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 이북, 어느 무덤에서 호리꾼(도굴꾼)이 무덤 하나를 하나를 파헤쳤는데요….”
 1989년 어느 날, 국립중앙박물관에 흥미로운 제보 하나가 접수됐다.
 어느 도굴꾼이 민간인 통제선 이북의 무덤을 파헤쳤는데, 그 무덤의 벽면과 천정에 그럴싸한 그림이 그려져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양모 박물관 학예실장의 귀가 번쩍 띄였다. 무덤의 벽가 천정에 그림이라? 그것은 바로 벽화라는 것이 아닌가. 사실이라면 대단한 뉴스였다.
 특히 한반도 남부에 벽화묘는 극히 드문 것이어서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민통선 이북 파주 서곡리의 도굴된 무덤에서 확인된 고려말 벽화그림. 무덤의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민통선 고분벽화의 비밀
 알다시피 고분벽화의 전통은 삼국시대, 특히 고구려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그 전통은 소극적이나마 발해-고려로 이어졌다.
 고려 명종(재위 1171~1197년)의 무덤인 지릉(智陵ㆍ장단군 장도면)에 그려진 성신도(星辰圖)를 비롯해, 개풍군 수락암동 1호분에서 표현된 사신도(四神圖)와 십이지신상, 장단군 법당방(法堂坊) 벽화고분의 십이지신상과 성좌도(星座圖), 공민왕릉(개풍군 해선리)의 사신도와 십이지신상 등 주로 북한 땅에서 발견되는 고려무덤에서 간간이 보였다.
 남쪽에서는 거창군 둔마리의 주악선녀도(奏樂仙女圖)와 안동 서삼동의 사신도와 천체도(天體圖) 등 고려시대 벽화전통이 남아있을 뿐.
 이런 상황에서 또 하나의 벽화묘가 발견된다면 그 또한 주목을 끌만한 뉴스임이 분명했다.
 정양모 학예실장은 제보자에게 “한번 은밀하게 추적해보라”고 채근했다. 제보자는 1년 간의 추적 끝에 무덤의 위치를 파악해서 정실장에게 전했다.
 “파주 진동면 서곡리 야산이랍니다. 비석도 있다네요. 청주 한씨, 그러니까 문열공 한상질의 묘라고….”
 한상질(1350?~1400년)은 여말선초의 문신이다. 고려 왕조에서 판서-우상시(右常侍)-예문관제학 등을 거쳤다. 조선 건국 후 예문관학사로서 주문사(奏聞使·특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국호(조선)를 확정 받고 돌아온 인물이다. 세조 때의 권신(權臣)인 한명회의 할아버지였다.
 만약 이 무덤에 벽화가 있다면 그것은 여말선초의 벽화임이 분명했다.

 

 ■도굴된 고려벽화분
 발굴이 결정됐다, 물론 남의 조상 무덤을 함부로 파헤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미 도굴이 되었고, 그 안에 벽화도 존재한다니까 청주 한씨 종중을 설득해서 양해를 얻은 것이었더.
 1991년 4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정식발굴을 시작했다.
 “무덤을 찾는 데 4시간이나 걸렸어요.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노출된 지뢰가 보이기도 하고…. 군인 3~4명이 호위하는 속에서 조사를 시작했죠. 비무장지대 안이라 대남방송은 귓전을 때렸고….”(최맹식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
 발굴단은 민통선 밖 여인숙에 숙소를 잡아놓고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과연 무덤 안에는 벽화가 보였다. 전형적인 고려 말기의 벽화였다.
 “사방 벽면에 12명의 인물상을 배치했고, 천장에는 별자리를 그린 성신도가 있었어요. 전형적인 고려 말 무덤의 모습이었습니다.”
 인물상의 머리는 12지신을 의미하는 동물 형상의 관모를 쓰고 있었다. 3장의 판석으로 연결된 천장의 판석에는 천계(天界)를 나타내는 커다란 원이 표현돼 있고, 그 안쪽에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북두칠성, 삼태성(三台星), 북극성 등이 묘사돼 있었다. 또한 북두칠성 좌우에는 두 무더기의 구름인 것 같은 형상이 나타나 있었다.
 천정에 죽은 이의 영혼이 향하는 천상의 세계, 영혼의 세계를 명성신(明星辰)과 신수(神獸), 서조(瑞鳥), 영초(靈草) 등을 그린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잘 나타난다.
 도굴의 흔적은 처참했다. 여러차례 도굴이 이뤄진 것으로 보였다. 출토유물이 토기와 자기편인데, 모두가 작은 파편으로만 수습됐을 뿐 완형은 단 한 점도 없었다.
 다만 개원통보(開元通寶ㆍ621년 처음 주조)와 치평원보(治平元寶ㆍ1064~1067년) 등 동전 43점과 주판알 모양의 수정제품, 푸른 구슬옥 1점이 나왔다.  
 비록 유물은 별볼일 없었지만, 고려 말기의 벽화묘가 확인됐다는 하나만으로도 분명 획기적인 발굴성과였다.

여말선초의 문인 한상질의 무덤으로 알려져 600년간이나 한씨 가문의 제사를 받았던 무덤. 하지만 발굴조사결과 여말의 문신 창화공 권준의 무덤으로 확인됐다.

 ■한씨의 무덤이 권씨의 무덤으로
 발굴과정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비석에는 분명 한상질의 묘, 즉 ‘문열공한상질의 묘(文烈公韓尙質之墓)’라고 돼있었으므로 논란의 여지없는 한상질의 무덤이어야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막상 묘비를 발굴해보니 묘비가 공중에 붕 떠있는 것이 아닌가. 발굴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이 묘비는 나중에 세운 것이 아닐까. 긴가민가하고 조사를 진행하던 발굴단을 경악시킬만한 유물이 나왔다.
 묘 주변의 구조를 조사하다가 무덤 바로 앞의 흙에서 묘지석(誌石·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묘소의 소재를 기록하여 무덤에 묻는 돌)을 4편이나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묘비를 정성스레 닦고 묘비에 새긴 글자를 읽어나가자 놀라운 글씨들이 보였다.
 전서체(篆書體)로 쓴 비석의 상단에 보인 ‘증시창화권공묘명(贈諡昌和權公墓銘)’이라는 글자였다. 무슨 말이냐. 한마디로 묘 주인공이 권씨라는 것이었다.
 물론 비석 밑부분에는 또박또박한 해서체(楷書體)로 가로 27행, 세로 48행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해괴한 일이었다. 무덤 앞에 서있는 비석은 엄연히 청주 한씨(한상질)의 묘라고 해놓았는데 정작 무덤의 실제 주인은 권씨라는 것이 아닌가.
 정확한 판독결과 무덤의 실제 주인공은 고려 충렬왕~충목왕 때의 문신 창화공(昌和公) 권준(權準ㆍ1280~1352년)이었다.
 묘지석은 권준이 죽은 해(1352년) 사위 홍언박(洪彦博)의 간청으로 당대 문인인 이인복(李仁復ㆍ1308~1374년)이 쓴 것이었다.
 권준은 충렬왕 6년(1280년)에 태어나 공민왕 1년(1352년) 별세한 인물이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충선왕(재위 1308~1313년)을 섬기면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등을 지낸 후,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다. 묘지명에는 권준의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및 자녀와 손(孫)까지의 가보(家譜)가 상세하게 실려 있다.
 즉 그는 권렴(權廉)과 권적(權適) 등 2남2녀를 두었으며, 외손녀는 충혜왕(재위 1330년~1332년, 복위 1339년~1344년)의 비가 됐다.

당초 한상질의 무덤으로 알려진 서곡리 벽하묘에서는 발굴결과 창화공 권준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지석이 확인됐다. 

 

 ■공민왕 시역사건의 비밀
 그렇다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하나 있다.
 권준의 무덤에 왜 한상질의 비석이 서 있었던 것일까. 청주 한씨는 이 잘못된 비석 때문에 600년 가까이 엉뚱한 분의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아닌가.
 왜 이런 착오가 생겼을까.
 그런데 이 두 집안 간에는 떼래야 뗄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무덤의 실제 주인공으로 판명된 권준과 훗날 세워진 비석의 주인공인 한상질이 내외손 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권준의 둘째 아들인 권적의 사위가 한상질의 아버지인 한수(1333~1384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내외손 간이라는 것과, 잘못된 무덤은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이 무덤의 미스터리는 이른바 ‘공민왕시역사건(1374년)’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한번 되돌아보자. 
 공민왕은 망국의 기운이 돌던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울 만한 개혁군주의 면모를 발휘했다. <고려사>와 <태조실록>, <연려실기술> 등을 종합해보자.
 “공민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총명하고 인후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도 정성을 다해 힘썼으므로 조정과 민간에서 크게 기뻐해서 태평시대가 오기를 기대했는데….”
 그런데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나고, 신돈을 통한 개혁정치가 물거품이 되자 정신줄을 놓고 만다.
 “밤낮으로 슬퍼하며 죽은 노국공주만 생각해서 드디어 정신병을 얻었다. 임금은 스스로 화장해서 부인 모양을 하고….”

 

   ■동성애 공민왕의 변태기질이 낳은 비극 
 설상가상으로 공민왕은 남색(男色·동성애)에 빠진다.
 “1372년(공민왕 21년) 공민왕은 자제위를 설치, 나이 어리고 얼굴이 아름다운 자를 뽑았다. (총신) 김홍경이 자제위의 책임자로 두었다. 이후 홍륜·한안·권진·노선·홍관 등이 음란해서 왕의 사랑을 받았고, 늘 침실에서 모셨다.”
 훙륜·한안·권진 등이 바로 자제위로서 임금의 동성애 상대였던 것이다. 이때 파국이 잉태됐다. 아들이 없던 공민왕이 홍륜·한안 등을 시켜 여러 비(妃)와 강제로 관계를 맺게 하여 사내아이를 낳게해서 자기 아들르 삼으려 했다. 하지만 정비와 혜비, 신비 등 세 명의 비(妃)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거부했다.
 공민왕은 역시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한 익비(왕씨)를 칼로 위협, 홍륜과 강제로 관계를 맺게 했다.  
 1374년(공민왕 23년) 9월 1일 환관 최만생이 볼일을 보러 화장실로 들어간 공민왕의 뒤를 따라 은밀해 고했다.
 “익비가 임신 5개월 됐답니다.”(최만생)
 “기쁘기 이를 데 없구나. 노국공주의 영전이 그 아이를 바칠 수 있겠구나. 그런데 그 아이는 대체 누구의 씨란 말인가.”(공민왕)    
 “홍륜이라 합니다.”(최만생)
 “그래? 내가 내일 창릉(태조 왕건의 아버지 묘)에 행차해서 술에 취한 척한 다음 홍륜을 죽일 것이야. 그리고 참. 너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너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할거야.”(공민왕)
 “….”(최만생)
 죽을 운명이 된 최만생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임금에게 밀고했는데, 도리어 죽을 운명이라니…. 최만생은 급히 훙륜·권진·한안 등을 찾아가 공민왕의 말을 전했다.
 그날 밤, 홍륜·권진·한안 등과 공모한 최만생은 만취한 공민왕을 시해했다. <여사제강>은 “(공민왕의) 머리의 골이 병풍에 튀었고 피가 방안에 홍건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다음 날, 전세가 역전됐다. 친원파(親元派)인 이인임(李仁任ㆍ?~1388년)과 경복흥(?~1380) 등이 전모를 파악하고 도리어 홍륜과 최만생, 권진, 한안 등을 체포한다.
 홍륜과 최만생은 능지처참됐고, 권진·한안 등은 참형을 당했다.

파주 서곡리 벽화묘 전경. 민통선 이북에 있었지만 무자비한 도굴이 계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얄궂은 두 가문
 이 대목에서 무덤에 얽힌 사연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공민왕 시역사건에 연루돼 참형을 당한 권진의 가문이 멸문지화의 위기에서 할아버지(권준)의 제사를 내외손 간인 청주 한씨 집안(한수)에게 부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인 것이다.
 그러니까 청주 한씨 가문이 내외손 간인 권준의 제사를 300년 이상 지내주다가 한수의 아들 한상질(1400년 사망)의 무덤으로 오인했다는 것이다.
 무덤 앞에 서있는 한상질의 비석은 1700년대에 세운 것이다. 꽤 그럴듯한 추정이다.
 하지만 100% 확실할까. 그렇지는 않다.
 공민왕 시역사건으로 권씨 가문의 권진이 멸문의 위기를 겪었다지만 한씨, 즉 한안 역시 참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 ‘신우 1(1376년)’을 보면 ‘공민왕 시역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권씨와 한씨 집안의 내력을 읽을 수 있다.
 “사건 이후 한안의 아비(한방신)과 형제(한휴·한열), 그리고 권진의 아비(권용)과 형(권정주) 등이 줄줄이 참형을 당했다. 그들의 부인들은 참형 직전에 겨우 살아남았다. 그들의 친숙질과 종형제는 모두 원지로 유배됐다.”
 결국 두 집안 모두 멸문의 화를 당하기 일보 직전까지 간 것이다. 그런 마당에 한씨 집안이 권씨 집안의 제사를 대신 지내줄 여력이 있었을까. 이 또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나저나 두 집안의 관계가 알궂지 않은가.
 서로 내외손의 관계이며, 공민왕 시역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참형을 당하고…. 이후 600년 간이나 상대방의 제사를 받고(권씨), 아니 상대방의 제사를 올려주고(한씨)….
 이 황당한 무덤 사건은 결국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싸움으로 번졌다. 법원은 ‘권준’의 손을 들어주었다.
 “14세기 중반, 즉 권준이 사망한 1352년 무렵의 유물이 묘 주변에서 출토되지만 한상질의 사망시기(1400년)를 전후한 시기의 유물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는 발굴단의 고고학보고서가 인정된 것이다. 청주 한씨 측은 다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 보고서>가 잘못됐다면서 다시 소송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소송도 기각됐다.
 그렇다고 본다면 권준이라는 분은 그나마 복받은 분이라 할 수 있다. 남의 집안이 차려준 제사상이나마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으니까.
 그렇다면 한상질의 비석이 왜 남의 무덤 앞에 서있었다는 걸까.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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