는 오줌과 함께 배출된 결석을 갈아 마시면 된다’는 약간은 주술적인 치료법을 소개하고 있단다.
 그 경우 몸 속의 돌이 부서져 나온다나…. 실제 <세종실록>을 보면 전국 각지에서 발견된 돌칼과 돌화살촉을 바친 이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선복 교수는 바로 세종이 걸렸다는 임질이 석림, 즉 요로결석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뇌부 즉 선사시대 석기와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다.

 

 ■세종의 임질은 과연…
 세종은 자신을 무던히도 괴롭혔던 임질, 즉 요로결석을 치료하려고 선사시대 석기를 구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이 걸렸다는 임질은 과연 요로결석이 확실한가. 성병으로서의 임질이 아니고?
 강용혁 분당 마음자리한의원장은 “그렇게 100% 단정할 수만은 없다”고 말한다.
 조선시대 때는 세균 감염의 개념이 없었다는 것. 따라서 당시 의료진들은 세종의 임질이 성 접촉에 의한 세균 감염으로 생긴 성병인지, 아니면 단순 요로결석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게 강 원장의 말이다. 강 원장은 또 “<실록>에 나오는 증상 만으로 요로결석이다, 혹은 성병이다 단정하는 것도 무리일 수 있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세종은 성병에 걸렸다는 말인가?
 “글쎄요. 물론 요로결석일 가능성이 짙겠지만…. 정확히는 ‘판단 불가’라 하는 게 옳을 것 같아요.”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