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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춤을 사랑한 '국왕대리' 효명세자는 궁중예술의 총감독이었다

같은 주제의 그림이 사이좋게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된 2점이 있습니다.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가로 576㎝, 세로 273㎝)입니다. 1828~1830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림에 1828년 건립된 연경당이 보이는데, 1830년 소실된 환경전, 경춘전, 함허정 등도 함께 들어 있거든요. 
동궐도를 보면 마치 드론으로 찍은 사진처럼 한 눈에 두 궁궐의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천·지·인’ 도장을 찍은 3점을 1세트로 제작했습니다. 그 중 16개 화첩으로 된 고려대박물관 소장본에는 ‘인(人)’자가 찍혀있구요. 재작 후 16개 화첩을 16폭 병풍으로 꾸민 동아대 석당박물관본은 ‘천(天)’이나 ‘지(地)’ 중 하나에 해당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궐도에 숨겨진 ‘잠룡’의 정체
이 ‘동궐도’에는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그림 주인공의 자취가 숨어있답니다.  주인공은 순조(재위 1800~1834)의 아들인 효명세자(1809~1830)입니다. 효명세자는 예전에 방영된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KBS)에서 박보검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효명세자), 바로 그 분입니다.
손명희 국립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관이 최근 연구원 미술문화재연구실이 펴낸 단행본(<유물과 마주하다>)에서 당시 부왕(순조)를 대신해서 정사에 임한 효명세자의 동선을 상세하게 파악했는데요.
효명세자가 3년3개월간 대리청정(1827~1830) 했던 각 전각들이 물론 중심이구요. 
그외 세자가 어린 나이에 짊어졌던 정사의 부담을 덜고 각종 취미생활을 했던 전각도 보이구요. 나아가 궁중 음악의 가사를 쓰고 안무를 짰고, 무대연출까지 구상했던 사적 공간까지 알 수 있답니다.

효명세자가 누구이기에 그렇게 팔방미인이었단 말입니까. 우선 그분이 남긴 시를 볼까요
“연못에 잠긴 용이 있으니 구름을 일으키고 나와 안개를 토하더라. 이 용이 조화가 많으니 사해(四海)의 물을 움직일 것…”
이 시의 제목이 다름아닌 ‘잠룡(潛龍)’인데요. 조선의 세자로서 언젠가 왕위에 올라 나라와 백성을 위해 바치겠다는 각오를 다졌죠. 그러나 효명세자는 결국 그 꿈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세자의 나이 22살 때인 1830년(순조 30)이었는데요. <순조실록>은 “윤 4월22일 효명세자가 각혈 때문에 약을 먹었다”고 했는데요. 처음에는 별것 아닌 증세인 것 같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구요. 결국 효명세자는 보름도 안된 5월6일 급서하고 맙니다. 

효명세자는 사후에 익종(훗날 문조)으로 추존되었습니다. 세자 신분으로 서거했지만 임금 대접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조선을 통틀어 살아 생전에는 임금이 아니었지만 사후에 임금으로 모신 ‘추존왕’이 한 둘입니까. 효명세자를 포함해서 9명이나 됩니다. 그런 분들 중 ‘효명세자’ 만큼은 ‘국왕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평가가 만만치 않습니다. 왜냐면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라”는 부왕(순조)의 명에 따라 실제로(1827년 2월18~1830년 5월6일) 조선을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효명세자의 저술이 역대 임금들의 시문을 모은 <열성어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존왕의 저술이 <열성어제>에 포함된 예는 효명세자가 유일합니다. 그래서 ‘태정태세문단세…’로 시작되는 27명의 조선 임금 계보에서 ‘정순(익)헌철고순’이라 마무리 지어도 딴죽을 걸 수가 없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용의 눈동자롤 가진 세자
그럼 효명세자는 어떤 분일까요. 
“세자는 이마가 솟은 귀한 상이었고, 용(龍)의 눈동자로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궁내의 모든 이들이 ‘장효왕(정조)과 흡사하다’고 입을 모았다.”(<순조실록>)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세자 18세 때인 1826년(순조 26)에 그린 어진이 남아있는데요. 불행히도 궁중유물의 부산 피란 시절인 1954년 12월 일어난 대형화재 때문에 화면의 절반 이상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만약 어진이 무사했다면 조선의 미남상이 어떤지, 또 중흥군주라는 정조의 얼굴이 어떤지 가늠할 수 있었을 같은데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순조실록>은 세자의 비범함을 증거하는 일례를 듭니다. 즉 세자로 책봉된 4살 때(1812년) 홍경래(1771~1812)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젖을 먹고 있던 세자가 웃으면서 ‘쾌(快)하고 좋구려!’라 말했다는 겁니다. 
유모가 “무엇 때문이냐”고 묻자 4살 짜리 세자는 “도둑이 벌써 잡혔으니 어찌 쾌하고 좋지 않겠느냐”고 대꾸했답니다.
또 밥을 먹다가 밥알을 떨어뜨리면 반드시 주워 삼키면서 “하늘이 내려 준 것을 소홀하게 할 수 없다”고 했구요. 
그렇게 15년간 ‘잠룡’으로서 대권 수업을 받은 효명세자는 19살 때인 1827년(순조 27) 대리청정에 나섭니다.

사실 당시 순조의 나이는 불과 38살이었는데요. 순조는 왜 그런 창창한 나이에 왕권을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을 했을까요. 
우선 건강문제가 컸습니다. 어려서부터 수두-홍역-천연두 등 전염병이란 전염병은 모두 앓고 지나갔구요. 게다가 불과 11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데요. 서슬퍼런 증조할머니(정순왕후·영조의 계비·1745~1805)의 수렴청정(3년)으로 주눅이 들었고, 이후에는 처가인 김조순(1765~1832)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기를 펴지 못했죠. 
그 와중에 극심한 불면증과 함께 신경쇠약 및 소화불량 증상을 호소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당시 조선 사회는 어수선했습니다. 잇단 흉년과 가뭄이 계속됐구요. 홍경래의 난(1811~12년)이 진압됐지만 시중에는 여전히 ‘홍경래 불사론’까지 떠돌만큼 민심이 흉흉했습니다. 순조로서는 이 총체적인 난국에 세자의 처가(풍양 조씨) 세력을 등장시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견제하고 싶었을 겁니다. 추락한 왕권을 강화하려고 대리청정이라는 승부수를 두었다는 겁니다. 
순조는 1827년 2월18일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면서 “병형(군권과 형벌권)의 긴요한 일이 아니면 세자가 모두 처리하라”고 일러둡니다. 효명세자는 그런 부왕의 의도를 간파한 것 같습니다. 세도를 휘두르던 안동 김씨 일가를 줄줄이 쫓아냅니다.

■대리청정 시기의 업적들
효명세자는 그 빈자리를 친위 세력으로 채웠습니다. 외척정치에 반대하고 청의(淸議)를 기치로 내건 김로(1783~?)·이인부(1777~?)·홍기섭(1776~1831)·김노경(1766~1837) 등이었죠. 이 네 사람은 훗날 ‘효명세자의 4간신’으로 지목되죠. 세자의 처가였던 풍양 조씨 가문의 조만영(1776~1846) 등이 세자를 뒷받침했습니다. 그 사이 국정개혁을 위해 애썼습니다. 
우선 서울의 소수 가문 자제를 주로 뽑는 과거의 폐단을 개혁하고 전국에서 신진세력을 널리 등용했습니다. 과거의 횟수도 대폭 늘렸습니다. 비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례로 1827년(순조 27) 홍문관 부수찬(종 6품) 강태중(1778~1862)이 ‘효명세자의 시험 남발’ 극력비판했습니다. 그러자 세자는 “대리청정한지 몇달이 지났는데 당신 같이 직언하는 이는 없었다”면서 오히려 강태중을 사간원 대사간(정 3품)에 임명했습니다. 직언한 신하를 벌주기는커녕 간관의 꽃인 사간원의 수장으로 발탁한 파격인사였습니다. 
효명세자는 1829년(순조 29) 암행어사를 각 지방에 파견하여 탐관오리의 작태를 낱낱이 파악하도록 했습니다. 
그해 5월 29일 함경도와 영남·호서·호남 등에서 모두 260만명에 달하는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 및 각종 구호 물자를 내려보냈습니다.(<순조실록>) 

■누이동생을 지극히 아낀 오라버니
그러나 효명세자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문예군주’의 향기를 물씬 풍긴다는 겁니다.
예컨대 22살에 요절한 효명세자는 400여제의 시를 남겼는데요. 조선의 문예군주라는 정조가 49년을 살면서 남긴 시가 200제를 넘지 않았거든요. 효명세자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중 여동생들을 끔찍히 예뻐한 시를 다수 남긴 것이 눈길을 끌죠. 특히 1살 어린 누이동생(명온공주·1810~1832)에게는 사흘 간격으로 시를 보냈습니다. 동생에게 보내는 친필시는 한시를 원문으로 적고 다시 한글음을 병기했으며 그 번역문까지 첨부했는데요. 어려운 어구는 한글로 주석까지 달아놓았습니다. 
“수레를 보낸지 이미 삼일이 되니 암암리에 내 마음이 생각하는도다. 슬퍼함에 저녁산을 대하니 나무에 가득한 매미가 울 때로다.(送송車거已이三삼日일 暗암暗암我아心심思사 초초愴창 對대山산夕석 滿만樹수蟬선鳴명時시)”(기寄매妹씨氏)

조선 말기 학자인 김창희는 “(길주·명천 등 서북지역을 다닐 때 만난 백성들은) ‘대리청정기 효명세자는 수재(水災)를 깊이 염려했고, 각 지방 수령들을 가려 내보냈으며, 백성 한사람 한사람을 마치 자식처럼 여긴 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석릉집>)고 전했다.

■궁중잔치로 왕권강화의 무대로
효명세자의 업적 중에서도 으뜸이 있습니다. 바로 세자가 궁중예술의 꽃인 ‘정재(呈才)의 황금기’를 이뤘다는 것입니다.  
‘정재’는 궁중의 연회에서 여령(女伶·여성 연예인)과 무동(춤추는 아이) 등이 공연했던 춤과 노래입니다.
대리청정에 임한 효명세자는 3년3개월의 재임기간 중 세차례에 걸쳐 대규모 궁중연회를 개최했습니다.      
1827년 9월9일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린 뒤 베푼 ‘자경전진작정례의’와, 1828년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 생일을 기념한 ‘무자진작의’, 그리고 1829년 순조의 등극 30년과 탄신 40년을 기린 ‘기축진찬의’가 그것인데요.

22살에 요절한 효명세자는 400여제의 시를 남겼다. 조선의 문예군주라는 정조가 49년을 살면서 남긴 시가 200제를 넘지 않았다.

당시 시대상황은 궁궐에서 그렇게 흥청망청 잔치를 벌일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천주교 탄압과 외척의 득세, 신분질서의 와해 등으로 사회혼란이 가중된 때였죠. 설상가상으로 크고작은 천재지변이 일어났고, 전염병이 번져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규모 궁중잔치를 벌였던 효명세자를 예쁘게 볼 수 있을까요. 
물론 왕조시대에서 궁중잔치는 단순한 ‘놀자판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성리학에서 예악을 다스리는 군주야말로 성군으로 칭송받았기 때문이죠. <예기> ‘악기’는 “군왕이 음악을 만든 것은 천지의 이치에 따라 백성을 다스리려고 했기 때문”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효명세자가 그 힘겨운 시기에 세번이나 궁중잔치를 벌인 속내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라도 궁중잔치에 참석하면 군왕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충성을 다짐해야 했습니다.
효명세자의 궁중잔치는 두가지 효과를 노린 겁니다. 효를 내세워 위로는 부왕을 섬기고 아래로는 신하들에게 충성을 이끌어 냄으로써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려 했던 겁니다.

■궁중공연의 총감독이었던 효명세자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효명세자가 궁중음악의 가사를 직접 썼을 뿐 아니라 각종 공연의 총감독(총연출자)을 맡아 진두지휘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효명세자 연간에 공연된 정재(呈才·노래와 춤, 음악이 어우러진 종합예술)는 40종목 정도 되는데요. 그중 23종목은 효명세자 시기에 새로 등장한 종목이구요. 그 23종목 가운데 20종목의 가사를 효명세자가 직접 썼습니다. 20종목 중 17종목은 효명세자의 순수 창작품이고요. 3종목은 본래 전승되어온 정재의 가사와 곡조, 춤의 구성 등을 그 시대에 맞게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공연작품 중에는 중국 문헌에 이름만 남아있고 실체가 전해지지 않았던 ‘고구려무’를 새로운 춤으로 재창작했구요. 신라시대 화량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사선무’ 등도 다시 만들었습니다.
효명세자의 창작품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처음 등장한 1인 무용입니다. 그것이 ‘춘앵전’과 ‘무산향’입니다. 
기존의 정재는 대부분 대형 중심, 즉 군무 스타일이었는데요. 그러나 ‘춘앵전’은 한마리 꾀꼬리인듯한 댄서 1인이 돗자리라는 아주 작은 무대공간에서 나아갔다가 물러나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는 작품이었습니다. 
또 다른 세명세자의 독무곡인 ‘무산향’은 설치해놓은 대모반(침상처럼 행긴 이동무대)에 댄서 1인이 올라가 추는 춤곡입니다. ‘춘앵전’과 ‘무산향’의 등장은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인 이때가 궁중 무용의 전성기였음을 알려주는 단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18세기판 기획사 차린 효명세자 
물론 모든 창작·안무·연출 등을 효명세자 1인이 북치고 장구치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함화진(1884~1948)의 <악인열전>에는 1827년 전악(조선시대 장악원에서 음악업무를 맡은 정6품 잡직)의 자리에 오른 김창하라는 인물이 눈에 띕니다. <악인열전>은 “효명세자의 총애를 받은 김창하가 악단을 이끌고 궁중에서 머물면서 세자 앞에서 시시 때때로 연주했다”고 전했습니다. 이때 김창하가 효명세자를 보좌해서 ‘다수의 정재’를 창작했다는 겁니다. 
<순조실록>은 “1827년(순조 27) 3월11일 효명세자가 장악원 소속의 대년악생(待年樂生·일종의 연습생) 72명에게 봉급을 주어 춤을 연습하도록 명했다”고 기록했는데요. 요즘으로 치면 효명세자가 기획사가 차려놓고 김창하 등과 함께 연습생들을 기르고, 훈련시킨 뒤 궁중음악을 창작·편곡·연출한 대표 프로듀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효명세자는 아버지(순조)와 어머니(순원왕후)를 위한 궁중잔치(예·禮)와 그 궁중잔치를 위한 공연(악·樂) 등 전체 의례를 총연출하는 총감독이 된겁니다.

효명세자는 장악원 소속의 연습생 72명에게 봉급을 주며 춤을 연습하도록 명했다. 효명세자는 기획사를 차려놓고 김창하 등과 함께 연습생들을 길러내며 궁중음악을 창작·편곡·연출한 대표 프로듀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효명세자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정치를 통해, 음악을 통해 실추된 왕권을 되살리고 밝은 정사를 펼치겠다던 효명세자의 꿈은 단 3년3개월만에 물거품이 됩니다. 세자가 죽자 그의 흔적은 곧바로 지워지기 시작합니다. 효명세자가 기용한 인사들이 줄줄이 쫓겨나죠. 
아버지 순조가 통곡합니다. “하늘이 너를 빼앗아감이 어찌 그렇게도 빠른가…장차 우리 나라를 두드려서 망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순조실록> 1930년 7월12일)
과연 순조의 말처럼 조선은 헌종(재위 1834~1849)-철종(1849~1863)을 거치면서 급전직하하죠.
저는 효명세자 자료를 들춰볼 때마다 좀체 풀리지 않는 난제에 허우적 거립니다.

생전에는 임금이 아니었지만 사후에 임금으로 모신 ‘추존왕’은 9명에 이른다. 그중 효명세자는 부왕(순조)의 명에 따라 3년3개월동안 국정을 사실상 이끌었다.

효명세자가 만약 정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아 오래 다스렸다면 조선의 형편은 나아졌을까요. 솔직히 비관적인 생각이 듭니다. 18세기 초중반이면 어떤가요. 서구 열강은 산업혁명을 이루며 완전히 바뀐 세상에 살게 된 시절이었죠. 
그런데 그런 시절에 효명세자는 시대착오적인 예악정치로 왕권을 강화할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니 말입니다. 백성은 도탄에 빠져있는데, 궁중에서 호화로운 연회를 펼쳤다니 말입니다. 다만 이런 생각은 듭니다. 그래도 8살에 왕위를 이은 헌종이나 아무런 준비없이 덜컥 임금자리에 오른 ‘강화도령’ 철종보다는 낫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효명세자는 군주의 수업을 제대로 받았던 똑똑한 군주였으니까요. 그렇다면 외우내환에 시달리던 조선을 구할 극적인 비책을 마련하지 않았을까요. 역사에서 가정법은 없지만 뭐 그런 긍정적인 상상을 한번 해봅니다.(이 기사를 위해 손명희 국립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관과 이종묵 서울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국립고궁박물관, <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특별전 도록), 2019
손명희, ‘동쪽 궐에 깃든 효명세자의 봄날’, <유물과 마주하다>, 국립문화재연구원 미술문화재연구실, 2023
이종묵, ‘효명세자의 저술과 문학’, <한국한시연구> 10, 한국한시학회, 2002
김문식,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문헌과 해석> 56권, 태학사, 2011 
심승구, ‘효명세자의 삶과 예술’, <한국무용연구> 제36권 4호, 한국무용연구학회, 2018
김말복, ‘춤을 사랑한 효명세자’, <무용예술학연구> 17권17호, 한국무용예술학회, 2006
김거부, <춤을 사랑한 조선의 왕세자>, 시간의물레,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