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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기름 얼룩 흠뻑’, ‘산산조각’ 달항아리는 왜 ‘백자 베스트 42’에 뽑혔나

“너희 중에 뉘에 ‘군자의 기개’가 담겼느냐”(경향신문) “‘백자’쟁명 청화-철화-동화…조선백자 대표 다 모인 챔피언스리그”(동아일보) “불멍·물멍 이어 자기멍…눈 뗄 수 없는 조선백자”(서울신문) “어둠을 몰아내는 ‘조선백자의 스펙터클’”(조선일보)….
요 며칠 사이 각 언론이 편집자의 감각을 마음껏 뽐낸 온갖 수식어와 함께 앞다퉈 소개한 특별전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리움 미술관의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특별전(2월28~5월28일)입니다. 국가지정문화재 59점(국보18점, 보물 41점) 중 절반이 넘는 31점(국보 10점·보물 21점)과 일본 소재 34점 등 총 185점의 백자가 총출동한 특별전이랍니다.

리움미술관 소장 ‘국보 달항아리’. 이 달항아리는 군데군데 누런 얼룩이 묻어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항아리에 담겨있는 기름이 밖으로 배어난 건지, 혹은 항아리가 엎어져서 옆에 쏟아져 있던 기름에 밑부분이 젖어든 건지 확실치는 않다. 이 사용의 흔적이 오히려 이 달항아리의 가치를 높였다.

■군자와 백자
특별전이 조선 백자의 매력을 ‘군자’의 덕목과 연결시켜 해석한 것이 눈에 띄더군요. 조선백자에서 군자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겁니다. 백자에 그린 산수화와 식물, 시를 통해 유교의 품격과 의식을 발현해냈다는 겁니다.
그것이 “군자는…자기를 수양하고 남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는 <논어> ‘헌문편’의 가르침이라는 겁니다. 
또 양란(임진왜란·병자호란) 후 곤궁해진 조선의 실정이 백자에도 영향을 끼치는데요. 이때부터 페르시아산 코발트(CO) 성분의 값비싼 청화안료를 국내에서도 구할 수 있는 철 안료가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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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흠결이 있는 두 점의 달항아리에 눈길이 머뭅니다. 그 중 국보 한 점은 바탕은 새하얀데 몸통의 전체에 커다란 누런 얼룩이 져 있습니다. 순백색의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친다면 흠결이 이만저만한 백자 항아리가 아니죠. 
리움 미술관 구입 당시 미술관 관계자가 이건희 회장(1942~2020)의 출근길을 막아서서 결제 처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을 치렀답니다.(이종선의 <리컬렉션>, 김영사, 2016에서)
그렇다면 이 흠결있는 달항아리가 어떻게 해서 국보가 되었고, 어떻게 해서 이번 특별전의 대표선수로 선발되었을까요. 
우선 약간은 비대칭이지만 거의 풍만한 정원을 그린 완벽한 달항아리라는 것에서 점수를 얻었답니다. 

■300조각난 달항아리가 대표선수로 발탁 
이번에 ‘베스트 42’에 뽑혀 전시장을 장식한 달항아리가 또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일본 오사카(大阪)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이 소장중인 백자 달항아리입니다. 
이 달항아리 또한 흠결이 보이는데요. 그것도 보통 흠결이 아니라 300조각으로 박살난 항아리였답니다.  무슨 소리일까요. 이 항아리는 일본에서 ‘소설의 신’으로 유명한 시가 나오야(志賀直哉·1883~1971)와 관계가 있는 백자입니다. 
시가가 2차 세계대전 직후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간논인(觀音院)에 머물며 신세를 지고 돌아갔는데요. 
이후 시가가 이 절의 주지인 가미츠카사 카이운(上司海雲)에게 감사의 뜻으로 백자항아리를 주었답니다. 그래서 ‘시가의 항아리’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항아리는 이후 간논인(관음전)의 응접실에 신줏단지 모시듯 잘 보관되어 있었는데요.

 

현재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달항아리는 7점 정도이다. 보통 높이 40cm가 넘는 둥근 백자 항아리를 달항아리로 일컫는다. 국가지정문화재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은 49cm에 이른다.

 

1995년 7월4일 사달이 벌어집니다. 대낮에 사찰에 칩입한 한 남자가 달항아리를 들고 도망가다가 발각된 겁니다.

사찰 스님과 경비원들이 달려와 범인을 포위한 순간이었는데요.

범인이 갑자기 달항아리를 힘껏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습니다. 그 틈에 범인은 잽싸게 도망갔구요. 사찰 측은 고고학자의 도움을 받아 산산조각난 항아리를 가루까지 솔로 쓸어담았답니다. 셀 수 있는 도자기 편만 300조각이 넘었답니다. 
경찰 조사 후 이 항아리 조각 및 가루는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에 그대로 기증되었는데요.    
미술관 측은 고심 끝에 ‘가능한 형태만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수리·복원 전문가들은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손사래를 쳤는데요. 그중 한 전문가가 손을 들고 나섰답니다. 

 

리움 미술관 특별전에 출품된 중국과 일본 자기들. 달항아리가 제작되었던 17세기말~18세기 무렵 중국와 일본에서는 이와같은 화려한 색채의 수출용 자기들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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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성종은 &ldquo;이 백자잔은 맑고 티가 없다&rdquo;면서 &ldquo;사람에게 비유하면 &lsquo;대단히 공평하고 지극히 바르다(大公至正)&rsquo;고 할 수 있다.&rdquo;(<성종실록> 1491년 12월7일)고 언급했다.

 

또 다른 방증자료가 있습니다. 즉 일본 와세다대(早稻田大) 아이즈야이치(會津八一) 기념 박물관 소장 ‘웃밧쇼’명 백자가 단적인 예인데요. ‘웃’은 ‘위(上)’를, ‘밧쇼’는 ‘바깥 소주방’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웃밧쇼’ 항아리는 ‘윗전에 딸린 외소주방’을 나타내는 거죠. 그런 사례가 또 있습니다.
‘연령군 겻주방’ 명 백자 항아리(개인소장)가 그것인데요. 숙종의 여섯째 아들인 연령군 이훤(1699~1719)의 자택 ‘겻주방’에 쓰인 생활용기였던 겁니다. 그리고 이 국보 얼룩 항아리에는 또 다른 가치가 숨어있습니다. 
얼룩이 백색의 도화지에 그린 한 폭의 추상화 같다고 할까, 혹은 구름에 걸친 달을 연상케 하는 산수화라 할까, 뭐 갖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다는 겁니다. 한가지 여담은 이 항아리를 들고온 이가 “백자 표면의 얼룩을 지우면 어떠냐”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유물을 구입한 미술관 관계자가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답니다. 골동품계에서 얼굴을 지우는 것은 다반사라는데요. 이 관계자는 “얼룩을 빼면 사지 않겠다”고 다짐해두었답니다. 만약 순백색의 자기를 만든다고 때를 뺐다면 어찌되었을까요. 그 백자의 역사성은 송두리째 사라졌을 겁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이죠.

■중력을 거스르는 도공의 분투
참 희한하죠. 화려하고 예쁜 백자도 많기도 하고, 그런 백자들도 절정의 예술성을 뽐내죠. 그런데 왠지 살이 좀 찐 듯하고, 또 조금은 비대칭이면서 아무런 무늬도 없는 달항아리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우선 성군의 으뜸과 버금인 세종(1418~1450)과 성종(1469~1495)이 그 순백의 의미를 알았던 것 같아요. “세종은 오로지 백자그릇만 썼다”(<용재총화>)고 했구요. 성종은 안료를 사용하지 않은 순백자 잔을 승정원에 하사한 뒤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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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술잔은 맑고 티가 없다. 술을 따르면 티끌이나 찌꺼기가 다 보인다. 사람에게 비유하면 ‘대단히 공평하고 지극히 바르다(大公至正)’고 할 수 있다.”(<성종실록> 1491년 12월7일)
백자처럼 맑고 티가 없으면 선하지 않는 것은 다 걸러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세종·성종 같은 성군이라면 몰라도 웬만한 사람들은 조선백자의 멋과 흥취를 깨닫지 못했던 것 같아요. 심지어 북학파 실학자인 박제가(1750~1805)는 “중국 자기는 정교하고 화려하지만 조선 자기는 몹시 거칠다”(<북학의> ‘내편·자’)에서 ‘디스’했답니다. 

 

무미건조한 &lsquo;백자대호&rsquo; 대신 백자 달항아리라는 멋들어진 이름을 붙인 이는 화가 김환기와 미술사학자 최순우였다.

 

그런 마당에 17세기 후반(숙종 말)~18세기 중엽(영조)까지 100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반짝 생산되었던 백자 달항아리는 더군다나 ‘관심밖’이었겠죠. 게다가 생각해보시요. 높이가 40㎝가 훌쩍 넘는 대형 백자를 만들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죠. 
이 큰 항아리를 한번에 물레로 성형하려 하다가는 스르르 무너져 버리기 십상이었겠죠.
그래서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였습니다. 물론 이 방법은 중국 명대 초기의 항아리 성형법에서 착안했는데요.
하지만 그렇게 큰 항아리를 구워내는 과정에서 갈라지거나 틀어진 부분을 완벽하게 원형으로 마무리 짓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옹기처럼 생활용기로 활용했기 때문에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날렵한 대칭과 깔끔한 몸체를 자랑하는 중국·일본의 수출용 도자기와는 달랐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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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상이었던 홍기대(1921~2019)는 “김환기 화백은 찌그러진 백자 항아리를 좋아했는데, 특히 일제 때 마루츠보(圓壺)라 일컬어졌던 항아리를 특별히 ‘달항아리’라 했다”고 전했습니다. 
김환기 화백은 1949년 <신천지>에 실린 시 ‘이조 항아리’에서 “지평선 위에 항아리가 둥그렇게 앉아있다. 굽이 좁다못해 둥실 떠있다. 둥근 하늘과 둥근 항아리와…”라고 읊을만큼 ‘달항아리’에 매료된 분이죠.
김 화백과 평생 교유했던 미술사학자 최순우도 1963년 4월 17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달항아리 예찬론’을 펼칩니다.
“오늘 어떤 백발이 성성한 노감상가 한분이 찾아와 시원하고 부드럽게 생긴 큰 유백색 ‘달항아리’를 어루만져보고는 혼잣말처럼 ‘잘 생긴 며느리 같구나!’하고 자못 즐거운 눈치였다…”  
최순우는 그러면서 일찌기 “그 잘생긴 애인 감이나 며느리 감의 진가를 채 알아보지 못하고 천대했던 이전 세대가 저지를 우리네의 불찰이 지금 회한만 하게 된 것”이라고 안타까워 합니다.
어쨌거나 달항아리를 일컬어 ‘잘 생긴 며느리’라 표현한 것이 ‘이때부터’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술사학자인 혜곡 최순우는 1963년 4월17일자에서 &lsquo;달항아리&rsquo;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신문지상에 사용했다.

■“그저 느껴야 하오.”
생각해보면 얼마나 절묘한 표현입니까. 원형을 이루다가 곧 이지러지는 달이 백자 항아리를 쏙 빼닮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같은 달이지만 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달을 보죠. 달항아리를 보면서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저마다 다른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되는 것처럼…. 그래서 달항아리는 새로운 영감과 창조의 세계로 이끄는 또 다른 문이라는 그럴듯한 해석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렇게 멋들어진 ‘달항아리’ 이름은 2000년대 초까지는 학술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터부시되었습니다.
그저 문화인들끼리 흥취를 나누는 수준이었죠. 그러나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의 개관 첫 전시제목을 ‘백자 달항아리’ 특별전으로 붙일만큼 인식이 바뀌었구요. 마침내 2011년 국보 명칭을 ‘백자대호’에서 ‘백자 달항아리’로 바꾸었습니다.

고고미술사학자인 삼불 김원룡은 &ldquo;조선백자는 이론을 따질 필요가 없다.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하지 말라&rdquo;고 했다.

만약 그릇의 크기와 형태, 기종만 문자 그대로, 그것도 어려운 한자로 표현한 ‘백자대호’니 ‘백자대항’이니 했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달항아리는 지금처럼 대중에게 사랑받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참 사족 하나 달아야겠습니다. 시대가 바뀌면 표현도 바뀌는 법인데요.
혜곡 최순우의 언급이 그런 것 같아요. 최순우는 달항아리를 두고 ‘욕심 없이 어질고 순종적이며 의젓해 잘생긴 며느리 같다’(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 학고재, 1993)이라 했는데요. 둥글고 온화한 순백의 멋을 표현한 말이었을텐데요. 그러나 이런 표현이 요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이젠 다른 좋은 수식어를 붙여야 할 것 같아요.
고고미술사학자 김원룡(1922~19930)의 한마디가 백미인 것 같습니다. 이겁니다.
“조선백자의 미는 이론을 초월한 백의의 미….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오.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여기에 무엇 새삼스러이 이론을 캐고 미를 따지오….” 그래서 저도 조용히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특별전을 ‘그저 느끼고’ 왔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강태춘, ‘백자달항아리의 제작기법 연구’, 전통문화대 석사논문, 2019
김규림, ‘조선 17~18세기 백자원호(白磁圓壺)의 조형과 성격’, <한국문화연구> 36권 36호,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2019
윤용이·이토 이쿠타로(伊藤郁太郞)·마이클 R 커닝햄, <백자달항아리>(특별전 도록), 국립고궁박물관, 2005 
이광표, ‘컬렉터와 명품의 탄생-백자 컬렉터 김환기와 달항아리’, <미술세계> 40, 2016
이종선, <리컬렉션>, 김영사, 2016
이준광·전승창·방병선·최경화·가타야마 마비,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특별전 도록), 리움미술관,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