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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효수'에 얽힌 피맺힌 사연들

 능지처참이나 참형의 극형을 받은 자의 수급(머리)을 매다는 것을 효수(梟首)라 한다. 장대에 꽂은 모습이 마치 올빼미(梟)의 머리(首) 같다 해서 이름 붙었다.

“역적은 반드시 능지처참하고 그 머리는 3일간 저잣거리에 내걸며, 수족은 8도로 조리돌려야 한다.”(<영조실록>)

 1724년(영조 즉위년) 의금부의 상소를 보면 반역모반죄나 강상죄를 지은 자의 목을 내걸어 만백성의 본보기로 삼자고 촉구한다. ‘능지처참형(참형)→효수’의 극형을 받은 역사인물이 뜻밖에 많다. 1135년(고려 인종 13년) 서경(평양)에서 난을 일으켰던 묘청도 목이 잘린 뒤 저잣거리에 효수됐다.

깁신정변 실패후 망명 중 피살된 김옥균의 목은 양화진에서 효수됐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 때 참살된 김종서·황보인 등의 목도 모두 저자에 내걸렸다. “길가던 사람들이 욕하면서 (내걸린 죄인들의 목을) 기왓돌로 때리고 발로 차고 머리를 짓이겼다”(<단종실록>)는 끔찍한 기록이 남아있다.

 1456년(세조 2년) 단종복위 운동에 연루된 이개와 성삼문 등도 군기감 앞에서 환열(환裂·수레로 찢어죽임)된 뒤 3일간 목이 내걸렸다. 홍경래와 김개남, 김옥균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운아들도 ‘본보기’를 이유로 목이 내걸렸다.

 하지만 오히려 꼿꼿이 소신을 밝히며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많았다. 본보기는커녕 도리어 죽은 이들의 의기만 세워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성삼문은 죽을 때까지 임금(세조)을 ‘임금’이라 하지 않고, ‘나으리(進賜)’라 불렀다. 영조 때의 김일경도 임금에게 ‘저(矣身)’라 하지 않고 ‘나(吾)’라 하며 “시원하게 죽여달라”고 했다.

 1894년쯤 효수된 동학군 지도자의 유골이 121년이나 구천을 헤매고 있다. 1995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의 창고에서 ‘진도에서 효수된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이라는 글씨와 함께 발견된 이 유골은 1996년 돌아왔지만 지자체와 문화재청의 갈등 속에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에 임시 보관돼 왔다.

 뒤늦게나마 감사원은 “부처 간 갈등을 풀고 하루빨리 안장사업을 추진하라”고 권고한 모양이다. 목이 잘린 뒤 효수라는 극형을 받았지만 ‘반외세·반봉건’의 뜻을 외쳤을 고인의 안식처를 하루속히 마련해주자. 고인의 명복을 빈다.(끝)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