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종목 중에 카누 용선(龍船·드래곤 보트)이 있다. 중국을 비롯, 동남아시아에서 성행하다보니 18일 개막하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의 정식종목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별 관심 없는 종목이었지만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 같다. 남북한이 단일팀을 구성해서 출전하는 덕분이다. 용선은 특히 10명의 패들러(사공)와 키잡이, 드러머(북 치는 선수) 등 12명의 선수가 한 팀을 이뤄 경쟁하는 종목이다. 남녀별로 8명씩(예비 2명씩 포함)의 남북한 선수들이 선발됐다.
■애국시인 굴원이 절망한 이유
용선은 스포츠로서는 매우 생소한 종목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그 뿌리를 더듬으면 2300년 전까지 올라간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애국시인으로 꼽히는 굴원(기원전 343~기원전 278년 추정), 그리고 그 굴원에서 비롯된 명절인 단오절(端午節)에서 유래한다.
약육강식의 전국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에서 살아남은 7대 강국을 ‘전국 7웅’(진·초·제·조·위·한·연)이라 한다. 그 중 요즘의 G2라 할 수 있는 초강대국이 있었으니 바로 서북의 진나라와 동남의 초나라였다.
그러나 초나라는 회왕(재위 기원전 329~299) 시대에 급격하게 몰락하고 만다. 굴원과 같은 인재의 말을 듣지않고 간신들의 말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다. 당시 굴원은 회왕의 좌도(左徒)였다.
좌도는 안으로는 군주와 정사를 논하고, 밖으로는 외교문서의 초안을 잡고 다른 나라 제후들을 상대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그러나 굴원은 군주의 신임을 다투던 간신 근상의 참소로 좌도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회왕은 ‘역대급’ 혼군(昏君)이었다. 굴원이 떠나자 어리석은 군주가 다스리던 초나라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회왕은 진나라 재상이자 ‘레전드급’ 유세가인 장의의 세치혀에 농락되어 우방이던 제나라와의 국교(합종)를 끊어버렸다.
“제나라와의 국교를 끊으면 600리 땅을 주겠다”는 장의의 약속에 깜빡 속은 것이다. 장의는 초가 제와의 국교를 끊자 “언제 600리를 준다고 했냐. 6리를 준다고 했을 뿐이다”라는 강변으로 약속을 깼다.
진나라는 어리석은 초나라 회왕을 가지고 놀았다. 진나라는 초 회왕을 초청했다. 진나라를 방문하는 회왕을 억류해서 초나라 땅을 떼어달라고 요구한다는 꿍꿍이였다. 진나라의 시커먼 속을 간파하지 못한 회왕이 진나라의 초청에 응했다.
이 꼴을 보다못한 굴원이 나서 “진나라는 호랑이와 이리 같은 나라니 절대 가서는 안된다”고 매달렸다. 하지만 회왕은 “진나라의 호의를 무시하느냐”는 간신들의 주장을 믿고 진나라를 방문한다.
그러나 회왕은 이번에도 속았다. 진나라는 회왕을 억류하고는 “땅을 떼어주면 풀어주겠다”고 협박했다. 초 회왕은 결국 귀국하지 못한채 진나라 땅에서 죽었다. 돌이켜보면 진나라라는 초강대국의 말도 안되는 ‘깡패 억지’가 통했던 전국시대였다. 2300년이 지난 지금의 국제정세는 어떤가. 강대국의 ‘힘의 논리’가 통한다는 측면에서는 일맥상통하지 않은가.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다
굴원은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의 꿀발린 말에 속아 망국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굴원은 절망했다. ‘이소(離騷·걱정스런 일을 만난다)’라는 작품을 남겼다. 373행 2490자의 작품은 이렇게 끝난다.
“다 끝났다!(已矣哉) 나라에 나를 알아주는 이 없는데(國無人莫我知兮) 나라를 생각해서 무엇하리?(又何懷乎故都)”
어떤 어부가 강가에서 꾀죄죄한 몰골로 거닐던 굴원을 알아보고 “예서 무엇을 하고 계시냐”고 물었다.
굴원은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있어서 쫓겨났다”고 답했다.
어부가 굴원에게 재차 물었다.
“세상이 혼탁하면 그 흐름을 타면 되지 않느냐. 모든 사람이 취해 있다면 같이 그 술을 마시면 되는 거 아니냐.”
세상과 타협하면 될 일인데 뭐 그리 혼자 깨끗한 척, 잘난 척 하는 거냐고 묻고 있었다. 굴원은 딱 잘라 말했다.
“사람이 왜 깨끗한 몸에 더러운 때를 묻히려 하겠습니까.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를 지내는 게 낫지. 어찌 희디흰 깨끗한 몸으로 속세의 더러운 티끌을 뒤집어 쓰겠습니까.”
굴원은 곧바로 절명시인 ‘회사(懷沙)’를 지었다.
“…세상이 어지러워 날 알지 못하니(世혼濁莫吾知) 내 마음 말하지 않겠네.(心不可謂兮) 죽음 피할 길 없음을 알기에(知死不可讓) 부디 슬퍼하지 말자.(願勿愛兮) 세상의 군자들에게 분명히 알려(明告君子) 내 그대들의 표상이 되리라.(吾將以爲類兮).”
그야말로 우국충정으로 무장한 애국시인의 유언이라 할 수 있다.
굴원은 이 시를 읊은 뒤 돌을 품에 안고 멱라수(상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멱라수는 호남성(湖南省) 북쪽의 동정호(洞庭湖)에 흘러 들어가는 상수(湘水)를 가리킨다.
■“강물에 몸 던진 굴원을 구하라!”
굴원의 위대한 우국시와 비극적인 투신은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로 승화되었다.
굴원이 투신한 음력 5월5일은 단오절로 전승되었고, 이것이 용선의 유래가 되었다.
이미 제나라의 유징지가 쓴 <파양기>를 보면 “속전에 따르면 ‘해마다 5월5일 배젓기 대회를 열어서 강물에 빠진 굴원을 구해냄으로써 재앙을 쫓는다’는 말이 있다”고 소개했다.
6세기 양나라 종름(499~563)이 옛 초나라 지역의 풍속을 모은 <형초세시기>를 보면 좀더 구체화된다.
“해마다 5월5일이면 배젓기로 강을 건너는 대회가 열린다. 이날 멱라수에 몸을 던진 굴원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마다 배젓기를 함으로써 굴원을 구한다고 여겨 연중행사로 굳어졌다.”
당나라 때인 636년에 편찬된 <수서> ‘지리지’와 <수당가화> 등을 보면 단오절 용선(배젓기)대회가 탄생한 결정적인 이유를 밝힌다. “굴원이 투신하자 사람들이 구해내려고 앞다퉈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달려갔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굴원을 구할 수 없어 안타깝게 여겼던 사람들이 해마다 5월5일이 되면 이른바 ‘굴원 추모 용선대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단오절에 용선 대회를 열고 종자(종子·쫑쯔)라는 밥을 먹는 풍습도 굴원과 연관된다.
■단오절과 용선의 유래
양나라 오균(469~520)의 <속제해기>는 “초나라 사람들이 굴원을 애도하여 이날이 되면 대나무 통에 밥을 담아서 제사 지낸다”고 기록했다. 굴원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물고기들에게 “이 음식을 먹고 굴원의 시신은 건들지 말라”고 빌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대통밥의 형태였던 종자가 요즘의 ‘삼각김밥 필(feel)’이 나게 바뀐 유래도 흥미롭다.
처음에는 대통에 쌀을 넣고 쪘는데, 후한의 건무 연간(기원후 25~56) 인물인 구회에게 ‘삼려대부’를 자처한 사람이 찾아와 이렇게 간청했다.
“나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냥 대통밥으로 제사를 지내면 문룡(蚊龍)이 다 빼앗아 먹는다. 앞으로는 잎으로 밥을 싸서 실로 매어주면 좋겠구나.”
‘삼려대부(三閭大夫)’는 초나라 때 다름아닌 굴원이 맡았던 벼슬이다. 왕족인 굴·경·소씨 등 3대 가문을 통제하는 직책이다. 그러니 ‘삼려대부’는 곧 굴원을 지칭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굴원이 후한 시대 구회라는 인물에게 나타나 ‘내 제삿밥을 문룡이 다 빼앗아 먹으니 밥을 잎에 싸서 실로 묶어달라’고 청했다는 것이다.
■초호화판 대회로 전락한 용선대회
용선 대회는 갈수록 화려해졌다. 아름답게 채색한 용선을 경쟁적으로 건조했다. 북송의 시인 곽상정(1035~1113)은 “배 경주(競渡) 전래의 풍속인데, 곁에서 구경해도 또한 장관”(<고금사문유취>)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결국 처음에 ‘굴원 추모 대회’로 시작된 용선은 본래의 뜻을 잃고 ‘초호화판 대회’로 변질된다.
<신당서> ‘장중방전’은 “용선 40척을 짓는데 정부 조운 예산의 반이 투입될 지경이라 그 비용을 3분의 1로 줄였다”고 기록했다. 또 용선의 본고장인 옛 초나라 지방에서도 초호화대회로 변질된 행사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당나라 시인 원진(779~831)의 <원씨장경집>에 적나라하게 묘사됐다.
“초 지방에서는 사람들이 본업을 버리고 배젓기 대회에 힘쓰고, 이에 드는 비용을 백성들에게 전가시키며, 작물이 영글지 않고 수해가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뱃고사를 조상 제사처럼 받들고 승패를 겨루는데 목숨을 건다.”
■오자서, 조아, 자선부인을 위한 용선젓기
이렇듯 용선젓기의 원조가 중국 최고의 애국시인인 굴원에게서 비롯됐다는 게 통설이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추앙의 대상이 다르다. 역시 초나라 사람으로 ‘레전드급’ 복수의 화신인 오자서(기원전 559~484)도 일부 지역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초나라에서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아버지와 형이 살해되자 오나라를 섬겨 결국 복수했다. 이미 죽어 무덤에 묻힌 초 평왕의 시신에 300번이나 매질을 가한 처절한 복수극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오자서는 오나라 왕 합려를 보필해서 강대국으로 키웠지만 결국 합려의 아들 부차에게 중용되지 못한채 모함을 받아 자결하고 만다.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시신을 말가죽 자루에 넣어 강물에 던졌다. 이후의 이야기는 굴원의 레퍼토리와 비슷하다.
이밖에도 기원후 143년 아버지가 강물에 빠져 실종되자 그 시신을 찾으려 몸을 던진 14살 소녀 조아(曹娥)와, 남편을 죽인 몽사(중국 남쪽의 부족)가 왕비가 될 것을 강요하자 역시 물에 뛰어 들었다는 자선부인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양자강 중 하류에서 유행한 용선
그러나 이 용선젓기 풍습이 한족(漢族)만의 전통이 아니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중국 고전 문학 연구자인 원이둬(聞一多·1899~1946)를 비롯한 상당수 학자들은 “이 용선젓기는 본디 양자강(양쯔강·楊子江) 일대에서 논농사를 지었던 소수민족의 풍습이었다”고 보았다. 가만보면 용선젓기 풍습이 단오절인 5월5일에 집중되고 있다. 논에 심은 모가 한창 자라는 5월5일 즈음에 가뭄이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원이 이 풍습에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또는 부모나 배우자, 자식들 때문에 강물에 몸을 던졌거나 던져진 ‘억울한 원혼’이 있기 마련이다. 굴원을 비롯해 오자서·조아·자선부인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영혼을 달래줄 연례행사가 용선젓기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양자강 중하류 옛 초나라 영역에서 유래한 용선젓기는 중국 전역으로 퍼졌다.
■동남아시아의 용선젓기
비단 중국뿐이 아니다. 벼농사를 짓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도 용선젓기는 여러 형태로 전승되었다.
베트남과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에서도 용선젓기는 왕실의 의례로 베풀었다. 베트남에서는 이미 985년 임금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용선젓기 행사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캄보디아에서는 장마가 물러난 것을 자축하려고 3일간 대회를 치렀다. 태국의 아유타국에서는 왕이 바다에 나가 칼로 물을 베는 퍼포먼스를 벌임으로써 용선젓기 행사의 개막을 알렸다. 칼로 강물을 베는 이유는 “장마 때 고인 물이여! 잘 빠져 나가라!”는 뜻이란다. 태국의 경우엔 지금도 우기가 끝나는 10월이나 11월이 끝날 무렵이면 모든 강에서 용선젓기 행사를 벌인다.
동남 아시아 뿐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용선젓기의 행사를 벌였다. 특히 중국과 한반도 문화의 영향을 받은 서부 일본에 집중된다. 오키나와(沖繩)에서는 중국 굴원의 고사에 기원을 둔 용선젓기가 전승되고, 일부 지역에서는 남산왕의 동생이 1380년 명나라 남경(난징·南京)을 방문하고 돌아와 퍼뜨렸다는 이야기도 돈다.
■한반도 가락국에도 용선젓기가 있었다
그렇다면 한가지 궁금증이 남는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는 물론이고 일본까지도 전승되어온 용선젓기가 한반도에는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수로왕을 사모하는 놀이’라는 역사서에 등장한다.
“이중에 수로왕을 사모하는 놀이(戱樂思慕之事)가 있었다.…7월29일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서 망산도에서 말발굽을 급히 육지를 향해 달린다. 또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古浦)를 향해서 다투어 달린다. 이것은 옛날에 유천과 신귀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에게 아뢰던 옛 자취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가야에서 김수로왕(재위 42~199?)을 기념하는 놀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수로왕이 보낸 신하들(유천·신귀·구간)이 야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오던 부인 허황후를 맞이하려 다투어 배를 저어간 장면을 기린 것이다.
허황후의 도착 장면은 자못 극적이다.
“수로왕이 (허황후의 도착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수로왕은 구간 등을 보냐 목련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노를 저어 맞이했다. 그러나 왕후는 ‘당신들이 누구인데 내가 따라가겠느냐’고 거부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수로왕은 ‘그 말이 옳다’하고 손수 행차해서 대궐 아래 서남쪽으로 60보 쯤 되는 산 주변에 장막을 쳐서 임시궁전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허황후가 신부를 직접 영접하지 않고 신하들만 보낸 수로왕을 꾸짖었다는 뜻이다. 그러자 수로왕은 “내가 잘못했다”고 후회하며 별도의 신방을 꾸리고 신부를 직접 맞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가락국에서는 이날 수로왕이 허황후를 영접하기 까지의 과정을 국가의 명절로 삼았을 것이다.
■중국의 단오와 한국의 단오는 다르다
그러고보면 2300년 전 굴원의 고사에서 기원했다는 중국의 용선젓기 대회와, 가야국 수로왕과 허황후의 사랑이야기에서 유래한 한국의 배젓기 놀이는 근본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단오와 한국 단오 역시 사뭇 다르다.
조선 후기의 문인 윤기(1741~1826)의 문집인 <무명자집>은 “조선과 중국의 단오가 다르다”고 밝혔다.
“(중국의) 단오는…예부터 이어온 풍속 우리와 다르다네.(古昔相循俗異同)… 옷을 하사하고 거울을 진상하는 것은 당나라 유풍(賜衣進鏡傳唐制) 떡 던지기 배 타기는 초나라 풍속이지(投종競舟想楚風)….”(<5월5일 고사>)
윤기는 단오와 관련된 중국고사를 죄다 읊어놓고는 중국과는 다른 조선의 단오 풍속을 열거한다.
“그네는 (중국에서는) 예부터 한식에 탔는데, 우리 풍속엔 단오에 타지. 괴이하다 나라 다르면 풍속도 달라… 아이는 창포 뜯어 잎을 달여 머리 감고 뿌리 잘라 머리에 꽂네…”
윤기가 나열한 조선과 중국의 단오절 풍습 중 가장 다른 것은 아마도 그네타기와 용선 젓기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그네를 한식에 타는데, 조선에서는 단오에 탄다는 것이다. 또 ‘떡던지기와 배타기’는 굴원의 고사에서 유래한 중국의 전통적인 풍습인 용선 젓기를 일컫는다. 가야국 수로왕과 허황후의 만남 고사와는 다르다. 무엇보다 가야국의 배젓기는 단오절의 풍습이 아니다. 또 한반도에서는 이 배젓기 풍습이 성행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가야국의 조기멸망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한 배를 탄 운명
위에서 살펴보았듯 한·중 양국의 용선 유래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의 운명을 절망하며 강물에 뛰어든 굴원을 구하려 다투어 달려간 초나라 사람들이나, 이역만리에서 온갖 풍파를 견디고 찾아온 허황후를 맞이하러 경쟁하듯 노를 저어간 가야국 사람들이나 그 심정이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한마음으로 노를 저어 갔을 것이다.
아시안게임 카누 용선 종목에 출전하는 남북한 단일팀 선수들이 탈 배 이름이 한강호와 대동호로 명명됐다. 남의 한강과 북의 대동강에서 따온 이름이다. 두 배를 합치면 ‘통일호’가 아니겠냐는 농담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배와 관련된 속담이나 고사성어가 꽤 된다. 단순히 용선 남북한 단일팀 뿐 아니라 전반적인 남북관계에도 통용될 수 있는 말이다. 오랫동안 으르렁댔지만 어려움에 빠졌을 때는 서로 힘을 합한다는 오월동주(吳越同舟) 고사가 눈에 띈다. 그러나 오월동주 고사로는 부족하다. 어려움을 극복한 뒤에는 다시 적대관계로 되돌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공들이 많으면 배(용선)는 산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속담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아니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지금은 ‘한 배를 탄 운명’이라는 속담이 제격이라 할 수 있다.
말 나온 김에 ‘배와 물’ 관련된 고사성어를 하나 더 대자면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배를 뒤집을 수 있다(水則載舟 水則覆舟)”(<순자> ‘왕제’)는 것이다. 원래는 물(水)인 백성이 배(舟)인 임금을 띄울 수도,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무시무시한 혁명론을 설파한 것이다. 그러나 용선 남북단일팀은 물론이고, 남북관계 전반에서 원용할 수 있는 고사성어가 아닌가. 남북단일팀, 아니 남북관계를 순항시킬 지 좌초시킬 지는 바로 평화와 화합을 바라는 사람들의 든든한 응원이 아닐까 싶다. 한강호, 대동호의 ‘드러머’ 북소리에 한마음 한뜻으로 노를 젓는 남북한 선수들을 성원한다.(이 기사는 김광언의 ‘용배(龍船) 젓기 고(考)’, <문화재> 27권, 국립문화재연구소, 1994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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