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충남 부여 쌍북리 주택 신축공사장에서 수수께끼 같은 목간이 확인됐습니다.
숫자가 잔뜩 기록된 명문목간(6~7세기 백제)이었습니다. 발굴단인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적외선 촬영으로 목간의 정체를 분석했지만 확실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관청에서 문서나 물건 등을 운송하면서 사용한 것으로 짐작했을 뿐이죠.
목간 중에는 운송할 물품의 포장이나 문서꾸러미 윗부분에 올려놓거나 목간의 구멍에 끈을 꿰어 고정시킨 상태로 사용한 것들이 제법 되거든요. 그러던 5년 뒤인 2016년 1월 16일이었습니다.
■구구단 목간의 출현
정훈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조사연구팀장이 한국목간학회가 주최한 ‘최신 목간자료 발표회’에서 이 목간을 공개했습니다. 그런데 목간 사진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던 발표회장이 술렁거렸습니다.
‘九〃八一 八九七□□ 七九六十三(9981 897□ 7963)….’ 그것은 국내에서 처음 출토된 구구단 목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구단 목간의 패턴은 알쏭달쏭했습니다. 2단이 아니라 9단부터 시작됐고, ‘9〃’ ‘8〃’ 같은 숫자의 나열도 있었습니다. 당시 학회 섭외이사였던 이병호 공주교대 교수가 발굴자인 정훈진 팀장에게서 적외선 사진 자료를 받아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다음 날인 일요일(17일) 오후 이병호 교수는 초등학생 아들과 머리를 맞대고 이 구구단 목간의 패턴을 검토했습니다.
아이들 눈높이에서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빠와 아들이 찬찬히 뜯어보니 지금 알려진 구구단, 즉 2×1부터 시작해서 9×9까지 가는 패턴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9×9, 9×8…로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구구단 공식표인가
정훈진씨와 이병호씨 등 발굴자 및 연구자들의 분석결과 구구단 목간은 한쪽 면에서만 묵서가 확인되었습니다. 판독가능한 글자는 103자였습니다. 구구단은 각 단 사이에 가로줄을 한 줄 씩 그어 경계선을 만들었습니다. 9단부터 2단 순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부호는 각 단이 시작하는 첫 행에서 동일한 숫자의 중복을 피하려고 사용한 반복부호였습니다.
예컨대 9×9는 ‘9〃’, 8×8은 ‘8〃’ 등으로 줄였습니다. 또 20(卄), 30(삽), 40의 표기법도 흥미로웠습니다. 결과가 뻔한 1×2, 1×3, 1×4…는 생략했습니다. 구구단의 패턴도 특이했습니다.
맨 윗단이 ‘9×9=81, 9×8=72, 9×7=63…’이 아니라 ‘9×9=81, 8×9=72, 7×9=63…’로 이어졌다. 두번째 단 역시 ‘8×8=64, 7×8=56, 6×8=48’로 써내려갔습니다. 9×9, 8×9로 시작되고, 중복된 계산은 생략하니까 밑으로 갈수록 줄어듭니다.
예컨대 6단의 경우 6×6부터 시작해서 5×6, 4×6, 3×6, 2×6으로 이어진다. 6×7, 6×8, 6×9는 7단, 8단, 9단에서 이미 계산됐기 때문입니다. 3단은 3×3, 2×3, 2단은 2×2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밑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직각 삼각형의 구구단 목간이 된 겁니다. 어떤 연구자는 밑으로 가면서 좁아지니 시쳇말로 ‘그립감’이 좋아졌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백제인들의 실용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겁니다.
구구단을 단순히 적거나 외우려고 기록한 게 아니라는 거죠. 즉 구구단의 각 단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시각화해서 각 단의 공식을 쉽게 볼 수 있도록 배열한 목적으로 고안한 ‘구구단 공식표’이 가능성이 크다고 말합니다.
■칼 같은 구구단표
그럼 중국이나 일본의 구구단 목간은 어떨까요.
중국 구구단 목간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2002년 중국 후난성(湖南省) 룽산(龍山) 리예(里耶)에서 출토된 유물입니다.
진나라 때인 기원전 3세기의 유물인데요. 일본의 경우 오사와야치(大澤谷內)와 나나야시로(七社) 유적에서 나온 구구단 목간 등이 있습니다. 물론 중국·일본의 목간 중에는 쌍북리 목간처럼 위에서 아래로 단을 내려가며 쓴 사례는 있습니다.
하지만 쌍북리 목간처럼 9단-8단-7단-6단-5단-4단-3단-2단 등으로 일목요연하게 구분하고, 각 단을 하나의 줄에 완결한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중국·일본의 목간 가운데는 일본 오사와야치 유적의 구구단 목간처럼 틀린 답을 기록한 경우도 눈에 띕니다.
그러나 쌍북리 목간은 어느 하나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중국·일본과 쌍북리 출토 목간이 다른 점이 또 있습니다. 일본·중국의 구구단 목간에는 ‘二三而六(2×3=6)’이나 ‘一九又九(1×9=9)’ 처럼 이(而)나 우(又), 혹은 여(如)자를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지 글자수를 맞추기 위한 허사일 수도 있답니다. 예를 들면 답이 한자리수로 나오는 ‘二三而六(2×3=6)’과, 두자리수로 계산되는 二六十二(2×6=12)와 글자수를 맞추기 위한 글자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등호(=)’일 수도 있습니다. ‘3×4=12’ ‘1×8=8’를 표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거죠.
반면에 쌍북리 출토 구구단 목간에는 이런 글자(而, 又, 如)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二〃四’(2×2=4)이고, ‘二三六’(2×3=6)입니다. 중국와 일본에 비하면 아주 깔끔하죠.
■왜 ‘이이단’이 아니라 ‘구구단’인가
이쯤에서 궁금증이 생기죠. 왜 ‘이이단’이 아니라 ‘구구단’이라 했으며, 왜 요즘처럼 2단부터가 아니라 9단부터 시작했을까요.
고대천문·수학서인 <주비산경>은 “수(數)의 법칙은 원(圓)과 네모(方)에서 비롯되는데, 원은 네모(方)에서, 네모는 구(모날 矩 혹은 ㄱ자 모양의 자)에서, 구(矩)는 구구팔십일(九九八十一)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후한의 조상은 “이 구구는 승제법(곱하기와 나누기)의 기본”이라는 각주를 달았습니다. 후한 시대 연중행사를 기록한 책(<사민월령>)에서 “어린 학생이 소학에 들어가 배우는 4과목 중 구구단이 들어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구구단이 반드시 공부해야 할 기초지식임을 밝힌 겁니다.
그러면 왜 하필 구구단이라 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동양에서 단수 가운데 가장 큰 수인 ‘9(九)’는 무한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앞길이 구만리 같다’느니, ‘구중궁궐’이니 하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또 ‘구(九)’의 중국어 발음은 ‘오랠 구(久)’와 같아 ‘영원하다’는 의미로도 읽혔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9층으로 되어 있다 해서 구중천(九重天)이니 구천(九天)이니 하지 않았습니까. 혼백이 구천을 헤맨다는 따위의 옛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그 9번째 층에 천제가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중국에서는 황제를 지칭하는 숫자가 구(九)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이단’이 아니라 ‘구구단’이라 했을 겁니다. 구구단은 처음부터 9×9=81부터 시작됐던 겁니다.
■구구단으로 인재 뽑은 군주
그런 구구단으로 인재를 뽑은 예도 있습니다.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 때(기원전 685~643)의 일인데요.
환공이 뛰어난 인재를 뽑으려고 ‘초현관(招賢館·현신을 초청하는 관청)’을 만들고, 관청 앞을 밤낮으로 밝혀두었습니다.
유능한 선비라면 언제라도 찾아오라는 상징적인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지쳐갈 무렵 한 사람이 나타나 “내가 놀라운 지식을 갖고 있다”고 소리치며 구구단을 외웠습니다.
“이제야 인재가 왔구나” 하며 잔뜩 기대했던 환공이 실망하며 “구구단이 무슨 재주냐”하고 코웃음 쳤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구구법이 능력이나 학식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군께서 단지 구구법만 아는 저를 등용하시면 틀림없이 유능하고 재주 많은 사람들이 나설 겁니다.”
듣고보니 그럴 듯했답니다. 제 환공이 본보기로 그 구구단 선비를 등용하자 한달도 못돼 유능한 인재가 몰려들었습니다.(<설원> ‘존현’)
■우리 역사 속 구구단 사용례
우리 역사에도 구구단이 실생활에 사용되었음을 알려주는 문헌 및 고고학 자료들은 제법 있습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는 “곰이 ‘삼칠일’, 즉 3×7=21일 동안 잘 버텨 사람(웅녀)이 되었다”고 기록했죠.
유명한 <광개토대왕비문>(414년)에도 ‘이구등조(二九登祚)’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2×9=18, 즉 18세에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적시한 거죠.
또 백제 <나주 복암리 출토 목간>(610년)에도 ‘마중연육사근(麻中練六四斤)’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6×4=24근’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뿐이 아니고요. 대전 월평동산성에서 등산객이 수습한 ‘구구단 기와’에는 ‘…오구사십오사구삽십육’(5×9=45, 4×9=36)이라는 숫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백제 구구단 목간의 출현으로 고대사의 큰 숙제 하나를 해결한 셈이 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 구구단목간이 확인되지 않자 일본학자들이 “구구단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직수입한 것”이라고 주장했었거든요. 극적으로 되살아난 백제 목간은 또 한 번 역사의 공백을 메워준 것이죠.
■남근용 목간의 쓸모
최근 경북대 인문학술원 인문한국플러스 사업단이 펴낸 <한국목간총람>에 따르면 해방 이후 확인된 목간(삼국~조선)은 730여점에 이릅니다. 목간은 주로 습기가 많은 우물이나 연못, 저수지, 배수지 같은 곳에서 집중 출토됩니다. 목재는 산소가 차단된 물 속에서 좀처럼 부식하지 않기 때문에 수백 수천년 동안 보존되는 거죠.
경주 안압지나 함안 성산산성 같은 곳이 대표적인 목간 출토지였습니다. 종류도 다양합니다. 물품 꼬리표 목간과, 두루말이 종이문서를 찾을 수 있도록 한 색인(인덱스) 목간, 그리고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기에 이자와 함께 원금을 돌려받았음을 기록한 일종의 환곡문서인 대식(貸食) 목간 등….
인천 계양산성에서 확인된 것처럼 <논어> 제5장인 ‘공야장’이 일부내용이 적힌 경전 목간도 있습니다. 책처럼 지니고 다니면서 ‘공자왈 맹자왈’을 공부한 거죠. 궁궐 출입 때 신분을 증명하는 이른바 부신용 목간도 있고, 창고정리용 목간도 나옵니다.
그러나 관전자의 관심을 끄는 목간은 뭐니뭐니해도 ‘기타 용도’의 목간인데요. 백제의 경우에는 앞서 공부한 ‘구구단 목간’과 함께 ‘남근형 목간’이 아주 특이하죠.
남근형 목간은 2000년 4월 부여 능산리 절터 주변의 웅덩이에서 출토됐는데요.
특히 한쪽 면에 새겨진 ‘도○립립립(道○立立立)’이라는 글자가 눈에 띕니다. 이 목간은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중심도로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확인됐습니다. 백주대로에서 이상야릇한 목간이 발견된 건데요. 연구자들은 이를 두고 색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어요. 예부터 남근은 나라의 안녕, 그리고 악신·질병의 추·예방 등을 위해 숭배되고 신성시됐는데요.
따라서 백제인들이 지금의 서울 세종로 격인 중심도로에서 ‘길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남근 목간을 세워놓고 도성 바깥에서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남근 목간을 제사에 사용한 뒤에 나쁜 기운을 흘려보낸다는 의미에서 물웅덩이에 던져버렸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남근이 길 위에 섰다(立)! 섰다(立)! 섰다(立)! 그랬으니 사악한 귀신과 도깨비들은 썩 물렀거라”를 외쳤다는 겁니다. 즉 남근이 일어섰으니 귀신과 도깨비는 두려워 근접할 수 없다는 점을 선포했다는 거죠.
목간은 이렇게 1500년전 생생한 서사가 기록된 그 시대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있는 매우 중요한 당대의 자료인 셈입니다.
(이 기사를 쓰는데 정훈진 한국문화재재단 조사연구2팀장과 손환일 한국서화연구소장, 이병호 공주교대 교수, 이용현 경북대 인문학술원 HK연구교수, 김재홍 국민대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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