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5월19일은 정부가 정한 ‘발명의 날’인데요. 왜 하필 이날일까요.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고안·실험한 날이 1441년(세종 23) 음력 4월29일인데요. 이것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5월19일’이라 이 날을 ‘발명의 날’로 삼은 겁니다.
이상하죠. 훈민정음·거북선·앙부일구·자격루·금속활자 등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 최초·최고의 발명품이 많은데 왜 굳이 ‘측우기 고안·실험 일자’를 ‘발명의 날’로 삼았을까요. 이유가 있답니다.
1957년 ‘발명의 날’ 제정 때 이병도(1896~1989) 등 심의위원들이 “발명 날짜와 발명자(세자 이향·문종)가 분명히 기록된 측우기가 가장 적당하다”고 주장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금도 포털사이트의 각종 지식백과에서 거의 대부분이 ‘측우기 발명=장영실’로 검색됩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조선에 자랑할 것이 없는데…”
1917년 일본의 기상학자인 와다 유지(和田雄治·1859~1918)는 ‘조선의 고대 관측기록 조사보고’(조선총독부)라는 논문을 남겼는데요. 그런데 이 논문에 조선총독부 관측소장이었던 히라타 도쿠타로(平田德太郞)가 맹랑한 서문을 씁니다.
“조선이 자랑할만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세종 때의 강우량 관측은…유럽보다 200년 앞서고(1639년·이탈리아의 베네데토 카스텔리) 중국에서도 없었다…놀랍게도 조선인의 뇌리에서 솟아나온 독창적인 사업…탁월함을 보여주기에...”
한국의 측우제도를 연구하고 국제적으로 알린 와다도 이 논문에서 ‘세종대왕=명군’으로 칭하며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이미 460년 전에 측우제도를 구축하여 전국에 보급한 것은 일대 특필해야 하며…‘명군’ 세종의 거룩한 뜻에 의한 것….”
와다는 “측우제도가 세종을 계승해서 영조-정조-헌종조까지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찬탄을 금할 수 없다”고 극찬했습니다.
대체 측우기가 뭐기에 조선문화를 깔본 일본인들까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을까요.
하나하나 따져보죠. 요즘도 일부 어른들은 ‘비가 내린다’고 하지 않고 ‘비가 오신다’는 존댓말을 쓰죠.
그 이유가 있습니다. 세종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먹는 것을 하늘처럼 우러러 보는 사람들(民惟邦本 食爲民天)”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가뭄이 들면 어찌 되겠습니까. “제발 비 좀 내려달라”고 기우제를 지냈죠. 그런데 그때 비가 내려 보십시요.
“비가 오신다”고 했고, 그렇게 내리는 비를 ‘단비(甘雨)’라 했죠. 해마다 음력 5월10일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라 했는데요.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에 일화가 나와있습니다. 태종이 승하 직전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는데요.
이때 죽음을 앞둔 태종이 “백성들이 어찌 살라는 건가. 안되겠다. 내가 하늘에 올라가(죽어) 천제에게 ‘즉시 단비를 내려달라’고 고하겠다”고 했습니다. 과연 다음날(1422년 5월10일) 태종이 승하했고, 곧 하늘에서 단비가 내렸답니다.
이후 ‘해마다 5월10일엔 단비가 내린다’는 ‘태종우’ 일화는 조선시대 내내 정설처럼 전해졌던 것 같아요.
<경종실록> 1723년 5월12일조는 “이틀전(5월10일) 태종우가 내려야 하는데 감감무소식”이라고 아쉬워했구요. <영조실록> 1764년 5월10일조는 “오늘(10일) 태종 대왕이 내려주신 비가 내렸다”고 기뻐했습니다.
이렇듯 ‘비에 왕조의 명운’을 거는 판국이었으니 체계적인 강우량 측정 또한 절실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어떻게 강우량을 측정했을까요. 비가 흠뻑 오면 눈대중으로도 파악할 수 있었죠. 그러나 가뭄 끝에 찔끔 와서 메마른 땅에 스며들었다면 어떨까요. 그때는 ‘물이 흙에 스며든 깊이(入土深)’로 측정했습니다.
■1441년 4월29일 무슨 일이…
이렇게 주먹구구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1441년(세종 23) 4월29일자 <세종실록>에 심상치않은 기록이 보입니다.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땅을 파서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보았다. 그러나 적확하지 못해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어 궁중에 두어(鑄銅爲器 置於宮中) 그릇에 고인 정도를 실험했다(以驗雨水盛器分數)….”
이 날짜, 즉 음력 4월29일(양력 5월19일)을 ‘발명의 날’로 삼은 겁니다.
가만, 여기서 한번 짚어봅시다. 세자는 다름 아닌 세종의 맏아들 문종(1450~1452)을 가리키는데요.
그럼 어릴 적부터 눈과 귀가 닿도록 보고 들었던 ‘측우기=장영실 발명’ 이야기는 대체 뭔가요.
그렇습니다. <세종실록> 뿐 아니라 어떤 사료에도 ‘측우기 발명자=장영실’이라는 이야기는 찾을 수 없습니다.
<연려실기술> ‘세종조 고사본말·찬술 및 제작’조는 “장영실이 1432년(세종 14)부터 간의대, 혼의혼상,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자격루 등의 제작을 주도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측우기는 쏙 빠져있죠.
세자 이향(문종)의 창안으로 시험 제작·운용된 ‘구리제 우량계’는 4개월여 만인 1441년 8월 18일 정식으로 제작됩니다.
세종은 “쇠로 길이 2척, 지름 8촌의 우량계를 만들어 대(臺) 위에 올려 놓고 강우량을 측정한다”는 호조의 구체안을 승인합니다.
‘측우기’ 명칭은 1442년(세종 24) 5월8일 <세종실록> 기사에 처음 등장합니다. 세자(문종)의 ‘구리그릇 실험’ 이야기가 나온지 1년여가 지난 때죠. 실록기사는 이렇습니다.
“서울에서 쇠를 주조한 측우기를 제작…대(臺) 위에 두고 매양 비가 온 후에는…서운관(기상청) 관원이 친히…강우량을 측정 보고하고…각 지방에도 측우기를 보내…”
■그 때 장영실은 곤장 맞고 있었다
‘장영실’ 이야기는 없습니다. 사실 그 무렵(1442년) 장영실은 의금부의 국문을 받는 괴로운 처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3월 16일자 <세종실록>은 “장영실이 제작한 안여(임금이 타는 수레)가 부서지는 불상사가 일어나 의금부로부터 국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후 측우기 제작이 공식발표되는 5월초까지는 장영실의 처벌이 한창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세종실록> 1442년 5월3일자는 “임금의 안여 제작을 감독한 장영실 등의 직첩(職牒·관리 임명장)을 회수하고 곤장형의 집행을 결정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측우기의 반포일자’는 5일 뒤인 5월 8일이었구요.
왜 그럼 ‘장영실=측우기 발명’이 정설로 굳어진 걸까요. 당대 장영실은 ‘세종 임금의 훌륭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해서 난 인재’(<연려실기술>)라는 평을 들었는데요. 그래서 당연히 측우기도 장영실의 주도 아래 발명되었다고 믿게된 것이 아닐까요.
일인학자 와다 유지의 언급도 한몫 한 것 같아요.
“(조선의 측우기 발명·보급에) 장영실 등의 학식은 실로 비범했던 것으로 인정된다. 다시한번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인식이 퍼져서 ‘장영실=측우기 발명’설이 굳어진 것 같습니다.
■천문 기후 관측에 밝았던 세자 문종
그렇다면 세자 시절 문종(1414~1452)은 어떨까요.
“세자가 강우량을 재는 구리그릇을 만들어 시험운영했다”는 기록은 <세종실록> 1441년 4월29일자에 등장하죠.
그런데 세자가 ‘강우량 측정’을 고민했던 때가 ‘근년 이래’, 즉 ‘요 몇년 사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1441년보다도 앞선 시기부터 측우기를 연구하고 실험한 이가 다름아닌 세자(문종)였다는 겁니다.
<연려실기술>은 “문종이 천문을 잘 관측하고 기후(氣候)에 정교하여, 우레가 어느 때에 치고 어느 방위에서 일어난다고 예언하면, 뒤에 반드시 맞았다”(‘문종조고사본말’)고 했습니다.
사실 정식 임금으로서 문종의 치세는 2년 3개월(1450년 2~1452년 5월)에 불과합니다. 39살의 젊은 나이에 승하했죠.
그러나 문종이 조선을 다스린 것은 10년에 달합니다. 1443년(세종 25) 4월17일 세종이 대리청정을 명하는 교지를 내렸는데요. 하지만 1년 전인 1442년부터 조선의 국정을 사실상 이끌기 시작했거든요. 업적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6품 이상까지 윤대(輪對·문무 관원이 교대로 임금의 질문에 응대)를 허락함으로써 언로를 활짝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어요. 이민족과의 전쟁사인 <동국병감>을 펴냈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또 태종 때 만들었던 화차를 새롭게 개발하여 유사시에 대비했습니다. 만만치 않은 업적이 아닙니까.
그런 문종이 가뭄을 걱정해서 측우기를 고안·제작하고 시험 운영한 것은 27살 때의 일입니다. 누구도 ‘그럴리 없다’고 딴죽을 걸 수 없을 겁니다.
■영조가 깜짝 놀라 주저앉은 이유는?
이렇게 문종에 의해 창안·발명된 측우기는 서울과 각 지방 각지의 체계적인 강우량 측정에 활용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어쩐 일인지 측우기를 이용한 강우량 측정 기록은 한동안 보이지 않습니다.
영조 연간인 1770년(영조 46)이 되어서야 재등장 합니다. <증보문헌비고>는 “영조가 <세종실록>에 측우기 관련 기사가 있다는 소식을 알고 본인도 모르게 엎어지듯 앉으시며…(기뻐했다)”고 소개했습니다.
영조는 창덕궁과 경희궁는 물론 8도와 양도 등 각 지방에 측우기를 설치·운용했습니다.
정조(1776~1800) 역시 측우제도 발전에 공을 들입니다. 이후의 임금들도 영·정조 때 보급한 측우기로 강우량을 측정했습니다.
국왕의 업무일지인 <승정원일기>(영조~순종)에서 ‘측우기’ 단어가 무려 8129건이나 검색되더군요.
‘비가 내렸다. 몇시~몇시 사이에 내린 비로 측우기의 수심은 몇 푼이었다’는 형식으로 측정기록을 계속 쌓아둔 겁니다.
■“측우기의 1년 통계를 보았더니…”
비가 내릴 때마다 강우량을 측정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정조실록> 1799년(정조 23) 5월22일자를 보면 가늠할 수 있습니다.
“1791년 이후 비의 많고 적음을 반드시 기록했다. 1년치의 통계를 보았더니…. 지난해 이달에는 측우기 물깊이가 거의 1자 남짓인데…이번 달은 겨우 2치…백성들의 실정이 딱하기만….”
정조는 “측우기 측정 등으로 비가 오고 안오고를 잘 파악해서 만약 가뭄이 심해지면 벼 대신 다른 작물을 심으라”(<승정원일기> 1798년 6월7일)고 당부했습니다. 임금은 측우기의 장기 강우량 기록을 수시로 살피며 백성들의 농사를 걱정했던 겁니다.
측우기 뿐이 아니죠. 세종 시대부터 청계천변과 한강변에 설치해놓은 것이 수표입니다.(<세종실록> 1441년 8월18일조) 하천의 수위를 측정해서 홍수에 대비하고자 한 겁니다. <영조실록> 1731년 6월13일조는 “지금 단비가 쏟아져 수표에서 청계천의 수위를 계속 보고하고 있다”고 즐거운 비명을 질렀습니다. 반면 <명종실록> 1554년 6월6일자는 “한강 수위가 21자3치에 달해 강변 집 20채 물에 잠겼다”고 걱정했습니다. 요즘의 풍향계라 할 수 있는 ‘풍기대’도 궁궐 내에 설치했는데요.
■현대 측우기와 비교해도 손색없다
현재 남아있는 측우기는 딱 1대입니다. 충청 감영(금영)에 있었던 ‘금영 측우기(1837년·헌종 3)’인데요.
기상학자 와다가 일본으로 가져가 일본 기상청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끈질긴 교섭끝에 환수(1971년 4월)한 겁니다.
그동안 ‘진품’임을 주장하는 몇몇 측우기가 등장했지만 모두 가짜로 판명되었습니다. 1987년에는 시중에서 제작한 3만원짜리 우산꽂이가 ‘세계 최고의 측우기’로 둔갑해서 소개된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측우기를 설치했던 측우대는 5기 정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결국 측우기 관련 유물은 측우기 1대와 측우대 5대인 셈이죠.
그런데 저는 세종 때 발명되었다는 측우기를 보면서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한가지는 얼핏 보기에 간단하기 이를데 없는 이 측우기가 어떤 과학성을 갖고 있다는 걸까요.
우선 현전하는 금영측우기의 지름은 140㎜ 정도인데요.
이것은 현재 세계 13개국의 우량계(127㎜)와 8개국 우량계(159㎜)의 중간 정도 됩니다.
580년 전에 제작한 측우기인데도 현대 측우기의 규격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3단 조립식 측우기의 비밀
측우기 모습이 간단하지만, 허투루 보면 안됩니다. 빗물을 받는 면적이 너무 넓거나 좁으면 측정오차가 커집니다. 면적이 너무 넓으면 비가 적게 내릴 때 측정하기가 어렵구요. 반면 지름이 너무 좁으면 바람이 불 때 빗물을 받기 힘들게 되죠.
비의 평균 반지름이 1㎜이고, 단위 시간당 강우량 10㎜ 정도라는데요. 이 경우 지름이 140㎜인 금영 측우기의 채취 오차는 0.51%에 불과하답니다. 현재 세계기상기구(WMO)의 강우 채취 표본 오차범위는 1% 이내라는데요.
그렇다면 금영 측우기는 현대 우량계의 국제규격에도 합치되는 크기라 할 수 있죠.
또 금영 측우기(깊이 316㎜)는 세부분으로 나눠 조립할 수 있게 만들었는데요. 여기에도 과학적인 고려가 담겨 있습니다.
원통이 너무 깊으면 밑바닥에 고인 물을 측정하기 힘들잖아요. 그럴 때는 윗부분의 한토막이나 두토막 용기를 떼어내고 빗물의 깊이를 잴 수 있잖습니까. 3단 조립으로 제작한 이유를 아시겠죠.
측우기에는 이렇게 강우량의 정밀측정을 위한 역대 임금들의 노심초사가 담겨있습니다.
일본 기상학자 와다는 1770(영조 46)~1907년(고종 광무 11)의 강우량을 월별로 정리하고, 1671(현종 12)~1907년의 237년간 강수·강설일수를 정리했는데요. 바로 이겁니다.
즉 조선은 측우기라는 우량계를 발명해서, 국가 주도로 연중 전국 단위로 정밀측정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측정값을 농사에 활용했다, 무엇보다 그 통계의 일부가 남아있다, 뭐 이런 얘기죠. 기상과학 기술을 농사현장에 활용하여 농업생산을 구현한 조선의 국가적 역량이 측우기를 통해 채현된 겁니다.
조선 후기의 시인인 박윤묵(1771~1849)는 “어진 임금님의 하늘을 공경하는 뜻을 알고 싶다면 돌에 새긴 측우대의 명문을 살펴보시라”(<존재집>)고 권했습니다. 그 명문에 이렇게 써있습니다.
“임금은 가뭄 때 백성과 더불어 근심하고, 비가 내릴 때 백성과 함께 기뻐한다. 측우기에 임금과 백성의 기쁨과 걱정이 매이었으니, 만세토록 알맞은 비가 내려주기를….(이 기사를 위해 측우기 연구자인 이하상 선생과 도서출판 ‘소와당’, 국립기상박물관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한상복 한수당자연환경연구원 원장의 블로그 사진자료도 참고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이하상, <기후에 대한 조선의 도전, 측우기>, 소와당, 2012
와다 유지, <조선고대 관측기록 조사보고>, 조선총독부, 1917
이두순, <농업과 측우기>(연구총서 30), 한국농촌경제연구원, 2015
박성래, ‘측우기는 문종(文宗)이 발명했다’, <과학과 기술> 38권1호,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2005
한상복, ‘영조 이후의 측우기에 관한 연구’, <고서연구> 제40호, 한국고서연구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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