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책을 100번씩 반복해서 읽었다. <좌전>과 <초사> 같은 책들은 200번 읽었다. 몸이 아파도 마찬가지였다. 보다 못한 아버지(태종)가 환관을 시켜 책을 다 거두어갔다. 그런데 <구소수간(歐蘇手簡·구양수와 소식의 편지 모음집)>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다. 세종은 이 책을 1100번 읽었다.”(<연려실기술> ‘세종조고사본말’)
■세종의 ‘자뻑’, ‘나보다 책 많이 읽은 자 나오라그래!’
역대로 가장 많은 독서량을 자랑한 군주는 역시 만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을 꼽을 수 있다. 서거정(1420~1488)의 수필집인 <필원잡기>를 인용한 <연려실기술>은 ‘독서계의 레전드=세종’의 일화를 전한다.
세종의 독서량이 상상을 초월했다는 이야기는 당대의 정사인 <세종실록>에 자세히 소개된다.
그것도 다름아닌 세종의 ‘자뻑’으로 등장한다. 즉 1423년(세종 5년) 12월 23일 세종은 경연에 나서 남송 주희(1130~1200)의 역사서인 <통감강목>을 강독한 뒤 동지경연사 윤회(1380~1436)에게 ‘내가 그 어렵다는 <통감강목>을 20~30번을 읽었다’고 은근슬쩍 자랑한다.
“송나라 학자인 진덕수(1178~1235)은 ”<통감강목>은 너무 권질(卷帙)이 많아서 임금이 다 보기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3년 전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20~30여번 읽은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너무 어렵다.”
이 주희의 <통감강목>은 북송 사마광(1019~1086)의 <자치통감>을 공자가 지은 <춘추>의 체제에 따라 재편찬한 역사서다. 그러나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채 정조(精粗·정밀함과 조악함)의 구별 없이 모두 실려 있기 때문에 전체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세종은 “엄청 어려웠지만 나는 그래도 20~30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은근슬쩍 자랑하고 있다. “나는 읽었는데 자네들은 읽어봤냐”는 것이었다.
이 날짜 <세종실록>은 “주상께서는 수라를 들 때에도 반드시 책을 펼쳐 좌우에 놓았고, 밤중에도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 대목에서도 세종의 독서자랑은 끝이 없었다.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손을 거두고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가 있는가. 없지 않은가.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거야.”
세종의 ‘자뻑’이 계속된다. “나는 말야. 책을 본 뒤에 잊어버리는 것이 없었어.(予於書籍看過之後 則無遺失)”
<세종실록>의 기자는 이 대목에서 세종대왕이 얼마나 똑똑한 군주인가를 꿀발린 소리로 한 상 제대로 말아올린다.
“임금이 한번 읽은 서적을 기억해내는 재주만 있는게 아니다. 수많은 신하들의 이름과 그 사람의 이력은 물론 그 사람의 가계도까지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으셨다.”
참 대단한 능력이다. 게다가 세종은 신하들의 얼굴을 한번 보면 절대 잊지 않았다.
“한번 신하의 얼굴을 보시면 여러 해가 지났다 해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하며 ‘아무야’하고 성명을 부르셨다.”
■다독의 이유, “책 1000번 읽으면 의미가 절로 살아난다”
그런데 이쯤에서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모든 책을 100번 이상씩 읽었다’는 세종의 자기자랑에서 봤듯 왜 옛사람들은 책 한권을 수십번, 수백번, 수천번, 아니 심지어는 억만번을 읽었다고 자랑했는가.
18세기 실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안정복(1712~1791)의 <상헌수필>에 그 이유가 자세히 나와있다.
우선 글이란 무엇인가. 안정복은 “글이란 옛 성현들의 정신과 마음가짐(심술)의 운용”이라 정의했다.
“옛 성현들이 영원히 살 수 없지 않느냐. 그래서 옛 성현들이 글을 지어 후손들로 하여금 그 글 속의 말을 통해 성현의 자취를 찾고 그 자취를 통해 성현의 이치를 터득하고자 한 것이다.”
안정복은 성현의 이치를 터득하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고 했다.
“많이 읽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며, 널리 보지 않으면 그 변화에 통달할 수 없다.”
그러면서 안정복은 다독(多讀)를 강조한 옛 사람의 이야기를 여럿 소개한다.
즉 “책 1만 권을 읽으면 붓끝에 신기가 어린 듯(讀書破萬卷 下筆如有神)”하며, “글을 1000번 읽으면 그 의미가 저절로 나타난다(讀書千遍 其義自見)”는 말 따위다. 이렇게 다독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소개한뒤 마지막 한마디를 던진다.
“‘책 5000권을 읽지 않은 자는 내 방에 들어 오지 마라(有不讀五千卷者 不入吾室)’는 말까지 있다. 이렇듯 옛사람이 독서함에 있어서 그 양이 많고 그 폭이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사기> ‘백이열전’을 1억1만3000번 읽었다는 독서의 끝판왕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다독가’ 하면 제 아무리 세종대왕이라도 이 분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
백곡 김득신(1604~1684)이다. 김득신은 150년 후대의 화가인 김득신(金得臣·1754~1822)과 한자까지 똑같은 동명이인이다. 대체 어느 정도였기에 책 좀 읽었다는 세종대왕 마저 숙여야 할 정도란 말인가. 김득신 스스로 평생 읽은 책을 기록한 ‘독수기’(讀數記)를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사기> ‘백이전’은 1억1만3000번 읽었고, ‘노자전’ ‘분왕’ ‘벽력금’ ‘주책’ ‘능허대기’ ‘의금장’ ‘보망장’ 등은 2만번 얽었다. ‘제책’ ‘귀신장’ ‘목가신기’ ‘제구양문’ ‘중용서’는 1만8000번, ‘송설존의서’ ‘송수재서’ ‘백리해장’은 1만5000번…. ‘용설’은 2만번, ‘제약어문’은 1만4000번, 모두 36편이다.”
<사기> 중 ‘열전·백이열전’ 편을 1억번 이상 읽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1만4000번 이상 읽은 책의 편수가 36편이라니 더욱 기가 찰 노릇이다. 김득신의 부연 설명이 더욱 놀랍다.
“<장자>와 <사기>, <대학>, <중용>의 경우 읽은 회수가 1만번을 넘기지 않았기에 기록에서 뺀다”는 것이다. 책을 1만번 이상 읽지 않았다면 ‘읽은 축’에도 넣지 않았다는 소리다.
얼마나 ‘다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지 김득신은 자신의 서재 이름을 ‘억만재’라 지었다. 물론 예전의 억(億)은 10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득신은 <사기> ‘백이열전’을 11만3000번 읽었다는 소리다.
■“책 억만번 읽었다고?” 팩트체크에 나선 다산 정약용
백곡 김득신은 정말 <사기> ‘백이열전’을 11만3000번 읽고, 다른 서적도 수만번씩 읽었을까.
후대의 인물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이른바 ‘팩트체크’에 나섰다. 못말리는 다산이다. 다산이 분석한 김득신의 독서량은 다음과 같다.(<다산시문집> ‘변’)
다산은 “김득신이 ‘독수기’에서 <사기> ‘백이전’을 무려 1억1만3000번, <사서> <삼경> <사기> <한서> <장자> <한문(韓文)> 등은 6~7만 번씩 읽었다고 했다”면서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 단정했다.
다산의 팩트체크를 들어보자. 다산은 “독서를 잘하는 선비라면 하루에 ‘백이전’을 100번은 읽을 수 있다”고 봤디. 그도 그럴 것이 <사기> 전체를 읽는 것이 아니라 <사기> 중 ‘백이열전’ 만을 읽는다면 100번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야장천 ‘백이열전’ 만 읽는다면 1년에 3만6000번이다. 그렇게 꼬박 3년이 지나야 1억8000번(10만8000번) 읽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다산은 3년 내내 ‘백이열전’만 읽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 사이 백곡(김득신)에게 병환이 없었겠느냐. 문밖출입을 안했겠느냐. 게다가 백곡은 타고난 효자이니 부모를 돌보는데 시간을 썼을 것이다. ‘백이열전’만 읽었다 해도 4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백이열전’만 읽는데 4년이 걸리는데 어느 겨를에 여러 책을 저토록 읽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러면서 다산은 “‘독수기’는 아마도 백곡의 작고 후에 누군가 전해들은 말을 기록한 것 같다”고 단정했다. 다산은 백곡이 지은 시를 증거로 들이대며 백곡 김득신의 독서량을 추정한다.
“백곡의 시 중에 ‘한유의 문장과 사마천의 <사기>를 천 번을 읽고서야(韓文馬史千番讀) 금년에 겨우 진사과에 합격했네.(菫捷今年進士科)’라는 글귀가 있다. 이 시가 백곡이 읽은 독서량의 실제를 말한 것이리라.”
그러나 다산은 김득신의 독서량을 이렇게 ‘팩트체크’ 했지만 절대 폄훼하지는 않았다.
“백곡이 읽었다는 한유(768~824)의 저작과 사마천의 <사기>도 발췌본을 말한 것이지,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백곡의 독서량 또한) 장하다고 할 수 있다.”
■‘천재’ 세종과 ‘둔재’ 백곡의 독서법
백곡 김득신이 또다른 위대한 다독가인 세종대왕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노둔하다(미련하고 둔하다)는 것이었다.
책을 1억만번 이상 읽었다는 김득신의 이야기는 머리가 나빠 그렇게 읽은 책을 제대로 외우지도 못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전설처럼 전해졌다. 한마디로 김득신은 둔재였다. 10살 때 비로소 글을 깨우쳤다.
그때 배운 <십구사략>의 첫단락은 겨우 26자에 불과했지만 사흘을 배우고도 구두조차 떼지 못했다.
홍한주(1798~1866)의 <지수염필>이 전하는 김득신과 관련된 ‘웃픈’ 사연 하나.
김득신이 말을 타고 어느 집을 지나다가 글읽는 소리를 듣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디서 많이 듣던 글귀인데…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김득신의 말고삐를 끌던 하인이 올려보며 씩 웃으며 말했다.
“아니 저 글귀는 ‘부학자 재적극박’(夫學者 載籍極博) 어쩌구 하는 말이네요. 나으리가 평생 읽으신 글귀잖아요. 저도 알겠는데 나으리만 모르겠다는 겁니까.”
김득신은 그제서야 그것이 1억1만3000번(실제로는 11만3000번) 읽었다는 <사기> ‘백이열전’의 글귀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학자 재적극박(夫學者 載籍極博)’은 ‘무릇 학식이 있는 사람은 전적이 극히 많지만~’이라는 뜻이다.
■“나으리가 평생 읽었다는 책의 글귀인데…그걸 모르시나요.”
책은 죽도록 읽지만 머리는 지독히 나빴다는 김득신의 일화는 이어진다.
어느날 김득신이 한식날 말을 타고 들 밖으로 나갔다가 도중에 5언시 한구절을 얻었다.
그 구절은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이었다. 그러나 마땅한 댓구를 찾지못해 끙끙댔다. 이때 말고삐를 잡고가던 하인이 대뜸 ‘도중속모춘(道中屬暮春)’를 외쳤다. “말 위에서 한식을 맞이했으니(馬上逢寒食) 길가는 도중에 늦봄 되었네.(道中屬暮春)”라니 얼마나 멋들어진 시인가.
하인의 댓구에 감탄사를 연발한 김득신이 말에서 내려 “네 재주가 나보다 낫구나. 이제부터 내가 네 말고삐를 잡겠다”고 했다. 그러자 하인은 팔을 내저으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이 구절은 나으리(김득신)이 말마다 외우시던 ‘당시(唐詩)’가 아닙니까.”
김득신은 그제서야 자기 머리를 쥐어 뜯었다고 한다. 이 시는 당나라 시인의 시모음집인 <당음(唐音)>에 실린 송지문(656?~712)의 ‘도중한식(途中寒食)’이 아닌가.
“말 위에서 한식날을 맞이했으니, 길 가는 중에 늦봄 되었네. 가련하다, 강 포구를 바라보니 낙교 위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네.(馬上逢寒食 途中屬暮春 可憐江浦望 不見洛橋人)”
■쇠바늘, 은철사가 움직이는 듯한 글씨
이런 일화는 김득신의 어리석음을 마음껏 희화화 해서 전한 것이다. 놀림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김득신이 노둔하고 오활(세상물정에 어둡다)했다는 것은 정사인 <숙종실록>에도 등장한다.
<숙종실록> 1684년(숙종 10년) 10월9일 기사에 “김득신은 젊어서부터 늙어서까지 부지런히 글을 읽었지만 사람됨이 오활해서 쓰임받지 못했다”는 인물평이 나온다. 순암 안정복 역시 김득신을 평하면서 “성품이 어리석고 멍청했지만 밤낮으로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고 했다. 이렇듯 김득신을 향한 모든 평가는 예외없이 그의 ‘노둔함’을 화제에 올렸다.
그러나 사람들의 비아냥 섞인 평가 뒤에는 어김없이 책읽기와 시짓기를 향한 김득신의 집념에 대한 찬사가 녹아있다. 한마디로 김득신은 ‘평생 노력한 둔재’라 할 수 있다. 김득신은 시를 지을 때 한 자 한 자를 떠올리느라 괴로워했다.
하겸진(1870~1946)의 <동시화>는 김득신과 관련된 일화를 전한다.
“김득신은 괴로이 읊조리는 벽이 있었다. 시에 몰두할 때 턱수염을 배배 꼬았다. 점심상을 차리면서 상추쌈을 얹어놓고는 양념장은 올리지 않았다. 아내가 싱겁지 않냐고 묻자 ‘응 잊어버렸어!’라 했다.”
후손인 김유헌은 김득신의 <백곡집>을 읽은 다음 “백곡 선조께서는 만년까지 손수 여러 책을 베껴 서서 늙어서도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면서 김득신의 독특한 독서법을 소개했다.
“백곡 선조의 책읽기가 백번 천번 만번 억번에 이르렀다. 글의 맥락이 담긴 복선이 있는 곳은 밑줄 쫙, 둥근 점을 잇대어 놓았다. 핵심의미가 있는 곳은 흘려쓴 글씨로 각주를 달았다. 삼가 필적을 살피니 쇠바늘과 은철사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백곡집> ‘서독수기후’)
■“김득신은 당대 문단의 최고봉이다”
세간의 막된 표현대로 머리가 나쁜 김득신이었지만 “책 1만 권을 읽으면 붓 끝에 신기가 어린 듯(讀書破萬卷 下筆如有神)”하며, “글을 1000번 읽으면 그 의미가 저절로 나타난다(讀書千遍 其義自見)”는 옛말대로 였다.
그랬으니 다름아닌 효종 임금이 김득신의 시를 “당나라 시와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라고 칭찬했다. 당대 한문사대가로 명성을 높았던 택당 이식(1584~1647)은 “백곡 김득신은 당대 소단제일(騷壇第一·문필가 사회의 1인자)이라 칭찬했다. 김득신을 ‘멍청한 둔재’라 평한 안정복도 뒤에 가서는 “밤낮으로 책을 읽은 김득신은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다”고 칭찬했다. 안정복은 최고 1억번(10만번) 이상 다독하는 김득신의 독서법을 ‘대추를 맛도 보지 않고 통째로 삼켜 버리는 것’이라 했지만 “이 노인(김득신)은 이런 다독을 통해 문장을 이루었다”고 치켜세웠다.
■‘반짝’ 했던 영재와 마음을 지킨 김득신
황덕길(1750~1827)이 김득신의 ‘독수기’에 쓴 후기 또한 의미심장하다.
황덕길은 우선 다독으로 유명한 조선의 명사 문인들을 줄줄이 소개한다.
“김득신의 선배들을 살펴보면 김일손은 한유의 문장을 1000번, 윤결은 <맹자>를 1000번 읽었다. 노수신은 <논어>와 <두시>를 2000번, 최립은 <한서>를 5000번 읽었는데, 그중 ‘항적전’은 두 배 읽었다. 차운로는 <주역>을 5000번, 유몽인은 <장자>와 유종원의 문장을 1000번 읽었다. 정두경은 <사기>를 수천번, 권유는 <강목> 전체를 1000번 읽었다.”
황덕길은 “조선 대가의 문장을 논할 때는 반드시 이 분들을 거론하는데 이 분들의 힘은 결국 다독에서 비롯된 것”이라 했다. 황덕길은 당대에 재주가 뛰어나다고 칭송받는 영재출신 인물들을 거론하면서 “이들의 총명한 재주는 남들보다 뛰어났지만 그저 한때 재능이 있다는 이름만 얻었을 뿐 후대에 전한 것은 없다”고 꼬집었다.
이서우(1633~1709) 역시 “김득신은 마음을 지킨 사람”이라 칭찬했다.
“공(김득신)은 젊어서 노둔하다 하여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고 독서에 힘 쏟았으니 그 뜻을 세운 자라 할 수 있다. 마음을 지킨 사람이다. 작은 것을 포개고 쌓아 부족함을 안 뒤에 이를 얻었으니 이룬 사람이다.”
이서우는 그러면서 ‘세상에 어릴 때의 천재는 많지만 그 천재성을 평생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어려서 깨달아 날마다 천마디 말을 외워 사람을 놀래키고 훌륭한 말을 민첩하게 쏟아내는 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게으름을 부리다가 늙어서도 세상에 들림이 없다. 공(김득신)과 견주면 어떠하겠는가.”(<백곡집> ‘서’)
박세당(1629~1703) 역시 김득신의 치열한 삶을 상찬했다.
“공은 심신을 스스로 고달프게 하면서 시 한자를 짓는데 1000번이나 단련했다. 시짓는 일에 골몰하면 팔뚝을 들어 쓰는 시늉을 하면서 타고 가던 조랑말이 길거리에서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못했다. 마부가 길을 비켜라 소리를 질러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쓴 시어이니 상황이나 물상의 자태를 묘사한 것이 참모습을 방불하게 했다.”(<백곡집> ‘서’)
이렇게 노력한 끝에 백곡 김득신은 당대의 유명한 문인인 정두경·임유후·홍석기·권항·김진표·이일상·홍만종 등과 시를 나누면서 17세기 시단을 이끌었다.
■‘취미=독서’가 덕목인 세상
특히 경치를 묘사할 때 특유의 정조와 아울러 회화성을 표현함으로서 이른바 ‘시중유화(詩中有畵·시 속의 그림)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듣는다. 김득신은 7책 분량의 문집(<백곡집>)과 1500수가 넘는 시와 177편의 문(文)을 남겼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 짓지 마라. 나보다 노둔한 사람도 없겠지만은 결국에는 이름이 있었다. 힘쓰는 데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재주가 부족하거든 한가지에 정성을 쏟으라. 이것저것해서 이름이 얻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
평생 죽어라 책을 읽음으로써 당대 최고의 시인이 된 김득신이 후학을 위해 남긴 금과옥조다.
요즘들어 워낙 책을 읽지 않은 세태이다 보니 ‘책의 서문만이라도 읽어라’, ‘아니다 책 날개만이라도 읽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백곡 선생한테는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그래! 서문만이라도 100번 읽어도 좋을 듯 싶다.
머리가 나빠 수만~십수만번씩 읽었다는 백곡(김득신) 선생의 예는 차지하고서라도, 만고의 천재였다는 세종대왕도 모든 책을 100번씩 읽었다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취미가 뭐냐 물을 때 종종 ‘독서!’라고 대답했던 때가 불과 30~40년 전이다. 그때는 “무슨 취미가 독서냐. 촌스러운 대답”이라고 손가락질 했건만 이제는 아닌 것 같다. 이젠 프로필란에 ‘취미=독서’라 자랑스럽게 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김득신, <백곡집>, 신범식 옮김, 파미르, 2006
정민, <미쳐야 미친다>, 푸른역사. 2004
한미경, ‘독서왕 김득신의 독수기에 대한 연구’, <한국문헌정보학회지> 49권 1호 한국문헌정보학회, 2015
신범식, ‘백곡 김득신 문학연구’, 한성대박사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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