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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미라는 출산중…" 출산직전 사망한 산모 미라

“저기 무연고 무덤이 하나 있는데, 도굴된 것 같아요. 어느 분 묘인지 한번 확인하고 싶어요.” 
2002년 9월 6일 경기 파주시 교하리 야산(장명산)에서 파평 윤씨 문중 묘소의 이장작업이 한창이었다.

흩어져있던 묘역 6기를 한곳에 모으는 작업이었다.

작업에는 김우림씨(당시 고려대박물관 연구위원) 등 전문가들이 입회하고 있었다. 파평 윤씨의 묘역이 경기도기념물(182호)로 지정되어 있었기에 전문가 입회는 필수였다.

그때 파평 윤씨 문중 대표가 “이왕 정리하는 김에 무연고 묘를 조사해봤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문가들에게 낸 것이다. 마침 문중사람과 포클레인 장비, 장의업체까지 있었으니 해볼만 한 작업이었다. 무덤을 노출시켜보니 회곽묘였다. 금방 난관에 봉착했다.
돌처럼 굳어진 회곽묘가 너무도 단단했고, 회곽의 이음새도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포클레인에 달린 브레이커(breaker)로 분쇄하기 시작했다. 2시간여의 힘겨운 작업 끝에 외관과 내관을 들어올리자 내관의 천판 위에서 글자가 어렴풋 보이기 시작했다.

출산중 태아와 함께 사망한 파평 윤씨 여인의 미라가 발굴된 경기 파주시 야당동 야산. 이곳은 윤원형과 정난정 등 파평 윤씨 가문의 선산이다.

 

■미라는 임신중!
‘坡平尹氏之柩(파평윤씨지구)’, 즉 파평윤씨의 무덤이라고 적힌 명정(銘旌ㆍ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깃발)이었다.
만약 남성이었다면 ‘坡平尹公○○○’라는 분명한 이름과 관직명이 적혀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었기에 이름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고, 그저 파평 윤씨 가문의 딸이라는 딱지만 ……붙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장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신을 꽁꽁 감싼, 전혀 썩지 않은 완벽한 형태와 화려한 색상의 염습의(殮襲衣ㆍ죽은 사람의 몸을 씻기고 입히고 묶는 옷)가 있었다. 시신이 썩지 않고 미라상태로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전문가 김우림씨는 문중측에 “미라를 수습에서 연구까지 고려대팀이 연구학 싶다”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문중측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어렵사리 승락했다.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결국 ‘미라’는 문중의 허락을 얻어 고려대 박물관을 거쳐 법의학 전문가인 김한겸 교수(고려대 의대)에게 인계됐다.   
시신을 감싸고 꽁꽁 묶은 대렴(大殮)과 소렴(小殮)을 수습하고 마지막 남은 습의(襲衣·죽은 사람에게 갈아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오빠 윤원형과 첩인 정난정(오른쪽 작은 무덤) 의 무덤.  경기 파주시 야당동 파평 윤씨 묘역에 있다.

 

입힌 옷)와 속옷을 모두 벗겨냈다. 그런데 시신의 하의 가운데 가장 안에 착용한 홑바지 옷고름에서 글씨가 드러났다. ‘병인윤시월’이었다. 윤 10월이 낀 병인년이라면 추측이 가능했다.
역산해서 추정해보니 ‘병인윤시월’은 1566년 윤10월, 즉 양력 12월일 가능성이 높았다.
미라의 영양상태는 상상 이상으로 좋아보였다. 연구진이 극도의 긴장감에 빠졌다.
“살짝 피부에 손을 대 보니 그 탄력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팔을 잡자 움직였습니다. 이것은 시신에 아직 수분이 남아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김한겸 교수)
그런데 시신을 살피던 연구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신의 옆구리(복부) 부분이 심하게 부풀어 올랐다.
혹시 암덩어리가 아닐까. 이 또한 엄청난 발견이었다.

수 백 년 전 암으로 사망한 여인에게서 확인될 수 있는 암 덩어리. 만약 그렇다면 ‘암 연구’에 획기적인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먼저 미라의 X레이 사진을 찍어보았다. 판독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뼈가 보였다. 그렇다면 그 뼈는 기형적으로 튀어나온 뼈일까. 아니었다.
부풀어 오른 복강과 골반강 안에서 태아의 골격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암 덩어리가 아니라 태아가 뱃속에 있었다는 얘기다.    
더구나 태아는 정상 분만 체위인 두위의 골격이었다. 그렇다면 무슨 이야기일까. 이 여성은 분만 중에 난산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파평 윤씨 미라의 옷고름에서 확인된 ‘병인 윤시월’ 글씨. 1566년 윤10월에 사망한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례없는 모자 미라의 출현
한 사람의 미라가 아니라 ‘모자(母子) 미라’라는 이야기였다.
임신 중 사망한 모자 미라가 남아있기는 감히 기적이라 말할 수 있다. 임신 중 사망하는 경우 부패가스가 장기에 차서 태아를 밀어내기 마련이다. 때문에 임신중 사망한 여인의 배 안에서 태아가 발견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 태아가 그대로 뱃속에 남아있다니….

CT 촬영 결과를 서둘러 확인했다. 그랬더니 X레이 촬영에서 보였던 태아의 모습이 더 확연하게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MRI(자기공명영상)를 찍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촬영하는 것처럼 속속들이 찍혔다.
우선 두개골은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두개골 안에는 공기와 액체, 뇌의 잔여물이 선명했다.
어머니 미라의 몸체와 사지, 피하지방층, 그리고 척추를 포함한 근골격, 흉부 및 복부의 장기들이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특히 관심의 초점인 태아는 복강 내에서 확연하게 보였다.

여성인지라 피하지방층은 풍부했다. 이번에는 태아 미라를 관찰했다. 어머니의 복강에는 많은 양의 공기가 있어서 부풀어 오른 자궁의 외연이 쉽게 보였다. 
놀라웠다. 자궁 안에는 만삭 크기의 태아가 정상 분만 체위로 자리 잡고 있었다. 심지어 태아의 두개골 안에서도 어머니처럼 공기와 액체, 뇌의 잔여물이 보였다. 태아의 키는 36㎝ 정도였다. 연구팀은 미라의 외음부를 살짝 벌려 보았다.
“아! 세상에! 태아의 태지(胎脂·양수의 침범을 막으려고 태아의 몸 표면을 싸고 있는 물질)와 함께 머리카락이 보였습니다.”(김한겸 교수)
이 모습을 본 산부인과 전문의가 명쾌한 설명을 해줬다.
“태아의 머리가 모체의 질(膣)의 전장을 통과하여 외음부 가까이까지 도달했네요. 정말 안타깝네요. 산모가 5분 더 견뎠다면 아기를 낳았을텐데요.”
아뿔사! 이 산모는 아기를 낳기 직전에 세상을 떴으며, 아기도 엄마와 함께 세상의 빛을 보기 일보 직전에 죽은 것이었다.
출산 일보 직전에 숨진 모녀 미라의 발견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미라의 몸에서 별모양의 파열흔적이 보인다. 산모는자궁파열로 인한 출혈로 출신 직전 안타깝게 사망했다. 

■5분만 버텼어도…
더 분석한 결과 산모는 20대 초반의 건강한 여인이었다. 키는 153.5㎝ 정도였다.
의료진은 자궁을 열어 보았다. 자궁벽은 2~3㎜ 정도로 얇아져 있었다. 태아는 좌측으로 비스듬히 누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태아의 음낭과 음경이 뚜렷한 남자아이였다. 머리는 산도(질)에 진입한 상태였기에 보이지 않았다. 출산직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자궁벽을 유심히 살피던 중 또다시 긴 탄식이 터져 나왔다.
자궁의 우측 부위에 3×4㎝ 크기로 별 모양의 파열 흔적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이것은 광범위한 출혈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때문에 오른쪽 자궁벽과 오른쪽 복벽이 흑갈색으로 변색된 것이다. 확실했다. 비운의 여인은 출산을 단 5분 남기고 그만 자궁파열에 의한 저혈량성 쇼크(실혈사)로 아기와 함께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종합하면 이 20대 여성은 분만 도중에 발생한 자궁파열로 인한 심한 출혈로 인해 저혈량성 쇼크로 사망한 것이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미라. 시신의 옆두리가 부풀어 올라있었다.

■왜 미라에 애기부들 꽃가루가 가득할까
조선시대 미라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학봉장군 미라는 어떨까.
2004년 5월 대전 중구 목달동 송절마을의 여산 송씨 문중의 묘역에서 가족 미라 3기가 한꺼번에 확인됐다. 부부와 증손자뻘 되는 후손의 미라다.
이 가운데 남편의 미라에 ‘학봉장군’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정확한 신원은 알 수 없다. ‘학봉’은 계룡산 자연사박물관 인근의 마을 이름을 딴 것이다. ‘장군’은 부부 미라와 함께 발견된 증손자뻘 후손의 미라가 조선초기 종 3품을 지낸 무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남편에게 ‘학봉 장군’ 미라의 명칭을 붙였다.
부부 미라의 조성시기가 15세기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오래된 미라로 알려져 있다. 남편인 학봉 장군은 167.7cm의 키에 턱수염과 콧수염이 발달한 외모였다.

학봉장군의 족보와 치아를 분석해보니 학봉장군은 1420년대에 출생해 42세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부인은 50대 초반인 1468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김한겸 교수팀이 학봉장군 미라를 정밀 분석해보니 더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미라의 몸 안에서 애기부들 꽃가루가 상당수 발견됐다. 핫도그처럼 생긴 수생식물인 애기부들은 6~7월 사이 연못이나 강가의 얕은 물속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군의 직장과 대장에서 간흡충란(디스토마)이 다수 발견됐다. 따라서 처음에는 학봉장군이 강변이나 연못에서 천렵을 하다가 물에 빠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정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런 가설은 실현 불가능했다. 우선 학봉장군의 몸 안에 남아있던 애기부들의 양이 엄청났다. ‘목구멍에서 항문까지’ 애기부들 꽃가루가 검출됐다. 천렵하다가 익사한 것 치고는 너무 많은 양이 몸 속에 들어간 것이다. 무엇보다 여름에 익사한 시신은 몇 시간만 방치해도 심한 부패가 진행된다.

석회와 가는모래. 황토를 3대1대1로 섞어 다진 뒤 무덤 구덩이와 곽의 6면에 싸바른 회곽묘는 시간이 지나면 벽돌처럼 단단해진다. 완전 밀봉된 회곽묘는 포클레인의 삽날로도 깨지 어려울 정도가 된다. 미라가 생성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각혈로 숨진 학봉장군
이런 마당에 무슨 미라가 만들어진단 말인가. 당연히 익사는 직접 사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꽃가루는 대체 무엇인가. 꽃가루 전문가인 김기중 교수(고려대 생명과학과)에 문의해본 연구팀은 무릎을 쳤다.

<동의보감>을 보면 애기부들 꽃가루가 포황(蒲黃)이라는 지혈제로 사용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학봉장군의 폐는 놀라울 정도로 ‘생생’했다. 이 또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건강한 사람의 폐는 죽고나면 쪼그라듭니다. 그러나 폐질환이 있는 폐는 흉막하고 유착된 채로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사망한 학봉 장군의 폐가 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김한겸 교수)
덕분에 방사선, 내시경, 흉강경 검사 등 다양한 검사를 통해 폐를 살펴보았다.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성과였다.
학봉장군에게는 안된 이야기지만 그 폐질환 때문에 600년 뒤의 후손들은 다양한 검사를 펼칠 수 있었다. 얼마나 역설적인가.
최첨단 다양한 검사를 하면서 퍼즐을 맞춰갔다. 그랬다. 학봉 장군은 생전에 피를 토하는 기관지 확장증과 같은 중증 폐질환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학봉장군은 피를 토하는 폐질환으로 사망했고, 그 과정에서 지혈치료를 위해 애기부들 꽃가루를 복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댕기머리 소년의 직접사인은 결핵?
댕기머리 소년의 미라(단웅이)도 있다.
2001년 11월 5일 경기 양주군 양주읍 광사리 해평 윤씨 선산의 회곽묘에서도 미라가 확인됐다.
주인공은 단정한 머리 가르마와 댕기머리를 한 소년이었다. 마치 막 잠이 든 것 같았다.
오죽하면 훗날 보관중인 미라를 친견한 이바노비치 몰로딘 러시아 시베리아 과학원 부원장이 감탄사를 연발했을까.

2001년 경기 양주에서 확인된 댕기머리  소년 단웅이의 발굴모습. 속립성 결핵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아! 이건 미라가 아닙니다. 금방 세상을 떠난 시체입니다.”
과학자들이 육안으로 확인한 댕기머리 소년의 머리둘레는 약 53㎝, 신장은 100㎝ 정도였다. 댕기머리 소년의 손목뼈와 치아의 골화상태로 나이를 추정하니 4.5~6.6세 사이로 판단됐다.

폐의 병리조직검사에서 흥미로운 점이 확인됐다. 각혈의 흔적이 보이는 적혈구가 기도 내의 기관지에서 혈병을 형성하고 있었다.
더 자세히 관찰해보니 왼쪽 가슴이 오른쪽에 비해 내려앉아 있고, 내부장기를 덮는 복막에서 육안으로 관찰되는 작은 결절이 널리 퍼져 있었다.

폐렴이나 폐결핵 같은 감염성 질환에 의한 각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소년의 직접 사인이 최종적으로 추정됐다. 소년은 결핵균에 감염되었지만 항생제가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결국 결핵균이 혈액의 흐름을 타고 온 몸에 퍼져 발병한 뒤 곧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치명적인 ‘속립성 결핵’이었을 것이다.
해평 윤씨측은 소년 미라가 1680~1683년 사이로 떠난 ‘윤호’라는 인물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소년미라에게 훗날 ‘단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미라를 보관하며 분석 연구한 단국대의 ‘단’과 곰 ‘웅(熊)’자를 합성해서 붙인 이름이다.

 

■진성이낭, 그녀는 왜 씨(氏)가 아닌 낭(娘)일까
또 한 분의 여인 ‘진성이낭’은 과연 누구인가.
2010년 4월18일 경북 문경시 흥덕동의 국군체육부대 영외아파트 건립 부지에서 노출된 회곽묘에서도 조선시대 여성 미라가 확인됐다. 미라의 사망연령은 35~50세 사이로 추정됐다. 신장은 150㎝ 가량 됐다. 당대 조선여성의 추정 평균키가 대략 149㎝라는 점을 감안하면 보통 키의 여성임을 알 수 있었다.   
관 위를 덮고 있던 명정에는 ‘진성이낭지구(眞城李娘之柩)’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2010년 경북 문경에서 확인된 진성이씨 가문 여인의 관에서 확인된 명정. ‘진성이낭지구’라는 명문이 뚜렷하다. 여성을 씨(氏 )가 아니라 낭(娘)으로도 지칭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진성 이씨’ 가문의 여성임이 확인됐다. 그런데 피장자가 여인임을 표시하는 ‘낭(娘)’ 자가 이채로웠다. 보통의 경우엔 ‘씨(氏)’ 자를 쓴다. 지금까지 확인된 명정 자료에서 ‘낭(娘)’자는 유일하다. 새로운 여성지칭어가 등장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낭(娘)’자는 ‘○○낭자!’ 하는 것처럼 미혼의 처자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알려졌다.
<국조보감>은 “낭자의 쌍상투(머리를 둘로 갈라 틀어 올린 상투)나 새앙머리(두 갈래로 땋고 위아래로 가지런히 놓고 덩어리지게 잡아맨 후 댕기를 드린 머리)는 결혼 전에 쓰는 제도”라 했다.

그렇다면 미라는 미혼녀인가. 아니었다. 서울대 법의학연구소의 부검결과는 ‘30~50세의 중년여성’이었다. 연구자들이 다시 들춰보니 ‘낭’자는 미혼녀 뿐 아니라 부녀자를 통칭하거나 후실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즉 <가례집람>은 “‘신주’를 쓸 때…부인의 경우엔 기낭(幾娘)이라고도 한다”고 규정했다. 여기서 ‘낭’은 부인에게 쓰는 표현이다.
또 조선중후기의 문인인 송준길(1606~1672)의 문집인 <동춘당집>을 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광빈의 어미 무덤 건너에 이낭(李娘)의 무덤이 있다. 이낭은 바로 나의 부실(副室·첩)인데…21살에 병으로 죽었으니 내가 가엾게 여겼다.”
여기서 인용된 ‘이낭’은 송준길의 첩실 명칭이다. 송시열(1607~1689)의 시문집인 <송자대전>에 등장하는 ‘오순지와의 문답’ 내용이 자못 흥미롭다.
“첩의 명정이나 신주에 씨(氏) 자를 넣는 것은 외람스럽고, 낭(娘)자는 마치 창기(娼妓)를 연상시키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이 혹 조이(召史·양민의 아내)라고 쓰는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오순지)
“첩에게 씨(氏)자를 쓰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낭(娘) 자도 창기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주위제(주자의 아버지)도 주자의 모부인(母夫人)을 낭(娘)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이’란 호칭은 법도에 맞지 않은 말 같습니다.”(송시열)
조선시대 여성들에게 씨(氏) 뿐 아니라 낭(娘)의 호칭도 통용되었다는 이야기다.
서울대 법의학연구소의 부검결과와 옛 문헌을 토대로 더듬어보면 미라의 신분을 조심스레 추정할 수 있겠다. 17세기를 살았던 진성 이씨 가문의 기혼녀이며, 혹은 어느 집안의 첩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학봉장군 미라의 목구멍에서 항문까지 폭넓게 관찰된 애기부들 꽃가루, 처음엔 익사한 것으로 판단했지만  후속 정밀검사에서 애기부들 꽃가루를 약재로 복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애기부들 꽃가루는 지혈제로 사용됐다. 학봉장군은 아마도 피를 토하는 폐질환을 앓다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성인병으로 사망한 진성이낭
그렇다면 이 여인의 사망원인은 무엇일까. 이은주(서울아산병원 내과)·신동훈(서울대병원 해부학과) 교수 등이 공동연구팀을 꾸려 사인규명에 나섰다.
우선 속바지에 남아있던 유기물을 수습해서 분석했더니 편충 및 간흡충에 감염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편충과 간흡충은 붕어·모래무지 등 담수어를 날 것으로 먹었을 때 감염되는 기생충이다. 이 여성은 민물회를 즐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라가 발견된 경북 문경은 낙동강 상류지역이다.
컴퓨터 단층촬영(CT)을 통해 미라의 혈관 내벽에서 동맥경화증의 흔적을 확인했다. 그러나 CT 영상만으로는 사인으로 진단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연구팀은 유전자분석기술을 동원했다. 특정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참조용 표준유전체(게놈)’와 비교해서 해당질병이 있었는지를 확인했다.
그 결과 이 미라의 사인은 ‘죽상동맥경화증에 의한 심혈관 질환’으로 판정됐다.

죽상동맥경화증은 나쁜(LDL) 콜레스테롤이 동맥 안에 쌓이면서 혈관이 좁아지는 질환이다. 잘못된 식생활습관이나 유전적 요인 탓에 발병한다.

자칫하면 뇌졸중과 심근경색 등의 심뇌혈관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혈압이나 당뇨병, 그리고 고칼로리식단과 고지혈증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인의 성인병으로 치부된다. 그런 병이 400년전 17세기 조선의 여인의 사망원인이 된 것이다.

 

■나주 귀부인도 출산중 사망?
이밖에도 2007년 11월 강원도 강릉 최경선(1561~1622) 무덤에서 확인된 미라(일명 최경선 미라)는 왼쪽 아래턱이 골절된 상태로 발굴됐다.
2009년 전남 나주에서 확인된 여성 미라(16세기 후반)의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미라의 외음부 밖으로 태반 같은 물질이 나와 있었다. 출산중이나

출산후 불행히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43살로 추정되는 미라에게는 ‘나주 귀부인’(가칭)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발굴 1년 7개월 만에 다시 남편묘에 합장됐다.

이외에도 후손이 없이 도로공사나 택지정리 중 우연히 발굴된 ‘봉미라’(경기 안산), ‘흑미라’(경기 고양) 등도 있다. 두 미라 모두 임진왜란 즈음에 묻힌 것으로 보인다. 봉미라는 버선에서 ‘봉’자가 쓰여있었다. 흑미라의 경우 미라의 색이 유난히 검어서 붙은 이름이다.       

<국조오례의>에서  규정한 회곽묘 조성방법.  (이승해·안보연, ‘조선시대 회격ㆍ회곽묘 출토 삽에 대한 고찰’, <문화재> 41권 42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에서)

■미라의 산실 회곽묘의 비밀
유독 조선시대 미라만이 확인되는 이유는 뭘까. 해답은 무덤조성방식에 숨어있다.

고려시대의 장례법은 화장과 49재로 대표되는 불교식 상장례였다.
그러나 고려말 주자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가 대거 기용되면서 관혼상제의 개혁이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신진사대부는 불교식 화장을 ‘오랑캐 무부(無父·어버이도 모르는 자식)의 장례’라 극렬하게 비판하면서 “<주자가례>의 상장례를 따르라”고 촉구했다. 1388년(공양왕 1년) 사헌부가 올린 상소문을 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사헌부는 우선 ‘장례의 뜻이 뭐냐’고 묻고는 불교의 화장을 무자비하게 폄훼한다.
“장(葬)이 무엇입니까. 장(藏)이라는 뜻입니다. 그 해골을 ‘감추어’(藏)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화장은 어떻습니까. 죽은 자를 불길 속에서 장사하고 모발을 태우고 피부를 짓무르게 하여 그 해골만 남깁니다. 심지어 뼈를 태워 재를 날려서 물고기의 밥이 되게 합니다. 그래야 서방정토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사헌부의 상소문에는 유교식 상장례의 의미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
“(불교식 화장은) 인(仁)에 어긋납니다. 사람의 정신은 서로 통합니다. 생과 사가 원래 동일한 기운입니다. 사람과 귀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할아버지 부모가 지하에서 편안하면 자손도 편안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행해집니다.”

회곽묘 모의실험. 일반 토광묘와 회곽묘를 만들어놓고 실험쥐의 사체를 넣었더니 일반 토광묘에서는 급속하게 부패가 진행됐지만 회곽묘에서는 13주가 지나도록 거의 변함이 없었다.(출처: 신동훈, ‘조선시대 회곽묘에서 발견되는 미라 형성연구’, 서울대산학협력단, 2010년 12월)

그런 마당에 사람의 몸을 불태워 가루로 날려버리면 어찌 되겠냐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든 시신을 훼손하면 절대 안된다는 것이 유교식 매장법의 기본이었다.
“<주자가례>에서는 관과 곽의 규격까지 제정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빨리 썩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게다가 시신을 싸매는 옷과 천을 수십겹 해도 얇을까 두려워 합니다. 또 곡식을 관 속에 두면 벌레나 개미가 침범할까 두려워합니다. 매장의 예법은 이렇게 엄정한 것입니다.”(<고려사> ‘형법·금령’)
이렇게 시신의 인위적인 훼손을 막으려고 고안한 매장시설이 관과 곽. 석실, 봉분 등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시신을 완벽하게 보호할 수 없었다. 또하나의 장치를 더 만들었다. 관 내부에 송진과 황랍, 들깨기름, 어린 조개가루를 섞어만든 역청(瀝淸)까지 발랐다.

역청은 방부와 방수, 방충효과를 도울 뿐 아니라 코팅의 효과까지 냈다.
최후의 보호장치는 바로 회격(회곽묘)이었다. 회곽묘는 보통 석회와 가는 모래(細沙), 황토를 3:1:1로 섞어 회다짐을 하여 무덤 구덩이와 곽의 6면에 싸바르는 무덤조성양식이다.

회곽묘 조성을 권장한 <주자가례(朱子家禮)>는 회곽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한다.
“회(灰)는 나무뿌리를 막고 물과 개미를 방지한다. 석회는 모래를 얻으면 단단해지고, 흙을 얻으면 들러붙어서 여러 해가 지나면 굳어져 전석(塼石)이 된다. 이에 따라 개미와 도적이 모두 가까이 오지 못한다.”
<주자가례>의 표현은 적확하다. 회곽으로 싸바른 묘는 철통같다. 파평 윤씨의 무덤에서도 입증됐듯이 회곽묘는 포클레인의 브레이커로도 깨기 힘들 정도로 단단하다.
그러니까 조선시대 무덤은 관곽과 석실, 봉분시설 만으로도 부족해 회곽과 역청 등 4중 5중의 장치를 더해 그야말로 철벽이었던 것이다.

 

■회곽묘 안에서 무슨 일이?
이집트 미라와 같은 인공미라의 경우 시신부패를 막기위해 내부 장기를 모두 빼낸다.
그러나 유교식 장례에서 부패를 막거나 사체를 빨리 없애는 행위는 반자연적인 행위로 간주됐다. 조선시대 미라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뇌와 척수는 물론 소화기관 등 내부 장기가 그대로 들어있다.
따라서 당대의 식습관이나 앓았던 병명, 그리고 직접 사인 등 장기와 그 장기 안에 남아있는 여러 증거물들로 찾아낼 수 있다. 또한 주로 선산에 묻히고 미라의 신원을 알 수 있는 비석과 관련 유물들이 동반 발굴된다. 이것은 고고학적 측면에서도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된다.
회곽묘 안의 시신은 어째서 썩지 않을까. 그 원리는 무엇일까.

밀폐된 회곽묘 안이어서 산소가 철저히 차단됐기 때문일까.
그러나 한가지 의문점은 남아 있었다. 산소 없이도 살 수 있는 ‘혐기성 세균’은 어찌된 것인가.

이런 세균은 밀폐된 관 속에서도 활동한다. 따라서 이 경우라도 부패시키지 않으려면 반드시 살균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회곽묘에서 발견된 미라들은 무균상태로 보관된다는 사실이 김한겸 교수팀의 연구결과 밝혀졌다.
그렇다면 공기없이도 살 수 있다는 혐기성 세균은 어떻게 살균되었다는 이야기인가.

 

■의도하지 않은 미라의 출현 수수께끼
2011년 신동훈 서울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팀이 이 미스터리를 밝혀냈다.

연구팀은 실제 회곽묘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관에 실험쥐를 넣고 10번에 걸쳐 온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관 주변에 설치한 삼물(三物·석회+모래+황토)의 온도가 최고 200도까지 올랐다.

관 내부에도 최고 149도까지 열이 전달됐다. 삼물의 경우 100도 이상 온도가 유지된 시간이 최고 140분까지였고, 관 내부는 최고 210분까지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관 내부에 안락사시킨 흰 쥐를 넣어두었는데, 그 사체가 13주가 되도록 거의 썩지 않았다. 게다가 쥐의 간과 뇌조직도 그 형태가 잘 유지되고 있었다. 반면 일반 토광묘에 넣어둔 쥐의 사체는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무슨 조화일까. 연구팀은 횟가루가 물과 산성토양에 섞여 고열을 내는 화학반응에 착안했다.

이 화학반응이 일종의 열소독 과정을 일으켰고, 그 덕분에 회곽묘 내부가 무균상태로 유지됐다는 추정이 가능했다. 말하자면 회곽묘 내의 시신은 열소독을 거친 무균의 상태로 그대로 미라가 됐다는 것이다.
새삼 <효경>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효도의 시작으로 줄기차게 운위됐던 바로 그 문구, 즉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불감훼상 효지시야(不敢毁傷 孝之始也)’란 가르침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터럭하나 손상시키지 않고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그 가르침에 따라 죽은 자의 시신까지도 온전히 보전하려고 회곽묘를 조성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노심초사가 ‘의도하지 않은 미라’를 낳았던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김한겸·김우림 외, ‘파평 윤씨 모자 미라의 고병리학 분석’, <대한병리학회지>, 대한병리학회, 2004
신동훈, ‘조선시대 회곽묘에서 발견되는 미라 형성과정 연구’, 서울대 산학협력단, 국립문화재연구소, 2010
김명주, ‘조선시대 회곽묘 출토 미라 연구에 대한 회고와 전망’, <동양학> 제40집,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2006
신명호, ‘조선시대 회격묘와 미라’, <동북아 문화연구> 제13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7
이승해·안보연, ‘조선시대 회격ㆍ회곽묘 출토 삽에 대한 고찰’, <문화재> 41권 42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진성이낭묘 출토유물 보존’,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조유전·이기환, <한국사기행>, 책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