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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1413년 코끼리 유배사건’의 비극…단식투쟁과 눈물로 호소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중인 코끼리 관련 유물들. 한반도에서는 서식하지 않는 동물이어서 일본이 외교선물로 보낸 경우가 있었다.

요즘들어 부쩍 ‘판다’ 관련 뉴스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며칠전 중국이 태국에 외교선물로 보낸 판다(린후이·林惠)가 돌연사했다는 소식이 들렸는데요. 
그런데 이 판다의 죽음 때문에 태국이 중국측에 보상금 6억원 가량을 지불해야 한다는 군요. 
얼마전에는 일본 도쿄(東京) 우에노(上野) 동물원에서 태어난 암컷 판다 샹샹(香香)이 5살이 되자 중국으로 되돌아갔답니다. 지난달(4월)에는 2003년 미국 멤피스 동물원으로 대여된 판다 ‘야야(아아)’ 역시 중국에 반환되었습니다. 
남의 일이 아니죠. 국내에도 2016년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방한 때 외교선물로 받은 판다 부부가 있죠. 
러바오(樂寶·수컷)와 아이바오(愛寶·암컷)입니다. 그 부부 사이가 낳은 판다가 푸바오(福寶)이구요. 
그런데 푸바오는 4살이 되는 내년(2024)에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군요. 
이상하죠. 중국이 다른 나라에 건네준 동물을 돌려받는 것도, 돌연사 했다고 보상금을 받는 것도, 푸바오(한국)나 샹샹(일본)처럼 그 나라에서 태어난 판다까지 돌려줘야 한다는 것도, 모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우간다를 하얀코끼리로 묘사한 1892년 삽화, 당시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는 내부 갈등 때문에 통제가 어려워진 우간다 상황을 ‘하얀코끼리’로 간주했다.(출처:위키피디아, 원 삽화는 ‘Punch, or the London Charivari’, Vol 103)

■기증이 아니라 대여
중국의 판다 선물 역사는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국민당 장제스(蔣介石·1887~1975) 주석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1897~2003)이 미국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에 한쌍을 기증하면서 시작됐는데요. 반일전선 구축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보낸 미국 정부를 향한 감사의 표시였죠. 
이후 1949년 대륙을 석권한 중화인민공화국도 판다에게 외교사절의 역할을 맡겠습니다.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미국의 리처드 닉슨(1913~1994, 재임 1969~1974) 대통령에게 선물로 보낸겁니다. 워싱턴 국립동물원에 보낸 ‘링링(娘娘)’과 ‘싱싱(星星)’은 역사적인 중미 수교의 상징으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는데요. 
그러나 곧 ‘판다외교’의 양상이 바뀝니다. 판다는 중국의 고지대에서 1500~1600마리 정도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멸종 위기 희귀종이랍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팔거나 기증할 수 없도록 한 워싱턴 협약(1973년)의 대상동물에 포함되었습니다.

1411년(태종 11) 일본이 외교선물로 보낸 코끼리가 애물단지로 변했다. 사료를 너무 많이 먹은데다, “보기 흉하다”고 손가락질하고 침을 뱉은 사람을 밟아죽이는 등 물의를 일으켜 결국 전라도 장도로 유배됐다.

따라서 이후에는 ‘장기 임대 방식’으로 판다외교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판다를 관리하는 문제는 보통 일이 아니죠. 판다 전용 축사를 세우고, 중국인 전용 사육사를 두는데 초기비용만 100억원이 든답니다. 게다가 판다 한 쌍 당 공식 임대료만 1년에 100만 달러씩 꼬박꼬박 내야 합니다. 이 비용은 멸종 위기의 희귀동물인 판다의 번식 연구하는 데 쓰인답니다. 
사실 러바오와 아이바오는 중국이 한국에 보낸 첫번째 판다가 아닙니다. 1994년 한·중 수교 2주년을 기념하여 ‘밍밍(明明)’과 ‘리리(莉莉)’를 임대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밍밍과 리리는 1998년 외환위기 때문에 중국에 반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내에서 태어난 아기판다 ‘푸바오’는 과연 돌려줘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장기임대 형식으로 온 판다는 물론 그 사이에서 낳은 새끼들의 소유권 역시 중국이 갖게 됩니다. 아기판다 ‘푸바오’의 경우에는 성 성숙이 이뤄지는 생후 4년차 즈음에 종 번식을 위해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하얀코끼리의 저주
이 대목에서 태국 등 동남아에서 통용되는 ‘하얀코끼리’ 속담이 떠오릅니다.
‘하얀코끼리’는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설화에 등장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이죠. 마야 부인의 옆구리로 하얀코끼리가 들어가는 꿈을 꾼 뒤 석가모니를 잉태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고대 샴(태국)의 국왕은 꼴보기 싫은 신하에게 이 ‘하얀 코끼리’를 하사했습니다. 그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신하는 국왕으로부터 받은 하얀코끼리를 지극정성으로 키워야 했죠. 어떤 일도 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떻습니까. 
먹이값은 먹이값대로 들지만 경제적인 이득은 하나도 없고, 또 잘 돌보지 못해 코끼리가 죽으면 선물을 준 국왕을 욕보이는 셈이 됐죠. 그래서 국왕은 밉살맞은 신하를 골탕먹이고, 결국 파산시키려고 ‘하얀 코끼리’를 하사한 겁니다.
이후 ‘하얀 코끼리’는 겉은 번드르르하지만 쓸모도 없고, 관리도, 처분도 어려운 ‘애물단지’를 일컫는 용어가 됐습니다.

■코끼리 유배사건
그런데 저는 조선왕조실록을 뒤지다가 ‘하얀코끼리’와 비슷한 사례를 발견했습니다.
병조판서 유정현(1355~1426)이 “(코끼리가) 사람을 해쳤으니 사람이라면 사형죄에 해당되지만…(코끼리를) 절도로 유배보내야 한다”고 아뢴 <태종실록>(1413년 11월5일자) 기사입니다. 사고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이 코끼리는 일본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쇼군(將軍)인 원의지(源義智·아시카가 요시모치·쇼군 재임 1394~1423)가 바친 ‘외교선물’이었습니다.(1411년 2월22일) 그런데 1년10개월 뒤인 1412년(태종 12) 12월10일 참사가 일어납니다.
문제의 코끼리가 공조전서를 지낸 이우(?~1412)를 밟아죽였다는 겁니다. 
“일본 국왕(원의지)이 잘 길들인 코끼리를 바쳐 3군부(군사업무 총괄 부서)에서 길렀다. 그런데 이우가 코끼리를 보고 ‘뭐 저런 추한 몰골이 있냐’며 비웃고 침을 뱉자, 이에 자극을 받은 코끼리가 이우를 밟아죽였다.”
가뜩이나 1년에 콩 수백석을 먹어댔기 때문에 미운털이 박혀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사람까지 밟아죽였던 겁니다. 
‘죄상이 드러난’ 코끼리의 유배지로는 전라도 장도(獐島)가 낙점되었습니다.

■눈물 흘린 코끼리
6개월 후(1414년 5월3일) 전라 관찰사가 이색 상소문을 올립니다.
“(코끼리가) 좀처럼 먹지않습니다. 그러기에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상소문을 받아본 태종 임금조차 ‘울컥’해서 “불쌍하구나. 코끼리의 유배를 풀어주라”는 명을 내립니다.
코끼리는 단식투쟁과 눈물의 호소로 태종의 사면령을 받고 육지로 돌아오는데요.
하지만 이 코끼리의 운명은 기구했습니다. 1420년(세종 2) 12월28일 전라도 관찰사는 “코끼리가 너무 많은 먹이를 축내 백성들이 괴롭다”면서 ‘순번 사육’을 제안합니다. 전라도 뿐 아니라 충청·경상도도 코끼리를 교대로 키워야 한다는 겁니다.
이로써 코끼리는 전라~충청~경상도를 떠도는 처지가 됐습니다. ‘떠돌이’ 스트레스가 심했겠죠. 
코끼리가 또 사고를 쳤습니다. 1421년(세종 3) 3월14일 충청도 공주의 사육사가 코끼리에 채여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충청도 관찰사가 폭발했습니다.
“코끼리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의 10배는 됩니다…하루에 쌀 2말, 콩 1말 씩 먹는데…게다가 화가 나면 사람을 해치니…다시 바다 섬 가운데 목장으로 보내소서.”
세종은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 코끼리를 두라”고 명한 뒤 “제발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고 신신당부합니다.

■공작새도 유배를 떠났다
그런데 일본이 코끼리만 외교선물로 보낸 것은 아닙니다. 공작새도 보냈습니다.
그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1589년 7월12일·선조 22)이었는데요. 
당시 조선을 방문 중이던 쓰시마(對馬島) 도주 종의지(宗義智·소 요시토시)가 공작 1쌍과 조총 2~3정 등을 바쳤습니다. 
조선 조정은 생전 처음보는 조총은 환영했지만, 공작의 처리를 두고는 골머리를 썩였습니다. 
받자니 선조 임금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은 데다 조선의 풍토에도 맞지 않는 새였구요. 그렇다고 받지 않자니 외교적인 결례가 될 수도 있고요. 선조와 조정대신들이 고심 끝에 묘안을 찾았는데요. 
“일본 사신(종의지) 일행이 떠난 뒤를 기다렸다가 공작을 제주도로 보내라.”(8월1·4일)
그러나 “공작을 제주까지 수송하기는 어렵다”는 현실론이 부각되었구요. 결국 4~5개월이 지난 12월11일 “수목이 울창한 남양(전남 고흥)의 외딴 섬’으로 옮기라”는 최종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공작새 유배사건’입니다.
사실 일본이 ‘하얀코끼리의 저주’ 고사를 알고 코끼리 혹은 공작새를 외교 선물로 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달갑지않은’ 일본의 선물 때문에 쓸데없는 비용과 정력이 낭비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죠. 조정의 공론도 공연히 흩어졌구요. 

■“초심을 잃을까 걱정됩니다”
예부터 외국이 선물로 보내는 ‘진금기수(珍禽奇獸)’는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래가 있습니다. 상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기원전 1043)에게 각 제후국이 선물을 바쳤습니다.
그 중 서방의 제후국인 서려(西旅)가 오(獒)라는 명견(名犬)을 바치는데요. 하지만 개국공신인 소공 석(생몰년 미상)은 “절대 받아서는 안된다”고 무왕을 말립니다.
“토종이 아닌 진귀한 새와 짐승은 나라에서 기르지 마소서. 잘못하면 큰 덕에 누를 끼칩니다.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서 공(功)이 이지러집니다.”(<서경> ‘여오’)
토종이 아닌 외국산 진금기수에 빠져 백성을 돌보는 데 소홀히 하면 창업의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군주들도 이 무왕과 소공의 고사를 금과옥조로 삼았습니다.

태조는 이듬해인 943년 훈요10조를 남기면서 ‘거란은 금수의 나라’이며, ‘강하고 악한 이웃(거란)을 늘 경계하라’로 누누이 강조했다. 거란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굶겨죽인 이유를 밝힌 셈이다.

■연산군도 일본의 진상품을 거절했다
성종 임금은 왜인에게 원숭이를 받은 것을 후회하면서 “내가 바로 뉘우치고 예조에 명해 다시는 바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를 전했습니다.(1478년 8월10일)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연산군은 1502년 일본이 암원숭이를 바치자 ‘주 무왕의 일화’를 자세히 인용하면서 “받지말라”는 명을 내립니다.
“일본이 예전에(세조 때의 뜻함) 바친 앵무새는 값만 비싸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한다. 지금 또 암원숭이를 바치려고 한다. 돌려주고 받지 않겠다는 뜻을 점잖게 전하라.”(<연산군일기> 1502년 11월14일자)
세조 때 일본이 바친 앵무새는 명주 1000필의 값이었답니다. 그렇다면 공짜가 어디있습니까. 조선도 그만한 선물로 답례해야할 것 아닙니까. 연산군은 그 부분을 지적했습니다.(1502년 12월14일)
그러나 성준(1436~1504)과 이극균(1437~1504) 등은 “외교 결례이며 자칫하면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이것이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의 일화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백성들의 삶에 되레 해를 끼칠 뿐이라는 임금과, 외교결례로 인해 자칫 분쟁의 위험을 야기할 수 있다고 간언하는 신하들…. 얼마나 건전한 임금과 신하간 논쟁입니까.

중국은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미국의 리처드 닉슨에게 판다 한쌍을 보낸다. 링링(娘娘)과 싱싱(星星)이다. 링링과 싱싱은 역사적인 중미 수교의 상징으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낙타를 굶겨죽인 만부교 사건의 미스터리 
그런데 역사적으로 동물외교에 잘못 대응하는 바람에 나라가 위태로워진 적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바로 고려 태조 왕건 때의 일인데요. 지금도 수수께끼인 ‘만부교 사건’이 그것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942년(태조 25) 10월, 신흥강국으로 급부상한 거란이 고려에 사절단 30명과 함께 낙타 50필을 보냅니다.
그러나 태조가 좀체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립니다. 거란 사절단 30명을 모두 절도로 유배시키는 한편으로 낙타 50필을 송도 만부교 밑에 매어놓아 굶어죽게 만든 겁니다. 태조는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거란은 예전부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 갑자기 옛 맹약을 돌보지 않고 하루 아침에 멸망시켰다. (거란의) 무도함이 심하다. 그러니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으면 안된다.”(<고려사>)
그러나 낙타를 굶겨죽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거란과 고려는 단교했습니다. 고려는 결국 3차례에 걸친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집니다. 태조 왕건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만부교 사건 후 360여 년이 지난 뒤 충선왕(재위 1308~1313)도 이제현(1287~1367)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는데요.
“임금이 낙타를 수십마리 정도 키운다고 해서 그 피해가 과연 백성들에게 이를까. 그저 낙타를 돌려보내면 될 일을 태조께서는 왜 굶어죽였는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후대 인물인 이제현이 어찌 알겠습니까. 이제현도 “태조의 심중에 반드시 숨은 뜻이 있었을 것이지만 후세 사람이 어찌 알겠느냐”고 언급을 회피했습니다. 

■‘인생’보다 ‘판생’
판다와 하얀코끼리, 그리고 역사서에 등장하는 각종 동물외교의 사례를 훑어보면서 한가지 명쾌한 해답을 찾아냈습니다.
무엇보다 아기판다 ‘푸바오’를 키워온 강철원 사육사(에버랜드 동물원)가 TV프로그램(‘유키즈’)에서 했다는 한마디가 감명깊었는데요. “사람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과 동물의 행복은 다르다”는 겁니다.
푸바오와 떨어진다는게 아쉽고 슬프지만 그것은 인간의 심정이라는 거죠. 철저하게 단독생활을 하는 판다의 습성과 4세 이후 생기는 번식본능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인생’이 있듯이, 판다에게는 ‘판생’이 있다는 얘기죠.   

강철원 사육사의 언급을 가슴에 새기자 <태종실록>에 등장하는 코끼리 기사가 자꾸 눈에 밟히네요.
사람을 밟아 죽이고 사료 값 때문에 이곳저곳으로 유배당하고, 옮겨다닌 코끼리의 운명.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애물덩어리’였겠죠. 그러나 그 코끼리의 이른바 ‘코생’은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 삶이었겠습니까. 
모든 게 낯선 이역만리에 와서, 그것도 “못생겼네, 지독히도 많이 쳐먹네!”하는 지청구를 들으며 이리저리 쫓겨다녔으니 말입니다. 하기야 역시 뜬금없이 끌려와 만부교 밑에서 하릴없이 굶어죽은 낙타들은 또 무슨 죄입니까. 
‘판다외교’는 어떨까요. 미중 국교수립의 상징이 되었듯 한때는 우호와 협력의 마스코트로 사랑받았던 건 사실이죠.
그러나 이제는 시각을 달리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무슨 외교 선물로 주고 받는 물건 취급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이젠 ‘판생’도 생각해줍시다. 비용도 많이 든다면서….

이기환 히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